1. 들어가는 말
만우 송창근 박사의 神學思想에 대해서는 그의 전집 II권 제3부 “學問과 敬虔”에서 몇몇 논문들에 의해서 비교적 심층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만우 송창근의 신학사상을 한마디로 규정하라고 한다면 自由主義的 神學思潮에 항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중심과제로 삼고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新正統主義 神學 혹은 辨證法的 神學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점은 그의 다수의 논문들에서 발견되는바 그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생명의 말씀”을 중심으로 항상 사고하고 있는데서 발견할 수 있다. 송창근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는 그 태어나고 자란 것이나 교육받은 것을 보아도 일개 프로레타리아요, 平民이요, 勞動者요, 無産者”였고, 그는 또한 그들을 편드는 설교를 하고 다녔지만 “예수의 敎訓은 한쪽 면으로 보면 社會的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적 교훈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최대 目的은 인류 사회의 改造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의 靈魂을 구제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복음은 사회적 문제들, “勞動問題, 平和問題, 國際問題”등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송창근이 이러한 신정통주의적 神學路線을 따르게 된 것은 추측컨대 그가 1920년대 일본유학에서 얻은 결론인 것 같다. 당시 일본 특히 그가 공부했던 靑山學院에서는 신정통주의 신학 특히 칼 바르트의 신학이 主流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송창근의 신학사상의 노선은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形式的 正統派, 人本主義的 新進派, 偏向的 主觀主義에 사로잡힌 神秘主義派, 義人보다는 聖化에 집착함으로써 主觀主義에 빠질 수 있는 敬虔派 등에 대한 예리한 비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송창근의 신학사상에서 보면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송창근의 “民族意識” 혹은 “民族問題” 역시 그의 사고를 지배했던 附隨的 關心事들 가운데 한 主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그의 글 “민족의 至大한 要求와 교회의 眞正한 使命”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다. 유일한 머리다. 교회는 오직 하나 되시는 머리 그리스도로부터 지도와 명령을 받아 그 絶對 命令에 절대 복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우리 교회가 할 것이 있다면 民族의 指導와 명령에 움직일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는 그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가 委託하신 바를 가지고 민족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이다. 곧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민족에게 봉사할 것이다... 오늘 조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민족의 명령과 分別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헤매는 형편이다....만일 교회가 二重(그리스도와 국가)의 지배- 協同의 지배를 용인할 때 그 결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두려운 사실은 교회 안에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退位와 세간적 權利를 영원히 승낙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송창근이 분명히 하자는 것은 “民族的 要求”가 아무리 지대한 것이라고 하드라도 그리스도의 명령이 언제나 至上的 命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회 혹은 그리스도인은 민족적 요구를 전적으로 外面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요구 앞에서는 항상 相對化된 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신정통주의적 신학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의 전통에 서서 소위 민족문제를 附隨的 문제로 간주하고 또 민족적 요구를 하나님의 요구의 “上位”에 두거나 “混同하는 것”을 엄격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기독교로 입문하고 특히 聖職者와 神學者가 되기로 한 動機는 민족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일제의 식민지 강점 하에서 송창근이 목사가 되면서 생각했던 民族問題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는 왜 이동휘를 따라서 민족운동을 하려 했고 또 그의 권고로 교회의 성직자가 됨으로써 민족문제와 씨름하고자 했는가? 일제 강점기에 多樣한 集團들을 통해서 多樣한 方式과 目標들을 가지고 민족 운동들이 전개되었는데 송창근이 관심했던 민족운동의 性格과 目標는 어떤 것일까?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창근의 사상과 활동을 통해서 당시 그가 가졌던 기독교 특히 改新敎와 民族運動 사이의 關係性格을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
2.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의 민족운동들
19세기 중엽 서구 列强의 아시아 침략과 거기에 편승한 일본이 明治維新을 단행하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近代化에 성공하면서 세력을 대륙으로 확장하려는 욕구가 점점 노골화되었다. 1884년 改化派를 중심으로 조선의 자주 獨立과 近代化를 목표로 일으킨 甲申政變은 3일 천하로 끝남으로써 외세의 간섭만을 더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10년 후에 단행된 甲午改革도 일본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어서 또한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影響力만을 강화해 주는 것이 되었다.
1894년 東學軍의 진압을 빌미로 조선반도에 출정한 일본군은 그 진압에 성공한 다음 조선에 대해서 內政改革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그 동안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청나라를 몰아내고 자신들의 세력의 거점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정부가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군대를 출동시키고 대원군을 내세워서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開化派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조선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패권다툼은 마침내 淸日戰爭을 불러왔고 여기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반도는 이미 일본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 역시 강대국의 弱肉强食의 장이 되었으며 특히 러시아는 만주에 거점을 정하고 조선의 문제에 간섭하고 이권에 몰두하였다. 여기에서 러시아는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 세력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곧 러일전쟁(1904)이었다. 여기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1905년 乙巳保護條約을 통해서 외교권 등을 박탈하고 이어서 1910년 조선을 合邦함으로써 완전히 식민지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이렇게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조선민족은 본격적으로 民族問題 혹은 民族意識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필자는 여기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몇몇 집단들의 민족의식들의 內容과 目標들 간단하게 검토해 봄으로써 만우 송창근과 한국개신교인들이 가졌던 민족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조선인의 민족의식이란 것은 어떤 단일한 것이 아니며 그 내용과 방향들 그리고 목표들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편의상 이들 집단들을 주로 宗敎的 뿌리에 근거해서 구별함으로써 그들이 가졌던 민족의식의 성격을 좀더 분명히 밝혀보려고 한다.
한국사에서 “民族的인 것”(das Nationale) 혹은 “民族意識”(das Nationalbewußtsein)이란 개념이 구체화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이웃 나라들, 특히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및 서구의 세력들이 정치적 관계에서 구체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역사에서 민족적인 것이라든지 민족의식 등이 사회적 構成體로서의 일정한 집단들 특히 宗敎的 集團들에 의해서 구체화 내지는 分化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서구세력들의 아시아 침략과 함께 그 동안 전통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 이웃나라들의 노골적 침략에 직면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 儒敎 正統主義者들의 民族意識: 儒敎的 原理들의 保存
이러한 서구열강과 이웃 강대국들의 도전에 직면해서 表出된 민족의식 가운데 처음 열거할 수 있는 것은 儒敎正統主義者들, 특히 性理學적 世界觀을 가지고 있던 자들의 이념 즉 서구의 문화와 종교들에 대항하여 유교적 原理들을 保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理念史的 觀點에서 보면 먼저 李恒老 등이 제창한바 있는 衛正斥邪論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서구적 사상 특히 天主敎의 침투에 직면해서 민족적인 것을 지킨다는 것은 유교 정통주의자들에게는 유교적 原理를 지키고 외래 사상을 排擊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의 단초가 된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서구의 사상 특히 천주교의 한국침투에서 찾게 된다. 개혁적 儒學者들이나 낮은 계층에 침투해 들어와서 세력을 확장했던 서구사상인 카톨릭 교회는 당시 유교정통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이념적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초기에 개혁 지향적 유학자들이나 中人 집단에서 순수 학문적 대상으로만 연구되던 카톨릭 신앙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矛盾에 저항하여 개혁을 시도하려던 특정한 정치집단(南人集團)과 결합됨으로써 현실적 도전으로 닦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道가 사라지면 野蠻과 짐승의 세계가 도래한다”고 외치게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유교 정통주의자들에 의하면 “朱憙의 참된 가르침”에 반하는 서양의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이 유교의 근본원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민족적인 것 혹은 민족의식을 보존해 나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민족의식의 이론적 기초로서 위정척사 원리의 실천적 표제어로서 이항노 같은 이들은 洋貨排擊論 이데올로기를 제창하고 있다. 위정척사는 丙寅洋擾(1886) 辛未洋擾(1871) 雲揚號事件(1875)에 의한 직접적 위협에 직면해서 보다 적극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것은 강력한 華夷論을 바탕으로 자주적 입장에서 서양의 물건들(洋貨)을 배격함과 동시에 禽獸와 같은 서양의 적들을 격퇴해야 한다는 主戰論을 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이후에는 척사론은 더욱 발전하여 倭洋一體論을 제창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교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주창되었던 위정척사론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1913년 이후에 유생들이 전개했던 義兵運動과 그 후 20년대에 전개되었던 武裝鬪爭을 통해서 담지된다. 따라서 이들 유교 정통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궁극적으로는 朝鮮王朝의 再建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나) 儒敎改革派(實學派)의 民族意識: 東道西器論
17.18세기에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改革의 요구들은 삶의 구체적이고 실제적 영역에 봉사하는 學問과 技術을 발달시키려는 노력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던 유교정통주의자들의 일파인 주희의 性理學, 즉 우주의 생성과 운행에 관한 이론이나 訓詁學과 같은 道德哲學을 거부하고 실천 가능한 학문 즉 實學을 제창함으로써 形而上學的 空理空論에 빠져 있는 학문을 實事求是의 학문으로 바꾸어 보려고 했었다. 따라서 그들은 순수 哲學的이고 形而上學的 方法으로 古典들을 해석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歷史的이고 實證主義的 방법의 도움으로 실천 지향적인 社會科學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價値 中立的 해석과 함께 客觀的 探究를 통해서 얻은 결과들을 정치적 사회적 개혁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實學運動의 출현은 무엇보다도 일본과 몽고의 침략(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거치면서 정통적 유교의 원리 즉 형이상학적 談論과 道德哲學을 가지고는 제기되는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개혁적인 학자들의 사고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전통적인 유교철학의 解體나 그것의 철저한 革命을 지향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 안에서의 一種의 改革運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실학의 경향을 유교정통주의자들의 연구대상의 제한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제기의 狹小性 때문에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러한 실학운동의 뿌리를 조선조 중기에 도입된 명나라의 王陽明이 제창한 陽明學에서 보고 있기도 하다. 이 양명학은 주로 認識論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순수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는 성리학에서와는 달리 知識과 行爲 즉 理論과 實踐 사이의 辨證法的 相互作用을 통해서 진리를 매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명학은 행동적 실천과 관념적 철학을 분리시키는 것을 엄격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17세기에 들어와서 예수회원들을 통해서 매개된 西歐文明과의 만남을 통해서 실학파들에게는 사회개혁을 위한 폭발적 힘들을 제공했다. 실학파 학자들은 유교적 원리에 기초한 封建的 階級社會를 카톨릭 사상과 서구의 학문을 통해서 개혁하려고 한 것이다. 1602년부터 1738년 사이에 22개의 서구서적들과 13개의 카톨릭 교리서들이 조선에 소개되었다.
이들 실학파들은 크게 經世治用學派와 利用厚生學派로 구분할 수 있다.
경세치용학파의 대변자인 李瀷은 특히 당시의 土地關係들 및 그것과 관계된 土地分配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公田과 私田이 일정한 원칙 없이 배분되고 있어서 농부들의 불만을 사고 또한 그들의 사회적 봉기로 나타난다고 보고 농부들은 그의 삶의 조건을 충족시켜줄 정도의 토지를 분배받도록 하려고 했었다. 그는 나아가서 토지문제뿐만 아니라 金融體制 그리고 稅制와 財政의 개혁까지도 시도했었다. 그리고 이용후생학파의 대변자는 서구의 技術의 導入, 産業의 增進, 海外貿易의 확대 등을 제창했다.
이 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中人으로서 왕의 譯官들이거나 隨行員으로서 주로 중국여행을 통해서 서구의 사상들을 접한 사람들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실학운동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民族의 更新이요 다른 하나는 사회의 近代化와 개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실학운동은 조선조 시대에 近代的 意識을 가져왔으며 유교적 普遍主義(konfuzianischer Universalismus)에 대항하여 근대적 民族意識(das moderne Nationalbewußtsein)을 가져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실학파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선택적 受容”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의 정신이 유교의 원리는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이 대표한 사상의 방향을 “東道西器論”이라고 말한다. 이 실학파는 그런 점에서 당시 서구문명에 대한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학파의 대변자인 朴珪壽에 의해서 제창된 동도서기론은 서구의 기술은 받아들이되 유교의 철학과 윤리사상은 그대로 지키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도서기론은 위정척사론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봉건적 계급적 지배구조의 개혁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실학파는 정통유교학자들과는 달리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富國强兵을 통해서 서구의 외세의 도전에 應戰함으로써 나라를 지키고 점진적 개혁을 해 나아가는 방향에서 민족의 장래를 설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민족의식은 보다 근대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개혁 지향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국민계몽운동, 외채상환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과 같은 온건한 방법을 택함으로써 부루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히 조선왕조의 개혁을 넘어서 근대적 민족구가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 東學農民 運動의 民族意識: 농민의 實體를 기초로 한 民衆的 民族意識
동학농민운동은 한마디로 조선조 500년의 유교적 原理와 거기에 근거한 封建的 階級社會의 諸般矛盾들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抵抗運動이었다. 물론 이러한 동학운동이 있기 이전부터 다수의 이러한 농민들의 저항운동들이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념사적으로 볼 때 온건한 개혁파인 실학파나 급진적 개혁파인 개화파의 운동이 주로 中人階級의 부루주아적 의식에 지배된 반면에 동학운동은 농민층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黙示文學的이고 千年王國的 사회변혁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개혁운동들과는 구별된다 하겠다.
이러한 동학운동은 철저한 밑으로부터 사회개혁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민족적 요소들을 담고 있다. 이 운동은 전개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들이 강하게 부각되는데 그것들이 민족의식과 결합된다는 것이다.
첫째는 동학운동은 말 그대로 反 西學運動이다. 이 동학운동은 당시 동양의 여러 나라들이 西歐東漸이라는 제국주의와 여기에 편승한 로마 카톨릭 (특히 예수회)의 제국주의적 세계 宣敎論에 직면해서 나라의 主權保護와 국민의 平安을 모색하는 민족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의 창시자인 崔濟愚는 그의 도를 天道敎 즉 하늘이 가리키는 길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의 독특성을 論學文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Von meinem Tao hat man weder in der Vergangenheit noch in der Gegenwart je etwas gehört. Mein Tao ist daher nicht vergleichbar mit irgend etwas Vergangenem oder Gegenwärtigen."
그는 동학과 서학이 서로 다른 것을 분명히 하고 동양 사람은 서양에서 난 도를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나서 동학은 동양의 고대 고등종교들이 佛敎, 儒敎 그리고 道敎를 종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천도는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요소들을 綜合한 하나의 동양적 信念體系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원시유교의 變形論(Wandlungstheorie)과 노자의 道德經 그리고 불교의 還生說들이 종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학운동이 가지는 세 개의 민족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반 서학 즉 반 카톨릭주의 사상을 들 수 있다. 최재우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기초해서 카톨릭 사상과 대결한다. 그에 의하면 서학에는 진정한 하나님 恭敬이 없고 또 신과 인간 사이의 조화를 위한 참된 길(道)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제우는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사상을 비판하고 특히 功勞를 통해서 천국을 얻으려는 補償行爲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서학사상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가르침인 동학과는 모순되는 것이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동학운동의 宗敎批判은 社會批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조선의 전통적 종교들, 불교와 유교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生命力을 다했기 때문에 서양의 도전과 그 자체의 모순들로 해체되어 가는 말기의 조선왕조를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지배자의 종교로서 유교와 피지배자의 종교로서 불고는 위기에 처한 당시 사회를 더 이상 구해낼 수 없고 오직 그가 창도한 동학만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종교를 통하여 탄생한 “새로운 인간”(新人)만이 하늘의 도를 깨닫고 하늘의 뜻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모순에 가득 찬 사회를 개혁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비판을 수반하는 사회비판은 외세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모순에 가득 찬 봉건적 階級社會를 타파하는 혁명으로 발전하게 된다.
셋째 이러한 종교비판적이고 사회비판적인 동학운동은 자연스럽게 帝國主義 批判運動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이미 종교비판에서 서학비판에서 이미 서구 제국주의 비판의 단초를 내포하고 있다. 즉 서구의 카톨릭의 선교신학은 徹頭徹尾 서구의 제국주의의 세계팽창과 결합되어 전개되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동학운동에 나타난 민족의식은 서학과 서구세력의 도전 앞에 무력한 동양의 종교사상들과 거기에 기초한 봉건적이고 계급적 사회구조를 전반적으로 개혁하려는 밑으로부터의 운동이며 밑으로부터의 민족의식, 즉 민중적 민족의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동학농민운동은 독립운동과정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유교정통주의자들과 궤를 같이하며 이들의 민족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을 넘어서 전통적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만민의 평등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동학의 민족의식은 그 후에 사회주의 운동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 改新敎人들의 民族意識: 獨立된 近代的 國民國家 建設
서구동점의 물결을 타고 한반도에 들어온 개신교에 대해서 일차적 관심을 가진 사회집단은 필자의 견해로서는 兩班階層으로서는 實學派에 속하는 지식인들, 역관들과 같은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졌던 中人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거나 그 운동의 박해를 피하고자 했던 억압받는 民衆들이었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서구의 발전된 지식과 기술을 통해서 社會的 政治的 改革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개신교와 진보적인 개혁파들과의 만남은 선교사 W.S. Scranton과 박형효의 대화에서 그 대표적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이 필요로 하는 것은 현대적 敎育과 基督敎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입헌군주제를 만들고 장차 당신들의 것과 같은 자유롭고 啓蒙된 나라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金玉均 같은 사람은 다른 나라(서구)의 종교를 통해서 우리 나라가 계몽될 때 나라가 부강해지고 독립된 국가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개신교의 선교를 받아들인 지도적 계층은 실학파의 전통을 가지고 개혁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개신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던 19세기 말 西洋帝國主義와 日本帝國主義의 도전 앞에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 전개된 새로운 형태의 민족운동은 주로 온건한 관료들, 서구지향적인 지식인들과 도시의 商工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1896년에 이른바 “獨立協會”라는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부루좌적 知識人들과 民族意識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원래 政治團體가 아니라 대중들의 교육과 계몽 같은 문제들을 다루는 親睦團體로 출발했으나 이러한 목표들은 보다 궁극적 목표 즉 민족의 自主獨立과 근대적 民族國家의 건설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선 그들의 정치적 목표 즉 민족의 자주독립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볼 때 고려말기부터 조선조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몽고와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또 19세기말에는 서양과 러시아의 도전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나라의 주권과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역사적 과제였었다. 따라서 독립협회가 이러한 외세지배의 상징인 寧恩門을 헐고 獨立門을 세운 것은 이러한 자주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獨立新聞의 발행을 통해서 계몽된 지식인들에 의해서 추동된 해국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민중들 사이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워나갔던 것이다. 이들이 전개한 정치적 사회적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는 지면관계로 생략하거니와 한글사용운동, 市民權運動과 함께 새로운 政治體制를 향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자주독립 운동은 필연적으로 독립이후의 국내 정치적 개혁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서구적 近代的 民族國家 형성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서구에서 전개되었던 “민족의 民主化”(Demokratisierung der Nation) 운동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서구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共和主義, 議會主義의 실현을 자신들의 운동의 목표로 삼았다. 물론 그들이 목표로 한 것은 완전한 의회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영국의 모델을 따라서 立憲君主制를 지향했지만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7월 3일자 고종에 올린 상소문에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할 것은 강력하게 요청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근대적 法治國家를 통해서 과거의 군주에 의한 자의적 통치를 종식시킬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민족의식을 가진 개신교인들과 부루좌적 지식인들에 의해서 주도된 독립협회운동은 반동적 皇國協會의 반격과 식민지 세력들에 의해서 좌절되었지만 우리 역사상 한스 콘(Hans Kohn)이 말하는바 “主觀的-政治的 民族意識” (subjektiv-politisches Nationalbewusstsein)의 표출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있다.
이 개신교인들의 민족의식이나 민족운동을 목표와 성격, 프로그램과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목표로서는 민족의 자주와 독립 및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성을 들 수 있다.
둘째 성격으로서는 서구의 기술문명과 정치체제를 받아들이는 것.
셋째 프로그램으로서는 대중의 교육과 계몽을 통한 사회적 정치적 의식의 고양.
넷째 지지세력으로서는 계몽된 실학파들, 의식화된 중인들과 동학운동에 동참했던 억 압 받는 민중들과 서양의 일부 선교사들.
이러한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적 민족구가의 형성을 목표로 한 개신교인들의 활동은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다음에도 기독교 단체들 청년회(YMCA), 에프워드(Epworth League) 및 신민회 등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특히 1908년 안창호에 의해서 설립된 신민회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본프로그램을 가지고 활동했다.
첫째 대중들에게 민족의식과 해방사상의 고취
둘째 상공업기관들을 세워 민족의 복지에 기여
셋째 동지들을 결속하고 교육하여 민족해방에 기여
넷째 전국에 학교들을 설립하여 젊은이들에게 교육기회제공
이러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운동을 전개했던 신민회의 기본프로그램도 사실상 앞서 살펴본 19세기 말 개신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어 왔던 민족운동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네 가지 형태의 민족운동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운동의 성격과 방법 및 목표들은 상호 대립하기도 하고 상호 일치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정통주의 실학파 동학운동 개신교지식인
민족의식의 이념 유교적 원리의 보존 계몽과 개혁 새로운 인간 시민권과
새로운 사회 민족국가형성
서양종교(사상) 부정 긍정/부정 부정 긍정
서양기술 부정 긍정 부정 긍정
계급질서 긍정 부정 부정 부정
서양정치 부정 긍정/부정 부정/긍정 긍정
제국주의 부정 부정 부정 부정
3. 개신교인들의 민족의식과 송창근
송창근이 民族問題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13년 그의 나이 15세에 만주에 있는 명동 중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보여진다. 1910년 일제에 의해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게 된 처지에서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뭔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 고향을 떠나서 만주로 가서 공부한 것은 그곳이 국내보다는 민족주의자들이 활동이 활발했고 또 敎育環境도 民族敎育을 받기에 적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성재 이동휘선생의 문하에서 일을 보며 학교에 다녔는데 이 기간에 만우는 民族意識이 발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민족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3.1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그의 나이 23세에 당한 獨立萬歲運動에서 그는 33인 대표들처럼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경성독립비밀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20년 8월에 출옥하였다. 그는 이러한 거대한 민족적 저항과 거기에서 분출된 독립의지를 몸소 체험하면서 자신도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한 알의 씨앗이 되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 나와 일제의 감시를 피할 목적으로 휴양 차 고향에 간다고 하고 웅기로 돌아왔으나 그는 쉬지 않고 그 지역을 돌면서 時局講演을 했다. 이러한 시국강연의 목적은 일차적으로는 3.1운동의 실패에서 얻은 경험에서 온 것이었다. 민족의 자주와 국가의 독립은 몇몇 의식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서 달성될 수 없고 전국민을 일깨워서 자주와 독립정신으로 무장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경험이었다. 무지한 민중들을 일깨우고 또 그 중에서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들을 골라 교육시킴으로써 민족의 역량을 키워나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당시의 시국강연의 내용들은 대개는 世界情勢와 韓半島의 現實問題를 소개하고 나라의 獨立의 필요성과 그후에 준비해야 할 내용들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가 서울로 돌아오자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나 다시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나서 그는 192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이어 미국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1930년에 귀국하여 民族指導者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평양 산정현 교회에 목사로 일한다. 그는 그곳에서 약 3년간 목회를 하다가 1936년에 사임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聖貧學舍를 설립하고 활동하다가 1937년에 收養同友會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한다. 출옥 후 그는 경북 김천의 황금정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해방을 맞는다.
이렇게 볼 때 만우 송창근은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도산 안창호가 제창했던 표제어인 務實力行에 역점을 두어서 하나의 活動家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 대표적 전거로서는 그가 1932년 경 미국 LA에 체류하던 기간에 안창호가 이끌던 興士團에 가입해서 활동했고 귀국해서도 이 단체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활동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그가 1937년에 흥사단의 소속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볼 때 송창근은 민족문제에 관한 체계적인 글을 전혀 남기지 않고 있지만 그의 생각도 앞서 언급한 개신교 지식인들의 民族意識의 理解內容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만우 송창근이 이렇게 당시의 민족주의자들과 생각의 軌를 같이하면서도 그에게서 특수한 것은 그가 성직자로서 자기의 운동을 교회라는 조직의 틀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전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종교와 정치의 相關關係의 문제에서 교회가 어느 정도까지 정치에 참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의 要求와 세상의 要求가 갈등하는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송창근의 民族意識과 종교적 信念 사이의 관계문제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4. 만우 송창근과 민족교회 형성의 문제
장공 김재준은 만우 송창근을 회상하는 글에서 그의 민족의식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머에 능했고, 인정다웠고, 창의적이었고, 용감했고,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민족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할 만큼 民族愛에 불타는 애국자였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우리 民族宗敎로서 基督敎, 생생한 그리스도 모습의 신학 敎育機關을 구상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민족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온 만우가 일생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민족문제를 안고 씨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그의 삶은 그가 민족문제와 관련되어 고초를 겪는 시간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시절에도 계속되었었다. 이러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던 장을 그는 끊임없이 추구했고 그는 마침내 민족주의자들이 지도자로 버티고 있던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이 꿈을 실현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산정현 교회에서 그의 꿈은 3년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러한 그의 꿈이 좌절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당시 敎權을 장악하고 있던 宣敎師들과 그들의 同盟勢力들의 排他性을 들 수 있다. 1911년 민족주의적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하고 전개되었던 “新民會”가 한편으로는 정통주의적 신학노선에 따라서 정교분리를 내세우던 선교사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의해서 억압을 당하면서 그들 다수가 교회를 떠나서 다른 형태의 민족운동에 동참함으로써 교회는 한차례 “脫政治化”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나서 1919년 3.1.운동에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민족적 의식을 가졌던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가한 것에 놀란 선교사들은 이 운동이 실패로 끝난 다음 교권을 장악하는데 더욱 열중하게 된다. 특히 대부분의 민족적 교회지도자들이 감옥에 가거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지도력을 상실하게 되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선교사들은 상실했던 교권을 더욱 강하게 틀어쥐고 교회를 자기들의 방식대로 지도해 나가려 했다. 이러한 현실을 장공 김재준은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1935년 한국 선교 50주년 때까지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宣敎師時代여서 신학교육으로부터 牧會, 敎育, 醫療 등 교회의 모든 생활에 이르기까지 선교사의 指導와 保育 아래 있었다...3.1 운동을 계기로 얼마 홍역을 치렀으나 곧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3.1 운동 이후 한국교회의 主體性 意識이 얼마 움직이기는 했으나 成人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할 정도는 이르지 못하였다.”
두 번 째 송창근이 꿈꾸었던 한국인에 의한 民族敎會 형성이 좌절된 것은 선교사들과 그 동맹세력이 내세우는 보수적 正統主義 신학적 閉鎖性을 들 수 있다. 주로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으로 훈련받은 선교사들은 政敎分離의 원칙을 내세우며 선교초기의 민족주의적 기독교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외국에서 훈련받고 돌아온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신학적 입장을 가진 지도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했다. 1935년 선교 5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선교사 모펫은 “50년 전에 우리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신학)외에는 어떤 것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적이고 열린 자세로 世界神學을 두루 연구하고 돌아온 송창근이 이 정통주의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평양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자기의 꿈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목회자는 곧 민족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 교회는 西洋宣敎師들에게 의지할 수도 없이 되고 의지해서는 안될 시기에 왔어요. 우리 나름대로의 신학을 수립하고 우리의 精神과 피가 엉킨 교회 礎石을 세워야지요... 우리 민족의 지도자는 결국 교회 목회자가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때가 올 것이올시다.”
이러한 꿈이 그의 평양 목회에서 좌절되자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서 성빈학사를 세우고 활동하면서 中世的 制度敎會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수도사들의 “使徒的 淸貧”의 실천을 통해서 “살아있는 그리스도”들 몸으로 體現하려고 했었다. 그는 이 어간에 한국에서 논의되던 다양한 신학적 흐름들을 매우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正統派, 新進派, 神秘主義, 敬虔主義 등을 열거하고 이들이 가진 문제점들을 비판함으로써 “聖書的 信仰에 이르고자 한다.”
정통파는 몇몇 교회사에서 만들어진 신조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神性, 處女誕生, 十字架의 救援, 肉體復活, 再臨, 三位一體 등을 지적으로 승인함으로써 “形式的 假面的 正統派”가 되어 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自由主義者 혹은 신진주의는 신 중심이 아리나 人間中心으로 되어 신앙을 社會運動, 文化運動의 방편으로 삼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神秘主義는 극단적 個人主義와 지나치게 자유로운 主觀主義에 흘러가서 사회적 責任感이나 倫理生活을 떠나는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敬虔主義는 뜨거운 신앙과 진지하고 倫理的 生活은 칭찬할만한 것이지만 義認에 앞서 聖化를 강조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들에 대한 만우의 예리한 비판은 매우 놀랄만한 것이며 오늘날에도 배울만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만우는 한국 교회가 사도적 전통과 宗敎改革者들의 傳統에 나타나 있는 성서적 신앙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성서적 신앙이란 바로 “歷史的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전적인 生命을 찾고자 하는 신앙”으로서 이것이 한국 교회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만우가 신진주의 특히 自由主義 新學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敎會와 民族問題”에 대해서 그가 견지해 온 입장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결코 한갓 民族的 生活의 한 가지 機關이 아니다. 교회는 민족에게 그 어떤 것도 委託받은 것이 없다. 민족은 언제나 重大한 要求를 교회를 향하여 强要하지만 그것은 민족이 교회에게 준 것이 있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위탁받은 그것을 공급해 주기를 희망하는 까닭이다. 하나님께 받은 위탁이 무엇인가? 종교개혁의 사명인 ‘오직 한가지’다. 오직 한가지가 무엇인가? 오직 聖書, 오직 恩寵, 오직 信仰, 모든 것에 모든 것인 오직 그리스도의 福音이다... 우리 교회가 할 것이 있다면 민족의 지도와 요구 명령에 움직일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는 그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가 위탁하신 바를 가지고 민족을 위하여 奉仕하는 일이다. 곧 그리스도의 命令에 따라 민족에게 봉사할 것이다.”
만우 송찬근은 당신 한국 그리스도인들 특히 민족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의 要求와 그리스도의 命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복음과 세속명령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어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退位”당하고 세상적 권위에 복종하고 만다는 것이다. 세상의 요구와 그리스도의 명령이 協同하는 데서 교회의 봉사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민족과 사회에 대한 교회의 欺瞞行爲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중의 協同을 容認할 때에는 世上權力-合理主義-自由主義-社會主義-共産主義-保守主義-科學-哲學 등 모든 文化力에 겸손히 그 권위를 讓步하는 것이다... 그 때는 곧 교회가 주님께 받은 위탁을 違反하고 또한 교회로서의 資格을 상실하는 때이다. 그 때 벌써 교회는 복음을 반역하고 그리스도를 교회에서 退位시키는 때이다.”
여기서 만우는 교회와 민족의 二重的 協同을 통해서,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요구와 민족의 요구 사이에서 이 둘을 혼동하거나 민족적 요구에 우선권을 두는 입장을 분명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독일에서 나치 정권 하에서 루터파이면서 민족주의적 신학자들인 임마누엘 히르쉬나(Immanuel Hirsch)나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 같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요구를 민족적 요구와 結合시킴으로써 히틀러 정권에 협력했던 것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가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또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感性, 道德性, 文化, 科學 등 인간의 本性과 可能性들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칼 바르트의 입장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우가 비판한 것은 民族主義가 가지고 있는 特性 즉 쇼비니즘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말하자면 “내 나라, 내 국가, 내 민족, 내 문화, 내 세계관”만을 절대화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우 송창근은 민족적 요구를 그리스도의 요구와 혼동하거나 민족적인 것을 그리스도적인 것에 선행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우가 민족적 要求나 민족적 召命을 전적으로 부정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이미 신비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그것이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超越的 性向으로 인해서 사회적 책임성이나 윤리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바 있다. 만우가 복음과 민족을 혼동하는 것을 비판한 것은 뭔가 相對的인 것, 지나가 버릴 것을 絶對化하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면 만우가 생각했던 民族敎會 혹은 민족에 奉仕하는 교회란 어떤 것인가? 만우에 의하면 이러한 교회는 복음을 통해서 모든 국민이 죄악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에게 복종하여 새로운 민족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민족에게 봉사하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께 委託받은 복음으로서 내 民族이거나 남의 민족이거나 내 곁에 가까이 있는 민족을 향하여 죄와 죽음과 惡魔의 勢力에 지배를 받아 奴隸生活하는 인간들을 불러 하나님의 복음명령에 복종케 하는 것이 교회의 봉사요. 사명이다. 일체의 偶像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 것이 민족에게 대한 교회의 絶對의 使命이다.”
5. 결 론
만우는 그 동안의 교회가 민족적 攝理論을 이용한 것이나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地方色까지를 내세운 것을 비판하고 또 解放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이 과도하게 民族問題, 政治參與, 文化運動에 나섬으로써 직접적으로 政黨組織이나 政府(軍政廳)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民主主義 陣營과 社會主義 진영으로 나뉘어 투쟁하는데 가담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적 요구와 그리스도의 명령을 혼동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봐서 민족에게도 그리고 교회에게도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을 그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가 국가와 교회, 정치와 종교를 區別(분리가 아니다)하여 각각이 相互協力(füreinander)과 相互對立(gegeneinander)의 辨證法的 關係에서 자신의 고유한 職務에 충실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국가와 교회의 올바른 관계라고 본 것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만우는 정교분리주의 입장에 선 것이 아니라 루터의 도식에 따라서 正敎區分(distinction)의 입장에 서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칼빈신학적 도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王權論(Königsherrschaft Christi)의 입장에 더 가까이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교회는 어떤 政治團體나 政黨이나 어떤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발언하고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命令, 복음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자기의 政治的 委託(political diakonia)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우 송창근은 어떤 게르만적이거나 앵글로 색슨적 의미에서 민족적 기독교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한국 민족 전체를 복음에 복종하고 복음의 정신에 따라서 살도록 봉사하는 교회를 꿈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만우에게는 기독교의 문제는 곧 민족의 문제였고, 기독교의 장래의 문제는 민족의 장래와 관련된 문제라는 의식 가운데 살고 활동했다 그는 자기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복음을 拒逆하는 내 민족보다 진정 복음을 사랑하고 진정 복음에서 사는 남의 민족이 더욱 귀하고 아름답게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조선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직 하나님께로 위탁받은 한 가지 복음으로써 민족의 요구에 향응하는 것이 민족에 대한 진정한 교회의 봉사인 것이요,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使命인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