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성공회대학교 교수)
김재성(한국신학대학 교수)
날짜 : 2000년 1월 10일
장소 : 성공회대학교 손규태 교수 연구실
김: 지난 세기를 회고하고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염려와 희망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윤리학자로서 새 천년을 맞이하는 소감이 남다르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namespace prefix = o />
손: 사람들이 새로운 세기 아니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희망과 기대를 많이 갖는 것 같아요. 특별히 지난 세기는 민족국가들이 가장 강력하게 자신들을 확대하는 세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1, 2차대전이라는 커다란 전쟁을 겪고, 그 후에도 민족간의 갈등이 심화된 세기라 볼 수 있습니다, 또 지난 세기는 새로운 이념 즉 사회주의의 등장으로 러시아 혁명과 같은, 인류가 새로운 삶의 형식을 강하게 추구한 세기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간의 갈등 그리고 이념적 갈등이 지난 세기를 관통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지난 세기는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인간들의 삶의 질이 급격히 향상된 세기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과학적 발달은 자연파괴, 환경파괴라고 하는 커다란 문제들도 제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류가 갈망하는 욕구들이 매우 강력하게 분출되었고,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문명을 통해서 있었습니다.
새로운 천년은 커다란 변화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국민국가들의 세기를 대체하는 세계화와 함께 20세기를 주도했던 이념적 대결이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세계가 자본주의 단일체제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화의 다른 이름인 자본주의 단일체제는 많은 것을 새롭게 약속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점들도 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문제점들부터 이야기하자면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이 가지는 희망은 너무나 자본주의적인 것, 즉 물질적인 것에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다우존스 인덱스(Dow-Jones-Index)라는 주식 가격의 엄청난 폭등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주가의 상승이 곧 희망의 상승이라는 것이죠. 유럽에도 같은 경향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근면과 노동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완성하려고 하기보다는 주식시장에서 일확천금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상당히 경제가 침체기에 있었지만 주가의 계속되는 상승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러한 희망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희망, 즉 실제로 주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의 희망일 뿐이죠. 주식을 살 수 없는 사람들, 다수의 민중들에게는 이러한 주식시장의 활황은 단지 좌절과 절망일 뿐입니다. 20 대 80의 세계를 말하는데, 80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주식 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날그날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윤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약속된 희망이 내실이 있는 희망인가, 그리고 누구를 위한 희망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 희망이 세계 대부분의 민중들이 달성할 수 있는 희망인가, 하는 희망의 질과 성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내실 있는 희망에 대해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자본주의의 일원화된 세계체제가 제3세계 사람들 그리고 제1세계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절망에 직면하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그 다음으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월등히 능가하는 추세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금융자본이 벌어들이는 돈이 산업자본이 벌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습니다. 말하자면 일하지 않고 돈을 굴려서 버는 돈이 땀 흘려 생산하는 사람들이 벌어들이는 돈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바로 노동자나 민중의 삶의 현실에서 볼 때에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민중들이나, 일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금세기가 내실 있는 희망의 세기가 될 수 있을지 염려되는 것입니다. 교회나 NGO 같은 새로운 단체들이 이러한 투기꾼의 세상이 되어 가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희망을 창출해야 할 것입니다.
김: 교수님 말씀 듣다 보니 희망보다는 걱정이 앞서는군요. 새로운 세기의 희망은 해가 바뀌거나 세월이 간다고 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 노력해서 쟁취해야 된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점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 기술에서 서구에 많이 뒤져 있었기 때문에 지난 30여 년 동안은 모든 정책을 그것을 발전시키는 쪽으로만 정하고 매진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어느 정도 성취를 한 것도 사실입니다만, 이제는 그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 볼 때가 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과학 기술이 발전해 온 과정과 그 의의에 대해서 먼저 평가해 주시면 합니다.
손: 과학 기술을 말하면 17세기의 과학 기술의 혁명을 들 수 있는데, 이로써 인류가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다른 여러 측면의 해방,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민주화, 그리고 교회나 종교적 영역에서는 정치적 영역과 병행해서 세속화를 가져 왔습니다. 신학적 면에서는, 세속화의 과정은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이라든지 알려지지 않은 힘에 종속되었던 것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났습니다. 서구 유럽의 교회에서는 세속화를 통해서, 정치에서는 민주화를 통해서 이전에 가졌던 국가의 역할, 교회의 역할이 약화되면서 그 사이에 소위 시민사회라는 것, 공공성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하나의 삶의 영역 이른바 NGO, 공공성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앞으로도 더욱더 시민사회 영역이 확대되어 나가리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는 국가 소멸론을 이야기했고, 과학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혁명에 매우 큰 역할을 했었습니다. 민주화와 세속화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런 과학 기술 혁명은 지난 세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가져 와서 삶의 전반적인 영역을 새롭게 바꾸어 놓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난 세기의 급격한 과학 기술 혁명, 즉 컴퓨터의 등장이라든지 기술 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을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에게 정치, 경제, 사회적 영역의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과학 기술의 발전은 앞으로도 더욱더 진행될 것입니다.
김: 과학 기술의 발달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긍정적 면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갖는 부정적인 면이 있을 텐데요, 어떤 점을 들 수 있을까요?
손: 무엇보다도 과학 기술의 이른바 인공적 기능의 확대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삶에 대한 과도한 조작(manipulation)이죠. 조작이 지나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는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인간을 조작했고, 정치적인 조작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용이하게 되었죠. 따라서 과학 기술은 인간을 해방시킨 면도 있지만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제로 사용되고 있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삶의 주변에 대한 조작은 이제는 인간의 삶 자체의 조작에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요즘에 와서 이른바 동물복제라든지 인간 자체에 대한 복제와 같은 것이 과도하게 가는 면이 있는데,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공학의 영역에서는 인간복제와 같은 것을 통하여 앞으로 인간의 자연적인 것, 본성적인 것이 파괴되어 나갈 위험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져 온 문제는 우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하고 있는 생태계의 파괴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태계 파괴는 수많은 종의 멸망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지구 환경 및 기후의 급격한 변화 과정을 통해서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과학 윤리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 윤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과학이 인간을 해방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고, 또는 인간의 생명을 조작하고 환경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윤리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겠지요. 신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생명을 창조하고 기르고 꽃피게 하는 이는 창조주인데, 과학이 그 영역을 침범하는 데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가 되겠지요.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달이 불치병을 고치고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생명공학이 발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최근에, 게놈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잘못된 유전자를 제거함으로써 유전병을 고칠 수 있고, 에이즈도 고칠 수 있다는 전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발전할 경우 생명공학은 생명을 살리는 데 큰 공헌을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경우에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데 기여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침범해서는 안 될 영역을 무모하게 침범하는 것인지,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유전자 23번인가요, 그런 유전자 구조를 해명함으로 그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불치병을 해결한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고 많은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전자 구조에 대한 해명이 궁극적으로 불치병의 치료와 생명 연장과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지요. 어린 생명들이 불치병에 걸려서 자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을 구할 수 있다면 이러한 유전공학적 연구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윤리적인 문제들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 이러한 유전자 조작을 통한 특수한, 기괴한 인간의 출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전자 공학을 통해서 합리적 사고와 성격을 가지지 않은 변종의 인간의 출현은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유전자변이를 통해서 인간이 100세 혹은 200세까지 산다고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30년만 더 늘어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제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오늘날의 사회체제가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에도 인류의 과도한 팽창으로 인하여 여러 문제가 제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구의 폭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식량 문제도 유전자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그러나 그렇게 팽창된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지구라는 제한된 공간이 다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한다는 것 자체가 무조건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의 행복이라는 것은 자기를 실현하고 사회에서 자기를 기여할 수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지 무조건 생명만 연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인간의 생명이 연장되었을 때, 사회보장제도 같은 것을 누가 감당할 것이냐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나타납니다. 온갖 사회적 제도의 개편, 사회적 물적 토대의 확보 배분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김: 그러니까, 그것이 생명 연장에 기여한다고 해서 무조건 생명을 살리는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파급하는 효과까지 더 넓은 지평에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겠군요. 사람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함으로써 유전병을 치료한다는 것도, 병의 치유라는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유전자 지도가 의사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에게 공개될 경우 생길 수 있는 문제까지 대비를 해야겠군요.
손: 그렇습니다. 생명공학을 통한 유전자 조작의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서 파생될 수 있는 의학적 문제들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영역들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등장하는 문제이지만, 이미 유전자 판독과 관련해서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생명보험과 관련하여, 보험회사가 보험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유전자 검사카드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암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유전자를 가진 이들에게는 보험계약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죠. 나아가 사람을 채용할 때도 대기업들이 유전자 카드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해요. 사실상 보험회사는 병에 걸리거나 약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사회적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 때문에 유전자 판독을 통해서 그런 사람을 보험에 가입도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을 직업 영역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인권을 침해하는 발상입니다. 이런 문제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막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이런 문제에 대해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국가의 역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법과 제도를 정하는 것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 분야는 대개 국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손: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최근에 와서 국가의 역할이 상당히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루소(Russeau) 이래로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 하는 것을 주된 사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주의 사상에 기초한 부르주아 사회의 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재산이 있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이었고, 국가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고 할 때 국가는 자본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국가의 고전적 역할은 그 동안 사회주의 운동 등 새로운 관점들에 의해서 다소 수정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보면 오늘날에도 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부르주아적 관점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유전자와 관련된 문제 등 과학 기술의 문제에 있어서도 국가는 이러한 기술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 기술과 관련해서 국가의 역할을 재검토해야 할 처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는 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을 그들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서도 안 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자본가를 방치해서도 안 됩니다. 따라서 국가는 과학이나 기술의 문제를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민중의 삶의 전반적 영역을 고려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국가는 과학과 기술을 민중적 윤리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학 기술은 지난 세기와 같이 특정 계급에 복무하거나 아니면 이들의 자기확대를 위한 도구, 즉 전쟁과 같은 원치 않는 데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제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데 그 자금을 댈 수 있는 주체는 자본가나 국가라는 것이고, 또 오늘날 국가는 그런 자본가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과학자들은 순수한 과학 연구에 매진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절대로 순수한 목적에 사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과학 기술은 그것이 어떤 영역의 것이든지 그것을 추동하는 사람들의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을 추동해 내는 세력은 곧 과학발전에 돈을 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곧 오늘날의 자본가입니다. 그렇기에 과학 기술이 엄격하게 말해서 자본가의 족쇄에 눌려 있기에 돈을 내고 자본을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역할이 앞으로는 과학 기술이 단순히 자본에 종속되지 않게 하는, 인류에게 공동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쪽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 기술의 발전은 자본가들에게만 종속되고 그들의 이익과 목표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과학 기술은 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유전자를 조작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문제입니다. 농산물을 적정한 수준에서 공급받기 위하여 유전자 조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생산자 또는 자본가 쪽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유전자 조작을 한 농산물이 안전한지 여부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런 농산물로 만든 음식은 대개 일반 대중들이 먹고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한 사람들은 이런 것을 먹지 않고 자연적인 농산물을 먹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이 자본가들의 이익에 무조건 봉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법적 장치가 국가에 의해서 마련되지 않으면 다수의 사람들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과학자나 기술자에게 맡기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나, 또 그들을 움직이는 막강한 자본가의 능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최근에 시민 사회 단체들이 총선 후보의 자질을 평가하는 데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제는 우리 나라에서도 시민 사회의 역량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국가나 자본가가 시민 사회의 힘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시민 사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인식과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할 때인데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새롭게 갖추어야 할 가치관 또는 윤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합니다.
시민 사회의 등장은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표제어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시민 사회(공공성의 영역)는 서구에서는 이전의 국가와 교회의 영역을 축소시키면서 등장한 영역입니다. 말하자면 국가의 민주화와 교회의 세속화를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공공성의 영역이 등장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시민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이 공공성의 영역이 한편으로는 국가세력을 제약함으로써 민주화를 이루어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세력을 제약함으로써 세속화를 달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라고 하는 지배적 영역의 약화는 역사발전 즉 민주화와 세속화에서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민적 영역을 우리는 공적 영역 혹은 공영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공영방송이라고 하면, 서구에서는 그것은 곧 국가와 교회의 간섭의 배제와 더불어 요즘에 와서는 자본의 배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영방송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은 국가간섭과 자본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 즉 국영방송이나 상업방송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나라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공영방송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KBS는 공영방송의 성격보다는 국영방송의 성격을 띠고 있고, 다른 방송들은 상업방송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국영방송은 국가의 시녀가 될 가능성이 있고 상업방송은 재벌들의 선전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의 윤리적 과제는 현재 우리의 삶을 과도하게 지배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의 힘으로부터 어떻게 공공성의 영역, 즉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을 확대해 가느냐 하는 것이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민 사회의 영역이 확대되어갈 때, 국가도 자본도 과거처럼 자의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국민 전체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시민 사회 국가가 오늘날 과학을 지배하고 있는 기업이라든지 이런 것을 통제할 수 있고, 또 그것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복무하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 가치고 희망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느 집단이나 자본이 홀로 지배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같이 살고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그런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교회라든지 시민사회운동들이 하나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은 고전이 되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무엇인가 큰 것을 추구하려 합니다.
개인적 경험이긴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적은 것을 통해서 기쁨을 찾고 즐거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들에게 삶의 기쁨을 어디에서 찾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길가 노천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을 들면서 이웃과 나누는 정다운 대화가 가장 커다란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룸싸롱 같은 곳을 찾아서 하루 저녁에 수백만 원씩을 써야 뭔가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은 기쁨과 쾌락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적은 것에서 만족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세적 발상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둘러볼 때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은 것이 아름답다 그리고 적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기술을 체득해야 할 것입니다.
김: 룸싸롱에서 몇 백만 원을 쓰면서 쾌락을 찾는 사람과 카페에서 케이크 한 조각과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행복을 나누는 사람 사이의 대조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나 행복이 어떤 그림으로 나타나야 할지 잘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을 통해서 이런 잔잔한 기쁨과 행복이 우리 사회에 들불처럼 번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귀한 말씀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