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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3 18:42
千年王國 運動들의 社會倫理的 解釋
글쓴이 : 손규태
 
           
1. 서론적 考察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기와 더불어 새로운 천년(Millenium)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천년은 지난 1000년 전 중세기 중반에 맞이했던 것과는 그 질에 있어서나 폭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전 이해를 위해서 지금으로부터 1천년 전에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상승을 들 수 있다: 우선 768년 칼 대제(Karl der Gross)의 등극과 더불어 시작된 이른바 카롤링 시대에 교회 위에 강력하게 군림했던 황제 세력은 1000년대에 오토(Otto) 대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으나 그 동안 교회의 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강화된 교황의 위상은 교회를 세속적 정권으로부터 독립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귀족당들에게 교황선택권이 돌아감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권의 강화는 1075년 평신도의 서임식을 폐지하는 총회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가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 다음해 카노사에서 그것을 철회함으로서 절정에 달했었다.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에는 교황권이 가 장 절정에 이른다.
2. 1000년 아이스랜드를 기독교화 함으로서 북부 유럽의 선교가 완성되었고 이어서 동구라파 지역 일부가 서방교회에 의해서 선교되었다.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됨으로써 이러한 선교 열은 특히 동방교회에서 강력하게 추진되어서 슬라브 민족에 대한 선교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여기에 비해서 서방교회는 6세기에 상실했던 이전의 기독교 지역들 특히 북아프리카 지역과 예루살렘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을 1074년에 계획하기에 이른다.
3. 이러한 교회의 정치적 세력강화와 그것을 기초로 한 선교운동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사이의 갈등과 분열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세력 위에 군림하기 시작한 교회는 더욱더 세속화되었고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은 날로 심해져 갔다. 특히 교회가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는 일종의 정치적 권력이 수행하던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소요되는 비용들과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엄격한 규율들의 완화는 타락과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다.
이렇게 볼 때 1000년 전에는 기독교가 유럽 전체를 정치적으로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범을 유럽인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관철해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이 교회의 수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제국의 황제들과 왕들의 즉위까지를 재가하는 명실상부한 정치적 수장으로까지 그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교회는 동서로 분열되었다고는 하지만 5세기 이후 이슬람이라고 하는 동방에 있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서 점령되었던 지역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십자군 운동을 전개했고 성지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유럽의 남부지역에서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을 거두었었다. 특히 동방교회는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의 터전들을 상실한 대신 선교활동의 기수를 북쪽으로 돌림으로써 슬라브 민족이 살고 있는 광대한 지역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서방교회도 이 시기에 아이스렌드의 기독교화를 통해서 서북부 유럽의 기독교화를 마감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16세기의 이베리아 식민주의를 통해서 기독교는 라틴아메리카로 확산되었다. 1492년 대서양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면서 경건한 카톨릭 신자였던 컬럼버스가 했던 기도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우상들을 쓸어버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다”라는 어거스틴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서 개신교회들도 영미식 식민주의를 타고 전세계로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식민주의에 기초한 선교활동에서 자신을 얻었던 개신교 지도자들은 1910년 영국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모여서 “금세기 안에 우리는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한다”는 표제어를 채택했고 그들의 꿈도 실현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야무진 꿈은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 이후 도구적 이성에 기초한 세속적 사회 안에서 그 힘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다수는 교회를 떠나갔고 교회는 이전에 가졌었던 삶의 규범을 더 이상 제시할 수 없는 하나의 낡은 전통의 보존자로서만 존재한다. 또 이러한 꿈은 또 하나의 혁명 즉 러시아 혁명을 통해서 등장한 무신론적이고 반 기독교적 이념국가들에 의해서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 러시아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 안에 있던 교회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꿈은 다시 이른바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등장한 반식민지 운동과 거기에 근거한 민족주의와 민족종교들의 도전과 부흥 앞에서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훨씬 더 오랜 전통을 가진 전통종교 혹은 고등종교들이 서구 식민주의를 통로로 해서 들어온 젊은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서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천년 전과는 전혀 다른 조건하에서 교회는 다시 천년을 마지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지난 천년 동안의 기독교 안에서 일어났던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천년왕국 사상들을 성서와 교회사의 빛에서 조명하면서 그들의 지향점들을 사회윤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해 보고자 한다.

2. 성서적 回想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적 사고들은 이미 초대 기독교 안에 널려 있었다. 초대 기독교의 종말론에서 그리스교적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분명한 윤곽을 가진 개념으로서 이해되었다. 요한 계시록 20장 4-6절에 뿌리를 둔 천년왕국 사상에 따르면 예수는 재림(Parusie) 후에 지상에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고 종말의 날까지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다시 부활한 순교자들이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까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통치한다는 것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언을 문자적 의미 보다 폭넓게 해석함으로써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재림이 시작되며 거기에서 자신들을 순교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서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종말론적 사고의 기원을 우리는 크게 봐서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유대인들은 당시의 주변 민족들과는 달리 역사의 본질과 거기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서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한 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확신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타협을 불허하는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출애굽 이래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실현할 것으로 확신했었다. 예언자들의 시대, 특히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는 이러한 확신은 야훼 하나님이 민족적 신을 뛰어넘어서 모든 민족의 운명을 주관할 분으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확대 해석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해석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선택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자비를 베풀라는 책임과 의무로서 파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이방인들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위탁으로서 받아들였었다. 이러한 윤리적 해석 외에도 또 다른 집단은 계속되는 전쟁에서의 이스라엘의 패배와 파괴 그리고 포로 생활이라는 충격과 부담에서부터 낡은 민족의식에서 세계종말을 해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확신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때가 차면 자기가 선택한 백성을 모든 위협과 억압 그리고 노예화를 벗어나게 하여 완전한 승리를 허락하고 무한한 복락을 누리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이렇게 유대교 묵시사상에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가 서로 교차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공존해 왔었다. 그러나 엄격히 보면 이러한 보편주의와 민족주의는 대립충돌 한다기보다는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미 예언자들의 글들에서도 팔레스틴을 세계적 재앙이 지나간 다음 두 번째 에덴 동산으로 파악하고 있는 예언들이 등장한다. 선택된 백성의 타락에 대해서는 엄한 형벌이 내려져야 하며 죄로 물든 과거는 굶주림과 질병, 전쟁과 포로생활을 통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만군의 주께서 왕이 되실 텐데 달은 볼 낯이 없어 하고 해는 부끄러워할 것이다”(사 34:23). 이 때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땅의 기초들이 흔들린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주님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들과 이스라엘의 적대자들, 즉 이방인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구원받을 남은 자들”이 있어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실행된다. 이 때 야훼는 갱신된 백성에게는 보복자가 아니라 해방하는 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나면 의로운 남은 자가 다시 팔레스틴에 모이고 야훼 하나님은 그들의 주님과 심판자로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 야훼는 새로 지은 예루살렘 즉 시온에서 통치하고 모든 백성들이 영적 중심지인 그곳으로 순례를 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를 받고 평화로운 세상이 탄생할 것인데 거기서는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사 11:6-9). 이 때 태양은 일곱 배로 빛나고 달은 해처럼 찬란하며 사막과 습지는 아름답고 비옥해 진다. 물과 풀이 풍부하여 짐승들이 먹고 마시고 인간들에게는 곡식과 포도주, 생선과 과일이 차고 넘친다. 인간과 짐승들은 번성한다.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선택된 백성은 모든 질병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고 행복과 평화 가운데 살게 된다는 것이다(이사야 30:26 등 참조).
묵시문학들이나 예언들에서 새로운 특성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곧 유대적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묵시문학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는 책 즉 주전 165년 경 유대인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저술된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꿈”의 이야기에서 이러한 민족의식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래 약 300년 동안 페르샤와 프톨로매 왕조의 지배하에 있는 동안 비교적 평화와 안정을 누렸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이 주전 2세기경 그리스-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의 손에 넘어가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진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심각한 분열이 생기는데, 세속적 성격의 상부계층은 그리스의 사상과 관습을 따르려 하고, 일반 백성들은 조상들의 신앙을 고집한다. 안티오커스 IV세인 에피파네스가 친 그리스 당파들을 지원하면서 유대의 제의를 금하자 마카비 일파가 봉기를 일으킨다. 이 봉기의 절정에 저술된 다니엘서의 “꿈 이야기”는 네 개의 동물을 통해서 연이어 등장하는 세계제국들을 상징화한다.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 그것들이나. 마지막 것은 “앞서의 짐승들과는 달리 뿔을 열 개나 달고 있었고 쇠로 된 커다란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먹이를 잡아먹고 으스러뜨리며, 먹고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아 버렸다”(단 7:7-9),
그러나 이 나라도 멸망당하고 만다. 그리고 나면 인자(人子)의 모습으로 인격화된 이스라엘이 등장한다. 인자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데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모든 나라들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단 7:27).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그 동안 등장했던 세계제국들도 결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새로 시온을 중심점으로 한 나라가 모든 나라들과 통치의 정점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래할 영광스런 황국이 팔레스틴을 넘어서 전세계적 차원을 가지게 되었지만 동시에 민족의식이 보다 강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사상은 이전의 예언자들의 사상을 계승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민족주의적으로 채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여기서 후기의 혁명적 종말론의 주요 내용의 파라다임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악하고, 폭군적이며, 무제약적 파괴의 세력이 세계를 지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력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세력이 아니라 악마의 얼굴을 가진 존재하는 말이다. 이 악한 세력의 엄청난 폭력으로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과 희생을 당하게 되고 마침내 거룩한 하나님이 등장함으로써 그들이 극복된다는 것이다. 이 때 성자들이 그들의 억압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선택된 거룩한 백성으로서 지상에서 새로운 통치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역사가 완성된다. 이러한 성자들의 왕국의 영광은 이전의 제국들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왕국들을 마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사상은 유대인들의 역사 가운에서 그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등장했다.
로마인들과의 투쟁에 있어서도 주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서 팔레스틴이 로마에 예속되는 해로부터 주후 66-72년 유대전쟁 때까지 일련의 묵시문학적 사상들이 지배했었다. 여기에서 묵시문학의 핵을 이룬 것은 메시아 사상으로서 종말에 야훼가 구원자로서 직접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원래 이러한 메시아를 다윗 가문에서 올 지혜롭고 의롭고 강력한 통치자로 생각했었으나,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사람들은 메시아를 뭔가 초인적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다니엘에 등장하는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가 전체 이스라엘을 인격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전 100년경에 등장했던 에스라와 바룩에게서는 메시아의 상은 초자연적  존재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상을 하고 있다. 에스라에 의하면 메시아는 유다의 사자로서 그가 한번 울부짖으면 끔찍하고 악한 짐승 즉 로마의 독수리는 불꽃 속에서 사라진다. 동시에 이 메시아는 인자로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폭풍과 불꽃으로 이방인들의 강력한 군대들이 멸망하고 이방에서 사자졌던 열 지파들이 다시 모여 펄레스틴에서 한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 통일된 왕국에서 평화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룩에 의하면 끔찍한 불법의 시대 즉 로마라고 하는 끔찍한 짐승의 시대가 있고 그 시대의 악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시아가 등장한다. 그는 적의 군대들을 파멸시키고 로마의 장군들을 쇠사슬로 묵어서 시온 산으로 끌고 와서 거기서 죽인다. 그리고 나서 왕국을 세우는데 그 왕국은 세계 끝 날까지 계속된다.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모든 민족들은 다 칼에 쓰러지고 여타의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의 총독의 통치하에서 로마와의 갈등이 점차 첨예화되자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메시아 사상들이 등장하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메시아 왕국의 임박한 도래가 반로마 전쟁의 동인이 되는데 그것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면서 끝났다. 주후 131년의 민족적 독립운동의 투사였던 시몬 바코흐브(Simon Barkochba)도 메시아로서 추앙되었었다. 자치권의 박탈과 함께 그 후에 있었던 투쟁들이 무차별적으로 억압되면서 투쟁의지도 묵시문학적 희망들도 끝난다. 이때부터는 종말적 세계제국의 꿈은 사라지고 종말적 약속은 단지 유대의 민족국가 형성에만 국한된다. 따라서 묵시문학적 예언들은 유대교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다니엘서의 꿈에서 출발하고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 요한네스 봐이스(Johannes Weiß)나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등이 유대교의 묵시사상이 어느 정도 기독교의 묵시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입장들을 밝힌 이래 이 문제에 대한 찬반 논의가 분분해졌었다. 어쨌든 복음서들에 나타나 있는 묵시문학적 표현들은 기독교인들 역시 이러한 사상에서부터 완전히 자유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마태 16: 27-28;누가 9:27).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종류의 표현들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던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의미에서 해석했던 것이 분명하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역사를 두 개의 단절된 시대들의 빛에서 보았는데 말하자면 메시아가 승리하고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와 메시아가 등장한 이후의 시대가 그것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세계를 “종말의 시간” 혹은 “도래할 세계”등으로 불렀는데 그것은 모든 만물의 급속한 파멸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그 반대로 그리스도가 능력과 영광 가운데 곧 다시 와서 지상에다 그의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는데 그 왕국이 천년 동안 지속될 것으로 믿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역시 억압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억압자들로 인해서 당한 불의로부터 벗어나고 또 이들 억압자들이 멸망을 당하게 될 임박한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엄청난 변혁의 사상이 유대적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기독교의 묵시문학서로 알려진 요한 계시록에는 이러한 유대교적이고 기독교적인 종말론적 예언들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니엘서에 나타나 있듯이 요한 계시록에도 열 개의 뿔을 가진 짐승이 지상에서 마지막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는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뿔 열과 머리 일곱을 가졌는데 그 뿔 하나 하나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그러므로 땅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창세 때부터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모두 그에게 경배할 것입니다”(계 13, 1-8).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당시 로마 황제와 로마제국의 이방지배를 상징화하고 있다. “나는 또 당에서 다른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첫째 짐승을 대신해서 행하도록 허락 받은 그 기적들을 미끼로 해서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칼을 맞아서 상처를 입고서도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들의 오른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계 13: 11-18). 그리고 이 두 번째 짐승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만드는 당시의 로마의 사제계급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계시록 20장 이후로 가면 장면은 완전히 급전한다.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로운 천년 왕국의 상이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다.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러한 새로운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고 거기서는 눈물이나 죽음이나 울부짖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 도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쌓여 있고 그 찬란함이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 성안에는 이전의 모든 세상의 삶의 질서들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중시하던 성전마저도 사라진다. 거기에는 더 이상 교회와 그 제도들 및 사제계급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그 도시의 성전이고 제사장이기 때문이다“(희 4,4). ‘천사가 아비소스의 열쇠와 큰 사슬을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사탄을 결박하여 아비소스에 던진 다음 봉인하여 천년 동안 가두어 두어서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한다. “내가 도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도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에게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렸습니다”(계 20:4).이와 같이 천년 동안의 통치가 끝나면 사탄도 풀려 나오지만 심판을 받고 멸망한 다음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그의 나라에 들어간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에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대문이다”(계 21, 1-4). “그 동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싸였고,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고 수정과 같이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계 21: 11).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 22).
이러한 묵시문학적 종말 사상은 초대교회에서는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후 156년 브리기아를 중심으로 요한복음의 “진리의 영”이란 사상을 기초로 해서 일어났던 매우 금욕적이었던 몬타니즘 운동을 시발로 해서 거기에 가담했던 서방의 대신학자를 통해서 아프리카, 로마, 가리엔 지방까지 확산되었었다. 2세기말의 리용의 주교였던 대 신학자 이레네우스(Iraeneus)는 “이단들에 반대하여”(Gegen Irrlehren)라는 책을 통하여 신구약 성서에 바탕을 둔 모든 메시아 운동들과 천년왕국 운동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이러한 지상에서의 미래의 사건에 대한 신앙을 용납할 수 없는 이유들로서 죽은 자들이나 부활한 의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의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4세기의 락탄티우스(Lactantius)를 거쳐서 5세기의 콤모디아누스(Commodianus)에 이르기까지 같은 사고의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천년 왕국의 운동들을 초대 교회에서나 중세기에 들어오면서 몇 가지 종교적이고 사회적 특징들을 가지고 발전되어 갔다.
 
3.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운동들의 종교적 사회적 성격
 
묵시문학적 혹은 종말론적 운동들의 종교적 혹은 사회적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우리는 이 운동들의 시간성과 공간성, 다시 말하자면 역사성을 규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특정 사상이나 운동들은 예외 없이 역사적 환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출발하고 발전하고 때로는 쇠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결정하는 중요 요인들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규명될 때 그 운동의 성격과 함께 지향하는 방향(Soßrichtung)도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지향점들은 부정적 지향점과 함께 긍정적 지향점을 갖게 된다. 우선 부정적 지향점으로서는 이러한 묵시문학적 사상과 운동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문제삼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부정적 지향점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살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들의 부정적 경험들 예를 들면 사회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착취 혹은 종교적 혹은 심리적 소외를 말한다. 다른 한편 긍정적 지향점은 앞서도 언급된바와 같이 정치적 해방이라든지, 사회적 평등 혹은 종교적 혹은 심리적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부정적 지향점들은 역사적 환경에 따라서 매우 다양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제반 제도들이나 체제들을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부정적 지향점에 따라서 긍정적 지향점도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긍정적 지향점은 곧 부정적 지향점과 밀접한 연관 가운데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운동들의 특성들은 영적인 운동인 동시에 물질적 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이러한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운동은 영적인 차원들에서 출발하지만 물질적인 조건들의 변혁과 개선을 지향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운동이 영적 운동의 성격이 강력하게 부각될 때는 그것이 갖는 부정적 지향점에서 보면 이 운동은 종교운동들의 물질적 타락이나 세속주의적 경향을 그 공격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운동들의 타락은 대체로 제도권 교회나 종교단체들과 그 지배 세력의 과도한 물질적 탐욕이나 그것으로 인한 고위성직자들의 세속주의에 대한 반항운동으로서 일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운동들 가운데서 강력한 물질적 운동의 성격이 강력하게 부각되는데 그것은 대체로 사회적 빈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이나 가뭄 혹은 왜곡된 사회적 구조로 인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처하게 될 때 종말론적 운동들은 물질적 성격을 강력하게 띤다. 특히 사회구조들이 과도하게 왜곡되었을 경우에는 이러한 물질적 운동은 사회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띠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운동을 일방적으로 영적 운동 혹은 순순한 종교적 운동으로 규정하거나 그 반대로 물질적 운동 혹은 사회혁명적 운동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이 운동들은 영적 운동의 사원과 물질적 운동의 차원을 모두 함축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병증법적이고 매우 역동적인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이러한 운동들을 그 지향점들에 따라서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자.
1) 제도적 종교에 대한 반동운동으로서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운동들
기독교 안에서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운동은 대체로 부정적 지향점에서 살펴볼 때 종교의 제도화와 거기에서 발생하는 세속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대표적인 예로서 우리는 2세기 중반에 브리기아를 중심으로 하고 일어났던 몬타니즘의 운동을 볼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몬타니즘의 형성기인 160-180년경은 이른바 카톨릭 교회가 형성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 카톨릭 교회 혹은 공교회는 초기 교회들에서 가장 심각한 도전으로 등장했던 영지주의(Gnosis)를 극복하고 이른바 법적으로 독립적이었던 개개 교회들이 하나의 협동체를 구성하고 동시에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일정한 규율들을 확정하면서 성립된다. 이렇게 해서 주후 180면 경에 이른바 대교회 혹은 카톨릭 교회가 성립된다.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등장과 그것의 제도화에 대한 반응으로서 등장한 것이 몬타니즘 운동이다. 이 운동은 공적 교회가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포기하고 동시에 성직자들의 “세속화”(Verweltlichung)에 반대하여 일어난 영적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부정적 지향성 혹은 일차적 공격방향은 제도화된 교회들이 초대 교회가 가졌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세계심판의 사상을 포기한 데 있었다. 교회의 제도화의 완성은 2세기말의 교회 안에서 주교제도가 정착되는 것에서 가능했다. 이 주교제도의 완성에서 교회가 이전에 가졌었던 종말론적인 평등공동체적인 성격이 사라지고 성직자와 평신도들, 성직자들 가운데서도 상위 성직자들과 하위 성직자들 사이의 계층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런 교회의 제도화는 필연적으로 이전의 금욕적이고 종말론적인 삶의 형식이 교회 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속화 과정은 일반 평신도들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크고 적은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만연하게 되었다. 이른바 “사도적 청빈”의 전통이 무너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러한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운동들은 기독교 안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종교적 불만과 연관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제도화에 반발해서 등장한 것이 승려제도이다. 승려들과 수녀들은 사도적 청빈에 충실하기 위해서 세상을 멀리함으로써 그들은 세속적 성직자들의 계급과 구별되며 평신도들의 삶은 전적으로 후자들에게 위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신도들은 고위 성직자들의 축재, 정치적 야망과 하위 성직자들의 축첩과 성적 문란에 직면해서 어려움을 겪는다. 일반 신도들은 예수가 가르친바 있는 순수한 복음과 거기에 따른 초대 교회의 평등주의적 공동체를 갈망했다. 다시 말하자면 평신도들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그들의 신앙생활의 준거로 삼아줄 것을 요구했었다. 이러한 이상들은 제도권 교회들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으나 몇몇 수도원들에서는 어느 정도 지켜졌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네딕트의 규율에 따라서 “그들은 우리들의 조상들이나 사도들처럼 그들의 손으로 일해서 먹고 하는 참된 승려들이라”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원에서 전개되었던 사도적 청빈 운동은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고 밖에 있는 교회들과 평신도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등장한 것이 이른바 평신도 설교자들의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이미 6세기부터 지금의 프랑스 지방인 갈리엔으로부터 일어나서 1100년경에는 커다란 운동으로 발전했었다. 이러한 평신도 설교자들의 주된 공격대상들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치부한 고위성직자들 둘째는 중하위 성직자들의 축첩행위를 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세기에 교회는 수도원을 포함해서 세속적 지배자들의 통제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세속적 영주가 주교를 겸임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주교가 영주를 겸임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만연했던 것이 성직의 매매였다. 부유한 지배계층의 자손들은 자신들의 출세와 부를 위해서 돈을 내고 성직들을 사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적 지배권과 영적 지배권을 장악했었다.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에 대항하는 조처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만족할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평신도 설교자들은 이러한 시몬파 주교들을 “사탄의 종들”이라고 했고 그들의 서품식을 무효화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미사 집례를 막으려고 했었다.
이러한 평신도 설교자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몇 사람 들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591년에 투어(Tours) 지방에 그레고리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자신을 그리스도로 선포하고 자기를 따라다니던 여성을 마리아로 선포하고 다수의 추종자들과 같이 행동했다. 그는 레푸이(Le Puy)에서 그 도시의 주교인 아우렐리우스(Aurelius)의 간계에 말려들어 체포되어 토막살해를 당했다. 그 일이 있은 후 150년이 지나서 아달베르트(Adalbert)라고 하는 사람이 자칭 성자라고 칭하면서  커다란 십자가를 세우고 어디에서나 일반인들 사이에 설교행각을 벌리고 다녔었다. 그는 서품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영적으로 서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해서 교황 사카리우스와 프랑크의 왕 피핀과 칼만은 소셍(Soissons)에서 총회를 열고 그에게서 사제 서품을 박탈하고 그가 가지고 다니던 십자가를 불살라 버렸다. 그 외에도 1116년에 프랑스의 도시 레망(Le Mans)에 등장했던 승려 출신의 하인리히(Heinrich)를 들 수 있다. 그는 그 도시의 시몬파 주교를 공격하고 그에게서 성직을 사들였던 사제를 길바닥으로 끌고 나와서 두들겨 패고 진흙탕에다 처박았다.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이런 잘못된 성직자들이 행한 세례는 무효며 그들이 복무하고 있는 성전들도 무익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밖에도 프랑스 지방에서 활동했던 위데(Eudes)나 네델린드에서 활약했던 탄첼림(Tanchelm)등 여러 사람들의 평신도 설교자 혹은 방랑설교자들을 들 수 있으나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을 그리스도 혹은 성자라고 칭하고 사도적 청빈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자처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제도권 교회들과 성직자들, 특히 시몬주의자들을 공격했고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었다.
2. 보편적 평등사회 지향하던 천년왕국 운동들
중세기의 유럽은 거의 천년 동안 하나의 농업사회로서 폐쇄된 우주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11세기 클루니의 교회 및 수도원 개혁을 시점으로 해서 교회내적으로는 카타르파와 왈도파의 등장과 교회 외적으로는 십자군 운동을 거치면서 교회와 사회에서 다양한 변혁의 운동들이 시작되었다. 특히 이러한 변혁 운동들은 13세기에 들어와서 등장한 몇 가지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대운동들을 거치면서 더욱 발전해 나갔었다. 그것들 가둔데 대표적인 운동들을 들자면 우선 제도화되고 세속화되고 특권화 된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일어난 다양한 종류의 적은 수도단체들을 통해서 교황을 정점으로 한 카톨릭적 보편주의의 종교적 통일성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둘째 요아킴의 묵시문학적 예언운동의 등장으로 임박한 종말사상이 전체 유럽에 확산되었다. 셋째 요아킴의 묵시문학적 사상에 의해서 1260년이 “성령의 시대”로 선포됨으로써 사도의 형제단(Apostelbrüder)등의 수많은 수도단체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각성과 함께 그것의 성취를 꿈꾸는 광신적인 집단들의 신자들이 이탈리아를 향한 대규모의 순례행진들이 전개되었다. 넷째 이단적인 신비주의와 엄격한 금욕주의 사상들이 강력하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교회적 변혁운동들은 서서히 카톨릭적 통일된 중세기를 안으로부터 해체해 들어가면서 동시에 사회적 변혁들의 시작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종말론적이고 묵시문학적 운동들을 유럽에서는 11세기초부터 가난한 자들의 점증하는 사회혁명적 운동들과 결합되었다. 이들 운동들은 마지막 날들에 대한 요한과 시빌리우스적 예언의 성취를 외치는 메시아적 인물들이나 성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었다. 이러한 천년왕국적 운동들은 물론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북 유럽에서는 예를 들면 라인탈(Rheintal)을 중심으로 혁명적 천년왕국주의의 전통이 거의 끊이지 않고 16세기 종교개혁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와 같은 운동들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북프랑스와 오늘날의 벨기엔, 13세기부터 종교개혁까지는 남부 독일과 중부 독일에서도 일어났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혁이 일반화되면서 이러한 운동들은 런던 근처나 보헤미야 지방에서도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혁명적 운동들이 일어나게 된 시간과 공간이 이렇게 제약되었던 이유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운동들이 발생했던 장소들은 인구가 매우 과밀한 지역이인 동시에 급격한 사회적 경제적 변혁과정에 있던 지역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들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매우 극심했고 여기에 근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지역들에서 전수되어 왔던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예언들이 새로운 사회혁명적 혁명적 의미와 폭발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농촌이나 소도시의 빈민들 말하자면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토지를 가지고 있던 농부들, 하위직에 종사하는 사람들(Handlanger), 날품팔이들, 노숙자들(Vagabunden)과 거지들, 실업자들이나 실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사람들, 이런 혹은 저런 이유들로 인해서 삶의 안정을 상실한 모든 사람들이 중세 사회의 가장 취약하고 폭발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사건들 즉 봉기, 굶주림과 질병 등 일상적인 삶을 과정을 붕괴시키는 사건들은 해체되어가 던 사회에 엄청난 파괴력과 폭발력을 가지고 닦아왔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공동으로 대처하려는 방식이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거룩한 사람의 지도하에서 메시아 집단을 형성하게 만들었었다. 이러한 사회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어떤 사회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프로그램의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종교적 이념으로서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사상과 그 사상의 체현자로서의 예언자들이나 성자들이 이러한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대체로 평신도 방랑설교자들이거나 아니면 제도권 교회에서 탈퇴한 성직자들로서 하늘로부터 새로운 세계와 사회를 건설하라는 소명을 받은 자들로서 자처하고 나섰었다. 이러한 집단들은 대체로 형제단을 구성하고 자신들이 선택된 엘리트라는 의식을 가지고 활동했었다. 이들이 가졌던 과제들은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는 대중들을 구하고 사회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다. 그들을 통해서 유대교와 초대교회의 묵시문학적 상과 종말론적 이상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가장 잘 채워주는 사회적 신화(der soziale Mythos)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사상과 결합된 사회적 신화는 14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의 몇몇 지역들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상들을 가진 운동들로 등장한다. 이들 운동들을 우리는 보편적 평등을 지향한 천년 왕국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들이 영국의 농민 봉기와 타보르(Tabor) 지방의 묵시문학 운동 및 보헤미아 지방에서 있었던 무정부적 공산주의 운동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영국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는 138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영국에서 일어났던 농민 봉기는 유럽에서 있었던 가장 잘 조직되었었고 분명한 목표들을 가진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농민봉기에 대한 것을 상론할 수 는 없으나 이 운동의 주동자로 알려진 죤 볼(John Ball)의 설교의 한 구절이 이 배경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 즉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이라면 어떻게 남작들이 자신들은 우리 보다 위대한 주인들이라고 말하고 입증할 수 있는가 - 그들이 토지를 갈아엎어서 없애 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그들은 비로도와 실크로 옷을 해 입고 다람쥐 털로 장식을 하는데 우리는 거친 베옷을 걸치고 산다. 그들은 온갖 양념들과 포도주 그리고 부드러운 빵을 먹지만 우리는 오직 로겐으로 만든 빵과 부패한 밀가루 빵을 먹고 음료수란 오직 물뿐이다. 그들은 좋은 집들과 궁전들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노동과 근심뿐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들에서 일한다. 그들의 사치생활을 하기 위한 모든 것은 우리로부터 우리의 노동에서 온 것들이다.” 죤 볼이 블렉히트(Blackheath)에 모인 반역에 참가한 농민들에게 한 유명한 말 “아담이 땅을 파고 이브가 물레질을 할 때 누가 귀족 노릇했는가?”라는 명제는 오늘날까지도 자주 인용되는 명구이지만 이것은 모든 인간은 원래 자유하고 평당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악한 사람들이 그 후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불의한 압제를 통해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2) 보헤미야는 주로 슬라브어와 체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나 오래 전부터 문화적으로는 동서 사이에 놓여 있는 나라였다. 12세기부터 정치적으로 독일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보헤미야는 정치적 자치권의 회복을 위해서 투쟁하면서 중부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격변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보헤미야는 토지의 절반이 교회재산이었고, 많은 독일 출신의 성직자들, 특히 교회의 영주들이 전적으로 세속적인 삶의 스타일 가운데 살았었다. 게다가 교황도 이 나라의 내정에 간섭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돈을 가져갔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대중들 가운데서는 교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싹트고 동시에 민족감정이 불붙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14세기 중반 프라그에 출현한 금욕주의적 개혁자인 크로메리즈  출신의 요한 밀릭(Johann Milìč von Kromerìz) 대중들 사이에서 크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적 그리스도라는 상을 맴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어떤 개인이었으나 후에는 교회의 타락과 결합되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적 그리스도의 지배의 시작으로 보았고 그것은 곧 임박한 종말의 징표로 인식되었다. 그와 그의 제자인 야노프의 마태는 성직자들에게 청빈한 삶을, 평신도들에게는 “돈놀이하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요한 밀릭과 마태에 의해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죤 위클맆(John Wiclif)를 통해서 계승되고 이것은 다시 보헤미야의 개혁자인 dis 후스(Jan Hus)에게서 계승 발전되었다. 이들의 설교들도 역시 성직자들의 타락과 세속화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도자 후스는 신분보장을 확약받고 1414년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기 위해서 독일의 남부도시인 콘스탄즈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하러 가서 체포되어 화형헤 처해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지 보헤미야에서는 민족적 저항과 함께 강력한 종교개혁이 추진되었다. 특히 타보르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타볼파에서는 프라그파와는 달리 민주주어적 성격을 강하게 띤 개혁이 추진되었다. 그들은 1420년도의 “ 라그 조항들”(Prager Artikeln)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개혁을 시도했다. 그것은 곧 요아킴의 재림사상과 거기에 기초한 공산주의적 이념의 실천이 그것들이었다. 이들 운동은 1420년 초에 남부 보헤미야에 있는 도시 피세크(Pisek)에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구형되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공동체로서 타보르 파의 사제들의 지도를 받던 이 공동체들은 지역에 따라서 공동의 돈 관리소를 설치하고 사제들이 그것을 관리했고 수많은 보헤미야와 메린 지방의 농부들과 수공업자들이 자기가 가진 것들을 팔아서 그 공동의 재산에 넣었다. 그들은 이전가지의 삶과는 완전히 단절했고 심지어 자기들이 살던 고향 동네들을 불살라 버리기까지 했었다. 수많은 무산자들이 이들과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은 형제애적 사랑을 가지고 완전한 평등의 공동체들을 이루었었다. 1420-21년에 타보르와 함께 필센(Pilsen)이라는 두 개의 도시가 이들 운동의 중심지가 되지만 타보르가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천년왕국적으로 지향된 사람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귀족들과 영주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 “타보르에는 네 것 내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공동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같이 공유해야 하고 누구도 뭔가를 자신을 위해서 소유해서는 안 된다. 뭔가를 개인적으로 가진 사람은 죽을죄를 범하는 것이다.”
 
3.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천년왕국 사상.
 
우리는 이미 앞서 요한 계시록에 대한 스케치를 통해서 이러한 종말론적이고 묵시문학적 운동의 뿌리들 가운데 하나가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국가와 민족을 지배했던 강대국들의 외세지배에 있다는 것을 밝힌바 있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운동의 부정적 지향성으로서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는 주후 300년대 콘스탄틴적 전환을 통해서 교회가 로마제국 안에서 유일하게 승인된 종교로서 받아들여짐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박해받던 민족의 박해받던 종교에서 승리한 민족의 승리한 종교가 됨으로써 천년왕국 사상의 중요한 지향점이 반제국주의 사상은 거의 천년 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운동의 부정적 정향성으로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은 14세기에 보헤미야 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앞의 항목에서도 약간 다루었지만 보헤미야는 정치적으로는 독일제국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고 교회적으로는 철저하게 로마 카톨릭의 통제하에 들어감으로써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 독립성을 상실하고 지내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된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운동은 종교적 개혁과 더불어 정치적 개혁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운동들을 담지했던 집단들을 우리는 프라그파와 타보르파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타보르 파의 사상과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타보르파들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사람들은 천년 왕국을 상실된 무정부적-공산주의적 질서의 빛에서 재건했으므로 그들은 모든 종류의 개인 재산을 포함해서 세금, 이자, 공물 그리고 나아가서 세상의 정부까지도 폐지할 것을 주장했었다. “모든 사람들은 형제자매로서 함께 살아가게 되며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굴복되지 않는다.” 이러한 천년왕국 사상은 계급 없는 사회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대인들(지배자들)에 대한 계급투쟁을 향한 싸움은 불가피하며 적 그리스도와의 낡은 동맹자인 부자들을 향한 돌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대인들이란 바로 당시 보헤미야를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독일 세력 및 그들의 지원을 받아서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앞잡이 세력들 그리고 그들의 동맹세력으로서 교회를 말한다. “모든 남작들, 귀족들, 기사들은 처형되며 숲으로 끌고 가서 멸망시켜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었다. 이들 세력들의 거점이 되고 있는 프라그와 그들의 앞잡이 황제는 특별히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따라서 그곳은 바벨론이라는 증오의 칭호가 붙여졌었다. 바빌론은 예루살렘에 반대되는 악마의 도시며 적 그리스도의 출생의 도시로서 사치와 허영이 체현화된 도시였다. “모든 민족이 그 여자의 음행에서 비롯된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세상의 왕들이 그 여자로 더불어 음행하고 세상의 상인들이 그 여자의 사치 바람에 치부하였다”(계 18:3). 이들은 제국주의 바벨론 세력을 음행하는 여자로 상징하고, 자신들과 여타의 굴종적인 왕들은 그녀와 음행한 자들로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이 여자의 사치와 허영을 통해서 치부한 사람들로서 해석을 하고 있다. 이들이 이른바 “대인들”, 즉 사회혁명을 통해서 제거되어야 할 대인들인 것이다.
타보르에서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운동이 특히 그들의 부정적 지향성에서 제국주의적 지배를 들고 나온 배경을 이룬 것이 곧 요한 계시록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운동들이 가진 부정적 정향성이 중세기 초에는 주로 왜곡된 교회의 제도화와 세속화 그리고 성직자들의 타락을 향했었고 또 일반적으로 이들 세력과 결탁된 귀족들이나 영주들의 사회경제적 착취를 지향했었지만 보헤미야의 묵시문학적 운동가들은 제국주의적 지배를 그 부정적 경향성으로 삼은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로마의 정치적 보편주의와 카톨릭의 종교적 보편주의의 해체의 시초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묵시문학적이고 종말론적 운동들이 교회적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넘어서 다시금 계시록에서 제시하고 있었던 민족적 모순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타보르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개혁운동은 세 개의 부정적 지향점들을 통합한 운동들 즉 로마 교황청에 반대하는 민족교회 운동이고, 독일의 식민지적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적 독립운동인 동시에 교회의 세속화에 항거한 철저한 종교개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했던 종교세력과 독일의 제국주의적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결탁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는 말 몇 마디
우리는 지금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성서와 교회사에 나타난 천년왕국 운동들의 교회적 사회적 성격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앞서도 살펴 본대로 1000년 전 유럽 사회를 중심으로 해서 출현하고 전개되고 해석되었던 천년왕국 사상의 배경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이들 천년왕국 사상들이 문제삼았던 부정적 지향성들을 극복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 천년왕국 운동가들이 꿈꾸었던 긍정적 지향성들이 천년이 지난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고 있는가? 유럽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세계화된 오늘날의 환경에서 이러한 천년왕국적 꿈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우선 종교적 혹은 기독교적 영역에서의 부정적 지향성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교회는 그 동안 이성주의에 기초한 세속주의와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무신론의 도전을 받아왔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부루좌적으로 사고하는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속주의와 무신론을 악마화하면서 기독교의 존립기반을 지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성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을 계시신학으로 몰아대던 이른바 변증법적 신학 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은 세계에서의 그리스도의 왕권통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세계와 거리를 두는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책임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동안의 왜곡된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비판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특히 왜곡된 세계경제질서에 대해서 변증법적 신학은 속수무책이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우리는 유럽사회를 그리스도교적 정신과 이성의 결합을 통해서 덜 하나님답지만(?)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로 만들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가 요청된다 하겠다. 단적으로 말해서 유럽 사회 특히 복지적 차원에서의 유럽 사회를 만든 것은 이와 같은 하늘과 땅을 갈라놓은 변증법적 신학이라기 보다는 하늘과 땅을 결합해 보려했던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사회주의적 무신론을 공격하면서 그 생존의 기반을 확보하려고 했던 서구 특히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래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무신론적 공산주의만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지상천국이 올 것이라고 선전했었다. 그들은 이러한 선전에 매몰되어 있는 동안에 자기들 내부에 깊이 파고 들어온 또 하나의 보다 심각하고 물리칠 수 없는 적수의 올가미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사회주의가 말하는 유물론 보다 더 사악하고 역동적인 물질주의의 화신인 맘몬의 앞잡이가 되고 말았다. 서구 기독교는 이성주의와 무신론과 싸우는 동안에 보다 간교한 맘몬이라고 하는 예수가 그렇게도 경계했던 적수의 당당한 앞잡이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물음은 오늘날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만든 것이 기독교 사상인가 아니면 이성인가?  기독교가 지원하고 있는 유신론인가 아니면 기독교가 반대하고 있는 무신론인가? 기독교가 찬양하는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기독교가 극구 반대하는 사회주의인가?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열정을 말할 것이 아니라 이성의 냉철함 가운데서 그 답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동구라파의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세계는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세계화되었다. 이러한 세계화 문제는 천년왕국 운동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세계화는 곧 정치적 경제적 제국주의화의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자본의 세계화일 뿐이며 그것은 곧 다수의 인간의 노예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천년왕국 사상은 이러한 세계화를 문제삼았었다. 당시 근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는 곧 앗시리아, 바벨론,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는 제국주의화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다수의 인간의 주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주변화의 다른 이름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문화적 소외로 나타난다. 이것이 곧 묵시문학적 천년운동의 부정적 지향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세계화는 따라서 세계의 다수의 사람들의 빈곤화와 직결되어 있다. 컬럼버스이래 지난 500년 동안서방 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의 국가들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부유한 국가들을 만들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들은 식민지의 굴레에서 벗어난 나라들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원해 왔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개발원조로 제공되었던 차관들을 통해서 그들은 다시 제3세계 국가들의 민중들을 노예화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1년에 1천억 달라 이상을 이들 선진국에 이자로 지불함으로써 가난하고 후진적인 제3세계 국가들이 부유하고 강력한 선진국을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 지고 부유한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은 더욱 더 부유해 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안에서 전개되었던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운동들이 지향했던 목표들은 거의 달성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목표들이 세속적 이성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달성되어 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가진 자, 지배자, 착취자, 억압자의 편이 되거나 하수인이 되었으며 새로운 변혁과 역사창조에서 걸림돌이나 방해자로서 역할을 해 왔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교회는 예수의 산상설교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갱신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제까지의 자본주의 체제와의 동맹세력으로서의 과거를 청산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등장해서 활동하고 있는 세속적 묵시문학적이고 종말론적 운동들, 즉 시민사회 운동들과 손을 잡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세계통치, 즉 하나님의 선교운동(Missio Dei)이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선교를 원하시지 않고 자신의 선교를 원한다.  묵시문학자 요한은 종말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새 예루살렘)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시의 성진이시기 때문입니다”(계시록 21: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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