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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3 18:44
기독교 역사에서 본 종교의 권력화
글쓴이 : 손규태
                       
                                                 
들어가는 말
 
세계의 고등종교들은 예외 없이 국가와의 밀접한 관계들 가운데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갔다. 종교들은 국가종교로서 국가와의 호혜적 관계에서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으나 동시에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르기도 하며, 국가들과의 대립적 관계에서 박해를 당하기도 하지만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존해 나가기도 했다. 말하자면 한편으로 국가와 종교의 호혜적 관계에서 그 종교의 신은 국가와 군주의 수호자가 됨으로써 종교는 국가의 권위와 통치수단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 반대로 국가와 종교의 대립적 관계에서 그 종교의 신은 국가와 통치자의 심판자가 됨으로써 국가의 반대세력들인 민중들이나 그들의 세력의 지원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세계의 고등종교중의 하나인 유대교나 그 뿌리에서 탄생한 기독교는 국가세력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은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의 신들처럼 국가나 통치자의 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통치 가운데서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백성(민중)들의 신으로서 국가와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은 국가나 그의 통치세력의 신이 되거나 상호 유착관계에 있지 않고 독립적이며 독존적인 신이었다. 그는 오히려 힘없고 약하여 이집트의 노예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파트너로 선택했고(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출 6:7), 그 중에서도 제왕이나 귀족을 상대하지 않고 버림받은 “땅의 사람들”이나 민중들을 자기의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야훼신의 특성이며 동시에 강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특성을 가지 야훼종교와 거기에 기원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에 탄생한 기독교는 이러한 야훼신의 정체성을 역사적 과정에서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었는가? 이 글에서는 기독교의 2000년 역사에서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지배자와 특권층의 종교가 되어 그 본래적 사명을 상실했던 과정을 몇 가지 도식을 통해서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성찰하고자 한다.
 
국가와 종교의 종합(콘스탄티누스 모델)
 
로마 황제 데오클레티안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감행되었던  마지막 기독교 박해에 이어서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로마 국가가 기독교를 말살하려던 정책이 실패한 다음 남은 길은 기독교를 승인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기독교에 대해서 관용을 베푸는 것이었다. 이러한 로마 국가의 종교정책은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시니우스 황제에 의해서 채택되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적 종교로 인정되었다. 말하자면 로마의 식민지인 팔레스타인의 한 적은 마을에서 태어난 예수의 종교는 3백 년 동안의 꽤 긴 시간 동안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로마 국가의 거의 전 지역에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의 길고 고통스러운 박해들을 거쳐서 마침내 공적으로 인정받은 종교가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년)의 종교와 교회정책은 종교와 국가 사이의 관계설정에 매우 결정적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기독교를 통해서 국가교회체제를 만드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해나갔다. 325년 그이 경쟁자였던 리시니우스를 제거한 다음부터 콘스탄티누스는 가톨릭교회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었고,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했으며, 자기의 아들들과 국민들을 기독교적으로 교육하게 했다. 그렇지만 그는 매우 영리하게 이교들을 포용했고 따라서 기독교나 이교들이 다같이 황제에게 충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 국가에 의한 이러한 기독교의 승인은 단순히 기독교 자체의 승리는 아니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승인은 로마 국가가 갖는 내재적 원리에 따라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신론적 로마국가의 상황에서 기독교는 그들과 나란히 병존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들에 대해서 기독교는 매우 비관용적이어서 기독교는 313년의 상황을 급속하게 뛰어넘었다. 기독교는 박해받던 종교에서 박해하는 종교가 된다. 기독교는 허락된 종교(religio licita)에서부터 로마국가에서 자신의 유리한 조건들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율리안 황제시대의 과도기 내지는 휴전기를 거쳐서 데오도시우스 황제시기에는 다른 종교들에 반격을 가해서 독존적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국가종교화는 로마 국가 안에서는 다른 종교들, 즉 이교적 종교들에 대한 억압을 의미했다.
이러한 사태발전은 기독교의 내적 발전에 미친 영향과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기독교는 상처를 입지 않고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로마국가와 생사를 건 투쟁에서 얻어낸 승인과 특권은 기독교로 하여금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일반화되어 있던 황제숭배를 받아들여야 했고 따라서 정치세력인 황제의 지배와 통제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로마 국가의 황제숭배를 용인하게 된 것은 야훼라는 창조신이며 유일신을 숭배하던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지만, 기독교회는 그것이 가져올 치명적 결과들에 대해서 커다란 성찰 없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황제숭배의 용인은 그동안 로마국가의 기독교박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기독교 지도자들은 끔찍한 박해에서 벗어난 것에 안심했을 것이며, 그 다음 어느 정도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한 교회가 그것이 가져올 정체성 상실에 대해서 무감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로마 국가 황제는 교회의 내적 통일에 대해서 의심을 가졌었다. 이러한 의심은 로마 국가 안에 존재했던 분파주의들이나 이단들과 관련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당시 기독교 안에는 다양한 신학적 교리적 방향을 가진 분파주의자들과 이단들이 병존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심각하게 나타났던 아리안주의 논쟁(318-381년), 즉 교리적 논쟁은 교회 자체의 힘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었고 결국 황제세력의 중재 내지는 통제를 받아서 해결되었다. 그 결과물로서 나온 것이 곧 황제에 의해서 주관된 니케야 공의회와 거기서 나온 니케아 신조이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국가의 간섭은 결과적으로 이후 기독교 정체성과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셋째 기독교와 고대의 문화의 종교적 혼합이 일어났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 로마 시대는 기독교화 된 시대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독교와 정치적 문화적 종합은 초기 기독교의 도덕적 엄격주의와 타계적 신앙으로부터 일탈하여 세속화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이른바 콘스탄티누스적 전환(Die Konstantinische Wende)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와 로마국가의 통합 내지는 종합은 물론 로마 국가의 삶의 전체적 상황을 바꾸어 놓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정체성의 변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는 더 이상 박해받는 종교가 아니라 박해하는 종교로, 더 이상 비특권적 종교가 아니라 특권적 종교가 된 것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의 종교가 아니라, 부유하고 군림하는 지배자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더 이상 광야에서 자기를 계시하던 야훼 하나님의 종교가 아니라 궁정이나 거대한 성당에서 자기의 거처를 두고 있는 신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더 이상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노예들을 해방하는 하나님의 종교가 아니라, 노예들을 두고 부와 영예를 누리는 억압자들과 지배자들의 종교가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와 로마국가의 종합을 가져온 콘스탄티누스적 전환 이후 기독교는 특권을 누리는 종교로서 로마 국가 안에서 자신들의 특권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제반 법적 정치적 체제를 강화해 나가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로마의 법은 교회의 법을 제정하는데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조직과 질서도 지배자의 종교에 상응하게 계층적으로 만들어졌다.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피라미드식의 교회조직과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제반 교회법은 물론 이것을 이론적으로 뒷바침하는 여러 교리체제들이 만들어진다.
 
국가의 영토확장정책과 선교정책의 종합(칼 대제의 모델)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하에서의 국가와 기독교의 종합 이후 기독교는 5세기 경의 게르만 족들의 침입과 7세기의 아랍인들의 침입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과 함께 기회를 얻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아랍인들(이슬람 종교)은 동방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소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를 장악함으로써 초대교회의 대교구를 형성했던 지역들을 장악한다. 7세기 중엽에 지중해 연안지역으로 들어온 아랍인들은 강력한 힘과 전투적 선교의지를 가지고 두개의 전선을 통해서 그리스 로마의 문화권의 동부와 서부 반쪽 가운데 남쪽일부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아랍인들은 7세기 이후 동방에서는 동서양의 경계선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까지를 점령하고 아프리카 북부 전체를 차지한 다음 일시적으로는 크레타, 시실리아, 사르디니아, 스페인의 남중부를 차지했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기독교는 동부지역과 아프리카지역의 수많은 교회들을 상실하고 그 중심을 서부에 남아 있던 대교구인 로마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슬람의 지배 하에 있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그 이후에도 기독교는 존속되었지만 이슬람 세력에 굴복 당함으로써 기독교는 그 힘을 상실하게 되거나 시간상의 차이를 두고 이슬람에게 완전히 흡수되었다. 지금의 터키지역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은 초대교회 당시에는 전부 기독교화 된 지역이었으나 당시 회교도들에 의해서 점령당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회교도들의 국가들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이슬람의 도전이라는 상황에서 서방에서의 정치적 교회적 반작용이 일어났고 그 파급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건 하에서 전체 서구의 운명이 달려 있던 프랑스와 독일 세력의 강화였다. 왜냐하면 강력한 기독교 세력이었던 스페인의 일부와 이탈리아의 일부가 이슬람에 의해서 장악됨으로써 프랑스와 독일이 기독교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제까지의 동방의 기독교 지역의 동남부가 이슬람에 의해서 장악됨으로써 로마 교구를 중심으로 했던 서방교회가 기독교의 중심이 됨과 동시에 그곳의 대주교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의 권위가 향상되게 된다. 셋째 신학적으로 자신만이 순수하고 완전하다고 간주했고 나아가서 기독교를 강력하게 평가절하 했던 이슬람의 유일신 종교가 기독교와 공존하고 그 반대세력들의 해체를 통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고트 왕국을 유린한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의 일부를 점령한 이후 이전의 로마 국가의 영토에서 게르만인들의 국가들 가운데서는 단지 두개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드 왕국이었다. 그 후 카롤링 왕가가 전체 프랑크 왕국을 차지한 이후 그들은 정치적 도약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은 또한 교회의 세계적 지위를 약속받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크왕 칼 마르텔(Karl Martel)은 732년 투어에서 아랍인들을 무찌름으로써 페레네 산맥 북쪽의 기독교, 말하자면 “서구의 기독교”를 아랍인들의 손에서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칼 대제(Karl der Grosse=768-814)는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프랑크 국가를 서방의 보편국가로 확대했고 그것은 서방의 기독교적 국가들의 대부분을 포괄했다. 이렇게 프랑크족의 왕은 서방의 교회의 수호자요 지도자가 된 것이다.
칼 대제의 정복정책은 중부 이탈리아, 바이에른과 캐르덴, 작센, 아베른 그리고 스페인까지를 그의 영향권에 넣게 된다. 이렇게 카롤링 국가교회는 대서양으로부터 엘베강 지역까지 그리고 아이더엘서 갈리글리아노 상류까지 넓혀 나갔다. 칼 대제는 굴복당한 이교도들, 중부 독일과 알프스 동부의 프리센인들과 작센인들,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지배의 시기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선교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칼 대제 하에서 정치적 정복은 언제나 기독교 선교를 전제로 했다. 이러한 정치적 정복과정에서 이교도들에게 선교가 강요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항복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이방인들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가해지고 강요된 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사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국가의 정복전쟁과 선교활동의 결합은 이후부터 기독교 선교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정복과 선교의 결합을 반대한 경건왕 루드비히 같은 사람은 정복 없는 선교를 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요된 선교는 후에 와서 아퀴나스의 토머스 같은 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교회와 십자군 전쟁(교황 그레고리7세의 모델)
 
카롤링 왕국의 이상인 국가와 종교의 통일, 국가적 과제로서 정복전쟁과 선교의 종합은 고대교회의 이상들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교회가 정치와 결합됨으로써 그것이 가져야 할 본래의 사명들이 상실된 것이다. 박해받던 교회가 박해하는 교회로, 민중들과 약자를 돌보아야 할 종교가 특권층의 종교로, 피안적 종말론적 교회가 차안적 세속적 종교로 변질하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을 섬기는 자들로부터 특권층과 지배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선교가 아니라, 정복자들에게 강제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국가주의적 행위가 되었다.
이러한 카롤링 시대의 국가우위의 상황 하에서 교회의 위상은 10세기 이후 14세기까지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교황권의 해방과 그것의 강화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교황권의 독립을 위한 긴 투쟁의 과정은 엄격하게 말하면 이러한 국가와 종교, 정복정책과 선교정책의 종합에서 빚어진 온갖 교회의 부조리와 모순들을 타개하기 위한 운동들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교황권의 독립과 강화는 교회의 개혁(정화)운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의사 이시돌문서들(pseudisidorischen Dekretalen)통하여 황제에게 예속된 교황의 권리를 구출해 내는 것이었다. 교황들은 카롤링 국가의 몰락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정치와 종교의 종합을 해체하여, 교회의 독자성을 확보함으로써 교회의 정치에의 예속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이러한 시도에서 교회는 여러 가지 의사 문서들과 위조문서들까지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콘스탄티누스의 헌정문서이다. 이러한 시도는 교황권의 강화를 의미하는 동시에 교회의 개혁, 즉 교회의 본래적 과제를 찾는 일과도 연결된다.
둘째는 이 시기에 일어난 클루니 수도원 개혁운동을 들 수 있다.교황권의 실질적 개혁을 낳게 한 것은 승려집단에서 나온다. 10세기 경에 즉 카롤링 국가 말기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수도원적 금욕적 이상들은 특히 부군더 지역의 클루니 수도원에서 성공을 거둔다. 이러한 수도원 운동의 이상들은 다음과 같다. 1)수도원 경제의 개혁(수도원 재산의 세속적 지배자들의 약탈에서 보호) 2) 세속적 권력으로부터 수도원의 독립과 교황에게 귀속 3)베네딕트 규율의 철저한 수행, 4) 로마적 승려의 종교성 함양(고양된 내면생활의 고양) 등이다. 그러나 이 개혁을 통해서 시몬파(성직 판매자들)와 니콜리아파(대처승이나 축첩한 자들)의 추방 등을 감행했다.
셋째 독일황제 하인리하 4세와 교황 그레고리 7세 사이의 우위권 투쟁에서 교황이 승리함으로써 교회가 정치적 세력에 속박되는 것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은 교황선거에서 세속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것인 동시에 이른바 평신도(왕)의 서임식의 거부이기도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레고리 7세 교황은 교회의 정치적 지배권을 주장하고 확보함으로써 교황권을 세속적 정치세력인 황제권 위에 올려놓는데 잠시나마 성공하였었다.
이러한 교황권의 강화와 그것의 세속적 정치권력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강화된 교황권은 세속군주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십자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해서 과거에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빼앗긴 지역을 탈환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된다. 십자군적 사고는 일차적으로는 과거의 성지에 대한 순례사상이 그 뿌리에 자리 잡고 있지만 과거의 기사도 정신의 종교적 변용도 한몫을 했다. 그리고 또 교황청에 의해서 지원되었던 성 베드로의 군사라는 사고도 여기에 결합되어 나타난다. 십자군 전쟁은 순례라고 하는 종교적 행사와 기사도라고 하는 정치적 군사적 행태가 비정상적으로 결합된 것이었다.  
서방세계는 동방에 대한 과장된 기대들과 함께 이교도들에 대한 전쟁은 비교할 수 없는 종교적 열광주의를 동반했다. 이슬람 정복자를 옛 기독교 영토에서 추방하고 비잔틴과 아르메니아 교회가 교황권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군 전쟁들은 실패로 끝났다.
카롤링 시대의 세속적 정복전쟁이 선교와 결합되었다면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열정에 세속적 전쟁전통이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십자가와 십자군은 언어적으로는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라고 하는 것이다.
 
식민지 정복과 선교(콜럼버스의 모델)
 
15세기 유럽인들은 조선기술과 대양항해술을 남보다 먼저 발전시킴으로써 지구상 다른 대륙의 사람들 보다 결정적으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은 항해술의 발달을 기초로 삼아서 보다 넓은 세계관을 갖고 일찌감치 세계 여러 나라들을 탐험하는데 성공한다. 저명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부라우델(Ferdinand Braudel)이 말한 것처럼 대양항해 기술은 유럽인들과 비유럽인들 사이에 대칭관계를 만들고 따라서 세계적 척도에서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바다를 지배하는 자는 무역을 지배하고 세계무역을 지배하는 자는 세계의 부를 지배하고 따라서 세계 자체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Walter Raleight).
1492년 콜럼버스의 미 대륙 점령(발견이 아니다)은 단순히 유럽인들의 식민주의만을 그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바셀로나를 출발하기 전 당시의 스페인 왕 페르디난도와 여왕 이사벨라가 참석한 가운데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출발했다. 그의 출발미사는 그의 항해를 위한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자리인 동시에 가톨릭교회의 선교사로서의 파송을 축하하는 자리이고 했다. 그는 출발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우상들을 쓸어버리고 홀로 통치하실 것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암송하면서 항구를 출발했다. 그는 망망대해를 여행하면서 자신들의 안전과 항해의 성공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시에 전 세계의 민족들을 깨우쳐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퇴치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항해는 일차적으로는 세속적 목적 즉 스페인인들의 식민지 개척을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가톨릭신앙을 전파하여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게 하려는 대담한 종교적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미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 일행은 초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수한 무기와 전쟁기술로 원주민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전기 및 전설들의 저자인 콜럼버스의 둘째 아들은 새로운 대륙에서 자신들의 재배와 그 정당화의 이데올로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존하심은 인디오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생필품의 부족과 질병들까지 보내주어서 그들의 숫자가 이전에 비해 3분의 1로 줄어들게 해 주었다. 이것을 통해서 분명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과 그의 고귀한 뜻을 통해서 그와 같은 놀라운 승리와 원주민들의 굴복을 가능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에 비해서 우리의 것들이 모든 면에서 우수했다고 해도 그들의 압도적 다수가 우리의 유리한 조건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의 우수한 무기들로 원주민들을 수 없이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간  질병(매독)으로 면역력을 갖지 못했던 원주민들이 힘없이 죽어갔다. 한 예로 당시 2천 5백만 명의 멕시코 원주민들을 80년이 지난 이후에 1천만 명으로 줄어든 것이다. 콜럼버스는 이러한 대량학살과 질병으로 통한 원주민들 숫자의 감소를 하나님의 섭리로 본 것이다.
1992년 10월 2일 콜럼버스 미 대륙점령 500주년 되는 날에 “콜럼버스의 날”을 맞이해서 옛 세계의 지배자였던 스페인과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한 미국은 뉴욕에서 공동의 기념행사를 가졌었다. 그 행사의 내용인즉 바셀로나에 서 있는 콜럼버스 주상과 미국 뉴욕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의 “혼인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행사로서 정복자를 대변하는 콜럼버스와 자유인을 상징하는 여신상을 결혼시키는 것으로서 낡은 국가 스페인과 새로운 국가의 왜곡된 이중성을 말해준다. 어떻게 국가주의의 상징적 인물과 자유와 평화의 연신상이 결혼할 수 있는 것일까?
미국과 스페인은 이 행사를 거행하면서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은 두개의 각기 다른 대륙, 유럽의 문화와 남미의 문화의 만남(Begegnung)이며 따라서 축하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두개의 각기 다른 문화는 서로 소통가능하게 되고 더욱더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미 대륙발견은 새로운 세계질서, 폐쇄된 각각의 대륙을 중심으로 한 낡은 질서로부터 새로운 전체 세계질서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세계교회협의회 콜럼버스 500주년 위원회는 “신대륙 발견은 두 세계의 만남이 아니라 우월한 민족들이 약한 민족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규정한 계층적 원리의 승인이다”라고 선언했다. 콜럼버스 사건은 두 대륙이나 두 문명이 등등한 지위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문명과 야만으로의 분리이며, 유럽인들의 식민지적 지배와 문화적 편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미국의 저명한 언어연구가이며 반제국주의적 체제비판가인 노암 춈스키(Noam Chomsky)는 여기에 대해서 자유라는 이름의 정복자의 계획된 “제국주의적 야합”이라고 비판하고 레이건 정부의 어리석은 백치놀음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미국이 감행하고 있는 정복정책을 은폐하는 국가주의적 음모의 놀음이라는 것이다.
문명비평가인 세일(Kirkpatrik Sale)은 그의 책 “낙원의 정복”(The Conquest of Paradise)에서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되는 서구문명의 승리는 오늘날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팔리는 코카콜라에 이르기까지 정복자들의 창던지기와 대포 쏘기와는 달리 정신적 승리요, 심리적 정복의 성격을 가진다고 했다. 콜럼버스 이래 유럽인들은 정복당한 다른 대륙의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언어를 말하도록 강요했고, 자신들의 옷을 입게 했으며 자신들의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콜럼버스 이래 백인들이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이 모두에게 아름다운 것이며, 그들이 맛있다는 음심이 맛있는 것이 되었다.
남미의 작가 에두아로 갈레아노(Eduaro Galeano)는 콜럼버스 유럽과 다른 대륙의 대칭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유럽인들의 것은 문화며, 여타 대륙의 것들은 민속이고, 유럽인들의 것은 종교며 다른 대륙의 것들은 미신이고, 유럽인들의 것은 언어고 다른 대륙의 것들은 방언이고, 유럽인들의 것은 예술(Kunst)이고 다른 대륙의 것은 수공예품(Kustgewerbe)이다. 콜럼버스 이후 남미의 문명은 “日蝕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반식민지와 선교(라스카사스와 지겐발크 모델)
 
스페인 사람 콜럼버스와 포르투갈 사람  바스코다 가마의 지구탐험 여행들은 해외에 대한 유럽민족들의 열성적인 식민지정책을 추구하게 했고 가톨릭교회에다 예기치 않은 선교지평을 열어주었다. 종교적 혹은 선교적 동인이 이러한 탐험여행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다. 재산과 부, 특히 금과 이방세계에 대한 욕망이 곧 선교적 열정과 결합된다. 이러한 선교기관들은 대개는 프랜시스칸이나 도미니칸 등과 같은 수도단들인데 그 중에도 예수회가 선두에 섰다. 이러한 선교회들은 남미, 동인도, 일본, 중국들에서 활동했고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7세기에 와서 이러한 선교들은 부진을 금치 못했고, 일본 같은 데서는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남미에서 라스 카사스(las Casas)에 의해서 일어났던 선교와 반식민지 운동 모델이다. 그는 학생으로서 1493년 자신의 아버지도 동참했던 콜럼버스의 남미여행으로부터의 귀환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장해서 스페인 영토 하이티에 있는 금광에서 일하고 나서 군인으로서 전투에도 참여했다. 그는 아마도 1509년에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 때까지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서 극적 전환을 가져온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가 인디오들에게 가한 불법적 행위들 때문에 고해성사에서 사죄함을 받기를 거부했다. 둘째로 그는 그는 고해성사에서 사죄받음을 거부한 것은 시락서 34:21절과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Montesinos)의 설교의  빛에서 자기의 삶을 성찰하고 나서이다. 그 순간부터 그는 인디오들의 권리의 수호자인 동시에 스페인의 식민주의자들의 강력한 적수가 되었다. 1516년 그는 추기경 시스네로스(Cisneros)에게 식민주의자들의 불법적 행위들에 관한 백서를 제출하고 황제 칼 5세의 자문들에게 선교와 식민지 정책에 관한 계획들을 제시했는데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나 부분적으로는 거부당하게 된다.
1525년 그는 도미니칸 수도회에 입단하고 1542년까지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식민지 정책의 문제점들과 모순점들을 발견하고 귀국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1544년 그는 부유한 교구인 쿠즈코(Cusco)의 반대로 그는 가난한 교구인 치아파(Chiapa)를 담당하게 된다. 그는 인디오들이 바쳐야 할 조공과 세금을 감액해 주는 조치를 취했다가 멕시코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그가 불법으로 벌어들인 모든 재물을 환수해야 한다는 목회서신을 발표하자 치아파 사람들이 그에게 들고 일어났다. 1546년 그는 멕시코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해서 인디오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조치들이 통과되었으나 그로 인해서 그는 식민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그로 인해서 그는 주교직에서 물러나서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그는 인디언들에 대한 식민지 정책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후 그는 마드리드에서 1566년 6월에 사망했다.
그는 일생동안 스페인 식민주의자들과 인디오들 결혼해서 평화롭게 살수 있고 또 인디오들의 권리들이 보장되는 노동조건들을 제시했다. 이 시기에 그는 교황에 의해서 하사된 스페인의 소유의 합법화를 받아들였다. 그 다음 시기(1530-1544)에 그는 이론적 작업들에 몰두하는데 거기에 보면 정치적 권력과 교항의 권력 사이의 종합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원주민들 지도자들의 권리들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페인 정복자들을 무력을 통한 지배자로서 비판하고 있다.
그의 말년(1546-1566년)에 그는 매우 급진적 자세를 위하면서 스페인의 식민지화를 심판하고 나선다. 따라서 스페인 사람들은 양심에서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사태를 원상으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풀베다(Sepulveda) 회의의 논쟁에서 인디언들은 야만이라는 논제를 거부하고 모든 인류는 하나라는 논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범죄를 저질렀고 무죄한 인간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거해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노예로 태어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동등하다는 것이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 문화, 종교의 빛에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했다.
라스 카사스는 전쟁의 반대자였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는 전쟁만을 승인했다. 그리고 인디언들을 기독교화 하기 위해서 굴복시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는 선교를 위해서 식민지화 할 수 있다고 해석한 교황의 칙서(Sublimus Deus=1537년)를 거부한다. 그 칙서에 따르면 복음화만이 식민지화를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에 의하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들과 일치하는 방식으로만 선포되어야 한다.
라스 카사스는 멕시코와 리마에서 국가적 차원이나 지방의 차원에서 인디오들의 권리보장들을 위한 법제정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많은 민족들 특히 남미의 민족들은 그를 그들의 독립투쟁을 위한 선구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 힘없고 억압받는 자들의 옹호자로서 추앙을 받는다. 최근에 그는 해방신학자들( E. Dussel, G. Gutierrez, H. Assmann)에 의해서 예언자로서 숭상을 받는다. 그는 동시에 인디오들의 통합을 위해서 일한 토착화의 선구자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그의 기본적 통찰은 인디오들이 불법으로 고통 받는 데서 발견하는 수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인 선교사 지겐발크(Batholomäus Ziegenbalg)의 모델이다. 지겔발크는 1682년7월 독일 작센주의 한 적은 마을에서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할레 대학에서 당시 루터교 경건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케(August Francke) 밑에서 공부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의 슈페너(Spener)가 시작한 경건주의 운동이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진젠돌프(Zinzendorf)에 의해서 지도되던 헤렌후터의 경건주의와 함께 할레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이 커다란 종교적 반향을 일으키던 시기다. 이들은 주로 러시아와 신대륙 미국에서의 선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할레 출신의 지겔발크는 남인도의 선교사로 간다.
지겔발크는 다른 동료 한 사람 풀루챠우(Heinrich Plutschau)와 함께 덴마크의 왕 프리드릭히 IV세의 지원을 받아서 인도의 트란쿠에바(Tranquebar)로 떠난 것은 1706년 9월 7일이었다. 당시 할레의 선교회는 덴마크왕 프리드리히의 재정지원을 받았는데 이러한 정치와 선교의 유착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야기하여 결과적으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두 사람 선교사들은 힌두교인들과 덴마크의 인도식민지 관리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707년 12월에 새로운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들은 인쇄시설을 만들고 1517년에는 지겐발크가 타밀어로 번역한 신약성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찌겐발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던 코펜하겐의 선교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교사업이란 복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된 원주민들의 사회적 권리와 복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교부는 단지 선교사들로 하여금 복음만을 설교하기를 바랐으며 토착민 교회는 유럽의 기도교만을 받아들이도록 했었다.
그런데 지겐발크는 공공연하게 브라만의 계급제도(caste)를 비판하고 그것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서서 힌두교의 하층민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그는 힌두집단에 의해서 피살을 당할 뻔 하기도 했다. 힌두교인들이 이러한 살해위협을 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덴마크의 선교부에서는 선교사가 이러한 사회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의 하층민들에게는 이러한 그의 활동이 적지 않은 반응을 일으켰다.
그 결과 토착민 지도자들이나 선교사들 사이에서 이러한 지겔발크의 생동을 두고 대립이 생기고 논쟁이 발생했다. 트란쿠에바에서 각기 의견을 달리하던 선교사들 사이의 다툼과 경쟁으로 인해서 1708-09년 사이에 4개월 동안 지겔발크는 덴마크의 식민지 관리에 의해서 투옥을 당했다. 그리고 1708년에는 덴마크의 군인과 비기독교적 토착민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세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이 문제가 법정싸움으로까지 나가게 되었다. 이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서 지겐발크는 다시 감옥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와 같은 일들로 인해서 지겐발크는 인도에 나타난 토마스 뮌쳐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계속되는 덴마크의 식민지관료들과의 힌두교의 상류층들과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서 그는결국 1714-16년 유럽으로 소환되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선교사로서 복음의 정시네 따라서 전통종교인 힌두교의 계급사회를 타파하는 일에 전력했고 동시에 자신을 지원하던 덴마크의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들어서 선교사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귀국조처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기의 선교사업의 경험을 통해서 선교정책은 식민지 정책과 결합되어야 하며 또한 선교정책은 토착민들의 사회정책과도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실망에 빠져서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의 위로로 받아들였던 것은 성공회 선교단체(Anglican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Christian Knowledge)와의 협력을 통해서 토착민들의 독자적 교회형성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상 최초로 에큐메니컬한 협력의 기초를 놓았었다.
 
정치적 메시야주의와 선교의 종합(히틀러 모델)
 
세계화와 선교의 종합(미국 네오콘의 모델)
예수는 부활하여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선교명령을 하달한다.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이러한 예수의 선교명령은 사실상 기독교 복음의 세계화,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실현되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세계화를 향한 예수의 선교명령은 예수님의 직접적 제자들에 의해서 실현되었다기 보다는 이방선교사로 부름 받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복음의 세계화의 명령은 앞서 살펴 본대로 초대교회에서는 로마 국가의 기독교화를 통해서, 중세기에는 유럽의 기독교화를 통해서, 중세기 말에는 남미 대륙의 기독교화를 통해서 그리고 근세에는 전 세계의 기독교화를 통해서 실행에 옮겨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서 이러한 선교의 전 과정을 국가와 기독교의 종합, 국가와 선교의 종합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국가와 선교의 종합모델은 오늘날에 와서는 국가의 세계화 모델과 결합됨으로써 몇 가지 새로운 양태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정치적 세계화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념국가군의 출현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새로운 국가로 등장한 미국과의 동일성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국가로 등장한 소련에 반대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적 미국과 사회주의적 소련이 세계를 분할하여 점령한 이래 등장한 동서냉전체제에서는 세계는 두개의 국가로 갈라져 있었다. 이러한 동서냉전체제에서 두개의 강대국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전쟁에서 대부분의 보수적 기독교는 미국 편에 서서 미국의 반공적 이데올로기의 동맹자와 지원자가 되었었다. 이 때 기독교가 들고 나온 구호는 공산주의는 무신론적이며 전체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신을 부정하고 따라서 종교를 반대하며 나아가서 교회를 박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로서 스스로가 기독교가 가진 신의 전체성을 탈취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전체주의는 신만이 가진 전체성, 혹은 완전성을 자신들의 사상과 지도자에게서 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아마게돈 전쟁의 논리에 따라서 선한 국가인 미국을 지원하고 악의 국가인 소련과 동구라파의 국가들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 곧 선교적 과제, 기독교 선교였다. 따라서 악마에게 사로잡힌 무신론적이고 전체주의적 세계를 붕괴시키고 그 자리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 곧 예수의 지상명령 즉 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로 경제적 세계화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는 미국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지원하고,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제적 세계화 과정은 자유시장경제의 이론에 근거해서 경제의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의 통제를 제거하고 무한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경쟁을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사회주의의 계회경제체제는 모든 재산을 국유화함으로써 자본의 자유를 통제함으로써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유를 부정함으로써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고 따라서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시장경제체제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자유에 상응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 선교는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만 성과를 거둘 수 있고 인간들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결   론
 
오늘날의 세계화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했던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한  그리스도교적 세계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의한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세계화, 즉 세계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아니라 자본 즉 맘몬에 의한 세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예수께서 경고한바 하나님과는 병존할 수 없는 재물의 세계화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달성된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의 자유, 즉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니라 맘몬의 자유, 즉 자본의 자유 즉 자유시장이 승리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보수적 혹은 신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자유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마르틴 루터)는 자본의 자유, 시장의 자유와 일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만물로부터의 자유인 동시에 만물을 섬기는 자유라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역설적 자유이해는 왜곡되어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자유가 중심이 됨으로써, 인간이 오히려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인간을 섬겨야 할 자본이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을 노예화하는 데로 나갔다는 것이다.(칼 마르크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의 세계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사회적 연대성,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의 세계화의 정신을 망각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기독교의 본래성에서 일탈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세계화와 더불어 등장한 오늘날의 기독교의 현실을 독일의 저명한 시사주간지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고, 이 하나님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Dow-Jones-Index)며, 그의 聖體는 미국의 달러고,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지금 크레믈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이다.”(Der Spiegel, 1991. 12. 31, S.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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