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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3 18:49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의 역사적 연구
글쓴이 : 손규태
 
       서   론
 
근래에 와서 한국의 개신교회들 안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 위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지난 30년 동안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 한가운데 성서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입각하여 정치적 봉사를 해 오던 역사적 현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당시 에큐메니칼 운동은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민중사랑의 정신 그리고 교회사에 나타난 해방전통에 서서 인권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맛서 투쟁해 왔었다.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을 회고해 보면 박정희 군사독재 치하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의 과정에서 그 의식성에 있어서나 조직력에 있어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학적이고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한국교회협의회원 교단들을 능가할 수 있는 민간단체들이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당시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산업화 과정들에서 노출되었던 인권탄압과 노동탄압에 대해서 독보적 존재로서 활동했었다. 이 운동은 당시 서구에서 시작되었던 산업선교 운동에서 영감을 받고 세계교회협의회와 독일 등 외국 교회들의 정신적 재정적 지원 하에서 한국의 노동운동 등 제반 인권운동 및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지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발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러한 급변하는 상황에서 그동안의 성서적 역사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동시에 그 운동의 지평을 잃어버림으로써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처한 정체성의 위기들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이러한 정체성 위기는 내부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적 요인들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위기는 단순한 조정위기인가 아니면 심각한 목표위기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 위기는 일차적으로 외부로부터 왔다.  60.7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것은 이미 앞서 언급한 바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그리고 통일운동들이 의식성에 있어서나 조직력과 규모 면에서 엄청나게 성장하면서 종래의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이 포괄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인권 및 민주화운동을 포괄하고 있던 노동운동만 보더라도 더 이상 노동자들이 교회의 산업선교지도자들의 이념적 지도나 조직적 지도를 받을 단계를 훨씬 뛰어 넘어 성장해 있었다. 산업선교 운동이 그 방향성과 지도역량을 상실하면서 이 분야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문제는 90년대까지만 해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주도해 온 통일 운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 위기는 이 운동 자체 안에 잉태해 있었다. 그것은 우선 역사적으로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교단들의 집합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사회정치적 문제들과 관련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심각한 의견대립을 노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다양한 교파들로 구성된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져야 하는 공의회적 과정(Conciliar Process)의 문제는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 전반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에큐메니칼적 합의가 도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교단이나 단체들에게는 합의사항이 전혀 구속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신교회의 에큐메니칼 대회에서의 결의들은 이 점에서 신학적 법적 구속력을 자기는 가톨릭의 공의회적 결의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88년도에 합의 발표되었던 “1995년도 희년운동”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 희년운동은 회원교단들 안에서 그 내용들을 두고 반대운동이 일어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에 치명적 상처를 주었다. 그 결과 이 운동은 1993년의 인간 띠 잊기라고 하는 성격이 지극히 모호한 운동으로 변질되다가 그 다음 해에는 그것마저도 계속하지 못하고 몇 군데서 통일염원예배라고 하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그리고 희년으로 선포했던 1995년에는 그 운동이 더욱 위축됨으로써 그것의 회생을 위해서 비에큐메니칼 교단들과 연합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게 됨으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이 더욱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상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에 이어 민족의 최대과제인 통일운동에서 그 정체성들을 찾아야 했지만 이러한 희년운동의 분열과 약화로 인해서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위기의 또 다른 요소는 각 교단의 교권통제 하에 들어감으로써 발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동안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앞서도 말한바 있지만 국제적 차원에서 신학적 재정적 지원을 통해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와서 외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의 감축 내지 철회는 결과적으로 국내적 지원을 통해서 운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점에서 몇 가지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명실상부 하게 한국교회들에 의해서 전개되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상 신학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거의 외국 교회들이나 단체에 의존했던 것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설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나 성장한 한국 교회로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다. 한국의 회원교단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능동적 활동이 가능해 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따라서 한국교회협의회도 새로운 조직체계를 만들게 되었고 회원교회들도 늘어났으며 그것을 계기로 해서 교회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에큐메니칼 운동은 새로운 정체성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선 이러한 전환기에서 조직구성에 있어서나 리더쉽에 있어서 보다 많은 교권주의적 요소가 작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개개 회원교단의 교권을 장악한 사람들이 또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다양한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가진 교파들의 의견 조정하는 일 좋게 표현하자면 “교회일치”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보다 이질적인 교단들의 새로운 개입으로 인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이전의 운동에서와 같이 성서적 진리와 교회사적 전통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자들을 위한 일을 추진하는 예언자적 활동은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른바 “교회일치 운동”으로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지고 있던 역사적 난제가 바로 이러한 전환기에 한국에서 그 실상을 드러낸 것이다. 칼 바르트는 1948년 암스텔담에서 있은 “세계교회협의회 창립총회”에서 “교회일치 운동”이 일종의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의 무원칙한 “타협운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바 있다. 그것은 당시 평신도 주제 강사로서 그 대회에 참가했던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가 취한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현실주의적 실용주의”를 경계한 것이었다.  당시 바르트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분열된 교회들의 일치 보다는 “분열된 진리들”을 극복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것으로 파악했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치등과 같은 세상권력에 의해서 기독교 진리가 왜곡되고 나치의 추종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되었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바르트에게는 교회일치 운동은 결코 어떤 무원칙한 “교회들 사이의 타협운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에큐메니칼 운동은 성서의 진리를 바로 세우고 증언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현금의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일치”라고 하는 명분을 앞세움으로써 그동안 에큐메니칼 신학과 운동이 견지해왔던 예언자적 증언의 전통이 사라짐으로써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위기는 단적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는 문민정부로부터 탄압받던 노동운동과의 와해된 연대성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우선 몇 년 전에 있었던 서울 지하철 노조탄압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가톨릭 명동성당과 불교의 조계사에서 그들의 지원처를 구했다. 그들은 개신교 가운데 어느 교회도 찾아오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마지할 수 있던 개신교도 없었다. 그리고 1996년 12월 26일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저항하던 민주노동자들은 다시 명동성당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았다.
이것은 단적으로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더 이상 노동자들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 위기를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개신교회들의 선교활동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사건들이었다.
 
우리는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위기의 원인들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 위기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원래 위기란 개념은 의학이나 생물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의학의 경우 환자가 특정한 불치의 병에 걸려서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여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을 때 의사들은 그 환자가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게 된다. 그리고 환자가 생명을 지속한다 해도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없고 또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의사들은 위기라는 말을 사용한다. 또 생물학에서 어떤 생물이 질병이나 환경적 요인들로 인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거나 종이 멸절될 처지에 있을 때 우리는 위기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치명적 질병에 걸렸다는 의미에서 이 운동의 위기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존속할 수는 있지만 제 구실이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위기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떤 운동이나 단체, 어떤 사회나 국가의 위기의 성격을 말할 때 그것이 조정위기인가 아니면 목표위기인가를 따져보게 된다. 조정위기라는 것은 예를 들면 배가 항해를 하고 있을 경우 나침판 등 항해에 필요한 기구들의 상실이나 고장으로 인해서 제대로 방향을 잡아나가기 힘들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경우 배와 그것을 움직이는 기관들은 문제가 없다. 따라서 이런 항해를 하는데 필요한 기구들을 다시 갖춘다면 그 배는 별 지장이 없게 되며 위기는 쉽게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목표위기는 차원을 달리 하고 있다.  다시 항해와 관련된 예를 들자면 배를 움직일 수 있는 기관이 완전히 고장이 나서 수리해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거나 아니면 배 자체가 너무 낡아서 운항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이 때 배는 폐기하게 된다.
 일부 한국의 보수적 개신교단의 인사들 가운데는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위기를 목표위기로 규정하고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서 대처하지는 주장도 있다. 이것의 대안으로서 그들은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 만든 단체도 여러 가지 문제들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 원인은 이 새로운 단체의 출발 동기나 목표설정이 매우 불순할 뿐만 아니라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 인사들은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위기의 성격에 대한 확실한 진단을 가지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칼 운동이 처한 조정위기를 왜곡되게 해석하여 목표위기로 몰아가려는 불순한 동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성서의 해방전통이나 예수의 민중전통을 추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다만 교회정치의 헤게모니 쟁탈을 은폐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도전에 대처하는 최근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안도 그리 석연치 않다. 왜냐하면 에큐메니칼 운동 측에서도 이러한 위기를 자기의 “정체성의 확립”이라고 하는 방향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보수적 개신교단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그대로 받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상실된 정체성을 확보하기보다는 교회 정치적으로 몇몇 성격이 불분명한 교단들을 영입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대처해 나가면 나갈수록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 자체의 “정체성 위기”는 심화되고 결과는 개신교회들 안에서의 추한 헤게모니 싸움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필자는 일단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 위기는 일단은 조정위기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지난 30년 동안 한국사회변혁운동에서 차지했던 위상과 존경을 회복하는 길은 그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정체성 확보에서 결정적 사안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결론적으로 성서의 해방전통과 예수의 민중전통을 회복하고 그 길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 교회사적 전통을 추구하지 않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일치는 물론 분열되지 않은 복음의 증언도 가져올 수 어 ㅂㅅ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조정위기에 처한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체성위기의 극복과 함께 새로운 대한 제시로서 그동안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이 지향해온 이념과 프로그람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을 사회윤리적 지평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 -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 패러다임(1948-1968)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총무로 있는 콘라드 라이저는 1990년에 발표한 글 “전환중의 에큐메니칼 운동”(Ökumene im Übergang)이란 책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패러다임 변화”(Pradigmenwechsel in der ökumenischen Bewegung)를 해명하고 있다. 라이저 교수에 의하면 적어도 1960년대까지 에큐메니칼 운동의 비전을 도식화 할 수 있었던 일반적으로 승인된 패러다임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글을 쓰고 있던 1980년대 말의 상황을 규정하기를 에큐메니칼 운동이 자신의 방향설정을 위한 틀을 탐구하고 있는 시기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제반문제들에 대한 납득할만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행동전략들의 수립을 위한 방향설정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1968년에 열렸던 제4차 웁살라 대회 이후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들, 방법들 그리고 담지자들과 관련해서 강력하게 제기되었던 비판은 이 운동이 갖고 있는 “우유부단성”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우유부단성은 당시의 제반 문제들 특히 개발문제, 제3세계의 인권문제, 인종차별문제, 해방신학에서 제기하고 남북문제 등에 대해서 의견의 합의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행동프로그람을 제시하는 일은 더욱더 어려웠던 데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 운동이 가지는 방향성과 그 실천력에 대한 심각한 위기들을 말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감은 비단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에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두차례에 걸친 세기적 혁명 이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혁들은 부분적으로는 진보로서 나타났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전통적 구조들과 정향들에 대한 위협들로 나타나고 있다. 진보를 찬양하는 집단이나 그것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는 집단 모두가 오늘날을 위기의 시대로 진단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거듭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위기를 말할 때 제시되는 구체적 문제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1968년 웁살라 총회 이후 복음주의 진영에서 제기한 위기론의 근거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과도하게 일방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1910년대에 세계선교협의회가 주창했던바 “복음화”(Evangelisation)와 같은 전통적인 교회의 문제들을 등한시 하고 이른바 세상적 문제들에만 관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비단 어느 한 나라에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복음주의적 입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모든 종교들과 이념들의 세계 공동체”를 지향하려는 것에서부터 철저한 전환을 통해서 성서적 메시지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이 말하고 있는 성서적 메시지는 “영혼구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판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용공적이라는 논리로까지 비약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한국에서도 몇몇 교단들 안에서 교회분열과 함께 NCC탈퇴라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었다.
둘째 1977년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수도인 달레살람에서 열린 세계루터교 연맹 총회(Lutheran World Federation)는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에 동참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요인”(casus confessionis)이라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인종차별을 지지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종차별 문제와 관련된 신앙고백의 문제(status confessionis)는 그후 독일의 재무장 및 핵무장과 연관되어서 논의되었다. 그래서 에른스트 랑게(Ernst Lange)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종차별의 문제과 관련된 신앙의 문제를 평화문제 뿐만 아니라 남북갈등의 문제까지 확대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반평화를 부추기는 일체의 군사주의나 제3세계의 빈곤을 야기 시키거나 아니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 행위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 제기된 위기론은 사실상 이 운동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논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하나의 해석모델로서 사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위기론에 근거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새로운 목표들과 함께 행동모델들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과도하게 그리고 일방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당시 WCC의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했던 인도의 토마스(M.M. Thomas)는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christozentrischer Universalismus)라는 도식으로 응답했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의 수직적 차원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입장도 그 반대로 복음의 수평적 차원만을 강조하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입장도 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보완관계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중심원 안에서 복음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이 서로 겹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는 WCC의 초대 총무였던 Wilhelm A. Visser't Hooft에 의하여 제시된 개념으로서 1948년 WCC가 창설된 이래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었었다. 이 개념은 적어도 1968년 웁살라 대회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밭아 들여졌었다. 그런데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라는 패러다임이 지향하고 있는 내용들을 Viser't Hooft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범주에서 도식화하고 있다.
첫째는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고백하는 것이다(das Bekenntnis zu Jesus Christus). 그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의 통일이다(die Einheit seines Volkes). 마지막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 인류에게 그를 증거하고 봉사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Die Berufung zu Zeugnis und Dienst an allen Menschen). 이것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의 배성들의 일치를 가져와서 그를 전 세계에 증언하고 봉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강조됨으로써 복음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분열된 세계 개신교회들의 일치가 중요하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나아가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를 향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전체 인류에 대하여 봉사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에 관한 Hooft의 범주들은 중요한 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콘라드 라이저에 의하면 여기서는 사실상 “역사”라고 하는 보다 근본적 범주를 내포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역사라고 하는 범주는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의 또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 “에큐메니칼적 패러다임의 기본범주”라는 것이다  물론 Hooft도 “증언과 봉사”를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역사참여를 언급하고 있지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 이 문제를 신학화하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라이저 교수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세속화의 경험은 ‘기독교적 세계’, ‘기독교적 질서’ 혹은 교회와 세계의 제도적 연관성이라고 하는 고정적 관념에 의해서 규정되던 기독교적 보편주의의 제반 구형들을 비판적으로 수정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역사라는 개념의 도입이 중심적 해석범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적 실존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사건의 특수성과 교회를 그 신앙고백과 실존과 결합시키는 보편적 요구 사이의 긴장은 단지 종말론적으로 이해된 역사연관성들의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보편적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실현으로서 보는 역동적 이해는 긴장 가운데 있는 패러다임의 기본요소들을 묵어주는 결정적 관절이다.”
여기서 라이저는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기독론적 강조점이 주어진 교회의 일치는 선물과 과제로서 이해되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역사개념의 도입과 더불어 선교개념의 새로운 이해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세계로 확장시킨다고 하는 19세기의 수평적 선교이해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역사 전반의 통치자라고 하는 이해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중심적 보편주의에로 발전해 나갔다. 이렇게 역사참여를 선교로서 이해하게 된 신학적 배경에는 이미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가 창설될 당시 제시되었던 “중간공리”의 이론이 깔려 있다. 이러한 중간공리의 이론은 그후 “책임사회”(Responsible Society)라고 하는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핵심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거기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역사 한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의 동역자가 되어 사회변혁에 동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 개념의 내용이 “역사”개념에 집중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하나님의 선교’의 동참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보다 구체적으로는 서구 산업사회들에 있어서 과학기술적 진보사상과 함께 이전 식민지적 국가들에서의 급속한 사회적 변혁들을 통한 도전들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동참하기 위한 기회로서 파악되게 되었다. 서구의 산업국가들의 문제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3세계군의 국가들의 교회들이 대거 WCC에 동참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 윤리적 논거점으로 등장한 “역사”의 개념이 더욱 구체적이고 강력한 추동력을 얻게 되었다. 이들 신생국가들의 민족국가 형성의 주요한 목표가 되었던 민족의 자주와 독립은 단순히 서구 식민지 세력들로부터의 해방으로만 이해되지 않고 하나님의 해방하시는 역사경륜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서구 식민지 국가들의 신식민지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이론으로서 “종속이론”의 신학적 발전은 해방신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민중들의 역사참여를 통한 사회변혁이 신학의 중심적 논제로 떠오르면서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쳣던 것이다.
   1968년을 기점으로 한 과도기의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의 패러다임들
1968년 웁살라 대회는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에서 하나의 과도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때까지는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의 문제가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의 관심의 중심을 형성했었다. 이때 가장 강조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그의 백성들의 일치 그리고 증언과 봉사의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1968년 대회에서는 앞서도 지적한 바이지만 그리스 중심적 보편주의라고 하는 교회내적 문제를 넘어서서 전체 역사의 문제와 관련된 “인류의 갱신과 일치”가 문제였다.  말하자면 단순히 그리스도 교회들의 갱신이나 그리스도 교회들의 일치가 아니라 그 차원을 훨씬 넘어 서서 “인류”의 일치가 문제되었다. 여기서 강조점은 우선 세계종교들과의 대화(Dialog mit den Weltreligionen)에 모아졌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 이래 그 동안의 승리주의적 선교정책을 통해서 타종교를 극복하고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한다는 생각을 포기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이들 세계종교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 인류의 평화문제들과 함께 당면한 빈곤의 문제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주어진 두드러진 강조점은 개발의 문제였다. 이 문제는 제3세계의 심각한 빈곤의 문제들과 연관된다. 빈곤의 문제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등장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들 국가들이 미개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확신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대회 이후 여러 지역의 에큐메니칼 총회들과 협의회들에서는 개발(Development)의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했었다. 이러한 신학적 교회적 문제는 당시 자본주의 세계의 과도한 자본의 축적의 처리와 함께 저개발 국가들을 시장화하려는 전략과 맞물리면서 활발하게 다루어졌다. 그 결과들은 제3세계들의 심각한 종속화와 함께 외채문제 등을 야기 시켰으며 따라서 70년대에 들어와서는 개밡의 문제는 더 이상 신학적 주제가 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들과 함께 웁살라 총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또 하나의 논제는 신앙, 과학, 기술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여기서는 과학기술지배하에 있는 오늘날의 세계의 제반문제들, 특히 과학기술을 통한 지배의 문제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다루어진다.
  
웁살라 대회에서 다루어진 중심적 주제들 즉 타종교와의 대화, 개발의 문제 그리고 신앙과 과학기술의 문제들이 한계상황에 부딛치게 되고 더 이상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실질적인 문제들이 되지 못한 이유들을 들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이전의 패러다임인 “그리스도 중심주의” 혹은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는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와 협력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불가피하게 종교적 다원주의라고 하는 문제와 충돌하게 된다. 이것은 다시금 1968년 이전의 패러다임을 붕괴시키는 것이었고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종교다원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둘째는 남북간의 갈등이라고 세계에 대한 대칭적 이해는 기독교적 보편주의와 “하나의 세계”라고 하는 에큐메니칼적 비전과 대립된다. 즉 통일된 인류라고 하는 전망은 가난한 자들과 주변 실존자들이라는 관점 즉 “밑으로부터”의 전망과는 모순된다.
셋째 남북갈등에서의 대칭적 권력구조들과 생태학적 위기의 파급효과들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구속사적 틀이 깨어진다. 지배자들의 역사와 피지배자들의 역사가 대립된다. 따라서 역사들의 일치는 단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의 빛에서 “종말로부터의 일치”로서 파악된다. 여기에서 다시금 역사와 종말론의 관계라고 하는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넷째 인류의 일치에 봉사하기 위한 교회의 일치라고 하는 교회론적 중심개념은 인종주의, 성파별주의, 착취 등 인류의 깊은 균열에 직면해서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모순들에 직면하면서 이러한 개념들 혹은 패러다임들은 새로운 신학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이 바로 “정의를 위한 투쟁”(Kampf für Gerechtigkeit)과 “창조의 보전”(Bewahrung der Schöpfung)이라고 하는 개념들이다.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정의를 위한 투쟁”은 사실상 인류의 진정한 갱신을 위해서는 인류의 통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지구적 차원에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한 창조의 보전이라고 하는 개념은 좀더 넓은 차원에서 인류의 일치를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상호 대립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사실상 1968년도의 웁살라 대회의 패러다임들은 별로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콘라드 라이저는 그의 책에서 당시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사회윤리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라면 “하나님의 집”(Oikos Gottes) 혹은 하나님의 살림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도식화 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집 혹은 하나님의 살림살이라고 하는 개념은 바울의 “몸”의 개념(로마서 12장과 고린도 전서 12장)의 해석으로서 일종의 연방신학의 상호적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살림살이라고 하는 개념은 연대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한 유비인데 전 지구적 체제라고 하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정의를 위한 투쟁과 자연의 보전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역동적 관계현실”(dynamische Beziehungswirklichkeit)로서 이해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재를 성령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본 랑게의 해석은 이와 관련해 볼 때 가정 적절한 신학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랑게는 몰트만과 보프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영감을 받아서 하나님의 살림의 개념을 “삼위일체의 사회적 해석”의 틀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 혹은 살림살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을 통해서 정의를 위한 투쟁을 통한 인류 사이의 연대성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연대성이 1968년 웁살라 대회에서 얻은 미래의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중요한 기초가 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그 다음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보다 구체적인 패러다임으로 발전되게 된다.

1968년 이후의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의 정향들

1968년 이후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에서의 쟁점들은 개발의 문제와 대립되는 성장의 한계의 문제였다. 제3세계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안되었던 “개발”이라는 도식은 사실상 이미 선진공업국들이 직면하고 있는 “성장의 한계”라고 하는 현실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곧 남북 갈등과 함께 생태학적 위기의 문제와 맞물리면서 이를 둘러싸고 심각한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서 1970년대에 와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윤리적 도식은 “정의롭고 참여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로 수정되어 나타났다. 이것은 이전의 이데올로기들의 고전적 대결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제는 1975년 세계교회협의회의 나이로비 총회에서 얻어진 다양한 자극들에 기초해서 1976년 WCC 중앙위원회가 이후에 역점을 두고 실행할 프로그람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 역시 지향하려고 하는 목표로서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문제에 들어가면 다양한 난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이러한 패러다임은 다분히 유럽과 북미교회들의 관점을 지배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종교다원 사회에 살고 있는 아시아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유럽의 전통을 통해서 주어졌던 길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고 또 가야 한다.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족국가 형성”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자 한다. 남이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식민지적 상황에서 야기되는 심각한 갈등들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서구 교회들과 제3세계 교회들 사이의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갈등들이 내재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선진공업국과 저개발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단순히 윤리적 도전이 아니고 교회들 사이의 에큐메니칼 운동 내에서의 갈등으로서 교회론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발문제만을 예를 들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고찰해 보자. 우선 사람들은 세계개발을 위한 책임을 포기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서구 사회의 모델에 따른 개발은 이미 그 한계에 달했고 또 장차 환경문제 등 보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선진공업국과 저개발국들 사이의 개발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 적절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러한 개발의 문제가 인류의 갱신과 일치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하는 데 대해서 회의가 제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의 일치는 오히려 불의와 불평와, 착취와 전쟁의 종식을 통한 보다 역동적 방식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오게 된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던 위기들은 자연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기초한 수렴이론은 무용지물이 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사실상 1960년대 말 이후부터 국제적 금융체제와 정보통신망에서 뿐만 아니라, 다국적 기업및 세계무역을 통해서 세계화 혹은 지구화(Globalisierung)가 강력하게 추구됨으로써 WCC가 추구했던 세계사회가 급속하게 실현되었지만 이것은 권력과 금력 그리고 기술을 가진 나라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실상 WCC까 강력히 추구했던 인류의 일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상호의존성이 강화되었지만 주변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전통적 삶의 형식들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이들 나라들의 국민경제, 정치체제와 문화적 정체성은 더욱 압박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빈곤의 문제도 전혀 해결되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따라서 하나의 세계에서 하나의 교회라고 하는 비전은 ‘아래로부터’라고 하는 전망으로부터 제기된 비판을 통해서 내적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에 직면해서 1971년 독일의 뢰벤(Loewen)에서 열렸던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교회의 일치 나아가서 세계의 일치를 위한 대안으로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명제들을 제시한다. 즉 교회의 일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세계에서 정의를 위한 투쟁”, “우리 시대의 타종교들과의 만남”,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한 투쟁”, “사회에서의 장애자들을 위한 지원” 그리고 “문화적 차이들의 존중”을 에큐메니칼 운동이 실천프로그람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가지 논제들은 사실상 하나의 세계에서 하나의 교회를 목표로 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와 관련해서 보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이것은 세계사회형성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갈등영역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들은 매우 역동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일치 혹은 세계의 일치를 보고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남은 과제는 각 대륙의 특수한 상황에 있는 교회들 사이의 합의점 도출과 함께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회원교회들 사이에서 의견일치의 도달이었다.
실용주의적 현실주의(Paul Abrecht)
아브렉히트(P. Abrecht)는 지난 40년간(1948-1988)의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의 주된 흐름들을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창설된 해인 1948부터 웁살라 대회가 열렸던 1968년까지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pragmatischer Realismus)가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을 지배했고 1968-1988년까지는 “해방의 에큐메니칼 운동” (Befreiungsökumene)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 전반부를 다시 두 단계로 나눈다. 즉 1948년부터 1961년까지는 “책임사회론”(Responsible Society)이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의 중심적 명제가 되었다. 그리고 1962년부터 1968년 사이에는 이러한 책임 사회론은 다양한 색채와 내용을 가지고 발전되었다.
1) 책임사회론(1948-1961)
이 책임사회론은 1937년 옥스포드에서 열린 Life and Work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30년대의 심각한 세계적 상황들. 미국의 경제적 공항과 독일의 나치의 등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주의 등의 등장과 이들의 권력오용과 전체주의가 가져온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를 기독교 정신에 상응하는 사회로서 상정했었다. 이러한  책임사회론이 “개방적 사회”와 “공동체적 사회”를 동시에 추구하겠다고 하는 변증법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잉태된 책임사회론은 1948년 암스텔담에서 열린 WCC 창설총회에서 당시 냉전체제와 더불어 나타난 동서의 이념갈등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극복하는 문제와 결부시켰다. 말하자면 인권이 존중되는 자유로운 사회는 권력의 민주적 통제가 가능하고 사회적 부의 분배를 위한 적절한 구조들을 갖춘 책임적으로 규정된 사회가 될 때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사회론의 또 다른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중간공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성공회 평신도 신학자 올담에 의해서 1948년에 제안되었던 이 중간공리 이론은 이러한 책임사회론을 위한 사회윤리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올담의 “중간공리”는 미국의 실용주의와 영국의 경제학자 토니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올담의 중간공리론은 성서적 신앙의 기본명제들과 현실적 세계의 제반 문제들을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윤리적 준거들을 도식화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윤리적 정황의 시간 및 상황속박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성서적 신앙의 기본명제들을 무시간적이고 탈상황적인 윤리적 준거로 관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 다음으로는 다양한 합리적 사고들과의 대화와 함께 현대의 특성인 인식적 요소들과 의지적 요소들 사이를 매개할 필요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의사결정과정들을 위한 토론에 과학, 경제, 정치 분야의 전문적 “평신도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올담에 의하면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 변화된 조건들 하에서는 우선 교회는 사회와 그 기구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경험들, 문제의식 그리고 지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서만 윤리적 정향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올담은 당시 기독교적 삶의 이해와 세속화된 사회의 도덕적 규범들 사이의 심각한 모순을 발견하고 대화를 통해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책임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따르면 평신도 전문가들의 참여를 통한 구체적 문제설정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바로 책임적 사회론의 핵심적 사안이 되었다. 이 후 평신도 신학의 문제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평에 등장한다.
 
2) 책임사횐의 변조들(1962-1968)
1955-1959년 사이의 교회와 사회위원회(Church and Society)는 “급격한 사회변혁의 영역들에 대한 공동의 기독교적 책임성”이라는 연구를 통해서 “책임적 사회론”의 모델형성을 위한 다양한 대안들을 모색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상황은 이전의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과 자주성의 강화를 들 수 있다.  그 결과 이른바 제3세계 교회들의 WCC안에서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여기서부터 제기된 문제들은 동서의 이념적 갈등의 문제와 더불어 남북의 갈등의 문제가 점차 사회윤리적 주제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때 세계교회협의가 직면했던 문제는 오늘날의 복지국가의 모델을 목표로 하여 사회정의와 더불어 자유의 올바른 사용이 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그리스도교회가 어떻게 책임적으로 행동할 수 잇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서 1966년 제네바에서 교회와 사회를 위한 세계교회협의가 모였었다.  이 때 보다 큰 사회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미의 참석자들에게서 이러한 책임사회론의 모델에 대한 이의제기가 나왔다. 그러나 여기서 남미의 참석자들의 목소리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협의회는 이제까지의 신학적 노선을 견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일종의 중도적 노선을 선택했다. 즉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혹은 시장경제냐, 계회경제냐, 또는 복지 국가형이나 혼합형 경제냐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체제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의 자세로서 개개 그리스도인들이 소속하고 있는 나라의 경제체제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적 행동이란 바로 경제적 성장을 지원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열매들을 정의롭게 분배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응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의 실현이다.
이러한 노선에서 1968년의 웁살라 대회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개발과 경제성장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는 전세계적인 책임사회”라고 하는 개념으로 구체화해서 도식화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이제까지의 정향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약간 확대한 것이다.  여기서 인류라고 하는 전망이 점차 중요해 졌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대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의미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책임사회론에서 중요한 방법론적 전거가 되고 있는 사회에서의 전문가들과 책임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통한 구조들과 제도들의 개선이 실현될 때 인간다운 발전이 가능하다는 논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3) 해방적 에큐메니칼 운동(Ulich Duchrow)
그런데  P. Abrecht는 1969년을 기점으로 해서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정향을 지배한 것은 소위 “해방적 에큐메니칼 운동”(Befreiungsökumene)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자본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결국 ‘교회와 사회위원회‘와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에 의해서 대변되던 입장을 강력하게 밀어부쳣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에서 새로운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의 세계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요인들로서는 아프리카에서의 성공적인 해방운동들, 월남에서의 미국의 패전, 남미에서의 사회적 긴장들과 게릴라 전쟁들, 중국의 문화혁명 그리고 1968년에 마틴 루터 킹목사의 살해와 더불어 절정에 달했던 미국의 민권운동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방적 에큐메니칼 운동은 좀더 구체적으로는 이 울리히 두크로(Ulrich Duchrow)에 의하면 1970년 CCPD의 설립과 1973년도 방콕의 선교대회를 계기로 해서 일어난 “의식화 과정”을 통해서 본격적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하는 교회”(Kirche in Solidarität mit den Armen)라는 명제를 통해서 교회는 이제까지의 국가적, 문화적, 경제적 세력들에 순응하던 교회의 콘스탄틴적 형식들과 신학적으로 결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P. Abrecht에 의하면 CCPD와 더불어 교회와 사회위원회가 주관했던 1974년의 부카레스Bukarest) 협의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명제에 서 있던 해방적 에큐메니칼 운동과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의 대립 사이에서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것이 곧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just and sustainable society)라는 명제다. 그러나 이러한 논제에서는 서구 산업사회의 미래가능성들을 위협하고 있는 전 지구적 위협들이라는 차원에 비중이 주어짐으로써 결국은 미래지향적 문제해결을 추구했던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의 명제가 강력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1975년 나이로비 총회에서 행해진 Charles Birch의 강연과 와 1979년 보스톤에서 열렸던 신앙, 과학 그리고 미래 협의회에서도 다시 나타났다. 여기서는 과학과 기술이 희망의 담지자며 가능한 오용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야 말로 세계적 위기를 분석할 수 있는 수단이며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울리히 두크로는 1970년의 CCPD설립과 그 활동을 보다 더 해방적 에큐메니칼적 과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본회퍼의 신학과 바르멘 신학선언을 배경으로 하고 핵무장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불의한 경제체제에 순응하는 것도 신앙고백의 문제로 봄으로써  Abrecht와 같이 그동안의 교회와 사회위원회가 강조점을 두었던 기술비판, 환경위기 등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창설시의 책임적 사회론으로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해방적 에큐메니칼 이라는 기본 틀에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이러한 CCPD의 해방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을 확정해준 대회로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총회는 가난한 자들의 교회라고 하는 명제를 분명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1973년의 방콕의 “오늘의 구원”을 주제로 한 세계선교대회와 1980년의 멜본의 선교대회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을 고려할 때 오늘날의 세계경제에서 주변부국가들은 더욱더 중심부 선진 공업 국가들에 의존적으로 되어가고 있으며 이것은 주변부 국가들의 민족경제와 정치적 구조들을 파괴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매일 매일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두크로는 WCC의 중점 프로그램인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의 추구”(Suche nach einer gerechten, partizipatorischen and überlbensfähigen Gesellschaft= JPSS)와 마찬가지로 1975년 나이로비 총회에에서 자극을 받은 것으로서 다국적 기업에 대한 연구 역시 이러한 해방적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진행된 것으로 본다. 이것은 그동안 성장과 현대화를 개발의 중요한 준거점으로 잡고 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제3의 길을 찾으려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JJPS는 두크로에 의하면 오늘과 내일의 세대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위한 정의, 참여 그리고 평화가 보장되는 경제적 정치적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사회윤리학의 새로운 도식으로서 “삶을 위한 선택”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의 실용주의적 현실주의라는 논제와와 해방신학적 관점에 서 있는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논제 사이의 갈등은 그렇게 쉽사리 해결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와 인류의 일치를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찾으려는 인사들과 보다 현실주의적인 접근을 통해서 문제해결에 접근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화해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이 보였다. 여기에서 1968년도 이후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우유부단성이 다시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의 대립적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한 도식이 바로 “정의, 참여, 지속가능한 사회”(JPSS)라는 도식이었다.  이러한 도식에 도달하게 된 것은 에큐메니칼 운동내부에서 해방신학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나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이나 모두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에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JPSS라고 하는 도식은 이미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첫 결정체”였다.  여기에서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라고 하는 목표설정과 정의를 위한 투쟁과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의 참여라고 하는 목표가 상호 접합점을 발견하는 것 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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