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998년 심원 안병무를 회상하고 추모하는 글을 모아 출판한 책 “갈릴레아의 예수와 안병무”에는 생전에 그와 가까이 지냈던 57명의 국내외 학자, 친지, 제자들의 글들이 실려 있다. 그 글들의 내용을 다 읽지는 못했으나 그 제목들을 살펴보면 특별히 안병무의 삶을 잘 표현해 주는 것들이 눈에 띤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제목들이 안병무의 면모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식인의 典範”(이문영),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希望”(위르겐 몰트만), “歷史와 證言을 깨우쳐준 스승”(안재웅), “民衆神學的 예수 상의 再發見”(김진호), “歷史의 現場 한가운데서 산 求道者”(손규태) 등등이 그것들이다. 대부분의 주제들은 “내가 만난 안병무”니 “나의 스승 안병무” 등으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그 내용들을 일어보지 않고서는 그 주제를 잘 알 수 없지만 거기에서도 대개는 위에서 제시한 주제들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서 제시된 안병무의 상은 크게 봐서 성서신학자 혹은 民衆神學者로서, 역사의 현장에서 투쟁의 同志로서, 그리고 다정하면서도 엄격했던 스승으로서 묘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안병무는 마치 교회와는 무관했던 분으로 보기 쉽다. 왜냐하면 그 책에서는 그를 목회자로서 그리고 설교자로서 회상하거나 추모하는 글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관련했던 향린교회와 관련해서 그를 회상하거나 추모하는 글도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물론 그 책의 출판목적이 교회나 목회활동과 관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단지 예외적으로 안병무를 기독교 공동체 혹은 교회와 관련해서 회상하고 추모한 글은 “예수의 얼굴을 닮은 교회”(김경호)와 “안병무 선생님과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가 전부이다. 이렇게 보면 김경호 목사가 지적하듯이 안병무 선생님은 교회에 대해서는 흔히 無關心했거나, 심지어 “敵對的”이기까지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는 전통적인 교회에 대해서는 적대감까지를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대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는 집단이라고 항상 생각하신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추구하고 실험한 것이나 함석헌 등 무교회주의적 성향을 띤 분들과 깊은 친교를 맺은 것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특히 한국에서 70년대 초부터 階層的으로 구형된 제도교회의 聖職者 中心主義나 企業型으로 經營되는 대교회주의, 자본주의적 경영원리를 택하고 있는 교회성장주의 등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왜곡된 기성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그로 하여금 기성교회들을 멀리하고 때로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지 안병무 선생님은 향린교회를 비롯해서 수많은 교회들에서 설교를 했지만 그는 按手를 받고 성직자가 되지 않았다. 그는 또 외국에까지 나가서 전문적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또 교단의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많은 후학들을 가르쳐서 성직자가 되게 했지만 자신은 끝까지 平信徒로 남았다. 그는 한신대학교에서 신학과 교수는 모두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지만 끝끝내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는 많은 기독교 단체들에서 성서와 신학에 관한 강연들을 했지만 그는 어떤 기독교적 직책이나 직무를 맡은 분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했다.
이렇게 기존의 제도적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을 가졌었지만 안병무는 놀랍게도 평생동안 뜻을 같이 하는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3개의 교회(향린, 한백, 강남향린)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53년 한국전쟁 이후 폐허와 좌절 속에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실험하기 위해서 믿음의 동지들과 공동체 생활을 목표로 향린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長空 金在俊은 善隣會 동지들과 함께 “나라의 再建”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을 때 안병무는 薌隣 동지들과 함께 이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델을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설계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연한 관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평신도 설교자로서 이 공동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다가 좀더 신학적으로 무장하고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를 체험하기 위해서 서독으로 떠났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독일에서는 물론 프랑스와 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오랜 전통을 가진 수도원 공동체 등을 둘러봤다. 이러한 관심은 계속되어 그는 1970년대 중반 민중신학을 시작하면서 민중시대의 민중교회를 위한 실험의 장으로서 다시 한백교회 창립에 동참했다. 이렇게 하면서 안병무는 1993년에는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기성교회로 나아가고 있는 향린교회를 분가시켜 강남향린 교회를 설립하여 제도화된 대교회주의를 극복하려는 운동에 동참했다.
사람이 일생동안 3개의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교회들이 하듯이 교회에서 넘쳐나는 헌금을 가지고 은행이나 대기업이 지점과 지사를 내듯이 지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큰 교회들처럼 돈이 넘쳐 나서 담임성직자의 권위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지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달리 바른 교회의 상 즉 “예수의 얼굴을 바로 그리려는 교회”를 설립하는 일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안병무는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했다거나 적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서구 2천년 교회사에서 제도적 교회들이 시대마다 자기편의에 따라서 예수의 상을 제멋대로 일그러뜨렸고, 오늘날 한국 교회들에서 온갖 부조리와 모순들이 발견되어도 그는 “교회” 자체를 버리거나 내던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는 왜 이 교회에 대해서 애착을 가졌었고 이 문제를 놓고 씨름했는가? 그는 교회의 개혁을 시도했는가 아니면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기대했었는가? 그가 개혁자였다면 그 목표는 어떤 것이었을까? 만일 그가 기성 교회를 포기하고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기대했다면 그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도날드 베인톤이 루터의 전기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를 교회 되게 하려고” 노력한 한국의 “교회(종교)의 개혁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는 개혁자로서보다는 새로운 모델의 교회의 출현을 기대했고 실험했던 교회의 개혁자 그 이상 즉 “새로운 교회의 創設者”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는 이 “새로운 교회상”을 설계하고 실험하기 위해서 그 模像으로서 “예수의 모습”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그의 윤리학에서 “形成의 倫理學”(Gestalstungsethik)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윤리학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Gestalt Christi)을 “닮아 가는 것”(Gestaltung)이라고 주장했듯이 안병무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공동체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모되기를 희망했고 그 일을 위해서 그는 특별히 “예수 硏究” 즉 그리스론에 연구를 집중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한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뺀 조직, 그리스도의 뜻을 뺀 조직, 그리스도를 뺀 관리, 지혜, 그리스도를 뺀 무리... 이것은 벌써 교회의 本質에서 떠났으며 이미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인간관계, 인간집단은 사실상 냉철하게 비판해 보면 그리스도 교회라는 간판 밑에서 영위되는 기만적인 단체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들을 개혁하려는 생각을 등한시한다.” 이렇게 안병무가 일생 동안 聖書硏究 특히 예수연구에 집중한 것은 바로 교회의 모습 즉 예수의 모습을 닮은 교회를 추구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안병무가 그리스도 이해는 곧 敎會論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리스도 이해 없이는 그의 교회이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안병무의 부정적 교회이해
안병무 선생님은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교회이해 아니 “교회의 교회됨”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안병무의 교회이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그리스도론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생동안 교회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보다는 예수 이해 즉 그리스도론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병무는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수많은 단행본 서적들과 체계적 논문들을 쓰고 있지만 傳統的 分類方式에 따라서 “교회론”(Ekklesiologie)을 전개했다고 볼만한 체계적 논문들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병무는 교회론을 그리스도론의 부록과 같이 다루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도 그가 어떤 理論的이고 體系的이고 學術的인 意味에서가 아니라 그가 관련하고 있던 현실의 교회 즉 향린교회와 한국교회 일반을 고려하면서 교회의 당위적 상을 서술하고 있다.
전통적 분류방식에 따르면 교회론의 주제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 설명된다. 여기서는 獨逸의 저명한 신학자 한스 퀭의 分類法을 대표적으로 선택했다. 1. 신앙의 對象으로서 교회, 2. 교회의 起源, 3. 교회와 하나님 나라, 4. 하나님의 百姓으로서 교회, 5. 성령의 被造物로서 교회, 6.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7. 교회의 一致, 8. 교회의 普遍性과 거룩성과 使徒性, 9. 교회의 職務들, 10 교회와 세계 등. 안병무가 교회와 관련해서 쓴 글들을 읽어보면 카톨릭 교회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8항 즉 교회의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주제들이 매우 단편적이긴 하지만 취급되고 있다. 따라서 안병무 성서학자이면서도 조직신학적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교회론의 내용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고 하는데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그가 성서학 그것도 신약성서학에 연구를 집중하고 있으면서도 비록 체계적 논문들로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본질과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연구하고 관심 했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안병무가 오늘날 기존의 전통적 교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해의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지향하고자 했던 교회상을 再構成하는데 기초로 삼고자 한다. 안병무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리스도를 뺀 교회”가 오늘날 어떤 형태로 그 모습을 나타내는가를 먼저 해명해 보자는 것이다.
우선 필자는 안병무의 “그리스도를 뺀 교회”의 상을 교회내적 문제로서 왜곡된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교회의 모습을 말하고 있고 또 교회외적 문제로서 왜곡된 교회의 모습을 다시 두 가지 범주로 다루고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그 왜곡된 교회의 상의 범주를 더 확대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 네 가지 범주에 국한하고 다른 범주들은 부수적 범주로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교회내적 문제로서 왜곡된 교회상
1) 교리에 속박된 교회
교리에 속박된 교회에 대한 안병무의 비판의 출발점은 성서적 진리와 메시지로부터의 일탈을 들고 있다. 안병무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에서의 신학교육과 신학운동과 관련해서 “성서학이 교리학에 捕虜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것의 극복이 없이는 진정한 신학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했었다. 왜냐하면 성서의 메시지가 카톨릭의 경우 敎皇의 권위에 굴복 당했고 개신교 특히 正統主義나 根本主義의 경우 교리의 권위에 압도당함으로써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교회가 성서 위에 군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 및 성서해석이 이러한 교리체계와 그것의 장악자에게 굴복 당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종교개혁 정신 즉 “성서만으로”(sola fidei)의 정신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1969년도 서울문리대에서 한 강연 “宗敎告發”에서 특히 교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법황의 절대권, 교회제도, 교리의 절대화 그것을 우상으로 선언하고 출발한 것이 신교이다. 그것은 옳은 출발이다. 하늘 아래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지상명령을 받아들인 결단이다. 그러나 그렇게 출발한 신교는 여러 가지 또 다른 偶像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첫째는 聖書主義, 둘째는 敎派主義, 셋째는 개인의 宗敎經驗의 絶對化 등을 신교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우상으로 말할 수 있다... 둘째는 각 교파의 교리지상주의이다.”
안병무에 의하면 카톨릭의 교리주의는 교황권을 강화해서 그만이 “바른 성서해석을 할 수 있는 자”로 규정함으로써 교황에게 성서해석의 獨占權을 줌으로써 제반 모순을 가졌으나 개신교의 교리주의는 우선 카톨릭의 개신교적 修正版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주의”(Biblizismus)를 내세워서 성서를 교황으로 만들고 모든 삶의 판단에 준거로 삼아 오히려 현실인식을 왜곡하거나 불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교리주의는 개신교 역사에서 다양한 개혁방향에 따라서 교파를 분열시키고 동시에 서로 적대시하는 역사적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2. 교권에 속박된 교회
교권에 속박된 교회에 대한 안병무의 비판의 출발점 역시 성서의 진리와 메시지로부터의 일탈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서에 나타나 있는 “終末論的 意識으로 세워진 초기의 공동체”는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前衛隊로서 특정한 조직이나 구성원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는 공동체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 공동체는 임박하게 도래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며 가진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식탁을 같이 나누던 공동체였다(행전 2:42-47; 4:32-37)).
예수의 再臨(Parusie)이 지연되고 종말론적 공동체가 가진 임박한 재림의 긴장이 이완되자 이러한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가 붕괴될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행전 5:1-11). 이러한 원시 공동체의 붕괴의 자리가 바로 교회의 출현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회는 안선생님에 따르면 예수가 “세운 일도 세우려고도 안 했었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2세기초에 와서 다양한 형태의 祭儀가 발달하면서 그것을 집행할 직무를 받은 聖職階級과 平信徒의 구별이 등장한다. 교리의 수호자며, 제의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仲保者요 교회의 治理者인 主敎 밑에 계층화된 성직 계급이 등장하면서 평신도(laici)들은 교회에서 더 이상 主體가 되지 못하고 대상화된다.
앞서 서론적 부분에서도 언급했지만 안병무 선생님은 그의 교회이해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불변의 질서인 按手(ordo)에 의한 성직계급이 지배하는 교회는 예수가 지향했던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 共同體의 信仰告白”이란 글에서 “이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높은 자리를 포기하고 인간의 종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는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자기 사명 즉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했다는 것이다... 이로서 예수공동체의 고백은 十字架라는 한 마디로 집약될 것이다... 이 운동은 전형적인 民衆運動이다.” 안병무에 의하면 주 후 300년경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으로 인정된 종교로 등장하고 박해받던 종교가 박해하는 종교로 바뀌게 되면서 이러한 성직계급은 교회 안에서 지배력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정치세력과 결합됨으로써 하나의 지배계급으로 둔갑하여 더욱더 복음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초대교회가 이상했던 평등공동체는 점차 성직계급이 주도하는 제도적 교회로 뒤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성직계급은 중세기에는 주로 유럽의 명문 가문들에게 독점되었었다(대표적인 예로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이들 성직 계급은 그 특권과 부를 현세에서 누릴 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 연장하기 위해서 자손들에게 承繼하기 위해서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저질렀었다. 이런 현상이 한국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이 땅에서도 성직주의가 가히 팟시즘적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Hanfried Müller).
2. 교회외적 문제로서 왜곡된 교회상
1) 체제 안주적 기득권의 교회
다음으로 안병무는 교회가 사회 혹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體制와 富에 안주하는 기득권 세력의 교회가 되었다는 점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점은 특히 주 후 4세기초에 있었던 콘스탄틴적 전환(Konstantinische Wende)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로마 제국 안의 유일하게 국가에 의해서 공인된 종교로 인정받음으로써 사실상 누가복음 기자의 꿈과 전략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누가 22:24-27).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는 300년이라는 짧은 발전기간에 그 본래의 목표를 상실하고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강력한 정치세력과 동맹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된 역사적 결정이 기독교가 정치종교로 전락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기독교가 그 본래의 궤도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는 더 이상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는 “時間의 宗敎”(혹은 카이로스의 종교)가 아니라 이 땅에 안주하는 “空間의 宗敎”가 된 것이다. 안병무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존재한다는 데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 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이다. 시간(역사)의 특징은 志向性이다. 계속 앞으로 나간다. 이에 대해 공간은 정착성이 그 특성이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공간은 언제나 끌어 앉힌다. 시간은 계속 낡은 것(과거)에서 탈출하게 한다. 그러나 공간은 자리를 마련하고 그것을 거점으로 정착하게 함으로써 과거의 줄에 매인 채 그것을 조금씩 확대 연장하게 된다. 시간은 이동하게 한다. 따라서 그것은 改革(Reform), 變革(Transform)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따라서 공간은 정착, 안정 마침내 보수를 강요함으로써 일정한 틀에 가둡니다.” 이렇게 공간에 속박된 카톨릭 교회에서는 시간의 내용인 종말론은 蒸發하고 정치체제에 따라서 조직이 강화되고 성직제도는 더욱 계층적으로 분화된다. 이러한 체제 안주적 교회가 종교개혁을 맞이하지만 반로마 카톨릭 동맹(Torgauer League)인 독일 영주들의 지원 하에 성공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곧 다시 공간적 교회 즉 “地方領主들의 교회”(Landeskirche)가 됨으로써 기득권 세력과 하나가 되어 부와 영예를 누린다. 카톨릭 교회는 중세 봉건영주들의 교회로, 서구의 개신교회는 그 이후에 등장한 부루좌 사회의 부자들의 교회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본주의 체제에 안주함으로써 그 공간을 확실하게 확보해 오고 있다. “요는 교회의 體質改善이 문제이다. 중세기 이후부터 고수한 체제와 부에 안주하여 좀처럼 그 점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문제는 점점 커져서 민중의 원한의 대상까지 될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의 부가 저들을 강화시키는 것이며, 시대의 지각생이 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와 부에 안주하는 교회는 그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 동시에 이런 교회들은 필연적으로 점차 대형 교회를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교회의 역사가 오래된 구라파나 미국 등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고 최근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부루좌들을 축복하고 안위하는 교회, 그들에게서 얻은 부와 영예를 누리는 교회들에서 우리는 기독교와 자본가들의 동맹을 본다.
2) 자기 완결적 게토화 된 교회
이렇게 임박한 종말론적 시간성을 상실하고 정치적 경제적 체제에서 확고한 공간을 차지한 교회는 이제는 더 이상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前衛隊로서 존재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콘스탄틴적 전환 이후부터 “현존하는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다”라는 命題를 내걸고 자기는 이미 완결된 존재, 더 이상 미래의 시간의 차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 확인했다. 이것은 이미 교회가 그리스도의 도래를 통해서 완성될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더 이상 기대하거나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어떤 미래의 종말론적 공동체를 포기했기 때문에 항구적인 조직과 체제를 완성하고 세상의 제왕들과 권력을 다투게 되었다. 교회는 제왕을 능가하는 교황제를 도입하고 그를 정점으로 하는 조직체를 만들었다. 이 조직체를 뒷받침하는 제반 교회법률을 제정하고 성직자들의 위계를 관료체제와 같이 조직하고 강화해 나갔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초기에는 세상정권과 협력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점차 경쟁자로 나타났고 마침내 교황권이 제왕권 위에 군림하는 시대가 도래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1077년 1월 25-28일 북이탈리아의 카노사(Canossa)에서 시작된다. 교황에 의해서 파문 당했던 독일 황제 하인리히(Heinrich) IV세는 여성 귀족의 별장성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교황 그레고리 VII세를 찾아가서 성채 밖에서 눈 위에 무릎을 꿇고 3일 동안 빌고 나서야 용서를 받고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교황이 통치하던 교회국가(Kirchenstaat)는 이탈리아의 중부지방 대부분을 차지했었고 이러한 교황의 세력은 15세기에 들어와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분열과 강력한 절대군주국가가 형성되기까지 지속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회와 정치의 종합이 깨어진 다음 개신교회에서는 교회의 자기 완결적 주장을 이른바 정교분리의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지키려고 했다. 이것은 이른바 루터의 두 왕국론(Zwei Reich Lehre)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정교분리(Separation)가 아니라 정교구별(Distinction)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 어쨌든 최근까지도 보수적인 루터파들은 그것을 정교분리로 해석해서 히틀러의 제3제국의 만행에 대해서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내세워서 600만 명의 유태인 학살에 대해 눈을 감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안병무는 다음과 같이 정교분리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정교분리)만을 오늘날에 이동하여 이원적 설법 위에서 사회에 대한 자기의 책임회피를 정당화하는 일을 제발 그만 두자. 만일 교회가 권력과 야합해서 어떤 이득을 노렸거나 결탁이 되어 있다면 정교분리를 끝내 황금률처럼 부르짖으려는 자는 자기개혁의 슬로건으로 이것을 내걸 수 있다.”
안병무에 따르면 이러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이른바 탈정치적 교회들은 또한 게토화 된 교회로 발전해 나감으로써 세상적인 것과는 담을 쌓았다. “우리 자신의 개혁에 시급한 것은 스스로 만든 달팽이 껍질 같은 게토화된 자기방어의 갑옷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날이 갈수록 그것은 비겁한 자의 자기방어의 방패가 되고 비겁한 자들이 그 안에 안주하기 시작하므로 민족의 수난과 유리된 군살 같은 것이 되며, 3.1의거와 같은 의거가 민족사에 잊을 수 없는 일익을 당당했는데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사와 관계없이 이질적인 종파라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체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스스로 폐쇄적이 됨으로써 한국 안에 있으면서 물위에 뜬 기름처럼 민족적 현실문제에 吾不關焉의 자세를 취한 긴 세월이 남겨준 인상이다.”
이러한 공간적으로 게토화 된 개신교회는 결과적으로는 이 세상과는 단절하고 피안적 교회로 나아간다는 것이 안병무의 생각이다. “교회는 영과 피안을 담당하고 정부는 육과 차안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관념상으로는 이분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현장은 차안뿐이다. 정권은 사실상 모든 것을 지배한다... 따라서 이 따위 이분법적 발상이나 제도는 서구 역사가 빚어낸 것이고 그리스도교와 아무 상관도 없다... 이 같은 이원론에 한국 교회는 크게 오염되어 파렴치하게 되었다.”
안병무는 교회가 세계와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중세 카톨릭 교회는 양자의 綜合모델을 택함으로써 정교유착을 가져왔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기득권 세력을 자처하게 됨으로써 복음의 본질로부터 이탈했다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개신교는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교회와 정치적 권력 사이의 철저한 斷切모델(정교분리)을 택함으로써 세상을 장망성으로 보고 그것과 담을 쌓고 오관불언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러 온 그리스도의 정신으로부터 일탈했다는 것이다. 이 두 모델들 가운데 전자는 차안에서 기득권자로서 자기완결의 길을 추구했고 후자는 피안에서 자기완결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통전된 교회
안병무는 이렇게 네 가지 범주에서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의 얼굴”을 왜곡시킨 교회의 상을 분석해 내고 거기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부정적 인식을 통해서 우리는 안병무가 지향했던 교회관의 그림자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부정은 이미 긍정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간략하게 안병무가 그리스도의 삶에 비추어서 지향했던 교회론 내지는 교회관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서 설명해 보겠다. 여기서는 안병무의 교회관을 역사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생략하고 체계적 방식으로 개괄해 보고자 한다.
1.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초기 향린교회):
안병무는 향린교회를 창립할 때 이미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 연구를 통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그 후에 출현된 교회 특히 제도교회 사이에는 많은 모순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 같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관심은 체제화 된 교회 자체가 아니라 예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것도 교리체계로 옷 입은 그리스도보다는 ‘人間的’ 면모를 지닌 예수에게 더 집중되었다. 그는 사석에서 자신이 신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인간 예수”를 알아보기 위해서 라고 했다. 희랍철학으로 옷 입혀진 神人間의 모습을 한 초대 그리스도론이나 게르만의 騎士들의 관습에 근거한 代贖者 그리스도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는 처음부터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하며 그렇게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인간 예수가 어떤 사람인 가를 알기 원했다.
따라서 안병무는 예수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제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회 그리고 지난 2천년에 걸쳐 다양한 변용을 한 제도권 교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특히 일본의 內村鑑三과 그 계통의 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제도권 교회들의 제반 모순들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안병무가 일생 동안 多石 선생님이나 咸錫憲 선생님과 같은 제도권 그리스도인들과는 거리를 둔 분들과 깊은 인간적 관계를 맺고 사신 것에서도 그 점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서론적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안병무가 교회 그 자체를 부정하는 無敎會主義者나 反敎會主義者는 아니다. 그는 인간 예수와 그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195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와 폐허 한가운데서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서 인간다운 삶의 형식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자매형제들의 공동체적 삶이었다. 그는 개인주의를 악의 기원으로 보고 기득권을 포기한 사람들의 모임 그야말로 사랑의 공동체를 향린에서 실현해 보고자 했다. “이것(한국전쟁)을 몸소 경험한 20대 후반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制度敎會대로는 별 의미가 없다는 판단 아래 새로운 그리스도인 운동을 일으킬 것을 다짐하기 위해 전란 중에 한 장소에 모여 살며 祈禱와 聖書硏究로 마음을 다져왔다. 거기에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교회의 주역이 될 만한 사람들은 共同體 生活을 한다. 그럼으로써 부분적인 것이 아닌 전체의 삶을 바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공동체 회원들은 비록 각기 다른 직장을 가지고 한 곳에서 한 가마솥의 밥을 나누어 먹으며 사는 것이다.”
그는 이 운동에서 엄격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원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고 독일 등 개신교 국가에서 실천되고 있는 “兄弟姉妹團 운동”(Geschwesterschaft)의 모델을 택한 것으로 보이다. 왜냐하면 이런 운동들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독신으로 한 집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으나 여타의 회원들은 결혼도 하고 밖에서 거주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한 일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으로 세워진 향린교회가 점차 제도권 교회를 지향하게 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그는 문동환박사가 주관했던 새벽의 집 운동에 “親戚”자격으로 참여하면서 거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그 후에는 독일의 디아코니아 운동의 협력을 얻어서 한국디아코니아 姉妹會를 창설했던 것도 역시 안병무가 초기에 가졌던 꿈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운동을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지도한 안뱡무는 여기에 전념하기 위해서 다른 회원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으나 늦게까지 독신으로 지냄으로써 본을 보이려고 했었다.
2. 反聖職主義的 카리스마의 共同體:
안병무는 직업적 성직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를 전형적인 제도교회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향린교회를 창립할 때 목회자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지향했다. 196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평신도 신학운동과 평신도 교회운동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 안병무가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시작한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평신도가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牧會者에게 월급을 주고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 밖의 사람들은 무조건 수동적이 되거나 觀照者가 되는 그런 체제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될 수 없다.” 교회에서 직무를 받기 위한 敍品(혹은 按手)이 성직자를 평신도와 구별되는 요건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러한 안수(ordination)를 카톨릭에서와 같이 불변하는 神的 秩序(ordo)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신의 祝福(Segen)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성직자든지 평신도든지 교회 내에서 일정한 職務나 委託을 받을 때는 그 때마다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도 이 의식에서 축복(안수)을 할 수 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전통에서 안수의 의미이다.
안병무는 물론 극단적으로 성직제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身分的 區別이나 役割分擔을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이러한 신분적 혹은 역할 상의 구별이 성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신자들의 역할론, 즉 카리스마(恩賜)를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면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대상화되고 객체화되어 자신이 가진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안병무는 이러한 카리스마 즉 은사의 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의 일원, 교회의 肢體인 각 사람의 지식, 능력, 모든 소유는 자기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은혜 혹은 성령의 膳物(카리스마)임을 인정하는 것이다...모두는 똑같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그러나 技能은 다릅니다. 기능의 역할은 높은 자리, 낮은 자리가 아니라 성령의 선물, 은혜에서 위탁받은 역할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자세가 없으면 모르는 동안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잊게 된다.”
그래서 안병무는 그리스도교 “共同體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어떤 형태로거나 그리스도 戰線에 서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한 사람들은 따라서 주체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카리스마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3. 하나님 나라 지향적 전위대(아방가르트)인 교회
안병무는 교회를 지구상에 있는 어떤 완결된 기구가 아니라 종말론적 공동체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 목적이다. “예수는 교회를 만들지도 만들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안병무의 주장은 교회가 자기 완결적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再臨遲延으로 결국 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병무의 관심은 이런 교회를 완전히 폐기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다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前衛隊로 만드는 것이었다.
안병무는 이 일을 위해서는 우선 오늘날의 교회가 자기 진단 즉 현주소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에는 1천만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또 수 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들이 존재하며 100만 명 이상이 모이는 대 집회들이 열리고 있지만 이들이 사회변혁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이 땅의 교회가 예수의 대열에서 단절된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에 대해서 이 땅의 良識은 눌린 자의 인권을 위해 자기 몸을 내대는 한줌밖에 안 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정부들도 긴장한다. 그것은 우리 역사적 현실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에 개입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해도 그들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대의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意志와 實踐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政敎分離를 내세워서 세상과 담을 쌓고 달팽이 껍질 속에 안주함으로 스스로를 게토화 시키는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위대로 나설 때만 교회는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교회는 스스로 하느님의 나라라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것을 證據하는 공동체로 행동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완전히 하느님의 統治權이 지배하고 지금까지 있는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되는 창조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하느님의 나라의 시작이거나 부분도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교회는 이 땅에서 만물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낡은 세계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이 역사에 있는 前衛隊이다.”
안병무는 이러한 교회의 모델을 처음에는 세계교회협의회가 주창했던 하나님의 宣敎(Missio Dei) 신학과 “他者를 위한 교회”라는 본회퍼의 교회론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선교개념은 사실상 서구에서 啓蒙主義와 그 결과로서 世俗化 過程에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고 그 대신 人文主義 등 公共性의 영역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신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것을 宣敎運動으로 파악한데서 온 개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 즉 세상에서도 활동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본회퍼 식으로 이해하자면 교회는 곧 “他者를 위한 存在”를 말하며 그들이 일정한 신앙고백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타자를 위해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신학에서 교회는 현존하는 “可視的 敎會”(sichtbare Kirche) 뿐만 아니라 교회밖에 있는 “不可視的 교회”(unsichtbare Kirche)가 존재하며, 여기서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목표,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안병무는 부루좌 사회를 지나서 새로 등장하는 민중의 시대에서 이러한 교회의 선교와 하나님의 선교, “可視的 교회”와 “不可視的 敎會” 사이를 媒介하는 새로운 교회 모델로서 民衆敎會를 상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병무가 구상했던 민중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신자든지 불신자든지)의 공동체, 종말론적 공동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聖과 俗, 교회와 세상 등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정의와 사랑 가운데 한 가족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다”(롬 14:17). 이 일에 동참하는 자들은 모두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안병무의 교회이해를 살펴보았다. 그의 생각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기성의 제도적 교회를 멀리하고 때로는 적대시했으나 그것의 철폐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신자들이 자기의 삶을 같이 하는 삶의 공동체를 지향했었다. 또 그는 예수가 “이 땅위에 임할 하나님 나라”(주기도문)를 위해서 전위대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일생동안 씨름했습니다. 그는 기존체제에서 안주하는 “공간의 교회”가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서 나아갈 “시간의 교회”, 즉 하나님의 전위대를 위해서 설교했다. 그는 성직자가 중심이 된 권력과 부에 안주하는 교회가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이 자기가 가진 카리스마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전선에 설 투사들의 공동체를 희망했다.
안병무는 일생 동안 이러한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교회이해를 몇 개의 교회를 통해서 실험하면서 “理想과 現實” 사이에서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시작했던 향린 공동체는 시간이 감에 따라서 점차 ‘制度的’(?) 교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과 ‘理想的’ 교회로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들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독일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 교회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으며 거기에서 자신의 위상을 설정하는 일도 전과 달랐던 것 같다. 그는 전과 같이 거기에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중앙신학교와 한국신학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하면서 주로 한국 교회 전체의 신학적 문제와 씨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향린 교회는 1970년대 초에 정식으로 牧會者를 초청하면서 급속히 제도적 교회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이상적 교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백교회인 민중교회 창립에 동참함으로써 그 꿈을 다시 한번 실험했다. 이것은 매우 急進的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분가선교’의 이상인 강남향린교회를 설립하는데 이것은 좀더 온건한 시도라고 평할 수 있다. 전자가 전혀 새로운 꿈이었다고 하면 후자는 妥協的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교회들은 현재 과정 중에 있어서 그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다.
그는 사실상 이 세 개의 교회들을 통해서 자기의 이상적 교회상들을 실험하였고 이것들의 성공여부는 앞으로 이들 교회들을 담당해갈 후학들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미국 자본주의의 新自由主義적 世界觀과 결합된 敎會成長論이 강력한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오늘날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 成敗는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들의 미래는 매우 不透明하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이 글을 마치면서 아쉬웠던 점은 안병무의 교회이해를 歷史的 發展段階를 거치면서 연구하고 그 실험의 현장이었던 세 개의 교회들을 검토하지 못한 점이다.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 놓으며 후학들의 과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