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보수(Conservo)란 말은 원래 식품공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이 취할 음식물들을 신선하게 보존하려고 노력했었다. 오늘날과 같이 냉장이나 냉동이 불가능하던 시대에는 짠 소금에 저리거나 아니면 훈제로 만들어서 먹거리를 저장했다. 이러한 저장 방법들은 음식물들의 신선도를 유지시킴으로써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영양소를 보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음식물들을 냉동시킴으로써 보다 오랫동안 저장하는 방법이 발달되었지만 그것 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통조림으로 만들어서 보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조림을 만들어서 가능한 한 음식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우리는 보존 혹은 보수(Konservierung)라고 부른다. 따라서 보존을 사전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수란 개념은 정치학이나 신학에서는 좀더 확대된 의미로 사용된다. 즉 보수 혹은 보수주의란 정치의 영역에서는 기존의 사회질서 혹은 정치질서를 최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보존하려는 자세 일반을 말한다. 말하자면 기존적인 것 혹은 유산으로 받은 것에 대한 철저한 충성을 우리는 보수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최근 한국정치계에서는 심심치 않게 보수논쟁을 벌리고 서로 자신들이 보수 혹은 보수주의에 있어서 정통적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보수로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장된’ 보수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면 한국사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지키려고 하는 사회적 질서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들이 경쟁적으로 방어하려고 하는 정치적 체제는 어떤 것인가? 한국의 보수주의가 지키려고 하는 내용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가 수호하려고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시작되어 군사정권들을 거쳐서 유지되었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몇 가지 모순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 자유민주주의는 대내적으로는 반공을 그 대립개념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자유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내포해야 할 사회복지적 차원을 상실한 채 대개는 권위주의적이고 심하게는 독재적인 것으로 변용되었었다. 따라서 서구적 의미에서 기본민주주의적 발전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왜곡되고 변용된 자유민주주의는 대외적으로는 친미 종속적이고 때로는 친일적으로 구형되어서 근대적 민족국가로서의 완전한 자주성과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란 이름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일제 36년간의 통치로 빚어진 온갖 모순을 청산하는 것을 불가능 하게 만들었었다. 친일적 인사들이 주요 직책들을 그대로 넘겨받았었다. 특히 경찰권에서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그 동안의 역대정권에서 매우 불행한 결과들을 초래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폐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보수주의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시장경제 원리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이다. 여기서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모순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동안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지키려고 했던 자본주의의 문제점들만을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위에서 정치적 보수주의와 같이 한국의 자본주의의 발전의 기초는 일제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식민지적 경제체졔와 해방 후 미국의 원조경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발전은 미국의 자본이나 기술에 의한 박정권 시절의 근대화 프로그램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한국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는 미국과 일본에 구조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이러한 대미.대일의존적 경제구조는 오늘날까지도 자생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고 많은 경우 이들 강대국들의 기업의 하청화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는 엄격한 의미에서 시장원리에 의해서 발전된 것이 아니라 보다 정치적 요소들에 의해서 성장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른바 정경유착을 통해서 대기업들은 비대해진 것이다. 그것은 역대 군사정권 하에서 성장했던 대기업들의 예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기업들이 자생력이 부족하고 부동산투기등과 같이 기업외적 수단들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문민정부에 들어와서도 그것이 내걸고 있는 신경제 역시 국제경젱력이라는 이름으로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수행함으로써 다수의 중소기업들이 도산하거나 아니면 대기업의 계열화 내지는 하청화 됨으로써 건전한 경제적 발전의 기초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이러한 왜곡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와 경제질서가 계속되는 동안에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떤 것일까?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현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없다. 정권의 수장들인 대통령들이 제대로 임기를 미치지 못했고 또 마친 사람들도 독재와 부정부패의 책임을 지고 비극적 최후를 마쳤다. 그리고 이들 지도자들의 몰락과 더불어 그들이 만들었던 정당들도 해체되었다. 오늘날 정당들을 지방당 내지는 특정한 정치지도자를 정점으로 한 붕당으로 변질되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경제질서들이 빚어낸 현실은 어떤 것인가? 왜곡된 자본주의적 경제정책은 빈익빈, 부익부를 구조화했다.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경제구조 전반을 부패시킴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삶 전반에 내면화되었다. 뇌물을 주고 받는 일 없이는 경제활동이란 것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노태우씨 부패사건에서 그 전모가 드러났지만 모든 인허가를 장악하고 있는 공공 기관에서 일상화되었다. 이런 문제점들을 분석하자면 한이 없다.
지금 여당은 물론 보수의 정통성 경쟁을 하는 야당들도 이런 정치체제와 경제질서를 그대로 보수하자는 것인가? 이런 왜곡된 정치현실과 부패된 경제질서를 탄생시킨 한국의 보수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첫째 이러한 왜곡된 정치적 경제적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보수주의를 견지하자는 사람들은 이런 왜곡들을 통해서 특별한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이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친일적이거나 친미적 인사들로서 해방정국에서부터 이권에 개입할 수 있었고 역대 정권들과 더불어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소수의 보수적 집단들이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보수주의의 대변자로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은 30여년 동안 군사독재정권에 동참했거나 거기에서 특혜와 혜택을 누렸던 군출신들 정치인들, 정경유착의 경제인들을 포함해서 그들의 동맹세력인 언론인들과 지식인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방 50년 동안 모든 정치적 왜곡과 경제적 부패를 통해서 특권을 누리거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자청하고 나선다.
둘째 이러한 왜곡된 정치적 경제적 현실의 피해자면서도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 보수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순전히 전술전략 차원에서 보수주의를 말하고 있기도 한다. 이들은 야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혜택을 누렸던 보수주의자들로서 특수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혹은 권력자들로부터 이념적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보수주의자로 위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동안 진보적 성향을 가진 야당의 정치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집권세력으로부터 이념적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장된 보수주의는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면 사실적 보수주의자로서 둔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보수주의자들의 위장은 많은 경우 노골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주는 폐해 보다 더 큰 폐해를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거등 국민적 결단을 펼요로 하는 공적 사건들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의 선택을 왜곡되게 만들거나 불가능하게 만들고 때로는 국민들을 정치적 허무주의로 빠뜨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정치적 보수주의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왜곡된 정치적 보수주의의 기초에서 형성된 부패한 경제질서를 수호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의 역사
그러면 한국의 개신교는 이러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보수주의의가 빚어내고 있는 역사적 환경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한국의 개신교는 이러한 보수주의적 체제 한가운데서 그들의 지원 세력인가 아니면 비판세력인가? 우선 한국교회의 보수성의 역사와 그 성격을 검토해 보자.
한국의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장로교와 감리교를 전해 준 영미계통의 선교사들은 단적으로 말해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성향을 조금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교리적으로는 정통주의자들이었지만 선교적 열정에 있어서는 경건주의자들이었다. 이들 선교사들 가운데는 부분적으로는 근본주의적 성향을 띤 사람들도 다수 있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들을 좀더 구별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보다 엄격한 정통주의자들이며 감리교 선교사들은 좀더 여유가 있는 경건주의적이다. 그것은 개혁교 정통주의의 출발점을 고려할 때 좀더 분명해 진다. 말하자면 개신교회 정통주의는 화란에서 알미니안주의를 극복한 다음 예정론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극단적으로는 근본주의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감리교회는 그 출발점에 있어서 독일의 경건주의 특히 할레의 경건주의자인 아우구스트 프랑케와 진젠돌프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따라서 감리교 운동은 교리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통주의와는 그 출발점과 목표를 달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는 역사적 배경을 같이 가지고 있지만 지향하는 방향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두개의 운동들은 역사적 출발점에 있어서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지만 이들이 모두 신학적 계몽주의(Theologische Aufklaerung)에 대립되었던 운동들이라는 점에서 같은 방향을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신학적 계몽주의가 진보적 사상에 기초하고 따라서 자유주의적 신학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적 전통의 수호와 함께 그 과정에서 합의되었던 신앙고백적 전통들을 고수하려 했던 점에서 이들은 모두 보수주의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두 운동이 신학적 계몽주의와는 달리 열성적으로 해외선교에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같은 길을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영미계통의 식민지 시대가 열리면서 시작된 개신교의 해외 선교활동은 주로 이런 정통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 선교사들 말하자면 보수적 선교사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러한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적 신학에 기초하여 훈련을 받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된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정설이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특성을 미국의 장로교회 해외선교국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Arthur Brow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한국에서 실천하고 있던 신앙행태는 미국에서는 1세기 전에 이미 극복된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미국에서는 당시로 봐서 이미 100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매우 보수적인 신앙행태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학에 있어서 질적으로 뒤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시대착오적 사고와 행태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청교도적 엄격성과 보수주의적 정통성”의 사람들이었다는 평가는 자명적인 것이다. 부라운은 한국의 선교사들의 자질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영적으로는 앞서 있지만 균형, 통찰력 그리고 자기 통제를 결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 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정규적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부는 성경학교 수준의 교육만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교육정도의 높고 낮음이 보수와 진보의 지표가 될 수는 없지만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교육수준은 한국의 유서 깊은 문화를 소화하고 거기에 따른 선교정책을 수립할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교회를 지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방법 그것도 당시로부터 100년 전의 낡은 방법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장공 김재준박사는 이들 선교사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즉 그들은 정통주의 신학을 한국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가 될 사람들에게 주입했고 부흥회를 통한 복음전도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보수주의적 선교사들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이들 선교사들의 특성을 민경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교파교회적 탈사회성과 미국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이 함께 작용하여서 소박한 복음 전파 이외의 범위 한정이 처음부터의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의 특성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들 보수주의적 선교사들은 신앙선교(Glaubenmission)에만 전적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집중함으로써 탈 역사적 신앙형태를 견지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 온 정통주의적 선교사들의 일차적 관심은 인간들의 “영혼구원”에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영국의 명문대학인 옥스포드 출신의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성향과 비교해 보면 곧 드러난다. 영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면서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방향에서 토착화를 시도했었다. 그 대표적 예를 우리는 그들이 교회건축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서양의 예배당을 짓지 않고 한국의 절간을 본딴 교회들을 지었던 것이다.
둘째 이들 보수주의적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의 위급한 정치적 상황을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른바 “정교분리”의 원칙을 자신들의 선교및 행동지침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근대 한국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던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위급한 상태에 있었다. 1896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해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침략의 손길을 펴고 있을 때였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1910년에는 한국은 일본에 완전히 합방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했고 따라서 그들은 민족적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민족적으로 사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출현의 ㅊㄹ현이 있었다. 한국교회사에서는 “敎會의 政治化”라고 부른다.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장으로서 교회의 정치화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정치화는 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감리교회들 가운데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교회의 정치화는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정교분리 원칙에 충실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정치화는 교리적 측면에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질적 선교사업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치화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정치적 불안을 야기시킬 수 있고 나아가서 복음의 증거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정성 드려 시작한 선교사업이 이러한 정치화로 인해서 일본 사람들의 간섭을 받거나 방해를 받게 되면 허사로 끝날 수도 있다는 불안이 그들을 지배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첫째 당시 장로교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던 선교사들의 단체인 “장로회 공의회”는 1901년 10월 3일자 모임에서 다섯개 항으로 된 ‘교회와 정치’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교회는 국가의 사안들과는 무관하고 따라서 국가가 하는 일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건물이나 목사관은 정치적 토론의 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오직 그리스도인 개인의 사적 문제이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결정은 사실상 공적이고 교회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공의회’의 결의사항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당시 지도적 입장에 있던 선교사 클락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치적 문제들에 관한 불간섭적이고 중립적 정책을 취하기로 한 위원회의 결정에 대해서는 어떤 변경도 있을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선교정책은 언제나 엄격하게 지켜지고 강화되어 왔다.”
둘째 당시 선교사들은 이러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치화를 차단하기 위해서 구체적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1907 정점을 이루었던 대부흥 운동이었다. 선교사 클락(Clark)은 이러한 부흥운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민족적 삶이나 교회적 삶 모두에서 어려운 때를 대처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주어지는 특별한 정화와 함께 힘을 얻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특별한 정화”(special cleansing)란 말에서 우리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대부흥 운동의 숨은 목표를 발견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라의 위기에 처해서 전개되고 있던 애국적 운동 혹은 정치화로부터 교회를 정화시키자는 것이다. 이 부흥운동의 목표가 교회성장에 있지 않았다고 고백한 것에서도 이 운동의 숨은 목표가 드러난다. 1910년 한일합방부터 시작된 이른바 100만인 救靈運動도 같은 맥락에서 시도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한국의 대교단들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보수적 교회로서 그 확고한 신학적 실천적 기초를 확보했다. 말하자면 한국의 보수주의적 교회들은 선교 초기부터 민족해방운동, 민족독립운동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정치화로 정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의 조류는 다양한 모습을 취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관통해서 흐르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보수주의의 충실한 동맹자로 활동해 오고 있다.
한국사회의 신보수주의의 등장과 그 세력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 아니 한국사회를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보수주의는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고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 특별히 1990년을 기점으로 한 동서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출생하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 보수주의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등장해서 다수의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게 되는 단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1970년대부터 미국과 유우럽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신보수주의(Neo-Koservativismus)의의 성격과 그것의 정치적 목표를 살펴봄으로써 위의 질문들에 대해서 답들을 얻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보수주의가 한국의 교회와 정치에 미친 영향들도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에서 이른바 신보수주의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이다.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등장의 역사적 배경을 형성했던 것은 히피운동으로 대변되는 반문화 운동, 아시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목표 하에 진행되던 월남전 반대운동, 그리고 젊은 층들에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던 학생운동 및 신좌파들의 맑시즘적 사회비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가세한 것은 여성들의 여성해방운동도 포함된다. 이렇게 70년대 서로 상관관계에서 강력하게 진행되던 운동들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는 커다란 도전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사회의 보수성을 대변하던 자유주의가 이들 운동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왜 자유로운 사회가 반자유적이고 파괴적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비판의 파도를 만들어 내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급진주의자들에게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 자체의 캠프 안에서도 나왔다.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각기 다른 방향에서 찾고 있다. 즉 미국사회에서 급진주의자로 알려진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민주적 사회주의로서 자유주의의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유주의를 넘어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자유주의에 충성하는 자들은 현재의 자유주의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유주의를 넘어서서 신보수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신보수주의는 “60년대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허무주의적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항하면서 그 이념적 지향성에 있어서 자유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을 지탱해 주고 있는 세개의 강력한 집단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미 냉전의 단계에서 행동주의자였던 윌리암 북클리(WIlliam Buckley) 같은 사람들 주변에 모여들었던 카톨릭의 보수적 세력들을 들 수 있다. 둘째는 70년대에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로서 새로운 우익 진영을 형성하고 있던 개신교적 근본주의자들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집단에 속하지 않는 다수의 지식인들을 우리는 신보수주의자들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의 신보수주의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은 바로 보수적인 카톨릭 세력들과 개신교 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사실상 자기들의 진영에 속한 로날드 레인건을 미국의 대통령으로 지원했었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 공화당의 충실한 투표자들이기도 한다.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탄생의 배경이 된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유주의적 사회질서가 가지고 있던 제반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곧 그것의 탄생의 온상이었다. 그 점을 가장 적절하게 지적한 이는 독일의 하노바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Oskar Negt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보수주의는 오늘날 무력감, 즉 사회적 위기들을 관리하기를 원치 않는 무력감에서 자라나온 정신적 자세로서 그것은 기존의 생산관계와 소유관계에서 어떤 것도 바꾸기를 원치 않는다.” 이러한 신보수주의는 오늘날 사회가 풀어야 할 엄청난 과제들과 사회적 갈등들을 결정적인 것을 바꾸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 다니엘 모이니한(Daniel Patrick Moynihan)의 말 “폭풍우 속에서 올바른 진로는 원래의 진로를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 신보수주의 출생의 또 하나의 배경은 사회주의적 변혁운동에 대한 불안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보수주의는 앞서 말한 무력감과 함께 사회주의와 대중주의에 대한 불안감에서 태어난 산물이다. 따라서 이들이 취할 수밖에 없는 두개의 중요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반공주의의 입장이다. 즉 공산공주의는 그것이 전체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고 그들은 비판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민주적 엘리트 지배의 이론과 더불어 논거되고 있는 반대중주의다.
그러면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역대정권(군사정권을 포함하여)의 이념적 기초를 형성한 것은 이념적 보수성을 대변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다.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보수주의자는 곧 자유민주주의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자유민주주의는 몇 가지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변용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내려 왔다. 첫째는 남북분단의 현실이 그것이다. 남북분단이 가져온 많은 문제점들 가운데 남한 사회의 이념적 기초가 된 자유민주주의의 位價變容처럼 해로운 것은 없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서 기본적 민주주의가 전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것의 단적 예는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과 부정선거등으로 나타났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도 4,19 학생혁명 과정에서 붕괴된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학생들이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 학생층에서 남북회담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매우 낭만적 통일조국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지식인들이나 학생들 사이에서 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회의를 전혀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동안의 수많은 “비합법적 변혁운동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권으로 시작되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지식인들과 학생들 아니 대부분의 국민들의 주된 정치적 목표는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실현 즉 “민주회복”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를 통해서 기본민주적 질서를 회복시켜 나가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주회복의 투쟁구호에서 평가된 당시의 집권세력들은 군사팟쇼 독재, 혹은 단순히 군부독재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이들 군사독재정권은 초기에는 다수의 친일적 잔재세력들과 여기에 야합한 친미적 우익적 지식인들의 직접적 지원을 얻었었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세력으로 자처했다. 따라서 그들은 민주회복을 외치는 이들을 진보적 인사들, 좌파들 혹은 심지어 용공주의자들이라는 낙인찍기까지 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즉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정치적 체제와 그것을 기초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의 모순점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면서 투쟁의 구호는 “남북통일”로 전환된다. 이러한 투쟁구호의 변화는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에서 발생한 한국사회의 모순들의 극복을 남북통일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또 이러한 투쟁구호의 전환은 전술적 측면도 가지고 있어서 기본적 민주질서의 실현은 남북통일 없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남북통일이란 투쟁구호는 다분히 자유민주주의 체제비판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전제하고 있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투쟁구호의 전환과 더불어 그 동안 민주회복을 주장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불안이 생겨난다. 그 불안은 곧 남북통일은 곧 자유민주주의의 포기 내지는 수정과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온 것이다. 이러한 불안은 미국이나 유우럽의 신보수주의자들의 불안과 동일한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다수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의 位價變化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 동안의 투쟁의 동지들이 과도하게 좌편향 한다고 보아서 과거 투쟁의 대상이 되었던 세력들과 손을 잡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신보수주의자들의 등장이 가시화 된다. 이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전의 “민주회복”이라고 하는 투쟁구호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군사독재 정권과 이념적 정치적 통합을 시도한다. 이들은 보수대연합이란 구호 하에 모이고 “3당합당”을 통해서 그들의 정치적 실체가 나타났다. 이러한 비정상적 결합은 통일운동을 통한 민족적 미래에 대한 변혁요구들과 그 동안의 자유주의적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모순들에 대한 다수 국민들의 저항에 대한 불안에서 이루어진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들 신보수주의 세력을 구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과거의 친일적 잔존세력들을 기초로 해서 역대정권에 동참함으로써 특권을 누려왔던 다수의 정치인, 기업인, 학자들, 정치적 군인들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이들 사이에는 다소의 이념적 편차들이 있을 수 있지만 현재의 상황을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 면에서는 동일한 노선 즉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총칭해서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들을 지원해 주고 있는 세력들, 특히 종교세력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물론 한국과 같은 종교다원 사회에서 한국보수주의를 지원하고 있는 종교단체들은 수없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보수적 유교단체들이나 불교등이 이들 세력들 가운데 속한다. 여기서는 기독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적 보수세력을 지원하고 있는 최대 다수를 형성하는 집단으로서 우리는 개신교 보수주의 교파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장로교회의 경우 그 동안 교리적 지방적 나르시즘에 의한 여러 차례의 분열과 상호 적대적 관계들에도 불구하고 적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그 동안의 역대정권의 충실한 지원자들로 보여진다. 이러한 장로교인들의 지지는 특히 이승만 정권시절에 더욱 노골적이었고 이 때 이러한 지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 장로교인들은 박정희로 시작되는 군사독재 정권들 하에서 다소의 편차들은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이들 정권의 충실한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을 혹독한 군사정권의 지지자들로 묵어둘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으로는 역대정권이 내세운 반공이데올로기와 교리적으로는 ‘정교분리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거대한 교단인 감리교회도 장로교와 편차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시절에는 감리교가 더욱 노골적인 지지자였다.
둘째 그 다음으로 한국의 카톨릭 교회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적 보수세력을 지원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의 카톨릭 교회의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던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고려하면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그 동안 이들 정치세력들의 암묵적이고 명시적인 지지자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보수주의의 종교적 사회적 효과들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가져온 그리고 가져올 사회적 효과들을 우리는 몇 가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모든 삶의 영역들에서 탈집단화 혹은 탈연대화가 가속화된다. 신보수주의는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에 기초하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모든 삶의 중심은 개체이다. 여기에서 추구되고 있는 이해관계들이나 권리들은 전적으로 개인의 이해관계며 개인의 권리이다. 이것은 신보수주의의 뿌리가 되는 자유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서구 기독교에서 이러한 탈 집단화 혹은 탈연대화의 기원은 중세말기의 보편논쟁과정에서 전체주의적 실제론에 대결했던 유명론(Nominalismus) 혹은 성토마스에 대결했던 옥캄등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개체가 전체에 선행한다는 주장이 가장 강력하게 집단적으로 실현된 것은 종교개혁에서라고 할 수 있다. 루터나 특히 칼빈에 있어서 구원이란 신과의 개인적 문제며 교회나 혹은 교황과 같은 집단적 상징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사고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시민사회의 개인주의와 맥을 같이 하면서 개신교가 서구에서는 시민종교로서 사회적 효과를 가장 강력하게 실현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개신교가 개인의 능력과 이익에 기초를 두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맥을 같이 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한 탈집단화 혹은 탈연대화는 한국 자본주의의 비정상적 발전과 더불어 한국교회에서도 극단회된다. 그것은 개교회 위주의 교회조직과 함께 그 운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총회나 노회 혹은 총회나 연회같은 기구가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형식적인 것이어서 거기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연대성과는 무관한 것들일 뿐이다. 그 결과 개 교회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서 조직운영된다. 약한 교회들의 지원 같은 것은 구조적이거나 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선적 차원에만 머물러야 한다. 한국 개신교의 이러한 탈집단화나 탈연대화는 한국개신교인들의 삶 속에 깊이 내면화되었다. 그것은 사회적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개인주의적이고 나아가서 이기주의적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모든 삶의 영역들에서 권력과 도덕의 일탈현상이 가속화된다. 과거의 보수주의자들은 권력은 도덕적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미국에 이민왔던 청교도들의 사상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권력의 도덕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권력이란 신에 의해서 위탁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과거의 보수주의자들의 좌우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보수주의자들에게서 권력과 도덕의 일탈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이러한 일탈현상의 재가는 다분이 종교적이다. 말하자면 이들이 가장 큰 이념적 적대자로 생각했던 공산주의는 악마의 화신이며 따라서 그것들을 진멸하는 데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허락된다. 여기에서 온갖 종류의 정치권력과 그 수단이 정당화된다. 동서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에 대한 모든 정치적 공격과 파괴수단들이 정당화된 것이다. 또 니카라과 혁명및 이란 콘트라 사건 혹은 쿠바에 대한 경제적 제재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비도독적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된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도덕적 기초를 상실한 벌거벗은 권력의 행위였다. 그리고 핵무기 논쟁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나 이교도들에 대해서는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신보수주의의 신봉자들이다.
이러한 권력과 도덕의 일탈현상은 한국의 신보수주의 집단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 동안 자유민주주의적 보수진영의 집권세력들의 정치적 부도덕성과 경제적 부패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하면서 그것의 기본질서를 유린하고 그 반대자들을 살해하고 불법체포하고 고문한 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러한 모든 부도덕성이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부도덕한 권력남용이 재가되었다. 그 동안의 집권세력들의 권력형 특혜와 부정부패를 어떻게 다 고발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서 어떤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일일뿐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부패의 구조화는 바로 이러한 권력과 도덕의 일탈현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권력과 도덕의 일탈현상은 개신 교계에도 깊이 침투해 들어왔고 어느 정도 내면화되었다. 교계 안에서도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막대한 금전이 사용되어야 하고 이권이 있는 곳에서는 부정이 판을 치고 있다. 그 뿐인가! 사회에서 사업을 하고 직장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구조화된 부패의 틀 안에서 전혀 거리낌없이 부정을 요구하고 부정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말은 단지 구호에 거칠 뿐이다.
셋째 모든 삶의 영역들에서 과학 기술적 발전을 무조건적으로 재가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면서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 말했을 때 영국의 경건한 여성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기절했었다. 18세기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강력하게 시작된 세속화에 대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려를 나타냈었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들이 성숙하게 되어서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대중들은 교회를 멀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과거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과학기술적 발전에 대해서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보수적 신자들 가운데서도 과학기술이 새로운 세계에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렇다해도 그들은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뭔가 반신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었다. 오히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반겼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정은 정반대가 되었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가져다 준 결과들에 대해서 오히려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이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자원의 과도한 이용으로 인한 자연파괴와 공해문제의 주범을 과학기술로 보고 있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운동을 통해서 이러한 추세를 중지시키려 한다. 반면에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사용하여 막대한 생산수단을 점유하고 있는 보수적 기업인들은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이야말로 장차 우리가 살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 치열한 국제경쟁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첨단과학기술의 발전이며 그것을 통해서 더욱 많은 것을 생산하고 더욱 많은 것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 신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이 환경문제에 열심이고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소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넷째 마지막으로 신보수주의자들은 모든 삶의 영역들에서 금욕적인 것들이 부정한다. 과거의 보수주의자들의 대변자들이라고 할 수 있던 청교도들이나 경건주의자들 그리고 정통주의자들은 예외없이 금욕주의적이었다. 특히 칼빈주의적 정통주의자들은 금욕적 삶과 그것을 통한 재화의 저축을 그들이 예정된 것과 구원받은 것의 외적 징표로 알아서 그것을 종교적 가치로 까지 받아들였다. 그 결과 축적된 자본이 후에 자본주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 막스 베버의 주장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렇게 축적된 재화들을 사회적 봉사를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보수주의자들에게서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하면 많은 재화를 얻고 그것을 넉넉히 사용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고 구원받은 징표라는 것이다. 금욕주의와 같은 소극적 사고와 생활방식은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극적 사고’를 통해서 난관을 극복하여 차안에서 성공하는 것이 곧 피안에서의 축복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3박자 축복도 나온다.
오히려 금욕적인 사람들은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진보적인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가진 것이 적기 때문에 진보적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서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은 금욕의 길밖에 없다는 확신에서 그 길을 택하고 있다.
결 어
필자는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그 지지세력들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종교적 효과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보수논쟁의 실체와 그 목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보수논쟁에서 그들이 견지하고자 하는 것들은 그 동안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에서 많은 모순들을 확대재생샨해 온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사회와 교회에서 보수주의를 표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과오들과 현실적 모순들을 심각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과학적 성찰 없이 기존의 특혜와 특권을 유지하겠다는 방편으로 그리고 앞으로 어떤 정치적 기회로 삼으려는 전략으로서 이 보수주의를 내세우고자 한다면 그것은 역사와 민족 앞에 큰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그 과오의 결정적 순간에 그 보수세력의 대변자였던 노태우가 서 있고 그것을 앞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야당 지도자도 서 있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주의는 엄격한 자기성찰과 자기변신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보수주의의 또 하나의 실패는 남북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남북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북한의 왜곡된 사회주의 체제에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남한의 소위 자유민주주의적 정권이 가지고 있는 경직성이 그 동안 남북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질을 확보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시 말하자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거기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모순들과 왜곡이 그 동안 남북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와 유사한 처지에 있었던 이전의 서독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서는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민주적 기본질서와 경제적 정의가 상당 정도 실현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적 사명을 좀더 계속하고자 한다면(그럴 의사가 없다면 별 문제지만) 민주적 기본질서의 실현과 보다 많은 경제정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몇가지 조건들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적한 것이지만 사회적 연대성의 강화와 함께 권력의 도덕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다. 동시에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맹신에서 벗어남으로써 환경을 살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진지하게 금욕적 삶이 주는 교훈을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마련될 때 남북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기초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은 철저한 과거청산과 함께 획기적 자기혁신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길은 교회가 갈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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