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적 고찰
본 연구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다. 즉 종교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정착과정에서 종교적 진리의 일정한 과학적 체계화 내지 화석화가 등장하며 거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개혁운동들 가운데 하나로서 새로운 언표 즉 비유(Parable)가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그것의 역할과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종교가 문화의 한 현상이라고 이해할 때 그것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안정적으로 정착한 다음에는 쇠퇴기에 들어서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정착기 내지 쇠퇴기는 그 교리의 체계화의 완결과 더불어 시작되는 화석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순환론리를 대표하는 학자는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이다. 그에 의하면 문화들이란 뛰어넘을 수 없는 “영적”(seelische) 역사단위들과 양태단위들로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유기체론적으로 엄격하게 규정된 전개과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기체적 문화는 따라서 생성과 성장 쇠퇴와 멸망의 순환적 과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도 문화의 한 현상으로서 생성과 성장 및 정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것은 또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세력으로서 정착한 다음에는 자신을 내적 혹은 외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엄격한 교리화와 체계화의 과정을 거친다. 다시 말하자면 내적으로는 이른바 그 종교 자체 안에서 자의적 해석으로서의 이단화를 방지하고 외적으로는 분파주의나 다른 종교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진리체계에 대한 엄격한 체계화 혹은 교리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체계화 내지 교리화 과정의 정도는 내적 혹은 외적 도전의 강도에 의존하게 되는데 도전이 강하면 강할 수록 배타성은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가 하는 것은 그 종교가 처한 역사적 상황 즉 내적 혹은 외적 상황에 의존한다. 다시 말하자면 내적 도전이 강하거나 혹은 외적 도전이 강할 때 이러한 교리화 내지 체계화 과정이 빨라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도전에 대처하는 수단으로서 자신의 종교의 진리성을 시급히 확보해야 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의 이러한 생성, 발전, 정착의 기간을 규정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착의 단계를 규정하는 것에서는 몇 가지 조건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일정한 수의 추종자들 및 그들에 의한 일정한 물적 토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그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인정받을 때 그 종교는 정착된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교정착의 준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 혹은 사상의 일정한 체계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하나의 종교집단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토대를 형성했다고 해도 그것이 가르치는 것 즉 종교가 지향하는 진리의 체계화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보편성 혹은 세계성을 가지기 힘들다. 다시 말하자면 보편성을 띤 진리와 거기에 기초하여 인류를 구원해 낼 수 있는 실천력을 가지지 못한 종교는 쉽게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세계적 종교들은 모두 인류의 구원을 위한 이러한 보편적 진리와 보편적 실천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 종교의 실질적 정착의 준거가 될 수 있는 것은 포편적 교리체계의 완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종교라고 해도 앞서 언급한대로 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교리체계의 화석화나 경직화로 인해서 심각한 내부 붕괴의 위기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뿐만 아니라 이슬람이나 불교 등의 다양한 종파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문화들이나 이 문화의 한 단위로서의 종교의 이러한 성장과 몰락 즉 순환과정은 뭔가 필연적인 것인가?
이러한 순환과정에 대한 비판도 있다. 즉 슈펭글러는 문화 상호간의 전이성(Übertragbarkeit)과 문화를 지탱해 주는 정신적 힘들의 침투능력이라고 하는 현실 즉 역사적 전망들의 미완결성(Unabschließbarkeit)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문화는 일정한 역사적 현실에서 태어나고 그것이 완결되면 또 다른 문화가 등장하의 등장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새로 태어나는 문화는 그 이전 것에 의해서 촉발되거나 이전 것을 계승하거나 개혁하면서 등장하고 그것이 쇠해질 때 새로 등장하는 문화 역시 앞서와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슈펭글러의 문화결정론에 대한 비판은 문화의 한 단위로서 종교이해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종교는 일정한 정착과정을 통한 과학적 체계화에서 주변 문화 내지 종교들과의 상호 침투과정 내지는 동화과정 그리고 대결과정을 거치게 된다. 동시에 종교의 교리화 내지 화석화 과정에서 그 자체의 내적 힘으로 자체의 개혁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생동력을 가지고 계속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종교는 더 이상 존속되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쇠퇴기 혹은 교리화된 종교가 그 생동역을 상실할 때 새로운 종교지도자(들)가 등장해서 종교개혁 내지는 갱신을 단행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그 종교는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더 지속되고 사람들 가운데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발달과정에서 특히 교리화를 깨고 새로운 활력을 가진 종교로 발전되어 나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새로운 언표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필자는 “비유”(parable)라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교리적 체계화 내지 화석화와 여기에 대응하여 종교의 새로운 언표를 통해서 다시 생동력을 찾게 하는 운동의 원리가 비유라는 하나의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러한 형상은 비단 기독교만의 독특한 현상만은 아니며 종교발전 일반이 가지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여기서 필자는 후기 유대교의 진리체계로서 율법과 그것의 과도한 화석화로서의 “율법성”(Gesetzlichkeit)을 살펴보고 거기에 대한 대응전술로서의 예수의 비유라는 언표를 다루기로 한다.
2. 율법의 탄생과정들에 관한 개괄적 고찰
유대인의 성서에 있어서 율법(Torah)은 예언서들과 성문서들과 함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 이른바 모세의 책으로 알려진 율법은 다섯 권으로 되어 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율법 책으로서 그것은 인간이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며 그밖에도 그와 같은 율법들이 어떻게 지켜지거나 위반되었는가 하는 실례들과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따라서 유대교인들의 경전 가운데서 율법만큼 중요한 경전들은 없다.
그러면 이러한 유대교의 중심사상을 구성하고 있는 율법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1) 축복과 심판의 기준으로서 율법
앞서 밝혔듯이 율법은 신과 동료인간들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준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 내용들은 “십계명”(Dekalog)이나 계약의 책(Bundesbuch = 출 20,22- 23,33)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야훼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인간들 사이에서 정의의 실현이다. 율법, 특히 십계명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라고 하는 신, 그들을 창조하고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해낸 신을 절대적으로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는 계약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출 6,7). 따라서 그 외에 다른 신들을 섬겨서는 안 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 속에 있는 것이나 어떤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율법에는 철저하고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 다음으로 율법은 인간들 사이에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지침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십계명의 두 번째 서판에 잘 나타나 있다(출 20, 12-18). 부모에 대한 공경으로부터 시작해서 도적질하는 일이나 이웃의 재산을 탐내는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간들 사이의 문제들은 이웃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 22, 37-40).
그런데 주전 8세기의 예언자들(아모스, 이사야 등)은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의 원인을 그들이 이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다는 데서 찾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것은 “야훼의 율법”을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암 2,4). 간단히 말해서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인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유일신 야훼를 떠났고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야훼의 법과 정의를 저버릴 때 멸망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상숭배는 신에 대한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불의를 행하는 것은 동료인간에 대한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리고 다음으로는 여타의 민족들에 대한 야훼의 축복과 심판의 준거가 된다.
2) 구원자 하나님의 계명으로서 율법: 십계명
구약성서의 율법을 말할 때는 일차적으로 십계명을 말하게 된다. 구약에서 십계명은 특별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이 십계명은 구약성서 안에서 약간의 변조를 거쳐서 시내산 구절(출 20,2-17)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행한 고별연설(신 5,6-21)로 구별되어 나타나 있다.
이 십계명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과 동료인간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바른 자세를 위한 전체규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십계명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이다. 십계명 서문에서 하나님은 말하기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야훼다”(출 20,2)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으로부터 구원해 내서 그의 백성을 삼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가 구원하는 존재며 또한 구원받은 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먼저 요구하지 않고 많은 것을 줌으로써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십계명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인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는 그의 의지로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백성을 다른 나라의 종살이하도록 버려 두지 않는다. 따라서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지는 해방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일차적 의미는 해방이다. 이것이 율법을 수여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 다음으로는 율법이 인간의 구원을 말할 때 그것은 자유이다. 이 자유는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선사한 하나님을 섬기고 복종하는 데서 가능하다. 만일 그들이 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이나 여타의 물건이나 사건들을 섬길 때 그들은 이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과 자유가 하나님의 뜻으로서 율법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3. 모세의 율법서: 신명기
주전 622년 유다왕 요시야 통치 18년 대제사장 힐기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왕에게 보냈다. 이 책이 후에 신명기라는 율법서로 알려졌다. 왕은 이 율법서의 내용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이것이 곧 요시야 종교개혁이었다.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소 외의 모든 성소들을 폐쇄하고 유월절을 새롭게 지키게 했다. 그들은 그 동안 이방 신들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동료인간들을 억압하여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신명기에 나타나 있는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계시”(Willensoffenbarung)를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행실을 살피고 바른 길로 나가도록 노력했다. 따라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이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에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율법서가 이스라엘의 모든 삶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그것의 준거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의지계시를 담고 있는 “율법서“는 동시에 ”계약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상호 약속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을 지키면 생명과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과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과 저주를 담은 이 계약의 책의 중심 내용이 곧 율법이다(신 30,15-20).
4. 성화의 길: 사제의 법
구약성서는 요시야 왕의 율법서 발견 외에도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페르샤 왕 아닥사스다는 주전 458년 자신들이 점령한 바벨론의 영토에서 일단의 유대인 포로들을 발견한다. 그 왕은 그들 가운데 사제인 에스라를 수반으로 하고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국가와 성전을 재건하게 한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고 새로운 예배를 시작함으로써 모든 과거의 모순들과 오류들을 제거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의 율법”을 따라서 살도록 한다.
이 때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율법이 이른바 “사제들의 문서”(Priesterschrift)인데 그것의 핵심적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성소와 사제들에 관한 것(출 25-31장), 제물에 관한 것(레 1-7장), 제의적 순결성에 관한 것(레 11-15장), 거대한 속죄일에 관한 것(레 16장), 이스라엘에서 성소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질서에 관한 것(민 1-3장)등이 그것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필요한 모든 제의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제들의 문서”이다. 이것은 포로기 이후 신명기 이래로 모세의 규범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밖에도 율법을 찬양하는 시편들과 새로운 계약법(렘 31장)등이 있지만 지면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3. 후기 유대교에서의 율법성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즉 후기 유대교는 어떤 동질적이고 자기완결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후 70년 로마인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유대교 안에서는 바리새파가 하나의 지배적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의 신앙생활에서는 이들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과 율법이해가 규범적인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이 율법 해석권을 독점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 집단들 사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것들이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무엇보다도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의 기초다. 2. 율법은 하나님의 은총과 선물이다. 3. 유대교에서 율법의 이해는 구약성서의 토라 이해와 상응한다. 3. 구약에서 율법은 다른 모든 것에 선행한다. 그리고 율법에 나타난 모든 계명들은 준수되어야 한다.
이러한 바리새 집단의 율법이해에 대해서 근본적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이 예수였다. 물론 예수는 율법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신을 왜곡하고 오도한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 즉 율법성(Gesetzlichkeit)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즉 바리새들의 율법의 해석과 연관해서 예수는 유대인들의 율법성 즉 율법의 본래의 정신에서가 아니라 쓰여진 율법과 그것을 해석한 전통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율법의 규례들을 철저하게 완성할 수 있다고 하는 신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사고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것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다. 여기서는 종교와 도덕(Sittlichkeit)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경외의 계명과 윤리적 요구들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종교와 도덕이 요구하는 것이 율법에 쓰여 있으며 따라서 시민적 법과 시민적 형법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 즉 율법성은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는 것인가? 첫째 과거의 삶의 조건들 하에서 가졌던 의미를 상실한 다수의 율법적 규정들이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은 현재의 상황에 맞추기 위한 인위적 율법해석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삶의 조건들에다 과거의 율법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도출해낸 규정들을 적용시키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둘째 바리새인들에 따르면 제의적 계명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나 윤리적 요구로서 달성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본래의 요구들이 가리워 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윤리적 행위를 위한 동기가 퇴색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한 것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이 순전히 형식적인 것 즉 문자적인 것의 요구를 달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복종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의 율법이해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법적 율법(juristisches Gesetz)은 도덕적 요구와 같이 모든 개인적 삶의 조건들을 포괄할 수 없다. 많은 경우 계명이나 금령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허다히 있다. 인간의 삶에는 그때그때 즐겨서 열정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들이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의무를 가지고 수행해야 할 일들의 공간들이 존재한다. 모든 것을 율법성이 규정하고 있는바와 같이 결의론적으로만 처리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전통적 율법해석과 적용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예수의 저항은 주전 8세기 이후의 예언자들 특히 아모스나 미가등과 같은 사회적 예언자들의 저항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 제의적 경건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인 공법과 정의로 대결했다면 예수는 형식적 복종 즉 제의적 계율들의 순수와 완성 대신 하나님의 참 뜻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했었다(마태 7,12). 즉 하나님은 형식적 복종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복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에 가장 쟁점이 되었던 안식일 문제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예수를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라고 그 본래의 의미를 해명하고 있다. 또 “성결법”(Reinheitstora)에 대해서도 예수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외출했다가 들어와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는 예수의 제자들을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어겼다고 공격하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막 7,15). 여기에서 예수가 문제삼는 것은 하나님의 듯으로서의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바리새파들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해석된 형식화된 율법성이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구실로 우물에 빠진 어린이를 돕지 않는 식의 안식일 엄수나 내적으로는 온갖 더러운 생각과 말을 가지고 뭔가 외적인 순결성을 말하는 바리새인들에 그는 저항했다.
이러한 예수와 율법성 사이의 갈등을 말해주는 대표적 예들이 산상설교의 “반제들”(Antithese)들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율법과 하나님의 뜻이 대립되는데 하나님은 인간들이 도식화된 계명을 통한 행동을 넘어서 인간의 본래적 의도 마저도 문제삼고 있다. 말하자면 율법이 정한 인간에 대한 살인, 간음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증오와 음심이라고 하는 내면적인 것을 더 문제삼고 있다.
율법성에 대한 반제로서의 비유
예수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율법”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유대교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을 유대교의 개혁자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운동을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을 왜곡하고 있는 유대교에 대해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본래적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한다”(마 5, 17)고 선언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유대교의 전통에 서 있다. 그 런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율법의 의미를 바로 맑히는 일에 그의 전 생애를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의 참된 수호자를 자청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충돌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의 참 정신을 왜곡하고 그것을 바르게 실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요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 율법의 참 정신은 그것의 형식적 준수에 있지 않고 그것의 참된 내용 즉 ‘의와 인과 신’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의 내용을 “하나님 나라“라는 좀더 구체적 명제로 제시하고 있다(마태 20장). 그런데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새로운 명제를 율법이나 율법성과 같은 어떤 사상이나 이론 체계로 설명하지 않고 “새로운 언어”, 즉 비유라고 하는 새로운 언표로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마태 13,34). 마가복음에도 예수는 비유로 그의 중심사상을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 4, 33-34).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의 뜻의 실천 목표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의 독특한 방식 즉 비유라고 하는 특수한 언표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다시 말하자면 예수가 이러한 새로운 언표인 비유를 사용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가?
1) 새로운 언표로서 비유
우선 예수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뜻으로서 율법과 대립되는 것은 복음이다. 하나님의 뜻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심판의 언어”인 율법이 아니리 “복된 소식”이라는 것이다. 복음이란 바로 새로운 하나님의 발견이다. 그래서 예수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마태 9,17)라는 명제를 통해서 그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이전의 유대인들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그 출발에 있어서나 목표에 있어서나 전혀 새로운 것이다. 말하자면 심판과 정죄를 기초로 한 유대교의 율법의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구원을 기초로 한 것이 예수가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운동이 시작될 때 그 개념들이나 구호들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적 틀이 요구된다. 개념적으로 고정화된 일상적 언어를 통해서는 새로운 사상을 설명하거나 새로운 운동을 추동해 낼 수 없다. 이러한 새로운 멧시지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로서 예수는 비유를 선택했다. 비유는 따라서 새로운 멧시지을 위한 “특수한 언표”(the special linguisticality)이다. 새로운 사상의 출현은 곧 새로운 언어의 출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말하자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이 담고 있던 언어원자론적 해석 말하자면 논리가 언어를 규정한다는 전제를 거부한 것이 예수가 사용한 비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비유라는 틀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을 체계화되고 특수화된 율법에서 부터 “일상적 언어”로 해방시켰다. 따라서 토대주의적 언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 즉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고향의 언어”를 통해서 예수는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설명하려 했었다. 이것은 낡은 사상을 담고 있는 낡은 고착화된 언어를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2) 새로운 민중언어로서 비유
그 다음으로 예수가 전개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동참자로서 생각했던 주된 대상은 “민중”(ochlos)들이었다. 예수 자신이 갈릴리 민중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민중들과 더불어 같이 새로운 세계즉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언어와 표현방식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유대교의 율법체계는 민중들의 것도 아니고 민중들의 언어나 표현형식으로 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이른바 당시의 지배세력들의 언어요 자기표현방식이었다(마태 23,2).
따라서 율법학자들이 다루고 있던 율법의 내용들은 추상적이고 개념화되어 있으며 체제지향적이었다. 이러한 율법성에서는 생각과 삶, 신앙과 실천, 말과 행위가 분열되며 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을 율법학자들을 비판하는 예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저희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마태 23, 3 5).
3) 혁명적 집단언어로서 비유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제자들이라고 하는 새로운 집단의 새로운 통화방식과 함께 행동방식으로서 비유를 말하고 있다. 이 비유는 당시의 지배세력이었던 로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것이었다.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막 4,11-12). 예수는 자신의 새로운 제자집단, 즉 하나님 나라 운동의 동참자들을 위한 숨겨진 은어(은어)로서 비유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비유는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만 통화와 이해가 가능한 언어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비유는 피지배자들의 내밀한 언어였고 동시에 이들의 저항의 말이었다. 예수의 모든 비유가 현실비판적이고 혁명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와 그 제자들이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고 거기에 응한 사람들은 골목길에서 방황하고 있던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다(눅14,21; 마 22,1-10). 당시의 지배세력이라 할 수 있는 밭을 산 사람들이나 소를 산 사람들 그리고 장가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다.
이러한 특수한 집단언어로서 비유는 혁명적 집단들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비유들 자체가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수의 모든 비유는 기존적인 것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당시의 기존적인 것, 지배적인 것은 바로 율법이었고 그것을 기초로 기둑권을 행사한 집단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동시에 예수는 이 비유를 혁명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교육하는 자료로 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겨자씨 비유다(막 4, 30-32). 겨자씨라고 하는 것을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성장하면 큰 나무를 이룬다. 이 비유는 자신들의 능력에 위축되고 좌절하고 있는 대다수의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자신감을 넣어주고 그들의 혁명성을 길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4) 현실적 상상의 언어로서 비유
비유는 억압받는 민중적 집단들의 혁명적 은어(은어)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깊은 상상력(Imagenation)을 가진 언어이다. 비유는 현재의 언어가 아니라 미래의 언어이다. 당시의 현재를 긍정하는 대표적 언어는 율법이나 계명이나 금령과 같이 지배체계의 언어며 따라서 그것은 이미 비유가 아니다. 이런 지배자들의 언어, 체제의 언어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차단하고 억압한다. 이러한 체제의 언어는 미래를 미워하고 상상력에 반감을 가진다.
동시에 율법이나 계명 혹은 금령등 지배자들의 언어는 상상력을 거부하기 때문에 명시적이며 따라서 비유처럼 암시적이거나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는 긍극적 믿음과 결합되어 있어서 국외자들에게는 꾸며낸 이야기(fiction) 같이 들릴 수 있다. 이러한 꾸며낸 이야기는 깊은 상상력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을 통해서 꾸며낸 이야기야 말로 가장 현실적 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상력에 기초한 이야기들은 궁극적 믿음과 연관되어 있고 또 이러한 궁극적 믿음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런 미래에 대한 궁극적 믿음을 담고 있는 집단의 상상력에서 출발한 비유를 말하고 있는 집단은 반체제적 집단이기 때문에 기존하는 사회질서 속에서는 삶을 모험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비유는 까십이나 알레고리와 같은 현재적인 것이나 초현실적인 것 다시 말하자면 뭔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야 말로 가장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지배자들이 상상력을 두려워 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비유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현실적인 상상력의 언어이다.
결 론
앞에서 우리는 종교는 생성, 발전, 정착과정을 거칠 때 그것의 확고한 기초가 되는 것은 일정한 정도의 추종자들을 통해서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서 자리잡는 것 외에도 자신들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 혹은 교리의 체제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것을 말했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발달현상에서 하나의 체계화 혹은 과학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체계화는 비단 교리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그 종교의 조직체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종교가 일정한 사회적 세력으로 자리잡을 때는 조직에 있어서도 체제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교리의 체계화에 반발하는 세력을 가리켜 이단(Häresie)이라고 말하고 조직적 체제화 과정에서 저항하고 일탈하는 집단을 가리켜 분파주의(Schisma)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단과 분파주의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단이나 분파주의는 일정한 종교집단 안에서 교리적으로 불만을 가지거나 조직 내에서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집단을 이탈하는 데 있어서는 같은 성향을 가진다. 그러나 이단은 지배세력에 의해서 타의적으로 강제로 밀려나지만 분파주의는 자의적으로 떠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파주의는 새로운 종교집단을 형성한다고 해도 자신들이 가르치는 교리는 이전 집단의 것과 같은 내용을 고수한다. 그러나 이러한 두가지 현상에서 이단은 교리의 체계화 과정에서 파생하며 분파주의는 조직의 체제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뚜렸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일정한 종교의 정착화의 기초가 되는 교리적 체계화 내지는 조직적 체제화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정한 종교의 체계화 내지는 체제화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현상은 이것이 가졌던 초기의 생동성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생동성의 상실은 체제의 과도한 강화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또 교리의 과도한 체계화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조직의 체제화와 교리의 체계화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미 말한대로 이러한 과정은 생성한 종교의 성장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외적 도전이 강력할 때는 조직의 체졔화가 강화되고 내적 도전이 강할 때는 교리의 체계화가 강화되게 된다. 이것들은 도전들의 강동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체제화 내지는 체계화 과정을 통해서 등장하는 종교의 화석화에 대한 응답의 양태들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종교의 과도한 체계화 내지는 체제화로 발생하는 화석화 과정에는 불가피하게 여기에 도전하여 그것이 처음 가졌던 생동성을 찾으려는 새로운 집단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개혁새력이다. 만일 이들 개혁세력들이 성공을 거두면 그 종교는 새로운 생동성을 되찾는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정착화된 종교의 지배자들에 의해서 이단이나 혹은 분파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추방당하게 된다.
이들 개혁 새력들은 개혁운동에서 몇가지 특징들을 보여준다.
첫째 개혁세력들은 화석화된 종교의 근원적 진리를 문제삼음으로써 그것의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들은 종교의 발전과정, 특히 교리의 체제화나 조직의 체계화 과정에서 덧입혀진 부차적인 것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 대표적 예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게서 본다. 그는 교리적 측면에서 카톨릭의 7성사 중 성서에 언급된 세례와 성만찬을 제외하고는 제외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 조직에 있어서도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본래의 기독교 진리로 되돌아 가는 것을 그의 종교개혁의 과제로 본 것이다.
둘째 개혁세력들은 화석화된 교리체계나 조직체계를 문제삼을 때 독특한 언술 즉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사용한 비유이다. 이러한 예는 비단 예수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서 사사기 9정에도 예수가 사용한 것과 매우 유사한 이른바 “나무들의 우화”가 그것이다. 여기에 보면 폭군적 인물 아비벨렉이 자기 형제 70인을 죽이고 왕이 되고자 한다. 그는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하루는 나무들이 모여 회의를 하면서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그리고 포도 나무에게 나무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연이어 청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가 할 과업들이 있다는 말로 하나같이 사양한다. 그러자 나무들은 가시 나무에게 청한다. 그러자 아무런 자격도 없는 가시 나무가 선뜻 왕이 된다는 이야기다(사사기 9, 8-15). 이것은 당시 전제독재 군주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을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체계화되고 체제화됨으으로써 생명력과 생동력을 상실한 종교나 정치의 화석화를 깨고 돌파하는 언어로서 우리는 비유라고 하는 장르가 사용되었고 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왜냐하면 앞서도 언급한대로 비유는 새로운 사상의 언어이고 그 안에는 민중성과 혁명성을 담고 있으며 또 깊은 상상력을 배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