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오늘은 본회퍼가 처형되지 꼭 44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1945년 4월 9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나치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까 1945년 5월 8일 유우럽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기 약 한달 전에 그는 처형당한 것이다. 그의 처형이 한달만 더 지연되었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며 전후 교회와 신학에 많은 발전적 공헌을 했을 것이다. 그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하고 가정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가 남긴 많은 신학적 물음들이 아직 새롭게 대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총탄에 쓰러진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나 일제에 항거하다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전덕기 목사 그리고 20년이 넘도록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는 남아프리카의 민족해방 지도자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등이 모두 39세에 삶의 종지부를 찍거나 전환을 경험했으며, 그들이 준 사회적 영향을 고려할 때 본회퍼는 짧고 단편적인 삶을 살았으나 그가 후세들에게 준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본회퍼 자신도 자기의 삶이 단편적이고 미완성적인 것임을 알았다. 그는 1940년 2월 20일 테겔 감옥에서 그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삶이 갖는 미완성적인 것과 단편적인 것을 우리는 특별히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단편적인 것이 실은 다시금 인간으로서는 더이상 보다 높이 달성할 수 없었던 완성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나는 특별히 많은 나의 제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 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적 사건들의 폭력이 마치 폭탄들이 집을 파괴하듯이 우리의 삶을 산산조각으로 만든다 해도 가능한 한 완전한 것이 계힉되었다는 것이 가시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적어도 어떤 재료로 건축되었으며 또 건축하려고 했었다는 것은 후세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미완성으로 많은 것들을 남겨 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치정권의 출현과 더불어 제기된 인권탄압과 함께 유우럽을 폐허로 만든 제2차 세계대전을 예감하고 그것을 중지시키는 일이 그의 신학적 사고와 기독교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맴돌았다. 1931년 본회퍼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독일은 이미 혁명적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그것으로부터 생긴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이 결국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와 희망으로 나타났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통해서 독일의 꿈을 설교했고 빈곤과 실업 그리고 사회적 불안에 시달리던 대중들은 나치에게 큰 지지를 보냈다. 나치 당은 1930년 선거를 통해 제국의회에서 107석을 얻음으로써 이미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혁명적 분위기에서 본회퍼는 더이상 어떤 이론적 작업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독교는 무엇이며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하는 물음이 끊임없이 나를 붙잡고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는 이론적 탐구(theological foundation)에서 점차 신학적 실천(theological application)으로 넘어서고 있다. 그는 사고와 행동의 틀을 존재에서부터 행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독일의 혁명적 상황에 대한 대답이지만 그것이 구체화되고 발전된 것은 그가 가진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접촉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0 본회퍼와 에큐메니칼 운동
본회퍼가 에큐메니칼 운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31년 9월 1-5일까지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친선 장려를 위한 세계연맹”(The World Alliance for Promoting International Friendeship through Churches)에 청년간사로 참석하면서부터이다. 거기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유우럽 지역 담당을 위한 세명의 간사들 가운데 하나로 피선되어 이 운동의 핵심으로 뛰어든다. 말하자면 그는 실천적 기독교(Life and Work)와 인연을 맺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 운동은 에큐메니칼한 기구였으나 다른 단체들과 달라서 교회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일을 했다. 신학적으로는 진보적이며 영국식의 휴매니스틱한 토대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이 운동은 주로 평화문제를 중심적 과제로 다루고 있었다.
본회퍼는 유우럽 담당 간사의 한 사람으로서 케임브리지에서 모인 회의에 참석한 것을 비롯해서 1934년 패노(Faeno)에서 열린 협의회까지 국제회의를 주관하고 참여하면서 약 4년간에 걸쳐 평화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발전시켜 가고 있다.
(1) “교회를 통한 국제친선 장려를 위한 세계연맹”이 주재한 국제회의(1931년 9월 1-5일)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제네바에서의 군축회담과 그것과 관련된 세계위기를 주제로 삼았다. 여기서는 국제간의 분쟁해결의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마음과 방법”(Mind and method)에 배치된다는 것을 확실히 밝히고 교회는 다음 세 가지를 요구했다. 1)어떤 형식을 통해서든지 군비를 최소한으로 줄인다. 2) 무장한 국민들 사이의 정의로운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3) 어떤 공격으로부터도 모든 민족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 연맹이 문제삼고 또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유우럽 국가들 사이의 악화된 관계를 극복하고 동시에 점증하고 있는 군비증간으로 야기될 새로운 긴장들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케임브리지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서 1931년 6월 1-3일 함부르그에서 열린 예비모임에서는 주로 1)국내적 국제적 의무, 2) 군축, 3)소수민 문제들이 다루어지는데 이러한 준비모임이 열리는 날 아침에 알트하우스(엘랑겐)와 히르쉬(괴팅겐) 교수에 의해서 발표된 글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들이 발표한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나라들이 지속적으로 독일에 대해서 적대적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국제적 이해나 친선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한 국제간의 친선과 평화를 위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이것은 동시에 평화운동이 추구하고 있던 군축문제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켐브리지 모임은 이전에는 엄두도 핼 수 없었던 전쟁당사자들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친선과 평화문제를 의논할 수 있었던 데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가진 국제적 조직과 연대성을 통해서 공동으로 할 수 있는 과제들을 개발하고 추진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또한 성과였다.
(2) 체코슬로바키아의 쿠플레(Kuple)의 청년평화회의(1932년 7월 26일)에서 본회퍼는 “세계연맹사업의 신학적 근거”(Zur theologischer Begruendung der Weltbundarbeit)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는데 여기서 그는 평화운동에 대한 신학적 교회적 근거를 좀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본회퍼는 이 논문에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에큐메니칼 실무자들이 이 운동이 갖는 신학적 논거를 찾는 일에 게을리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 실무자들은 분명한 신학적 정향이 없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기구들을 목적단체(Zweckorganisation)로 만들고 따라서 이것들이 정치적 경기변화에 따라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경우 에큐메니칼 운동이 강력한 민족주의적 성향에 의해서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영미식의 하나님 나라 이해와 평화 이상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세계연맹 내에서 갖는 영미식의 신학적 사고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서 생각해 온 평화를 복음의 현실, 즉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서 이해해 왔다. 여기서부터 평화의 이상은 절대화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더 이상 목적 형성이나 보존의 질서로서 이해되지 않고 궁극적인 것, 그 자체가 완성된 질서, 차안의 질서가 타락한 세계에로 뚫고 들어온 것으로 파악되었다. 외적 평화는 그 자체로서 ”매우 좋은“ 상태이다. 이러한 19세기의 신학적 자유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이해에 대해서 그는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광신적이며 따라서 비복음적이라고 부인한다.
국제간의 평화는 복음이 현실 즉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아니며 진노의 하나님의 계명 즉 그리스도를 향한 세계의 보존 질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운동이 곧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연속성을 부인한다. 따라서 국제간의 평화 그 자체가 이상적 상태가 아니며 또 그 자체로서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데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본회퍼는 국제간의 평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조건들 즉 진리와 정의를 제시한다. 허위나 책략 그리고 불의가 지배하는 데서는 평화의 공동체성이 성립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평화와 공동체성이 갖는 긍극적이고 유일한 근거는 사죄(Vergebung der Suende)라는 현실임을 역설한다. “사죄는 외적 평화의 질서가 진리와 정의 가운데 유지되는 곳에서도 모든 평화의 유일한 근거로 존속한다. 따라서 사죄는 모든 에큐메니칼 운동이 바탕을 두어야 할 궁극적 근거이기도 하며 바로 거기에서 분열은 극복된다.”
여기서 그는 영미적 평화개념의 고정적 애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히르쉬와 알트하우스식의 진리개념의 고정적 이해를 반대한다. 영미식 사고에서는 진리와 정의가 평화이사에 종속되며 따라서 여가서는 잘못된 평화이상의 절대화가 등장할 수 았다는 것을 경계한다. 그가 역사와 종말의 단절이라는 선상에서 지상의 평화를 이해한 것은 루터의 사상과 바르트의 위기신학의 노선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점에서 당시의 세계연맹이 보다 진지한 신학적 고찰을 포기하고 국제친선이라는 인도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움직인 것을 그는 비판하고 있다. 세계연맹이 이러한 평화를 국제간의 이해증진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서 그릇된 이해중진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이론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세계연맹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개인적 친교를 통한 이해증진에 있다고 규정하고 그것도 중요한 요소지만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서 독일 노동자들이 영어나 불어를 말할 수 없어도 국제적 기반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공동의 이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기독교인들도 평화운동을 위한 공동의 선포(gemeinsame Verkuendigung)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피차간의 사죄행위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국제간의 평화를 긍극 이전의 차원으로 파악해서 하나님의 평화인 궁극적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공통과 갈등의 해결(Loesung)은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평화라는 궁극적 구원(Erloesung)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목적조직으로 전환된 세계연맹의 한계선을 지적하는데 말하자면 그는 몇몇 에큐메니칼 전문가들의 개인적 친교가 세계평화문제를 순전히 휴매니스틱한 사고의 바탕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평화운동은 몇몇 에큐메니칼 전문가들에게 맡겨질 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또 그리스도가 현재하는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선포를 통해서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평화운돟은 신학적 논거를 가져야 하고 또 몇몇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선포를 통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전권을 갖고 복음과 계명을 선포한다” 명제는 바로 각각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갖는 권위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에큐메니칼 운동과 개개 지역 교회들 사이의 균열을 통찰하고 있다.
(3) 실천적 기독교(Life and Work)와 국제연맹이 주관한 국제청년대회(1932년 8월 25-31일)에서 본회퍼는 짧은 연설을 하는데 그는 여기서 평화운동을 하는 국제기구의 성격규정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적 행동을 위한 목적기관이 아니라 우리는 교회 자체의 일정한 형태다. 세계연맹은 주님을 부르는, 두려워 떨며, 경청하며, 불안해하는 그리스도 교회다.” 또 그는 회의 진행과정에서 경험한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서의 생각 보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더 중요시한다. 우리는 진지하게 성서를 읽지 않으며 또 우리는 성서가 우리에게 반대하는 것은 거부학도 우리에게 동의하는 것만을 받아들인다.”
본회퍼는 “세계연맹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규정하고 “그리스도는 설교와 성례전을 통해서 우리 안에 현재해야 하며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로서 하나님과 인간과 평화를 이루게 했다.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다. 그만이 우상들과 악마들을 몰아낸다”고 함으로써 평화문제를 그리스도론에서 다루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사건이며 평화의 약속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이 바로 평화의 긍극적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라는 명제 하에서 평화를 위한 전쟁론에 반대한다. “교회가 전쟁을 승인하려고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간들, 민족들, 계층간, 인종간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반대한다.” 여기서 그는 분명학게 무력증강을 통한 위협(Abschreckung)에 의해서 유지되는 평화를 거부학도 있다. 무기증강을 통한 안보의 확보를 그는 우상숭배로 규정 하고 이 세계에서는 진리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만 평화가 존재하며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영원한 평화가 있게 된다고 했다.
(4) 패노(Faeno)에서 모인 세계연맹과 실천적 기독교 운동 대회(1934년 8월)에서 본회퍼는 “교회와 민족들의 세계”라는 세계연맹 활동에 관한 신학적 논거를 위한 초안을 제시한다. 여기서도 그는 다시 한번 세계연맹의 성격을 문제삼고 있다. 그는 세계연맹이 자기를 목적단체가 아니라 교회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포할 때만 그 타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계연맹의 사업은 민족들 사이에서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못박고 전쟁의 종식과 극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세속적 평화주의와 기독교적 평화운동 사이를 구별하고 교회의 평화운동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그 성서적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한다. 즉 세속적 평화주의는 행동의 기준을 인간의 행복에 두고 있으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계명에 근거해서 국가안보의 이데올로기나 전쟁을 통한 평화 확보라는 논리를 거부하고 있다. 전쟁이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계명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논제를 통해서 평화유지를 위한 전쟁론, 평화유지를 위한 부기증강의 안보론, 나아가서는 평화주의의 인류의 행복론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극복하고자 한 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조직 위주의 활동에 대한 그의 불신이다. 그는 여기서도 다시금 “악마들의 세력들은 조직들을 통해서 분쇄되지 않고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분쇄된다(막 9,29)... 지옥의 영들은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만 추방된다. 따라서 패배주의도 조직도 아니고 기도뿐이다.... 기도는 조직 보다 강하다”고 했다.
그런데 본회퍼는 1934년 8월 28일 설교에서 평화는 국제간의 협약이나 자본독점이나 무기증강을 통해서 오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늘 평화와 안보가 혼돈되기 때문이다. 안보의 길에는 평화의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는 안보와는 반대다. 안보의 요구는 불신을 뜻하며 불신은 다시 전쟁을 유발한다. 안보를 추구하는 것은 자기를 지키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평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평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가? 모든 사람이 침묵을 지킬 때 개개인 그리스도인이 목소리를 높여 증언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개개 교회가 증언을 하고 수난을 당할 수도 있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일을 개인이나 개개 교회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목적 단체가 되는 것은 반대하고 교회의 특수한 형태로서 평화운동을 할 것을 강조했는데 그는 다가오는 전운을 바라보면서 전세계 교회가 모여 평화를 위한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꿈꾼다. 그가 공의회(Konzil)란 말을 사용한 것도 에큐메니칼 운동기구가 어떤 휴머니스틱한 이념에 근거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에 근거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행동의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인류의 속죄와 화해를 위해 십자가에 죽은 주님에게 복종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는 그 꿈을 다음과 같은 글에서 서술하고 있다. “오직 온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공희회만이 세계가 간절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감지해야 하고 민족들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자녀들의 손에서 무기를 취하고 그들에게 전쟁을 금하고 온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헌신하면서 꾼 꿈은 40년이 지난 1983년 카나다의 밴쿠버에서 다시 살아났다. 세계교회협의회 6차 총회는 1990년에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세계대회(Konzil)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이 대회는 내년초 우리 나라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정의, 평화, 자연의 보전의 운동을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로 보고 그것의 해결을 공동으로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것은 1934년 본회퍼가 꾼 꿈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본회퍼의 생각과 삶이 평화운동과 관련해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약술하고 이 강연을 마감하고자 한다.
3) 나오는 말: 세 단계에 걸친 전화
본회퍼의 사상과 행동을 맴돌고 있던 것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Gestalt)을 닮아가는 것(Gestaltung)이었다. 그래서 그의 윤리(행동)를 닮음 혹은 形成의 倫理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성육신하고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에 그이 윤리의 출발점이 있다. 이러한 형성의 윤리는 본회퍼의 사상과 행동에서 다음 세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 것으로 파악된다.
(1) 산상설교에로 전환
본회퍼는 현대적 자연과학적 세계관과 의식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봐이체커의 물리학과 딜타이의 역사철학을 통해서 당시의 세계상을 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그의 학위논문들에서도 잘 나타나 있지만 당시의 사회학과 인식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치정권하에서 고백교회의 신학교육을 맡아 감당하면서 그는 더욱더 산상설교에 나타나 있는 제자직(Nachfolge)의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당시의 히틀러 치하에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독일적 그리스도인들과 대결하는 고백교회의 목사들을 훈련하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제자직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그는 산상설교에로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1936년의 편지에서 새로운 경험을 쓰고 있다. “나는 처음으로 성서를 재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외랍됩니다. 나는 그간 자주 설교도 했고 또 교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고 말하고 글도 썻습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 못되었고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성서 특히 산상설교는 나를 그곳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그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산상살교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 보다 더 큰 ”의“를 추구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런데 이 산상설교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서 신앙이 갖는 내면성이란 시각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본회퍼는 신앙의 세계를 결코 삶의 현실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산상설교에 나타난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기독교인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보고 있다.
산상설교에 대해서는 대체로 크게 두 가지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첫째 비스마르크 식으로 통치의 모델로서는 너무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예수와 같은 특정한 훈련을 가진 자들이나 실천할 수 있다는 태도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의 산상설교에 대한 이중 윤리적 해석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 산상설교에서 뭔가 타협하지 않고 해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평화와 사회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산상설교에로의 전환이 그로 하여금 단순한 이론적 신학자에서 삶의 신학자로 전화시킨 것이다.
(2) 행동에로의 전환
1935년부터 본회퍼는 고백교회가 세운 목사후보생들의 수련소의 책임자로 일한다. 이때부터 그는 주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경건의 형성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 결과 그는 “나를 따르라”와 “신도의 공동생활”을 출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적 저항이 당시의 정치적 현실로부터의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39년 전쟁이 임박한 상황 중에 뉴욕을 향하는 배에서 자기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에 싸인다. 미국에서 그에게는 독일 피난민들을 위한 일들이 주어졌으나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귀국 동기는 바로 독일의 정치적 현실이었다. 이 결정적 시기에 고국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서둘어 귀국시킨 것이다. 이것이 곧 그의 행동에로의 전환이다. 그가 히틀러 암살에 가담한 것도 바로 이러한 행동에로의 전환이 가져온 결과였다.
본회퍼는 그의 윤리학에 발표한 “행동(Tat)이란 시에서 자기의 결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순간의 쾌락에 동요되지 말고, 정의를 단호히 행하고
가능성에서 동요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에서만 자유가 존재한다.
두려워 주저하지 말고, 인생의 폭풍우 속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이 너를 따르며,
자유는 그대의 혼은 환호하며 맞아주리라.
(
즉 그는 “가장 약하고 방어할 힘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의 운명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행동으로 나아가게 했고 이는 유대인들의 편에 서게 만들었다. 이것은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행위였다. 히틀러 정권에 대한 저항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다. 그리고 현실을 향해서 자기의 삶을 모험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이 세계의 현실 안에 스스로를 내어준 것에 대한 응답이다.
그런 면에서 본회퍼의 행동의 신학은 단순한 행동주의와는 구별된다. 민족분단의 극복과 분열된 민족의 화해를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문익환 목사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행동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본다. 행동에로의 전환은 궁극적인 물음에 책임적으로 응답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영웅적으로 나타나느냐가 아니라 다음에 올 세대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이며 원칙의 윤리에서부터 책임의 윤리로 넘어서게 하는 것이다.
(3) 삶에로의 전환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체포되었다. 그는 “인간들, 입들, 과거, 미래, 가정,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을 괴롭게 경험했다.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단절을 그는 죽음으로 경험했고 자살이라는 생각이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과거에 대한 단절을 연극과 소설의 단편들을 씀으로써 주목했다. 즉 그것들은 통해 자기의 과거의 삶을 확인했다. 그리고 미래의 대한 단절은 그가 옥에서 나와서 할 일들에 대해서 설계를 하고 글을 쓴 “옥중서신”에서 어느 정도 극복한다. 감옥살이라는 단절에서 이러한 지적 노력들마저 차단 당하는 현실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차단이기도 하며 신체적 생활에 대한 단절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활에 대한 죽임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미래를 향한 설계와 희망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삶에 전환한다. 삶에로의 전환은 다시 한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 십자가상의 예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과 직결된다. “너희가 한 시간도 나와 깨어 있지 못하느냐?”는 인간에 대한 고독과 “나의 하나님,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하나님의 부재 한가운데 즉 죽음의 한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밀려나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준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력하며 약하다. 바로 거기에서 그는 우리와 함께 하고 또 우리를 돕는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민중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본회퍼에게서는 삶의 길이었다. 그 길은 하나님 없이 가는 것과 같은 길이며 또 사람들 없이 가는 것과 같은 고독의 길이다. 단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이 삶에로의 전환이다.
삶에로의 전환은 단순히 종교에로의 전환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앙은 특정한 종교적 영역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삶의 행동으로의 전환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종교성의 시대에서의 기독교의 문제의 현실과 미래를 본다. 역사의 고난의 현장에로의 참여와 거기 따른 수난과 십자가가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이끌어간다. 본회퍼는 세계의 수난에 대한 하나님의 참여와 하나님의 수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참여에서 하나님의 현실성과 세계의 현실성의 통일을 본다. 이 통일이 구체화하는 곳이 정의, 평화, 자연의 보전이 구체화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죽음의 세력들이 극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