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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3 16:57
기독교의 해방과 영성
글쓴이 : 손규태
  
  
   서    론
 
   기독교 역사에서 영성과 해방은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성 없는 해방은 온전한 해방이 될 수 없고 또한 해방 없는 영성은 왜곡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영성 없는 해방은 인간을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하고 완성하는 해방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적 해방 내지는 사회적 해방의 테두리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외적 혁명들을 완성시켜 줄 수 있는 참된 인간혁명은 불가능한 것이다. 동시에 해방 없는 영성은 추상화 되거나 탈역사화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흔히들 생각하듯이 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을 떠나서 은둔하는 경향에서 우리는 그 대표적 예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은 해방을 목표로 하고 해방은 영성을 그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성과 해방을 다룰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이 두개의 개념을 추상적으로 연관지어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영을 받은 자를 말해야 하고 또 해방을 발하면서 해방자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그 추상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언어나 개념의 해명을 뛰어 넘어서 그 개념이 담지되고 실천하는 인간이라는 주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환언하면 영을 받은 자가 곧 해방자라고 하는 도식이 신학적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영성과 해방은 철학이나 사회과학에서도 얼마든지 개념적으로 이론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말이다.
 
   성서에 나타난 영성과 해방
 
   그와 같은 구체적인 예는 신구약 성서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말하는 대표적 성서인 출애굽기는 해방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자인 모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해서 해방의 영을 받게 되었고 또 그가 히브리 민족을 구체적으로 해방시켜 주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역시 그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고 어떻게 인간해방을 위해서 투쟁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의 영을 받고(혹은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한 예수에게서 우리는 또한 이러한 구약의 해방자의 전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수가 영을 받고 해방자로 나서는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을 “시험을 물리치는 설화”에서 본다. 그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지만 영적으로 얼마나 무장되어 있는가를 마귀는 시험해 본다. 우선 그는 “돌들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보라”는 시험을 당한다. 성서학자 Gloege에 의하면 이것은 희랍적 시험이라고 한다. 즉 도구적 이성을 가지고 물질을 가공해서 먹고 살아가라는 희랍적 삶의 방식이 바로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물질로만 그리고 그것을 가공해서 먹고 사는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를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로마적 시험이라고 한다. 권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삶의 방식이 오늘날도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높은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 세우고 뛰어내려 보라고 한다. 이것은 희브리적 시험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하겠다는 인간들의 교만을 극복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해방자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 즉 그리스적, 로마적, 희브리적 세계들의 유혹을 극복함으로써 영으로 무장한 것을 확실히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을 받고 동시에 세상적인 유횩들을 극복한 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진정한 해방운동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고 있는 영성은 예수의 시험사건에서 보듯이 뭔가 세상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영성과 해방에 대한 오해가 등장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뭔가 세상적인 것을 부정하는 데서 영성이 주어진다는 이해는 기독교 영성을 탈세상적인 것 혹은 탈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교회사에서 영성과 해방
 
   기독교 역사에서 영성운동의 핵으로 알려진 수도원운동들은 역사적 교회가 생동력을 상실하고 교리화되거나 아니면 제도화된 것에 반대해서 생겨났다. 5세기 경에 에집트에서 파코미우스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수도원 운동 역시 고대 동방교회에서 일어났던 난삽한 교리논쟁들과 주교제 하에서의 교회의 제도화에 반발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혹은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새로 태어나려는 운동으로서 등장했던 것이다. 이런 운동들은 콘스탄틴의 전환을 통해서 박해당하던 교회에서 박해하는 교회로, 특권을 누리비 못하던 그리스도인들이 특권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감으로써 로마제국 내에서는 별다는 성과들을 거두지 못했었다. 그 후 10세기 까지는 교황권의 강화로 인한 황제권과의 투쟁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11세기 십자군 운동에서 참패함으로써 교회안에는 자기반성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것이 소위 12세기의 카톨릭 교회 안에서의 이단 혹은 반대세력인 왈도파와 카타르파이다. 이들은 당시 교회개혁의 힘(영)을 무엇 보다도 예수가 가르친 본래적인 교훈에다 두고 제도화되고 특권화된 교회를 공격했었다. 말하자면 예수의 청빈한 삶과 그것을 통한 인간해방이 그들이 목표했던 개혁운동이었다. 거기에 부가된 온갖 교리들과 제도들을 그들은 철저히 배척했었다. 여기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교재판으로 대응했다.
    그후 14세기에 등장한바 있는 도미니칸 수도회와 프랜시스칸 수도회등은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전자는 호교를 위해서 후자는 내적 갱신을 위해서 일했었다. 따라서 프랜시스칸들의 청빈사상은 본받을만한 점도 있지만 그들을 통해서는 잘못된 중세기 교회를 구조적으로 개혁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왈도파의 개혁운동, 요아킴의 묵시문학 운동 그리고 독일의 신비주의 운동등 중세기 일어났던 일련의 영성운동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중세의 화석화된 교회를 해방시키려는 운동들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영성운동은 곧 해방운동 혹은 교회개혁운동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목회학적 차원에서 영성과 해방
 
   이런 의미에서 영성과 해방이라는 주제를 목회학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윤종모신부님의 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신학에서는 영성과 해방을 추상적으로 그리고 탈역사적으로 다루지 않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다룬다. 여기에서 영을 받은 자와 해방자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목회학이란 영을 받아 해방운동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라는 논제를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것이 목회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순한 교회의 관리자 혹은 구원의 관리자로서 교인들의 영적 삶을 보살피고 돌보아주는 전통적 목회자상과는 다른 측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통적 목회개념에서는 신도들을 영을 받은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하여 인간을 해방시키는 평신도를 만들어 내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평신도들을 어디까지나 목회자의 영성의 대상이었고 똥시에 해방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무장하는 데만 관심했었고 또 해방된 평신도들은 기피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회학의 개념정립의 일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전통적 위계관계의 시정이라 할 것이다. 중세기 특히 1215년 러테란 공의회를 통해서 규정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 규정들 말하자면 이들 사이의 종속관계가 철폐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교회도 교회는 성직자들에 의해서 장악됨으로써 영성은 독점되고 해방은 불가능한 단체가 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이러한 종속적 관계가 모든 인간종속관계의 뿌리가 된 것이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말하고 있는 종속이론은 바로 그 기원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나는 경제적 종속, 사회문화적 종속 그리고 정치적 종속(L. Boff)의 근원과 뿌리는 엄밀히 따져 보면 종교적 종속에 그 기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종속은 바로 앞서 말한바 있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를 규정하는 데서부터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남미의 해방신학은 카톨릭 신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점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다음으로는 남성과 영성 사이의 존통적 위계관계의 시정이다. 중세기 교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성직자의 교회, 제도적 교회 그리고 남성들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직자들의 권리를 제도화하고 접제화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을 철저하게 여성적대적인 방항으로 나아갔다. 여기에 대한 성서적 교회사적 연구들이 바로 여성해방신학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여성들은 초대 교회와는 달리 점차 성직으로부터 멀어져야 했고 여성적대성이 극에 달한 14세기에는 마녀사녕에 교회가 광분했던 것이다. 가부장제도나 성차별은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문명화된 세계에서 여기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교회가 걸머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영성과 해방에서 우리는 남성화된 교회로부터 해방이 목회의 일차적 과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영성과 해방을 말하기 전에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과 해방자 혹은 해방운동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이 영성과 해방의 문제는 목회신학적 내지는 실천신학적 기초와 목표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과 신학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고 혹은 부름을 받고 인간을 해방시키는 최전선에 나서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실천신학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으로 무장하고 해방전선에 나서게 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겔서는 영성을 상실한 목자들을 싻군이라고 했고 그들은 양을 해방의 장으로 내보내지 않고 자기 울타리에 가두고 잡아먹을 생각만 한다고 했다. 예수께서도 요한복음에서 영성과 해방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 목자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온 자가 아니라 울타리를 넘어온 강도와 도둑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영성과 해방을 위해서 목회를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성서는 엄중한 격고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신학연구나 교회에서의 목회활동은 하나님의 해방의 영을 받은 자들에 의한 해방운동이어야 하며 동시에 신도들을 영으로 무장해서 이 전선에 동참하게 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1994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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