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왜곡된 현주소
2000년대에 들어와서 언론매체들은 앞다투어 한국의 고등종교들의 현황과 그 중에 개신교 내지는 개신교 진영에 속한 특수한 형태의 집단들이 가진 문제들을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서 크게 다루고 있다.
우선 문화방송MBC)은 1998년 4월 5일 `시사매거진 2580'은 감리교단에 속한 금란교회 김홍도의 온갖 비리문제들(여신도와의 관계와 재정의 불투명한 사용) 등을 다루는 것을 필두로 해서 1999년 5월 11일 과거성결교 계통의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에 대한 비성서적이고 이단적 행태와 특히 여신도들과의 성적인 문란 행위에 대한 고발방송을 했다. 김홍도에 대한 방송이 나가고 나서 대부분의 개신교회나 집단들은 이러한 비판을 자기반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종교탄압이라는 논제로 대응했다. 당시 KNCC를 비롯해서 다대수의 개신교 집단들은 이러한 논제로 동원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해서 방송사를 공격했고 이러한 “종교세력”에 굴복한 방송사는 사과와 해명을 통해서 적당한 선에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재록의 교회는 수 십대의 교회 버스에 신도들을 태우고 방송사를 점거하고 방송장비를 파괴함으로써 물리적으로 보복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60년대 박태선 장로파와 문선명 파가 자기들을 비판하는 글을 쓴 동아일보를 급습하여 편집실 집기들을 파괴하여 신문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때를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 문화방송은 2000년 12월 19일에 “PD수첩”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한국의 대형교회”라는 주제를 내세워서 조용기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재정의 오용과 비리문제를 포함해서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들의 목사직 세습의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이에 대해서 해당교회들은 이 프로그램의 방영불가 신청서를 법원에 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교회집단인 “기독교총연합회” 등을 통해서 목사세습의 타당성을 선전하게 했다.
그리고 서울방송(SBS)은 1999년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으로 통해서 세 차례에 걸쳐서 정명석이라는 한 이단아가 이끄는 이른바 JMS 집단의 비기독교적이고 이단적 행태들을 다루었다(3월 21일자; 7월 24일자; 12월 25일자). 여기에서도 언제나 종교지도자 스스로가 자신을 메시아 혹은 예수라고 하는 이단적 주장이 문제가 되었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여신도들과의 성적 추문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방송은 2000년 12월 16일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을 얼마 앞두고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김계화의 할렐루야기도원의 왜곡된 치유 행태를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이 방송은 이전에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필리핀인가 어디에서 행해지는 치유방법 즉 손으로 배를 문지르면서 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방법이 돼지피를 이용한 사기극이라는 것을 밝힌바 있다.
그리고 2001년 1월 19일 방송들은 대한예수교 장로교회(합동파)라고 하는 한국에서 그 정통성을 누구보다도 자랑하는 교단에 속한 혜성교회가 교회건축과정에서 불법수단을 동원해서 20억 원의 세금을 탈세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의 목사는 건축허가를 받아내기 위해서 2000만원의 뇌물을 주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요즘에 와서 특히 개신교와 관련된 보도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띠는 것은 몇몇 대형교회의 목사세습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목사세습 문제로 갈등과 진통을 겪었던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의 충현교회(김창인 목사)와 지금도 그 문제를 진통을 앓고 있는 감리교단의 광림교회(김선도 목사)가 단연 앞자리에 나서고 있다. 이 두 교회들은 오랫동안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해온 목사들이 은퇴하게 되자 자신의 아들들을 후임으로 앉게 한데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러한 이른바 교회세습 문제는 이들 대형교회 뿐만 아니라 크고 적은 수많은 교회에서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이것을 반대하는 세력과 찬성하는 세력들 간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이 계속되고 있다. 대체로 찬성하는 세력을 많이 확보한 교회에서는 세습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거기에 반대하는 소수파는 추방당하거나 스스로 교회를 떠난다. 그러나 세습을 반대하는 세력이 강한 교회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좌절되며 그 과정에서 성직자와 교인들은 피차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대체로 이러한 갈등과 대결과정에서 교회가 둘로 갈라지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은 많은 교인들이 그 교회를 떠난다.
그 밖에도 교회는 아니지만 교회들이 운영하는 기독교 방송국의 계속된 노사간의 갈등이 대대적으로 보도된바 있다. 이 방송국의 노사갈등의 문제는 권오경 사장의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에 대한 충성편지가 문제의 단초가 되었다. 공공성을 대변하는 방송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서서 사회의 목탁이 되고 예언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방송의 대표가 특정인 특히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성서적으로도 언론매체의 공정성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에서 우리는 과거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교회와 목사들에 반대하여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고백하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칼 바르트나 본회퍼 같은 사람들이 “고백교회”를 만들어서 투쟁했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민주화 운동을 한 권사장의 권위주의적 행태와 그를 뒷받침하고 있는 교권주의적 이사들의 비민주적 행태로 인해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이리하여 방송은 몇 달째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 외에도 크고 적은 많은 교회들의 목사의 이단적 행태와 비리들로 야기된 갈등으로 인해서 개신교의 종교답지 못한 행태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개신교의 종교적 왜곡과 사회적 재정적 비리들에 관한 일련의 언론보도들이 계속되자 최근에 와서는 몇몇 주간지들과 계간지들까지 한국의 종교들, 특히 개신교회의 문제점들을 다루는 특집들은 연이어 내어놓고 그 원인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언론매체들의 분석을 통해서 드러난 한국 종교들 특히 개신교의 모습은 한마디로 교회가 예수가 그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르침 즉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마태복음 5:13-17) 라는 명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개신교는 예수가 추구했던 하나님의 나라 즉 민주적 정치질서(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자다)와 정의로운 경제 질서(많은 시간 일한 사람이나 짧은 시간 일한 사람이나 동일한 노임은 밭는 것)를 실현하려는 이상과 목표(마태복음 20:1-16)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공동체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봉사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는 이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는 소금과 빛의 사역을 하지 않고 스스로가 완결된 조직체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역행하는 행태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중세기 가톨릭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로 이해하고 교황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구원의 담지자로 주장했듯이 오늘날의 교회들은 닦아오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세우는 일은 잊어버리고 자체가 마치 궁극적 목적인 것처럼 이해하는 단체가 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했으나 그 제자들이 교회를 세웠다고 말한 프랑스 성서학자 알로이의 주장대로 오늘날 교회는 자기 완결적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개신교는 자기가 위치해야 할 현주소를 상실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매우 왜곡되고 변형되고 타락한 종교집단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성서의 말대로 맛을 잃어 길가에 버려진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아니라 말 아래 숨겨진 등불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하기 위한 섬김의 단체가 아니라 스스로가 완결된 조직체로서 자족하는 “종교‘ 집단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개신교들은 그 본래의 위치를 일탈함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한국 사회에서 그 신뢰성을 상실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뢰성의 상실은 곧 한국 개신교의 정체성 위기를 낳았으며 나아가서 오늘날 선교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정체성 상실과 선교의 위기로 인한 신뢰성의 위기는 이렇게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개신교에 대한 역사적 회고
주기도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의 존재근거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교회의 존재근거는 자기완결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고 하는 예수의 지상명령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고 단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이 점을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교회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게 되고 중세기에서처럼 교회가 자기완결적 단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건설을 위해서 교회는 일반적으로 이중적 사역(double ministries)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역동적 사역(dynamic ministry)으로서 세상의 악의 세력과 대항해서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요, 그 다음으로는 치유적 사역(healing ministry)으로서 세상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을 붙들어주고 감싸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누가 10:30-37)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의 사역을 가장 적절하게 정의해 주고 있다. 이 비유에서는 강도를 만난 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치유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으나 동시에 고통당한 자를 외면하는 유대교와 그 사제집단에 그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치유적 사역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본문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여리고 지방에 은거하고 있는 강도의 집단 즉 세상의 악에 대한 투쟁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역동적 사역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역동적 사역을 통해서 세상을 개혁하고 때로는 그것과 대항해서 투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고난의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없는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동시에 교회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세속적 세력이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그들을 돌볼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교초기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를 찾아오게 된 것은 이러한 이중적 과제를 절 수행해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한국교회의 역동적 사역(선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된 19세기 말 한국 땅에 상륙한 개신교는 그것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보수주의와 미국식 교파교회의 편협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500년 동안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조선왕조 체제하에서 수탈당하던 민중계급과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소외된 지식인들 계층 가운데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노쇠하고 병든 조선왕조의 절망적 상황에서 새로운 미래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서구 사상과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종교인 개신교에서 그들의 꿈을 찾고 그것을 실현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에 입교한 사람들은 소극적으로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을 피하려고 하는 하층민들이었고 적극적으로는 새로운 미래사회를 꿈꾸던 지식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된 한국의 개신교는 일본이 조선반도를 합방한 1910년 이전에는 도전해 오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맞서서 나라의 독립과 함께 근대적 민족국가 형성을 위해서 일했다.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의에 열성적으로 참가하던 이들 가운데는 많은 그리스도인 지식인들이 활동했었다. 나라의 독립을 지키는 일과 봉건왕조를 극복하고 근대적 민주주의 국가형성이라고 하는 두 개의 과제가 단지 온 국민의 과제였지만 특히 개신교인들이 보다 의식화된 차원에서 이 과제들을 위해서 앞장섰다.
이러한 개신교인들의 활동은 일본이 조선반도를 강제로 합방하고 나서 나라의 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일제는 주로 교육활동과 의식화 운동을 통해서 위에서 말한 목표들을 달성하고자 활동했던 단체인 신민회 운동(105인 사건)을 제거했다. 이 단체는 당시로서는 가장 잘 조직되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민족 운동가들의 단체였다. 이들 구성원들 가운데는 다수의 개신교인들이 들어 있다. 이들이 표방했던 목표 신민회(New Peoples' Association)는 낡은 사상과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상과 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의 사업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개신교는 선교초기부터 교육사업과 계몽사업에 주력함으로써 한국의 근대적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19세기말 일제의 침략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면서 깨닫게 된 것은 당시 한국 사회 지도층들의 역사의식의 부재와 그로 인한 민중들의 미몽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다수의 지식인들, 특히 개신교에 입교한 지식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문맹의 퇴치와 함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교육만이 나라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개신교를 근거로 삼아서 근대적 교육사업에 투신하게 되었다. 일제에 합병 당하기 전까지 전국에는 4천 개가 넘는 학교들이 세워졌다. 교회당은 일요일에는 예배처가 되고 다른 날들에는 학교로 사용되었다.
보수적이고 정교분리적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교회가 과도하게 “정치화” 되었다는 비판도 받고 또 그들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탈정치화가 시작되었지만 개신교는 역동적 선교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한다는 차원에서 바른 길을 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개신교의 치유적 사역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개신교는 서구의 의료제도와 사회복지 제도를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선교사들은 각 지역에 병원을 설립하여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아원 등을 세워서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양육하고 그들을 교육시켰다. 이러한 치유적 사역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사역을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치유적 사역을 통해서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는 1950년대 말 이승만 시절에는 잠시 동안 그 본래의 역동적 사역의 과제를 망각하고 그와 그를 지지하는 다수의 정부각료들이나 정치가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독재를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장기집권을 위한 온갖 선거부정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죄과를 저질렀다. 그렇지만 1960년도 이승만 독재정부가 박정희 군사 구테타에 의해서 전복되고 30여 년간 지속된 혹독한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보수적이고 극우적인 다수의 개신교 집단들 가운데 한국교회 협의회에 소속된 교파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투쟁하고 수난을 당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도 역동적 사역의 본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군사독재 정치를 정당화해 준 것이 나라의 분단과 그것을 배경으로 한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것을 간파한 개신교의 의식 있는 인사들은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북한의 인위적 적대관계 청산과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운동에 앞장섬으로써 다시금 교회의 역동적 봉사 혹은 정치적 봉사를 감당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십자가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과거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던 다수의 수구적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한편으로는 미국식의 정교분리의 원칙에 기초해서 교회의 역동적 정치적 봉사를 마치 비기독교적 정치행태라고 비난했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루터의 두 왕국론을 왜곡 해석함으로써 악에 대해서 침묵하고 나아가서는 그 악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수구적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박정희를 출발점으로 한 군사독재정권을 반공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라는 의미에서 묵시적으로 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반공이데올로기의 보루인 군사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 공산주의 집단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지원하는 것이라는 왜곡된 주장을 내세우면서 이들 군사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그리고 인권탄압을 묵인 내지는 방조했던 것이다.
한국개신교의 정치적(역동적) 사역의 위기의 시작
이러한 교회의 역동적 사역이 극에 달했을 때 거기에 찬성하는 집단과 반대하는 세력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서 개신교들 안에서는 횡적 분열이 생기고 그것이 점차 심화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제까지의 교파적 분열에서 각 교파들 안에서의 분열, 즉 보수와 진보의 분열로 나아가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교파를 초월해서 보수집단과 진보집단 사이의 연대가 형성됨으로써 개개 교파 안에서의 분열대립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한국 개신교 안에서는 신앙고백을 기초로 한 분열이 아니라, 정치적 고백에 근거한 분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개신교에서는 한편으로는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정교유착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파를 중심으로 한 정교분리 내지는 정교대립이 등장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정교분리를 주장하던 한국의 수구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정교유착 내지는 정교야합으로 나아가고 교회의 정치적 사역을 주장하는 진보적 세력들은 정교분리 내지는 정교대립으로 나아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때 한편으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보수적인 교파들을 다방면에서, 특히 선교대회 등 대규모 종교집회와 개개 교회의 필요들을 지원함으로써 정교유착을 더욱 강화해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함으로써 그 세력을 약화 내지는 제거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보적 개신교의 역동적 사역 즉 정치적 봉사(political diaconia)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봉사가 위기에 처하게 된 시기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힘들지만 우선 그 요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초기 한국교회의 정치적 봉사와 역동적 사역이 도전을 받게 되는 신학적 뿌리는 무엇보다도 초기 수구적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나라의 독립과 근대적 민족국가 형성을 주도했던 민족주의적 개신교인들의 운동을 선교사들은 “교회의 정치화” 혹은 복음으로부터의 일탈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교분리 원리는 한국을 강점하려던 일본세력으로부터도 지지와 지원을 받은바 있다. 1908년 이또와 선교사들의 만남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일본은... 선교사는...”(찾아서 채울 것). 그 결과 “정치적 개신교인들”은 1910년 신민회 사건과 그 후 1919년 3.1 독립운동을 거치면서 수구적 선교사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협공을 받고 그 세력이 완전히 붕괴되다시피 했었고 교권은 전적으로 이들 선교사들과 그지지 세력인 수구적 기독교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1950년대 말 이승만 정권과 60년대 초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한 교회의 정치적 사역운동은 불행하게도 다시금 이들 독재정권들과 수구적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양편에서 협공을 당해야 했었다. 박정희 정권은 다수의 수구적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자기편에 끌어들여 그들에게 온갖 편의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로서 수구적인 교회집단들에 의해서 추구되었던 “전군신자화 운동”, “빌리 그래햄 전도대회”, 김준곤의 대학생 선교회의 “엑스플로 74대회”, “77년 복음화 성회”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정부는 이들 대회장을 건설하는데 군 병력까지 동원하여 지원했다. 이렇게 수구적 기독교 집단들을 물심양면에서 지원함으로써 역동적 사역, 정치적 봉사를 하는 진보적 집단들을 억압하고 탄압했다.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기독교 일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진보적 지식인들과 동맹하게 된다. 위기의 시간에 이념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던 집단들이 만나서 협력을 하게 된 것이다.
둘째 한국 개신교의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봉사가 교회내적으로 도전을 받게 된 것은 7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80년대에 본격적으로 그 힘을 나타내기 시작한 “교회성장론”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와 맥가브란으로 대변되는 교회성장론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미 한국개신교 안에는 감리교적 전통의 부흥운동이 60년대부터 개 교회를 중심으로 부흥과 성장을 추동해 온 전통이 있어왔다. 거의 대다수의 교회들이 부흥회라는 수단을 통해서 교회성장을 꾀했으며 따라서 수많은 부흥사와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교회성장에 뛰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이들 부흥사들은 어떤 특정한 이론이나 실천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단지 개개인의 특성들을 대변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성장론이 특별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여의도의 순복음 교회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기라는 젊은이가 한국전쟁 이후 서대문 로타리에서 천막을 치고 시작한 이 부흥회식의 운동은 처음에는 뭔가 이단적인 운동으로서 일반 교회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70년대에 들어와서 커다란 부흥을 이루고 여의도에 거대한 교회당을 건설함으로써 교회성장론 내지는 대교회주의가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교회성장론은 사실은 70년대 박정희의 경제정책인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표제어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박정희에 의한 근대화 내지는 산업화의 추동과정에서 다수의 농촌인구들이 도시 특히 서울로 집중됨으로써 서울은 새로운 면모로 팽창해 나갔고 이 때 강남 등 새로 생긴 지역에서 교회들은 이주인구들을 흡수함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큰 교회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위 강남에 생긴 대다수의 교회들, 특히 대형교회들은 어떤 선교운동의 성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크리스챤 농촌인구들의 도시로의 이주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교회성장론에 영향을 받은 한국의 정통적 개신교들 그 중에서도 장로교회들과 감리교회들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전통적 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 개 교회 차원에서의 성장전략을 넘어서서 교단차원의 성장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이 때 교단들은 제각기 선교전략을 수립하고 그 달성목표로서 5천 교회 운동 혹은 3만 교회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교단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교단의 부흥사들을 총 동원하고 개척교회들을 총회차원과 대교회 차원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실천했다. 이 때 인구팽창과 도시확대로 생기는 새로운 지역에 교파들은 다투어 개척교회를 세웠고 그러다 보니 한 건물에 층마다 각기 다른 교회들이 들어서는 웃지못할 현상까지 나타났다. 자고 깨면 새 교회와 다방이라고 사람들은 우수개 소리를 했다.
이렇게 전통적인 부흥운동과 미국에서 들어온 교회성장론 그리고 박정희의 경제성장정책이라고 하는 세 개의 운동들이 상호 맞물리고 상승작용을 함으로써 한국 개신교는 70년대에 대도시들 특히 서울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성장을 추동한 교회성장론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의 선교론과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적극적 사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김경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성령이 이끄시는 영적 공동체로서 은사와 능력이 같이해야 하며 양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 사회적 인격적체보다는 인간을 개인 영혼단위의 실체적 존재로서 파악한다는 것, 선교운동은 구체적으로 교인의 증가로서 나타나며, 선교운동은 집단적 대중운동 형식으로 전개되어 한다는 것, 개개인의 인간이 잠재능력으로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 활성화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한다는 힘의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것들이다.”
이들의 선교론과 적극적 사고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교적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자유 시장경제 원리에 기초한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모든 윤리적 동기를 배제한 철저하게 과학적인 이론체계로서 파악되는데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경제의 주체들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원리는 변질되어 오늘날에는 미국식 자본주의에서는 공급자들 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그 상대들을 극복함으로써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본주의적 기업가 정신이다. 교회성장론에 의하면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이윤극대화 정신이 지배해야 하며 이 일을 위해서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신뢰하는 “적극적 사고”(positive thinking)와 그 실천원리로서 무한경쟁의 원리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경쟁원리를 통해서 획득된 교인(혹은 고객)을 떨어져 나가지 않게 관리하는 프로그램으로서는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기업들이 판매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다단계판매방식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채택되고 있다. 교회가 실시하는 전도자 내지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다단계 판매사원이 처음에 거쳐야 하는 판매교육 프로그램을 본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훈련된 전도자나 혹은 평신도 지도자는 구역장으로 임명되어 개개 구역을 점 조직으로 운영하는 일을 담당한다. 개개 구역장은 그 구역을 키워나가서 일정한 단위로 성장하면 그것을 분열시켜서 자기가 기른 구역장에게 넘겨준다. 따라서 교회의 성직자는 이 훈련된 구역장들을 관리하는 사역을 한다. 이렇게 대교회 목사들은 대기업체의 회장의 사역을 하고 부목사들은 일정한 지역을 담당하는 사장의 사역을 하면서 교회를 운영해 나가면 된다. 이러한 사장 격인 부목사들이 점 조직인 구역을 맡고 있는 구역장들을 통제해 나간다. 따라서 오늘날 대 교회에서는 전통적 목회는 사라지고 대신 자본주의적 “경영” 양식이 등장하고, 목회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의 선포라기 보다 기업체의 광고전략 즉 “선전선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 프로테스탄드 신학의 변질과 교회의 변용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해서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교회성장론과 더불어 한국개신교는 부정적 의미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모습을 취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필자는 종교개혁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준거로 해서 한국 개신교 신학의 변질과 교회의 변용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 개신교에서는 종교적 개인주의가 지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앙공동체가 가져야할 공동체성 및 사회적 연대성을 상실하고 있다. 중세말기 보편논쟁에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집단주의에 대항하여 강력한 힘으로 등장했던 개체주의를 지지했던 유명론(Nominalismus)이나 독일 신비주의자들인 마이스터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dt), 타울러(Tauler) 등이 주장한바 인간은 개체로서 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논제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근간을 이룸으로써 이러한 개인주의가 곧 프로테스탄트 신학적 방향을 자리잡아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당시에 새롭게 등장했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사상이 지향했던 개인주의적 요소도 이러한 종교개혁 신학의 기초가 된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 신학이 담고 있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종교개혁신학에서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가톨릭의 교황 체제이론과 함께 그 실천방안으로서 사제들을 통한 구원의 매개라는 집단주의적 모순을 거부하고 개개인이 한 인격체로서 하나님과 책임적으로 마주서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종교개혁 신학의 세 가지 핵심적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공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의인, 만인제사론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은 모두가 당시 로마 가톨릭 신학에 근거한 공로의인, 성직자 독점주의와 거기에 기초한 그리스도인들의 부자유를 극복하려는 것에 그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개신교적 전통들은 불가피하게 개인주의 혹은 개인의 성숙성과 거기에 기초한 책임성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신학전통에서의 개인주의는 그것이 빠질 수 있는 부정적 성향들, 우리 나라의 개신교가 직면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기복신앙, 성도들의 공동체성의 부정, 교회의 사회적 책임성과 연대성의 상실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부정적 성향들 가운데서도 한국 개신교가 가진 가장 부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기심에만 기초하고 있는 기복사상이라는 것이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러한 기복사상은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전통적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샤마니즘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한 개신교들이 신자들 심성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기복적 요소를 승인함으로써 이 샤마니즘과 일정 정도 유착관계에 들어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샤마니즘과의 타협 내지 유착현상은 외래종교로서 한국에 전래되었던 불교에서도 잘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불교사찰 경내에 삼신각이나 칠성각을 지어줌으로써 샤마니즘적 요소를 수용한 데서 잘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복신앙을 기초로 한 샤마니즘과 기독교간의 유착관계가 처음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시도된 것은 조용기 계통의 순복음 교회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삼박자 축복론”이 그 대표적 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 3:2)고 하는 특정 성서구절을 그는 마치 기독교 진리 전체를 포괄하는 것처럼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대다수의 목사들의 설교 도중 연발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라는 도식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샤마니즘적 축복중심의 신학이나 설교는 종교개혁 신학의 성서해석의 근간인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라는 해석학적 도식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 없는 복음 선포나 복음 없는 율법 선포는 기독교 전체진리를 왜곡한다는 루터와 칼빈의 주장에서 볼 때 순복음 교회적 설교는 일방성을 면하기 어렵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 없는 부활의 설교와 같아서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 즉 율법을 배제한 “꿀맛 같은”(루터) 복음만을 고집했던 종교개혁 시대의 반율법주의자(Antinomians)들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용기가 말하는 “순복음”이란 이런 의미에서 성서 전체를 구성하는 두 기둥, 즉 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설교해야 한다는 종교개혁적 전통을 떠난 이단적 사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책망과 형벌을 통해서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하는 율법 없이 항상 꿀과 같이 단 복음만을 선포함으로써 성서의 전체 진리를 벗어나 기복주의로 빠지게 된 것이다. 이른바 순복음의 설교는 매와 채찍은 없이 당근과 달고 단 사탕만을 주면서 아이를 키우려고 하는 요즘의 부모의 자세와 같아서 아이를 항상 부모에게 요구만 하는 성숙하지 못한 존재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부모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조용기 이전에도 한국 개신교 안에는 다수의 부흥사들은 대체로 기복신앙적 설교보다는 종말론적 설교를 통해서 죄인들의 묵시문학적 고통들로 위협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조용기처럼 철저하게 꿀맛 같이 단 복음만을 일방적으로 설교한 이는 없었다. 부흥사들 가운데는 대체로 종말론적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을 위협함으로써 그들의 회심과 참회를 요구하는 지나치게 율법설교를 하기도 했다. 70년대에 들어와서 교회성장론이 그 힘을 발휘하면서 다수의 개신교 목사들이 이러한 조용기식의 축복설교를 모방해 가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 이전에는 목회의 성공한 분으로서는 대개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를 꼽았으며 많은 젊은 성직자들이 그의 설교내용을 모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 스타일과 발음을 모방하기까지 해서 남한 출신 목사들이 설교할 때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크게 부각되자 수많은 성직자들이 조용기의 샤마니즘적 축복설교를 모방하고 그의 따발총 같은 경상도 사투리를 흉내내는 사람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둘째 한국 개신교는 개 교회주의에 집착함으로써 공교회성을 상실하고 특수집단으로 게토화되거나 성직자나 특정인의 사유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의 개신교 특히 장로교 계통의 교회는 역사적으로 가톨릭이나 성공회와 같이 주교제 교회보다는 회중교회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개교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장로교 계통의 개교회주의가 한국의 개신교 역사발전 과정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자 전통적으로 주교제도의 교회들까지도 그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예를 들면 감리교회와 같은 주교(감독)제 교회도 이제는 더 이상 목회자의 임면권이 주교에서부터 개교회로 넘어 간지 오래고 보다 더 강력한 주교제 교회인 성공회마저도 유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직자 임면권은 독일의 경우 16세기 토마스 뮌쳐가 이끈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이 요구했던 12개 논제에 등장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은 1918년 독일의 민주혁명을 통해서 탄생한 “헌법적 교회”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혁명 전까지는 주교들이나 영주들이 목사들의 임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400년이 지나서야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하는 종교개혁적 명제 하나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개 교회의 권리의 신장을 배경으로 하고 발전된 개신교는 그것이 가진 부정적 측면 즉 개교회주의가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 각국으로 전파된 개신교들은 각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들을 배경으로 하고 너무나 다양하게 발전하다 보니 교회가 가져야 할 공교회성을 상실하는 사태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19세기의 세계선교 이전에 이미 유럽과 북미 개신교들 안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개신교가 전세계로 퍼져나가자 이러한 개 교회주의는 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 정치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우선 신학적으로는 종교개혁 전통을 완전히 벗어난 다수의 이단적 종파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교회 정치적으로는 개개 교회들이 통제수단을 완전히 벗어난 집단들로 나타나기도 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나 교회 정치적으로나 개신교는 그 공교회성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우리가 공교회성을 말할 때 그것은 두 가지 차원을 내포한다. 첫째는 세계개방성을 말하고 둘째는 사회적 공공성을 의미한다. 공교회성으로의 세계개방성을 말할 때 우리는 종교단체로서의 교회가 어떤 수도원과 같은 폐쇄적인 은둔자의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가 처한 지역에서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공교회성으로서 공공성은 교회가 어떤 사적 조직이나 단체로서가 아니라 공적 집단으로서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책임성을 다 하는 것을 의미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등장한 에큐메니칼 운동(WCC)은 사실상 이러한 개신교의 공교회성의 상실과 그 결과로 나타난 폐쇄적인 개교회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영미 계통의 운동가들이 지향했던 교회의 세계개방성의 강화나 유럽 계통의 운동가들이 지향했던 교회의 공공성의 강화는 어떤 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끌어간 두 축으로서 상호보완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에큐메니칼적 언어로 말하면 이 운동에서 교파분열을 극복하려고 한 “교회의 일치운동”과 동시에 악한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의 관철이라고 하는 “해방신학적 운동”이 상호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은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매우 독특한 변조를 보이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은 인권신장과 민주화 그리고 민족통일과 평화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이 운동의 두 번째 축인 “해방신학적 운동”이 선두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권, 민주화, 정의를 위한 투쟁이 선두에 나선 당시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교회일치”라는 표제어는 후퇴했었다. 아니 이러한 해방신학적 운동이 교회를 진보와 보수로 더 분열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해방신학적 운동을 통해서 한국의 개신교는 그 공교회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교회가 그 세계개방성과 공공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시작된 이후에는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원인은 우선 해방신학적 운동의 구체적 대상이었던 군사독재정권의 퇴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감각의 상실은 이제까지 해방신학적 운동으로서의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서구 교회들의 재정적 지원의 중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재정위기에 봉착한 한국교회협의회는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구적인 교회들에게서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협의회는 정관을 바꾸어 이들 보수교단의 책임자들을 의장으로 영입함으로써 이게까지의 운동의 주도권을 넘겨준다. 따라서 이 단체의 이제까지의 해방신학적 운동들은 완전히 후퇴하고 그 대신 이들 보수적인 교회정치가들이 지향하는 “교회일치 운동”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교회성장론에 기초해서 대형교회를 이루어서 교단의 지도자가 되었고 따라서 개교회주의에 심취해온 이들 보수적인 교회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일치 운동이 성공을 거두리라고 보는 이는 적다. 더욱이 세계개방성과 공공성을 목표로 하는 공교회성의 회복을 이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이 보인다.
이러한 공공성을 상실한 개교회주의의 폐해가 70년대에는 개인이 세운 교회를 팔고 사는 상업주의로 나타났었다. 당시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할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재산을 투자하여 교회를 세우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비싼 값으로 교회 건물과 함께 교인까지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겼었다. 이것은 목회 하는 일을 영리를 목표로 하는 기업운영과 혼동하는 데서 생긴 일이다. 80년대 90년대에 들어와서는 크고 적은 교회들에서 목회세습이 시작되는데 이것은 개교회주의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합동파 장로교회의 충현교회의 김창인 목사가 세습을 완수했고 감리교회의 광림교회의 김선도 목사도 이로 인해 진통을 겪고 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교회 세습은 아니지만 국민일보를 통해서 조용기목사의 영향력과 재정이 세습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셋째 한국의 개신교는 배타적 교파주의에 사로잡혀 있어서 에큐메니칼 정신에 따라서 교파간의 협력은 물론 타종교에 대해서 적대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개신교의 배타적 교파주의는 개교회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배타적 집단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앞서 교파주의는 그것이 세계개방성과 공공성을 결함으로써 공교회로서의 전통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개신교의 개교회주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파주의는 미국의 교파교회의 선교를 통해서 선교초기부터 한국 땅에 이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선교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여타의 교파교회들은 예외 없이 미국의 모교회의 교파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하면 한국 선교는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생겨난 원주민의 교회라기 보다는 미국의 교파의 확대 즉 그 교파의 이식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교파들이 아니라 이들의 지원을 받는 선교단체들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여타의 선교지 교회들과 한국의 교회들은 확실하게 구별된다. 교파가 아니라 선교단체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된 지역의 교회들이 매우 자립적인 성격을 가진 것은 이들이 특정 교파의 교리나 예식 등에 크게 지배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교파교회들은 선교 초기부터 매우 배타적이었다. 이들 교파교회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전통문화나 종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다른 교파들에 대해서도 매우 배타적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개신교 교파들의 등장과정, 교리형성과 그 대립투쟁과정에서 상호간에 지니고 있던 적대적 자세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 초기에는 몇몇 교단 선교사들 사이에는 외적 조건들로 인해서 다소의 협력관계들이 있었으나 이러한 협력정신이 지속될 수가 없었다. 특히 해방직전 일제에 의해서 조선교단으로 강제 통합되었던 개신교는 해방이 되자마자 “교회재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교파교회로 돌아갔던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선교사들은 이러한 교회재건을 지원함에 있어서 역시 배타적 교파주의를 충동함으로써 한국 교회에서는 다시금 교파주의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된 이후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교파주의의 극복의 노력은 그러나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에 의해서보다는 선교사들의 모교회의 교회일치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전적으로 선교 모교회의 성격과 자세에 좌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파주의를 극복한 교회일치 운동은 한국에서는 약간 개방적인 장로교와 감리교, 성공회와 구세군 그리고 복음교회 등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추진되었다. 이들을 제외한 보수적인 장로교회와 여타의 교단들은 철저히 배타적인 교파주의에 얽매여서 교회일치 운동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을 매우 비판했고 적대적으로 대했다. 왜냐하면 이 운동에는 다수의 사회주의권 교회들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 즉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교단들 자체 안에서도 교리적 정통성이나 신학적 차이들과 교회정치적 이해관계들의 대립으로 인해서 항상 갈등이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조직 안에서는 항상 지도자들의 인선에서의 안배와 함께 사업계획이나 실천에서 이권나누기가 교회일치운동을 어렵게 만들었고 왜곡시켰다. 이렇게 되다보니 에큐메니칼 운동의 본래적 정신 즉 교회일치와 복음진리의 파지라고 하는 목표는 사라지고 교권정치가들의 자리다툼이나 이권다툼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거나 몇몇 이른바 에큐메칼 전문가의 놀음판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교권정치가들의 명예다툼이나 이권다툼의 장이 됨으로써 교회일치운동이 명실상부하게 전체 교회운동으로 교단이나 개개 교회의 운동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실상 교회일치운동은 몇몇 엘리트 성직자들의 운동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운동이 됨으로써만 진정한 의미에서 분열되고 대립된 교파들을 하나로 만들고 그 기초 위에서 그 동안 한국의 개신교들이 서로 분열함으로써 상실된 신뢰성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교회일치 운동을 통해서 다른 교파에 대한 이해와 신뢰성이 구축될 때 비로소 개신교는 다른 세계적 종교들, 특히 불교와 유교와 대화할 수 있고 그들과 협력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에 커다란 모범이 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기, 더욱더 세속화되고 물질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종교들 사이의 이러한 이해와 협력이 없이는 “상호 매개적 기관”으로서 교회가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화를 통해서 전통적 가치체계들에서 해방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물질적 가치들이 서로 상충하는 조건하에서 교회는 하나의 해석공동체로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 주는 데서 “상호 매개적 기관”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Wolfgang Huber).
넷째 한국의 개신교는 男性中心의 家父長制와 파쇼적 聖職者主義에 집착함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의 만인사제론과 평등주의 정신을 망각하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제창한바 있는 만인사제론은 로마 가톨릭주의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왜곡된 차별과 함께 남성의 성직독점이라고 하는 반성서적 제도를 타파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직을 신이 제정한 하나의 불변의 질서(ordo)로 규정하고 이 질서에 속한 성직자와 그 질서에 속하지 못한 평신도를 철저하게 차별했었다. 성사행위에서 성직자에게만 속한 영역과 평신도들에게 속한 영역이 철저히 구별되었다. 예를 들면 설교나 성례전 집행 같은 것은 철저하게 성직자의 것이어서 평신도는 그것들을 집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성직화(Klerikalisierung der Kirche)는 사실상 성서와는 무관한 단지 교회의 전통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루터는 여기에 대항하여 서품 혹은 안수를 불변의 질서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직무 맡은 사람을 위한 축복 혹은 축성(Segen)으로 파악함으로써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차별을 극복하려고 했다. 성서에 따르면 안수나 서품은 직무상의 특수성만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불변한 질서가 아니며, 이러한 직무를 맡은 사람은 서품을 받는 것은 단지 그 일을 전문적으로 혹은 직업으로서 행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품식의 목적은 따라서 신의 특별한 질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축복을 받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가톨릭이 불변의 질서로 삼았던 다섯 개의 성사를 반성서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결혼과 같은 자연적 질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견진(입교식)과 같은 종교적 의식도 신의 불변하는 질서로 이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성직자는 전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설교와 성례전을 집행하는 직무(Amt)를 교회로부터 상시적으로 위탁받은 사람일뿐이다. 그런 점에서 성직자는 뭔가 질서상으로 평신도와 구별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성직자는 전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교회의 직무를 받은 사람이고 평신도들은 그런 세속적 전문직업에 종사하면서 교회의 직무를 맡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직자와 평신도는 각각 어떤 질서상의 구별보다는 직무상의 구별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에서 볼 수 있는 절대화된 성직자주의는 성서적 전통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적 전통을 벗어난 성서의 왜곡된 해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근래에 와서 교회를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전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성직자들의 파쇼주의(Hanfrid Müller)의 성향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그리스도가 준 직무의 위탁받은 자로서 성직자가 교회와 그 소속원들을 섬기기보다는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행태가 비일비재하다. 교회와 그 소속원들을 마치 자신의 사유재산의 일부처럼 간주하여 팔고 사는 일이나 일부 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교회의 세습 등도 이러한 파쇼적 성직자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방송을 통해서 드러난 여신도들에 대한 성직자들의 성추행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러한 성직자 파쇼주의는 교회의 남성화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파쇼적 성직주의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차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남성중심의 교회로 만들었다. 이러한 교회내에서의 여성차별은 일차적으로는 여성들을 안수제도에서 배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교회에서의 여성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까지 주장하는 이론들이 신학자들에 의해서 조작되었다. 따라서 영혼이 없는 여성에게 성직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론이 심지어는 가톨릭 교회의 성가대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오늘날까지도 바티칸 성가대에는 여성이 배제된 채 소푸라노와 알토의 역을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들이 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안에 자리 잡은 파쇼적 남성중심주의는 급기야는 여성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려는 광기로 나타나 이른바 마녀사냥을 하기에까지 이른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안에는 이러한 노골적 마녀사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성멸시와 여성적대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다수의 교단들이 여성목사 안수를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장로 안수도 거부하고 있다. 여성안수를 인정하고 있는 교단들에서도 여성성직자들은 대체로 부수적인 사역만을 담당하고 있어서 총회나 노회와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 기구에서는 여전히 소외당하고 있다. 개개 교회에서도 여성 성직자들은 역시 주변적 존재로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여성 평신도들도 남성 평신도들과는 달리 교회에서는 주변적 존재로 남아서 그들에게는 주로 봉사하는 직무들이나 주어진다. 뭔가 지배하고 결정하는 기구들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남는다. 이를 정당화하는 성서구절로서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바울의 말이 금과옥조로 사용된다. 이 바울사도의 말은 당시 한 특정한 교회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과 관련해서 여성들에 대한 권면인데 그것을 그 동안 교회는 여성억압의 기제로서 일반화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세기는 교회의 성직화와 남성화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인사제론을 통해서 이러한 모순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종교개혁 전통을 이어받은 개신교에서도 이러한 교회의 성직자 중심주의와 남성중심주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암아 있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이러한 성직자 중심주의와 남성중심주의는 전통적 가부장주의와 뒤얽히면서 가장 고치기 힘든 악습으로 남아 있다.
다섯째 한국개신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正統主義 保守主義 신학만은 받아들임으로써 종말론적 來世主義와 함께 심리적 內面主義에 빠지고 세계개방성을 상실함으로써 신학적 교회적 게토화로 인해서 역사의식의 상실과 사회적 책임성을 망각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한국에 개신교를 전해준 선교사들은 대체로 보수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보수적 선교사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이들이 내세주의적이고 탈 역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한국 선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세기말 20세기 초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은 일본의 제국주의의 침략이 이미 시작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서 그것을 완결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식민지화라고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개신교를 받아들였던 진보적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개신교적 신앙과 그것의 전수자인 서구 세력의 지원을 통해서 국가의 자주독립과 더불어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이러한 운동은 이미 언급한대로 교회 안의 집회에서 설교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밖에서 일어나고 있던 만민공동회의와 신민회 등에 동참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자주독립 운동과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개신교 지도자들의 운동은 선교사들과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억압을 받았다. 보수적 선교사들은 이 운동을 “교회의 정치화”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정치화는 보수적 신학노선에 기초한 “政敎分離”의 원리에 반할 뿐만 아니라 처음 시작해서 기초를 마련해 가는 한국선교의 길을 위태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은 조선반도를 정치적으로 장악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을 얻지 못한다면 선교활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선교사들은 이 운동의 주동자들을 교회에서 배제 내지는 추방함으로써 교회를 탈정치화함과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충돌도 피하려고 했다. 이리하여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협공을 당하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개신교의 탈정치화 작업은 1911년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신민회원들이 다수 체포되고 그들 중 105인이 중형을 선고받음으로써 끝나게 된다. 그리고 1919년 3.1 독립운동과정에서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개신교 세력은 완전히 진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한국 개신교의 리더쉽은 보수주의적 선교사들과 그들의 지 세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과 동시에 교회는 보수적이고 내세적인 교회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착화는 20년대에 들어와서 강력하게 전개되었던 사회주의 지향적이었던 “반기독교 운동”의 도전으로 인해서 더욱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보수적 교회에서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는 현세에서 희망을 상실하고 피안적인 멘탈리티와 내면적 신앙의 세계로 몰입해 들어가게 된다. 3.1 운동의 실패로 좌절한 사람들은 이제는 더 이상 민족의 자주독립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심리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희망을 피안적인 것에 두게 되었다. 이러한 피안적 희망이 결과적으로는 내면적 신앙으로 정착화 되어 굳어진 것이다.
이렇게 정착된 내세주의로 인해서 한국 개신교는 해방 될 때까지 이렇다할 역사의식이나 사회적 책임성을 느끼지 못했다. 해방이후에 이러한 보수적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 등장했지만 대다수의 보수적 선교사들과 그 동맹세력에 의해서 장악된 보수주의의 탈세상적이고 종말론적 신학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고 사회적 책임성을 가진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60년대에 들어오면서 박정희로부터 시작되는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와 통일 운동에서 커다란 사역을 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군사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문민정부가 시작된 이후에는 앞서 말한 “교회성장론”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도입됨으로써 몰아치는 파도에 이들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을 끝난 것 같이 보였다. 진보적인 교단 안에서도 성장주의가 판을 치고 그것을 통한 성과가 크게 부각되면서 소수의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 개신교는 더욱더 탈정치화 내지는 사회적 책임성을 망각한 교회로 정착되고 있다.
여섯째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미 언급한바 있는 자본주의적 경제논리의 종교적 변종이라 할 수 있는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치열한 競爭論理와 戰鬪的 勝利主義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경쟁논리와 승리주의의 뿌리는 위에서 말한 교회성장론에 두고 있다. 개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웃의 교회와 경쟁을 해야 한다. 그 수단으로서 교회는 이른바 부흥회라는 것을 이용했다. 선교 초기에는 이 부흥회는 기독교를 알리고 선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부흥회가 오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이른바 “100만 명 구령운동”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나라 잃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는 나라 잃고 분노와 좌절에 처한 백성들로 하여금 현실세계를 떠나서 피안적 세계를 지향하게 함으로써 종교적 평안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구령운동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당시 조선총독 이또와 합의한 것, 즉 정치적 문제는 일본이 담당하고 종교적 문제는 선교사들이 담당한다는 합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개신교인들을 교회에서 배제하거나 추방함으로써 교회를 탈정치화 하는 것을 그 궁극적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치른 다음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 때만 해도 이 운동의 목표는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동시에 교회를 재건하는데 일정 정도 사역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60년대에 들어와서 부흥운동은 개개 교회의 교인들의 약화된 신앙생활을 재충전하는 데 중점이 주어지면서 다른 한편 교회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다시 경쟁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당시 거의 모든 교회들은 1년에 한두 번씩 부흥회를 열었고 이 운동은 점차 자기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재충전은 이차적 목표가 되고 교인숫자 늘리기에 집중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부흥회 때는 교인들을 동원해서 이웃교회들의 교인들을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점차 그 강도를 달리하면서 교회 안에서 일상화 혹은 내면화를 꾀한다. 이것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써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구역을 점조직으로 운영하고 이것을 통해서 이른바 “총동원 주일”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수시로 사용되었다. 구역을 통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판매시장에서의 경쟁수단의 하나인 다단계 판매조직을 본뜬 것으로서 공정한 경쟁을 거부하고 독점적으로 시장을 장악하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총동원 주일”은 일종의 당시 독재정권의 군사문화를 본받은 것으로서 그 배경에는 경쟁을 넘어서 적을 극복하려고 하는 승리주의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흥운동을 통한 교회성장 논리는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경쟁논리와 군사문화적 승리주의가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회간의 경쟁과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교회들은 앞다투어 교인들을 모아들일 수 있는 수단들을 강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 교회를 중심으로 한 버스 사재기였다. 다른 교회에 교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더 먼 곳에서 교인들을 수송해 오기 위해서 교회마다 버스를 사는 것이 70년대 대 유행이었다. 일요일이면 교인들을 가득 싣고 찬송가를 부르는 버스들이 이리 저리 질주하였다. 이는 마치 당시 군대에 동원되어 가는 청년들이 버스를 타고 군가를 부르며 지나가는 것을 연상하게 했다. 이렇게 서울에 있는 대교회들은 사방으로 버스를 보내서 교인들을 실어왔는데 이것은 마치 백화점들이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재래시장 주변이나 아파트 단지에 많은 버스를 보내서 고객들을 싹쓸이 해 오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경쟁원리와 승리주의는 교회의 성장을 위한 목표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이나 고위직 평신도들의 명예다툼에서도 나타났다. 한국 개신교 안에는 에큐메니칼 운동 차원에서 몇몇 직위들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장로교회는 지역단위의 명예직인 노회장과 전국단위의 것인 총회장이 있고 감리교회에서는 지역단위의 명예직인 감리사와 전국단위의 명예직인 감독(주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지역단위의 노회나 전국 단위의 총회에서 선출된다. 매년 열리는 총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심 있는 안건은 이들의 선출과 관련되어 있다. 다수의 경쟁자들이 출마하는데 이들 사이의 경쟁은 치열하며 승리를 위한 싸움은 격렬하다. 그 강도에 있어서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선거의 것을 넘어설 정도다. 후보자들은 지연, 파벌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데 특히 80년대 이후부터는 금품을 동원하는 사람이 당선되기 일쑤다. 후보자들은 총대들의 체재비와 여비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표를 얻기 위해서 돈 봉투를 돌리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김홍도 사건이 MBC 방송을 통해서 폭로되고 감독선거에서 후보자들이 공공연히 돈을 주고 표를 산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었을 때 한 감리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돈 받는 재미없으면 누가 교회 정치합니까.” 그는 교회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을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성직자들 특히 교회정치권에서 배회하는 목사들과 장로들은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로부터 금품이나 향연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돈이 있는 후보자들은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한 후보자들은 빚을 지면서 까지 선거를 치른다. 그리고 돈을 쓰지 않는 후보는 선거에서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표의 향방을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역시 돈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의 명예직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과 덕망으로는 불가능하고 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돈을 쓰는 목사들은 부끄러워서 숨어서 돈을 마련하거나 은밀하게 돈을 뿌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돈을 만들고 사용하는 데는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까지 총동원되고 있다. 이들 후보로 나선 목사가 돈을 쓸 수 있도록 교인들이 특별 헌금을 할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 후보 교회의 장로들이 나서서 총대들에게 돈을 뿌리고 그들을 접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타락한 선거는 이제는 공공연히 교회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된 돈의 지배가 교회의 일상적인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당선된 교회에서는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크게 잔치를 벌리고 현수막을 내걸어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개신교 안에서 승리주의가 극에 달한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총회장이 되거나 감독이 되는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고 학식이 높은 성직자가 아니라 교회정치에 전념하는 어느 면에서 매우 저질의 속된 인물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개신교를 지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그가 그렇게도 경계했던 맘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명예직을 위한 선거에 돈이 판치기 시작한 것 역시 교회의 성장론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승리주의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성장원리를 통한 성공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한국개신교의 신뢰성 회복의 과제들
이러한 신자유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교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성장이론이 한국의 개신교를 휩쓸고 지나간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의 현재의 실상을 우리는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그것은 위에서 본대로 개인주의, 개교회주의, 교파주의 등을 낳았고 한편으로는 성직자들을 가부장적 파쇼주의와 경쟁논리에 의한 전투적 승리주의로 이끌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샤마니즘적 기복주의와 피안적 내세주의로 내몰아서 결과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과 종교개혁 전통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개신교의 실상의 주된 원인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는 일차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기초로 하여 무제약적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인간성을 파괴하고 공동체성을 부정하는 자본주의적 경제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제원리는 인간들로 하여금 물질적 가치만을 숭상하게 만들고 따라서 이것을 얻기 위한 경쟁(시장)원리를 앞세우며 이 경쟁을 통해서 승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선교라는 이름으로 무제약적 경쟁을 추동하고 그 결과로 다수의 교인을 획득함으로써 대 교회를 짖는 목회자는 성공한 목회자로 추앙된다. 이런 성공한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차지할 수 있다. 이러한 전투적 승리주의가 우상화됨으로써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어떤 물질적 성과를 달성한 사람들만이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직책은 신앙과 인격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성과에 따라서 주어진다.
1.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개신교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일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갈릴리에 나타나 첫 설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 1:15). 이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니 모든 사람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이 나라 운동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으니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이 나라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고침으로써 이 나라에 동참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마음을 고쳐먹어야 하며 동시에 마음을 고쳐먹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사람만이 이 하나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의 동참과 삶의 방식을 고치는 회개행위는 동시적이고 병행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선포는 모두 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모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교회 자체가 아니리 하나님 나라였다. 이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예수의 정신과 선포를 바로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수단이지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단과 목표를 도치시킨 것이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며 그 선구자는 우리가 잘 아는 성 어거스틴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예수의 재림이 지연됨으로 인해서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했고 그리스도의 도래를 종교적으로 해석해서 교회 안에서 성령의 내재와 성만찬을 통한 임재로 설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와 성직자들이 이러한 종교적 의식을 독점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구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특히 중세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함으로써 예수의 메시지를 왜곡하고 교회 자체가 뭔가 역사적으로 완결된 실체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교회주의 교권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체를 해체시켜 뭔가 비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역사적 실체로 남은 것은 교회뿐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체를 해체시킨 것은 비단 가톨릭교회만은 아니다. 종교개혁에서도 몇몇 종교개혁 좌파들을 제외하고는 주류세력들은 역시 하나님 나라를 뭔가 공간적으로는 피안적이고 시간적인 것은 종말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체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던 재세례파나 토마스 뮈쳐 등 농민전쟁을 지원했던 기독교 세력은 철저히 박해를 당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주의를 목표로 한 종교개혁의 주류에 의해서 이단으로 몰렸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와 동일시되거나 아니면 뭔가 피안적이고 종말적인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에서 말한 것 같이 “이 땅에 임할 실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삶 혹은 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예수가 마태복음 20장에서 매우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역사적 실체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톨릭에서 말하듯이 교회와 일치될 것도 아니고 개신교인들이 말하고 있듯이 뭔가 피안적이고 종말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하나님 나라 건설운동에 매진함으로써 신뢰성을 상실한 한국교회의 미래의 과제를 찾아보자.
첫 번째 예수는 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포도밭의 일꾼들의 비유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포도밭 주인은 아침 일찍이 나가서 일꾼들을 불러 모아서 하루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씩을 주기로 하고 농장에 보낸다. 그는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다섯 시에도 길거리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일터로 보낸다. 그리고 저녁에 일이 끝나고 나서 제일 나중에 와서 단지 1 시간만 일한 사람들부터 불러내서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와서 하루종일 일한 사람들이 불평을 말한다. 어떻게 하루 종일 12시간 이상 일한 사람과 1시간만 일한 사람이 동일한 노임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포도밭 주인은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 20:13-16). 자본주의적 원리에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이러한 일한 만큼의 대가원리는 시간적 차원과 생산성의 차원을 내포하는데 오랜 시간 일한 사람이 짧은 시간 일한 사람보다 더 많은 대가를 받고, 또 같은 시간 동안 일했어도 더 많이 생산한 사람이 더 많은 노임을 받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생선성에 의한 성과급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업적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매우 과학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러한 업적주의는 철저하게 거부된다. 여기에서는 일한 사람들의 업적이나 생산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위한 필요성이 우위에 온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원리를 성직자들이 아니라 현대판 세속적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칼 마르크스가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기독교가 가장 혐오하고 적대적으로 대했던 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가 하나님 나라의 경제원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에빌 부른너의 말대로 공산주의는 왜곡된 자본주의를 숭상하고 그 세력과 결탁한 기독교에 대한 심판이 아닐까.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는 과학적이고 사회주의는 도덕적이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와서 일하고 더 많은 노임을 원하는 사람은 업적주의를 내세우는 최초의 자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자기의 뜻과 선함으로 주장하는 포도밭 주인(하나님)은 도덕적, 아니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업적주의 사회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도덕성과 종교성에 기초한 사회, 인간이 업적대로 대우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 대접받는 사회, 인간이 공로에 의해서 의롭다 인정받는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의롭다 인정받는 사회,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회, 즉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업적사회에서는 사회적 장애인과 같은 약자들은 더욱 고통스럽게 살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극복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 한 시간만 일하고 업적도 적은 사람이 경험했듯이 - 동일한 대우를 받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질서이다. 우리는 그 동안 계명을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피안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회피해왔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성서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질서를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세베대의 두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의 수난의 길을 오해하고 그가 승리하면 자신들을 좌우편에 앉도록 해 달라는 간청을 한다(좀더 후기에 기록된 마태복음에서는 무지했던 제자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그 어머니가 이런 간청을 한 것으로 수정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라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마태 20:22-28). 이 세상의 정치질서에서는 집권자들이 국민에 대해서 권세를 부리고 마음대로 처리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는 통치자는 국민을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높은 자는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 되어야 한다. 이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온 하나님의 아들은 지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고 스스로를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경쟁주의나 승리주의는 거부된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Dietrich Bonhoeffer)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강자로서가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약한 자로서 모든 사람을 섬김으로써 그들을 구원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는 인간과 세계를 “밑으로부터의 관점”(Blick von unten)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사의 거대한 사건들을 한번 밑으로부터, 즉 사회로부터 차폐 당한 자들, 혐의의 대상이 된 자들, 학대받는 자들, 권력이 없는 자들, 억압당한 자들, 경멸당하는 자들, 간단히 말해서 수난 당하는 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경험이다. 우리 시대에서 비꼬는 것이나 시기심이 마음을 찢어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큰 것과 적은 것, 행복과 불행, 강한 것과 약한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또 우리의 시각은 위대한 것, 인간적인 것, 권리, 자비심에서 보다 분명하고 자유롭고 유혹 받지 않게 되며, 따라서 개인적 고통이 개인적 행복보다 세계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관찰하고 행동하는데 유효한 열쇠가 되며, 유실한 원리가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관점이 영원히 불만족한 것에 가담하는 것이 되지 않고 우리가 원래 밑으로부터 혹은 위로부터의 차원을 뛰어넘어 뿌리를 두고 있는 바도 고차적인 만족감으로부터 모든 차원에서의 삶을 바르게 평가하고 그렇게 긍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