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본회퍼의 삶
행 동(본회퍼의 시)
순간의 쾌락에 동요되지 말고, 정의를 단호히 행하고,
가능성에서 흔들리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에만 자유가 존재한다.
두려워 주저하지 말고 인생의 폭풍우 속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이 너를 따르리니,
자유는 그대의 혼을 환호하며 맞아 주리라.
(“자유의 途上에 있는 정거장” 가운데서)
이 시는 1945년 4월 9일 히틀러의 나치정권에 저항하다가 독일 바이에른 주에 있는 한 작은 마을 플뢰센베르크(Flössenberg)에 있는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서 수많은 나치정권의 반대자들과 여러 나라의 포로들과 함께 처형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시이다.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나치의 종말을 꼭 한달 앞둔 시점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만일 나치가 한 달만 일찍 몰락했거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처형이 한 달만 연기되었어도 그는 살아남아서 명석한 신학자로서 그리고 용기 있는 목사로서 우리 시대에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크게 공헌하였을 것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행동적 지식인이었으며 현실적인 것을 단호히 붙잡은 정의와 용기의 투사라는 것을 발견한다. 성직자로서 독재자 히틀러 암살에 가담한 것이나 부르주아적 유복한 가정의 출신으로서 수난당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민중의 편에 선 이 보기 드문 위대한 인물로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고자 하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독일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이리 페쳐(Iring Fetscher)가 신학자 골비처를 기리기 위한 글 "테러리즘의 문제들“(Problem des Terrorismus)에 글에서 언급했듯이 역사상 성 프랜시스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성인들을 거쳐 체 게바라에 이르기까지 진정 부유한 부르주아적 가정 출신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난당하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연대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본회퍼에게도 해당된다. (Andreas Baudis, Richte unsere Fuesse auf den Weg des Friedens, Chr.Kaiser, 1979, S. 193-200).또 본회퍼는 오늘날 양심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칼 바르트 이후에 현대의 신학적 사조를 새롭게 바꾸어 놓은 사람이었다.
1. 본회퍼의 어린 시절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7남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칼 본회퍼는 네덜란드에서 이주해온 가문 출신으로서 1912년부터 베를린 대학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요 교수로 활동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부르주아적 가문들의 가풍을 따라서 말수가 적은 매우 위엄 있는 인물로서 시간을 매우 엄수하였고 따라서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대단히 엄격한 편이었다.
본회퍼의 어머니 파울라 폰 하세(Paula von Hase)는 남부독일의 귀족 가문의 딸로서 그녀의 부친은 황제 빌헬름 II세의 궁정 설교자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예나(Jena) 대학의 저명한 교회사 교수이기도 했다. 이러한 귀족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자란 어머니 파울라는 성격이 낙관적이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좋아했으며 활동적이고 모든 일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부모 밑에서 그리고 여러 남매들과 함께 성장한 디트리히 본회퍼는 어머니를 닮아서 성격이 매우 낙천적이었고 모든 일에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책임감이 강하며 자기가 맡은 일이나 직무에 대해서 엄격하고 책임적인 자세를 취하곤 했었다.
1916년 본회퍼의 가족은 그 당시 저명한 대학교수들이 많이 살고 있던 지역인 베를린의 그뤠네발트라는 곳으로 이주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명성을 날리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의학자 히스와 헤르트빅, 역사가 한스 델부뤼케(Hans Delbrücke) 등이 살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형편과 주변의 분위기가 본회퍼로 하여금 청년시절부터 학문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즉 그는 학자가 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규정했던 것은 1917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형 발터(Walter)가 전쟁에 나가서 죽고, 그것으로 인해서 끔찍하게 상심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열두 살짜리 디트리히 본회퍼에게 커다란 상처와 인상을 남겨주었다. 이러한 아픈 경험이 그로 하여금 후에 목사와 신학자가 될 결심을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2. 본회퍼의 청년시절
그는 1923년 가을 그의 나이 열여섯에 튀빙겐(Tübingen) 대학에 입학해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거기서 당시 저명한 성서주의자로 알려진 신약학자 아돌프 슐라트(Adolf Schlatter)와 빌헬름 하이트뭴러(Wilhelm Heitmüller)의 강의를 듣고 또 당시 위대한 철학자 칼 하임(Karl Heim)의 강의를 듣는다. 1년 후 그는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가서 거기에 등록하고 주로 교리사와 조직신학을 공부하는데 그 가운데는 저명한 교회사 교수인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에게서 공부한다. 그리고 신약학자 한스 리츠만(Hans Litzmann) 및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과 구약학자 에른스트 셀린(Ernst Sellin) 등의 강의에 참석한다. 그러나 이 젊은 신학자 본회퍼의 관심은 오히려 조직신학에 있었다. 당시 루터 르네상스의 주도자였던 칼 홀(Karl Holl), 라인홀드 세베르크(Reinhod Seeberg) 등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학창시절 이미 다수의 루터 연구와 함께 “이성과 계시”, “교회와 종말론” 등 다양한 조직신학적 주제로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는 1927년 21세의 약관의 나이로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부제 - 교회의 사회학의 교의학적 연구 - 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 이 논문은 당시 조직신학의 거장이며 대선배인 칼 바르트에 의해서 “신학적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그는 여기서 신학적으로 논거지을 수 없는 교회의 사회학적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교회이론을 새롭게 정리하는데 그에 의하면 교회란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며 따라서 그것은 집합적 인격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사회학적 구조에 따르면 그 안에 모든 가능한 형태의 사회적 연계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그것들을 대체하고 있다. 그것이 곧 代理(Stellvertretung) 개념의 사회학적 법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선 과거의 전통적 교의학에서 성도의 교제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던 형이상학적 이해를 버리고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사회학적 관점에서 봄으로서 “대리”라고 하는 개념으로 대치하고 있다. 즉 “대리”란 개념은 ...을 위한 ‘존재’ 혹은 ‘행동’으로서 이 개념을 통해서 본회퍼 특유의 신학적 개념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도출된다. 즉 그리스도의 대리성(代理性)을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 교회의 대리성을 ”타자를 위한 교회“(Church for others)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대리성을 ”타자를 위한 인간“(Men for others)등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리“ 사상은 그 후 그의 삶 전체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고난 받는 유대인들과 약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게 되는 신학적 그리스도교적 기초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타자를 위한 대리개념”은 1960년대 이후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 윤리적 지평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주의적이고 연대적인 대리개념이 후에 유럽의 정치신학과 혁명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그리고 여성신학 등에 깊은 자극과 영향력을 행사했고 또한 제3세계에서 상황신학으로 등장한 한국 등의 민중신학에도 같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3. 목사와 신학자로서 본회퍼
그는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약 1년 동안 스페인의 바셀로나에 있는 독일인 교회에서 1년 동안의 목사수련기간을 갖는다. 그는 거기에서 일상적 목회자의 삶을 살면서도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가 바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적은 집단의 독일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는데 그 구성원들은 대체로 상업에 종사하는 소시민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적이고 높은 학문적 분위기에서 지내던 본회퍼에게와 그들 사이에는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로 스페인 사람들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를 스페인어로 읽기도 했다. 가끔 투우도 몇 차례 관람했으나 크게 흥미를 가질만한 오락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그가 “윤리학”을 저술할 때 “형성으로서 윤리학”에서 부분에서 제반 이론적 윤리학자들의 실패를 논하면서 그 중에서도 윤리적 열광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에서 투우의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모든 윤리적 열광주의(Fanatismus)다. 열광주의자는 자신의 의지와 원리의 순수성을 가지고 악의 세력과 대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열광주의자는 악의 전체를 볼 수 없고 마치 투우처럼 투우사 대신 붉은 천을 향하여 돌진하는 것이 열광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에 결국은 지쳐서 쓰러지고 만다. 열광주의자는 그 목표를 놓치고 있다. 비록 열광주의가 진리와 정의의 높은 가치들에 봉사한다 해도 그것은 조만간 비본질적인 것, 사소한 것에 사로잡혀 보다 영리한 적의 그물에 빠지게 된다.”(본회퍼선집 7. 윤리학(손규태역) 대한기독교서회,78면.
또 본회퍼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은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여기에 “비극의 용사”, 철모 대신 이발소 세면대야를 뒤집어쓰고, 군마 대신 불쌍한 늙은 말에 걸터앉아 실재하지도 않는 자기가 선택한 마음속의 여주인공을 위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에로 내닫는 돈키호테의 영원히 변치 않는 모습이 있다. 낡은 세계가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취하는 모험적 시도, 과거의 현실이 오늘날의 현실에 대하여 그리고 인습적인 것의 압도적 힘에 대한 고귀한 환상들의 공격이 그렇게 보인다. 위대한 이야기의 두 부분들 사이에 있는 깊은 틈새도 특징적인 것은 저자가 첫 부분 이후 여러 해가 지나서 쓴 두 번째 부분에서 그의 영웅에 반대하고 웃음거리가 되고 저속한 세계의 편에 서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무기들을 경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늘날의 투쟁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박한 인간만이 돈키호테의 운명을 관심과 감동 없이도 읽을 수 있다.”(위의 책 80면).
그는 스페인에서 준목생활을 하면서 학문적 활동도 계속했다. 그는 세 개의 중요한 논문들을 써서 발표했는데 하나는 구약성서의 문제 그 다음으로는 신약성서의 주제 그리고 마지막에는 윤리학의 문제를 다룬다. 이들 논문들에서 그가 관심했던 것은 오늘날의 정신운동들에서 문제점 즉 이제까지 우리가 서 있던 기반들의 상실과 관련된 것 즉 그가 반복해서 말하는 “우리가 서 있는 삶의 기초가 상실된 것”((Boden unter den Füßen weggezogen)이다. 격변하는 세계 속에서 당시 서구인들이 서 있던 부르주아적 사회기반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각자는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기초들을 심각하게 재검토 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적 사회에 기반을 두었던 자유주의신학의 재검토와 더불어 칼 바르트에게서 시작된 변증법적 신학, 불트만 등에게서 시작되었던 실존론적 신학 등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는 새롭게 등장하는 민중의 시대, 즉 사회에서 축출 당하고 억압받는 “제5의 신분”(fünfte Stand)의 도전에 신학과 교회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것을 탐구하려고 했었다. 이것은 그가 옥중서신에서 제시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자세 즉 “밑으로부터의 시각”과 사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회퍼는 스페인에서 준목 훈련기간을 마친 다음 귀국하여 1928년부터 다시 베를린 대학에서 조교로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는데 그는 대학교수자격 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쓴다. 그 제목은 “행위와 존재(Akt und Sien) - 조직신학에서 초월철학과 존재론”(Transzendentalphilosophie und Ontologie in der systematischen Theologie)이였다. 그의 첫 번째 박사학위논문 “성도의 교제”가 교회 안에서의 공동체형태에서 계시의 구체성을 다룬 것이라면 그의 교수자격논문 행위와 존재는 신학적 인식론적 문제,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한 구체성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논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계시에서 차안에 계신 하나님의 자유가 중요하지 않고, 말하자면 하나님이 영원히 홀로 존재하심과 멀리 계심이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계시에서 자기를 나타내심, 역사적 인간들에게 스스로를 속박시키고자 하는 그의 자유가 중요하다. .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자유하지 않고 인간을 위해서 자유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유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우언한 비대상성 안에 존재하지 않고 교회에서 말씀 안에서 소유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다.”(행위와 존재, 67면).
이 대학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됨으로써 본회퍼는 대학에서 사강사로서 가르칠 수 있는 사강사(Privatdozent) 자격을 획득한다. 그는 1930년 7월 31일 "현대 철학과 신학에서 인간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대학 강사 취임강연을 하고 강의를 시작한다.
4. 본회퍼의 미국체류
그는 곧이어 더 연구하기 부족한 영어실력도 쌓아서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그는 미국 유학의 길을 선택한다. 당시 약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학문적 명성도 높은 장로교 계통의 신학대학인 유니언에서 본회퍼는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유니언에는 존 베일리(John Bailie), 반 두센(Van Dusen), 존 베넫(John Benett), 포스딕Fosdick) 등 저명한 신학자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여기서 본회퍼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는데 주로 세미나 발표를 통해서 자기의 관심사들을 서술했었다. 예를 들면 “현대문학에서 윤리적 관점들”이란 세미나에서는 전쟁문헌, 흑인문학, 입센, 버나드 쇼 등의 글에 나타난 윤리적 관점들에 대해서 세미나 페이퍼를 발표했다. 또 “현대적 사건들에 대한 윤리적 해석”이란 세미나에서는 금주법, 은행의 상황과 법정의 타락 등에 대해서 연구 페이퍼들을 발표한다. 그 밖에도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논문 등 다수의 글들을 발표하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낸다.
한편 이 곳에 머물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과 사귀고 우정을 나누었는데 그 중에도 프랑스에서 그곳으로 유학을 왔던 라살레(J. Lassarres)와의 특별한 만남을 가졌었다. 그는 자신을 절대평화주의자로 자칭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미국의 절대평화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본회퍼와 같이 그리스도교와 평화문제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본회퍼는 그와의 긴 대화를 통해서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언제인가 인도로 간디를 방문할 계획도 세웠었다. 그리고 이 후 그의 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에 나타난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다음으로 그와 깊은 인간과계를 맺었던 사람은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였다. 본회퍼가 약 1년여 간의 미국체류를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라인홀드 니부어를 비롯해서 뉴욕의 친구들은 제반 위기와 전쟁으로 내닫고 있는 독일로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 자리 잡고 안정된 상황에서 학문의 길을 갈 것을 본회퍼에게 권했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위기에 처한 조국과 교회의 현실을 외면한 채 일신상의 안일을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독일로 돌아온다.
4. 전쟁 직전의 독일의 상황과 본회퍼
1931년 본회퍼는 다시 독일로 돌아오면서 이제까지의 공부와 방랑이랄까 하는 삶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는 약 2년 동안은 베를린 대학의 강사생활을 겸하면서 교회에서는 준목사로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일 중 특기할만한 것은 본회퍼가 본(Bonn)대학에서 강의하던 당시의 대학자인 칼 바르트를 예방하고 그와 깊은 신학적 대화를 나눈 일이다. 본회퍼는 루터교회의 전통에서 신학을 했지만 개혁교회 전통에 서서 신학을 가르치던 칼 바르트와 신학적 대화에서 여러 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시 루터파 신학자들 특히 독일적 기독교의 입장을 옹호하고 히틀러를 독일의 메시아로 칭송하던 임마누엘 히르쉬나 알트하우스와는 신학적 거리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본회퍼는 1931년 11월 15일 포스타머 플라즈 근처에 있는 마태교회에서 총리사(Generalsuperindendent) 비스(Vies)에게서 안수를 받음으로서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만찬을 집행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1931년 본회퍼가 독일로 돌아왔을 때 고국은 이미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히틀러의 나치당에 의해서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한 연합국들의 경제적 압박이 독일국민들의 감정을 들끓게 했고 또 그들에 의한 경제적 제재는 더욱더 민족주의적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란 책과 알프레드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의 “20세기의 신화”는 빈곤, 실업, 사회적 불안에 시달리는 순박한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와 같은 강력한 독재체제 출현을 위한 좋은 토양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도 본회퍼는 대학에서 주로 조직신학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도 당시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유럽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1932년 8월 스위스에서 열린 한 에큐메니칼 대회에서 “교회는 죽었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면서 그의 행동주의적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과 유럽의 교회들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전쟁의 위협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대책도 내놓거나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그는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드디어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제국의 수상에 취임한다. 본회퍼는 이것을 계기로 해서 베를린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들”이란 제목으로 연설을 하는데 거기서 그는 “직무”와 무관하게 “인격”과 연관된 새로운 지도자 개념의 위험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우상숭배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회퍼의 연설도중 라디오 방송은 히틀러의 관리들에 의해서 중단 당했고 그는 이 때부터 히틀러의 적대자로 낙인찍힌다. 히틀러 정권에 대한 이러한 본회퍼의 행동과 그 결과는 그의 장래의 삶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게 된다.
같은 해 전체 독일의 28개 구성된 지방교회들(Landeskirchen)은 나치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각본에 따라서 제국교회(Reichkirche)로 강제로 통합되고 히틀러의 최대의 협력자였던 군목이었던 루트비히 뮐러(Ludwig Müller)가 제국주교로 선택됨으로써 완전히 히틀러에게 장악되고 만다. 따라서 독일 교회는 이른바 히틀러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히틀러와 그 정권에 충성하는 “독일적 기독교”로 변신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발전에 반대해서 루터파의 아스무센(Asmussen)과 개혁파의 마르틴 니묄러(Niemöller)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목사긴급동맹이 결성되고 이어서 히틀러에 충성하는 독일적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른바 “고백교회”(Die bekennde Kirche)를 조직하게 된다. 이들은 히틀러를 고백하고 충성하는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충성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동맹체였다. 이것이 독일의 “교회투쟁”의 시작이었다. 본회퍼는 이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한다.
본회퍼는 1933년 여름학기에 대학교에서 “기독론”(Christologie)을 강의하는데 여기서 그는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Stellvertretung)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타자를 위한 존재“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다. 전통적 그리스도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 등 그리스적 형이상학적 개념을 통해서 그리스도론을 다루었으나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 규정함으로서 어떤 관념론적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 개념은 이미 그가 쓴 박사논문 ”성도의 교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니케아신조에 나타난 신이시고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이해라고 하는 그리스 형이상학에 기초를 둔 매우 추상적인 그리스도 이해가 아니라 오늘날의 그리스도 이해 즉 그 분은 타자를 위해 살고 죽은 분이라고 하는 매우 현실적 그리스도 이해를 그는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그 동안 독일적 그리스도인들과의 단절과 투쟁과 함께 세계 기독교인들과의 연대활동을 강화하면서 독일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일에 몰두한다. 이 때 그의 사고의 중심은 교의학적인 것으로부터 성서적 주제로 옮아간다. 특히 산상설교에 나타난 말씀. 즉 그리스도인들의 제자 됨이 그의 사고의 중심문제가 된다. 즉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1934년 덴마크에서 열렸던 에큐메니칼 소모임에서 그가 한 강연 ”교회와 세계의 민족들“에서 더욱 발전된다. 여기서 그는 ”평화를 향한 그리스도의 철저한 부름“이라고 하는 주제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소명 즉 그의 제자가 됨은 곧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타자를 위한 존재는 곧 이 세상에서 평화를 위해서 살고 활동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5. 고백교회 목사수련소 시절
독일 여러 국립대학들에 존재하던 신학부들은 히틀러의 추종세력인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여기에 반대하는 “고백교회”의 목사훈련을 위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1936년에 고백교회 대표자들은 자기들의 목사훈련을 위해서 핑겐발데(Finkenwalde)라고 하는 소도시에 적은 신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그리고 고백교회는 디트리히 본회퍼를 그곳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곳에서 그는 독일의 히틀러 치하에 굴복당하지 않은 고백교회를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신학생들을 모아 같이 생활하면서 훈련시켰다. 이곳에서 공부하려고 몰려든 적은 숫자의 신학생들은 모두 히틀러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었다."(왕상 19:18)
이런 특수한 환경과 과정에서 그는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고 그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학문적 열매들인 “성서의 기도”,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등을 저술한다. 그는 이 저서들을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자세,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복종의 삶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삶을 매우 인상적인 필치로 그려나가고 있다. 그는 옥중에 갇혀 있을 때 명상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도하며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통합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그는 당시 독일의 제도화되고 형식화된 교회와 신자들을 새롭게 일깨워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에게 봉사하게 하는 일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또 히틀러에 굴복 당한 독일 교회를 새롭게 일깨워서 산상설교에 나타난 철저한 복종과 자기헌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개혁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
그러나 고백교회의 신학교가 1937년 나치정권에 의해서 강제로 폐쇄 당하자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는 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일에 집중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1938년은 본회퍼에게는 교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리고 가족적으로나 매우 어려운 해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처럼 삶의 리듬을 놓치지 않고 어려운 시기를 지냈었다. 우선 그는 힌터폼메른(Hinterpommern) 주에서 신학교가 문 닫은 후에 남은 신학생들을 모아서 그들을 목사훈련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했다. 그 프로그램들은 주로 목사로서 실무적인 것들을 가르치는데 집중했었다.
특히 고백교회는 이 때부터 더욱 심한 감시와 박해를 당했고 국내나 외국과의 연락수단들이 거의 불통 상태에 들어갔다. 거기에 더해서 본회퍼에게는 당시의 수도인 베를린에 체류금지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그곳으로의 여행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튀링겐주로부터 시작된 히틀러와 제국에 대한 목사들의 충성서약에 동참할 것이 강요되었다. 이러한 충성서약은 공무원들이나 군인들은 물론 목사들에게까지 강요되었다. 그러나 고백교회와 목사들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6. 에큐메니칼 운동
그리고 본회퍼는 1939에 영국과 미국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영국과 미국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실존을 계속해 나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나이로 봐서 군대에 징집되어 히틀러 군대에서 복무해야 할 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불의한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었고 따라서 가능하다면 해외로 도피하여 고백교회의 대표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틀 안에서 자기가 봉사할 일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치스터의 벨(Bell)주교와 미국의 니부어 등을 만나서 자기 자신의 신상문제와 평화를 위한 독일교회와 해외교회들 간의 협력을 모색하려 했었다. 물론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본회퍼의 활동을 도우려 했었다.
그해 3월 10일에 출발해서 본회퍼는 어려운 길을 통해서 영국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동안 말하자면 5주간 이상을 그곳에 머물러서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함과 동시에 벨 주교와 여러 차례 만나서 위기에 처한 독일과 교회의 상황에 대한 대담을 나누고 영국 교회는 물론 에큐메니칼한 차원에서 독일 교회와 협력하기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는 4월 18일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본회퍼는 다시 미국을 방문한다. 거기서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하고 친지들과 의논을 했다. 그들의 첫 번째 제안은 그해 6월서부터 열리는 기독학생회 여름수양회에 준비와 실행에 동참하는 일이었지만 그 제안은 수포로 돌아갔다. 두 번째 제안은 유니언 신학교에서 6-8월에 있을 여름학기 강의를 맡아서 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제안은 폴 레만 교수의 것으로 본회퍼가 여러 대학을 돌면서 순회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제안은 미국교회협의회의 것으로서 뉴욕에 있는 난민들에 대한 연구와 함께 여러 교파들의 협의회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들 가운데 본회퍼는 두 번째 제안인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강의와 연구를 맡기로 했고 그것을 같이 진행했다. 그러나 본회퍼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던 것은 별로 중하지도 않은 일들을 하면서 독일의 교회가 처한 현실을 피해서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족이었다. 그는 라인홀드 니부어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표출하고 있다.
“내가 이 시기에 미국에 온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사의 어려운 시기에 독일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에 내가 우리 백성과 같이 시련을 같이 격지 않는다면 전후에 독일에서 그리스도교적 삶을 재건하는데 참여할 권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Eberhart Bethge, Dietrich Bonhoeffer, S. 736)
본회퍼는 이 때 미국의 동료들과 친구들은 그를 한사코 말렸지만 전쟁발발 직전에 자기의 동족과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시련을 나누기 위해서 그 해 6월 8일 뉴욕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탄다. 돌아오는 길에 약 일주일간 본회퍼는 런던에 사는 자기 누이 집에 머물면서 가족의 정을 나눈다.
7. 히틀러 암살음모와 본회퍼의 체포
전쟁이 나고 첫 겨울동안 독일에서의 히틀러 암살음모가 두개의 단계를 거쳐서 다시 진행된다. 여기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nanyi)였다. 본회퍼는 성직자로서 여기에 소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암살음모의 준비과정에서 특정한 과업이나 일정한 부분을 맡아서 활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일에 깊이 관여했고 또 그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 위한 여러 가지 고려할 점에 대해서 상당한 역할을 했었다.
이러한 국가적 변란을 일으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1939년 9월 27일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사와가 항복하던 날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명령해서 홀란드와 벨기에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 때 장군들은 이러한 진격을 통해서 히틀러를 세계대전으로 나아가게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히틀러에게 반대해서 세계대전을 박을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길에 서게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연합국들이 히틀러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승인에 따라서 독일로 진격할 때 이 둘 사이를 구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 모든 것은 연합국들에 대한 공격 시점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히틀러와 그 정부의 제거가 사전에 성공을 거두는 것이었다.
둘째 폴란드에서의 히틀러 친위대들의 잔혹행위들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히틀러의 잔학행위가 독일의 일반국민들에게 잘 알려져서 그들이 히틀러와 그의 정권에 등을 돌리게 하여 히틀러에 대한 반대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이었다. 카나리스(Carnaris)는 폴란드에서 활동하는 군 사령관 블라스코비즈(Blaskowitz)와 회동하여 다른 장군들에게도 이러한 잔학행위들을 알리도록 했다. 블라스코비즈 장군은 유대인들과 폴란드 국민에 대한 이러한 히틀러 군대의 한학행위는 인권과 국제법에 위반되는 것이라는 것을 장군들에게 문서를 통해서 알렸다. 분노한 히틀러는 곧 그를 지휘관 자리에서 해임한다. 따라서 1939/1940년 겨울 동안의 두 차례에 걸친 거사일정은 연기되었다. 본회퍼는 베를린에 머물면서 이 히틀러제거를 위한 거사를 위한 전체 과정에 참가했다.
그 사이에 두 번에 걸친 거사가 실패로 끝나고 여기에 가담했던 인사들 특히 도나니와 카나리스 장군 등은 히틀러 친위대의 감시를 받기 시작한다. 이러한 감시는 더욱 강화되어 그들 외에도 본회퍼 등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43년 4월 5일 본회퍼는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스타포에 의해서 그의 집에서 체포되어 군사형무소에서 수용된다. 그는 몇 달에 걸친 심문 이후에 기소되기 전에 테겔 형무소로 이감된다. 그의 매제였던 한스 폰 도나니 등이 주동이 되어 그동안 준비되어 왔던 히틀러 암살계획이 1944년 7월 20일에 발각되면서 본회퍼의 연루도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근는 테겔 형무소에서 1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연합군의 진격으로 독일이 패전상태에 이르게 되자 히틀러는 포로들을 처음에는 바이에른 주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로 이송하다가 다시 플뢰센부르크(Flössenburg)의 집단수용소로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여러 나라 포로들과 함께 1945년 4월 9알 집단적으로 학살당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제자며 동료였던 에버하르트 베트게는 당시 나치 정권 시절 고백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운동을 다섯 가지단계로 구별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소극적인 저항단계이다, 그 다음은 니묄러나 부름목사의 경우에서처럼 공적인 이념적 저항으로서 새로운 정치적 미래를 모색하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예를 들면 아스무센이나 디벨리우스 한스 릴리 주교들과 같이 공적 교회의 직무수행자들로서 히틀러 암살계획의 준비를 같이 알고 그것을 암암리에 지원하는 단계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본회퍼의 경우에서처럼 히틀러 전복 계획과 실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단계이다. 이 마지막 단계는 루터교회의 전통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서 교회의 지원이나 정당성을 얻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Eberhardt Bethge, Dietrich Bonhoeffer, Eine Biographie, S. 890)
본회퍼는 테겔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18개월 동안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에게 써 보낸 209개의 편지들과 가족과 친지들이 보낸 편지들을 모아서 전 후에 그의 제자면 동료였던 베트게에 의해서 편집되어 “옥중서신”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독일 본회퍼 학회는 16권으로 된 본회퍼 전집을 출간했고 그 중에 8권을 골라서 한국 본회퍼 학회가 “본회퍼 선집”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간했다.
II.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상
지난번 글에서는 본회퍼 목사의 삶에 대해서 조명해 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본회퍼 목사의 사상은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사상형성에서 첫 번째 단계에 해당되는 기간은 1927년 그가 베를린에서 당시의 위대한 교리학 교수인 라인홀드 세베르크(Reinhold Seeberg) 아래서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란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또 1929년 “행위와 존재”(Akt und Sein)란 주제로 대학교수자격논문인 논문을 제출한 해들을 기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이 기간 사이에 스페인의 바셀로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목사수련생 기간을 소화했었다. 그는 당시 베를린 대학의 신학과를 지배하고 있던 Adolf von Harnack이나 Ernst Troeltsch과 같은 자유주의적 신학 이른바 독일의 개신교문화주의(der deutsche Kulturprotestantismus) 영향아래서 공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화 개신교주의는 신학에서의 교회 보다는 오히려 문화 일반 즉 정치와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교회의 분위기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신학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나타난 교회를 중시하는 사상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 따라서 본회퍼는 베를린에서 사강사 시절에 그의 박사논문인 성도의 교제에서도 암시된바와 같이 신학과 윤리학의 원천으로서의 교회를 주제로 하고 자기의 연구를 진행해 나간다. 그래서 몰트만 같은 신학자는 본회퍼가 칼 바르트보다 더 바르트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칼 바르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신학에 반대하여 성서의 말씀을 신학의 원천으로 보고 교회를 그 실천의 장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31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는데 그것은 본회퍼에게는 대학교수가 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회퍼의 전기를 쓴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t Bethge)는 그가 안수를 받고 목회의 길에 나간 것을 가리켜 “신학자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했다. 본회퍼는 당시 교회가 그의 학문적 신학의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의 신학에서 교회론이 다른 어떤 문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본회퍼의 사상형성의 두 번째 단계는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던 해부터 그가 처형되던 해인 1945년에 속한다. 이 시기에 본회퍼의 삶은 정치적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1933년 히틀러의 권력탈취와 더불어 나치를 지지하던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하여 벌리던 고백교회의 투쟁, 나치에 의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 전쟁준비를 위한 독일의 무력강화 등은 본회퍼에게서 신학적 교회적 사안들은 정치적 사안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신학을 연구하는 일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신학을 삶으로 실천하고 교회를 위해서 투쟁하는 일로 나아가게 된다. 대학은 나치에 의해서 장악됨으로써 그는 더 이상 대학에서 가르칠 수 없게 됨으로써 그는 대학에서 학문적 경력 쌓기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나치의 도전을 피해갈 수 없게 됨으로써 그의 신학은 불가피하게 교회신학의 울타리에 머물 수 없게 되어 세상을 향한 신학, 예언자적 신학, 나아가서 정치신학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결과는 1945년 39세의 나이로 나치의 집단수용소 플뢰센부르크(Flössenburg)에서 처형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 투쟁의 기간에서도 본회퍼는 몇 개의 중요한 저서들을 발표한다. 교회의 신학을 다룬 것으로서 “나를 따르라”(Nachfolge)와 “신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이 고백교회가 세우고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핑켄발데(Finkenwalde) 신학교 시절에 씌어졌다. 나를 따르라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해설서로서 당시의 제도화된 그리스도교회의 삶에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한 예수를 따르는 삶의 본래적 의미를 추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감당하고자 하는 신학생들을 위한 가르침의 표본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도의 공동생활은 교회적 삶에서 필요한 기도와 생활에 관한 지침서로서 기록된 것이다. 이것들은 철두철미 교회적 신학에 속하는 저서들이다. 그리고 그가 체포되기 전에 기획했던 것으로서 “윤리학”은 단편적인 것들로 남아 있었는데 그의 제자인 베트게가 사후에 편집해서 출간 했다. 그리고 옥중서신, “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은 1943년 4월 11일부터 1945년 2월 28일까지 본회퍼와 가족들과 친구들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과 시 등 단편적인 글들로 구성된 것으로서 이 책이 전후에 유럽과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들들의 많은 신학자들에게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들을 제공한바 있다.
여기서는 마지막 두 책에 나타난 그의 사상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정한 세계성
본회퍼는 좁디좁은 감옥에 갇혀 종교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세계, 즉 외부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과거 자기의 삶과 활동 특히 교회적 신학적 활동을 재점검하기 시작했다. 예수를 따르는 삶 즉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 즉 교회생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교회생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가 이 세상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며 그것은 현존하는 교회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는 전위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등.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서 본회퍼는 눈을 점차 교회에서 세상으로 돌린다. 세속적 세계의 자유, 세속적 삶의 존엄성, 지구의 아름다움, 특히 구약성서에 나타난 차안적 삶에서 얻는 기쁨 등이 그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신앙은 뭔가 전체적인 것, 삶의 행위다. 예수는 우리를 어떤 새로운 종교로 부르지 않고 삶으로 부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는 명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중세기 신학자들이 말한바 “자연스런 경건” 혹은 “무의식적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것은 “주여, 주여”만 외치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 성직자다운 성직자로서 세상에 봉사하는 삶으로 신앙을 실천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교회의 상황과 한국교회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장공 김재준 목사는 “신앙생활” 대신 “생활신앙”을 강조한바 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처럼 남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그런 기독교인이 아니라, 남이 보지 않는 골방에서 조용히 기도하고는 밖에 나와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하찮은 성금을 하면서 신문에다 이름을 대문짝만 하게 드러내는 그러한 자선이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게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교적 삶과 실천이 아닌가?
본회퍼는 감옥에 앉아서 세상적인 것을 위해서 종교적인 것, 차안적인 것을 위해서 피안적인 것, 생명성을 위해서 영성과 대항해서 싸웠다. “그에게서 신앙이란 죽음에까지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계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을 인식함으로써 전통적 신학에서의 두 개의 영역이론, 즉 하나님과 세상과의 대립을 극복한다. 그래서 그는 구약성서 아가서에 나오는 두 남녀 간의 사람을 좋아했고 모든 인간의 열정적인 것들을 억압하고 순화시키려는 기독교적 시도를 거부했다.
그래서 본회퍼는 흔히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그렇듯이 신약성서로부터 구약성서를 읽으려 하지 않고 그 반대로 구약성서로부터 신약성서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신약성서 보다는 구약성서를 더 많이 읽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할 수 있고, 우리가 삶과 대지를 그렇게 사랑하여 그것과 더불어 모든 것을 잃고 끝장을 보게 되는 것 같을 때만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로운 세계를 믿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킬 때만 하나님의 은총을 말해도 좋다.” 우리는 궁극적인 것 이전에 살면서 궁극적인 것을 믿고 있지만 궁극이전의 말씀을 말하기 전에 궁극적인 말씀을 말해서는 안 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세상적인 것을 부정하면서 혹은 세상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살면서 저세상적인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광신도들처럼 이 세상과 저 세상, 차안과 피안을 구별해 놓고 저 세상만을 바라보고 살아서는 안 되고 차안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피안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제는 루터신학에서 율법과 복음의 구별도식을 본회퍼는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루터 당시 열광주의자들(Schwärmer)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들은 더 이상 참회를 요구하는 율법은 필요 없고, 단지 복음으로 충분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들을 우리는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s)라고 부른다. 여기에 대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약한 인간존재이므로 다시 죄를 지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는 율법이 꼭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따라서 율법이 인간의 죄를 고발하여 참된 회개를 할 때만 복음이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푼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라는 신학적 명제를 제시했다.
한국의 교회들 가운데도 반율법적 행태의 교회들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순복음 교회가 그렇다. 그들의 설교들을 보면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율법적 요소는 거의 없고, 단지 “순복음”만을 설교함으로써 회개 없는 은총, 즉 본회퍼가 말하는 “싸구려 은총”(cheap grace)만을 신도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런 행태가 순복음 교회를 비롯하여 한국교회들의 설교에서 싸구려로 제공하는 구호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라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따라서 당나귀에게 채찍 없는 당근처럼 교회에서의 율법 없는 은혜는 싸구려 은혜가 될 뿐이다. 오늘날 한국의 청소년 교육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채찍 없는 당근의 무제약적 제공, 절도와 통제가 없는 무조건적 사랑이 가져오는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달릴 때와 설 때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절제한 문제아들로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어린이들 가운데 과잉행동장애가 많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가정에서 어린이 양육 때 율법 없는 복음만으로 키우려한 데서 생긴 폐해이다.
그러나 본회퍼가 강조하는 세계성, 차안성은 “교양인이나 사업가, 게으른 자나 호색가의 천박하고 비속한 차안성이 아니라 완전히 성숙한 깊은 차안성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인식이 항상 현존하는 차안성을 말한다.” 본회퍼는 1939년 잠시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프랑스에서 온 Jean Lasserre와의 대화에서, 그가 성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본회퍼는 거부감을 느끼면서 자기는 세상에서 믿는 것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거룩한 생활, 종교생활을 통해서 믿음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1935년 핑켄발데 신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나를 따르라”를 집필하고 나서는 “나는 전적인 차안성 속에서야 비로소 믿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지금까지도 체험하고 있다”고 그의 제자요 동료인 베트게에게 쓰고 있다. 즉 그는 겟세마네동산에서 수난당하고 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한가운데서 깨어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고 그리스도인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모든 고난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같이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즉 믿는 것이다.
2. 땅에 대한 신실성
세상성, 차안성 안에서의 믿음 다음으로 본회퍼의 사상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땅에 대한 신실성이다.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는 이 타락한 장망성인 세상을 떠나서 저 높은 곳에 있는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부귀와 영화를 주리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궁극적 목표로 생각했다. 이 때 이 세상, 땅이라고 하는 것은 버려야 할 것, 인간의 죄악으로 가득 찬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도식으로 전통적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Leonhard Ragaz 등 종교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의 희망을 새로운 방향에서 생각하고 하늘나라를 향한 피안적 희망을 정의가 지배하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차안적 희망으로 삼고 신학을 전개했다. 본회퍼도 이러한 방향에서 사고하고 그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가 1932년에 쓴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교회의 기도”라는 논문에서 “땅과 하나님을 하나같이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믿을 수 있다...기독교는 피안적 인간들(Hinterweltler)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종교적 세계도피라는 피안적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인간에게 신실한 아들로서 세상에 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를 세상의 주님으로서 사랑하고 대지를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대지로 사랑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대지로서 사랑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은....교회가 땅과 그곳에서의 참상, 굶주림, 죽음에 대해 성실하겠다는 것을 맹서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서의 부활의 나라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본회퍼는 1943년 땅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신실성에 근거해서 지상에서 히틀러의 악행에 대한 저항과 투쟁에 나서고 그 결과로 그는 히틀러의 경찰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감옥에 송치되게 되게 된 것이다. 즉 본회퍼에게는 이러한 땅에 대한 신실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정한 세상성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학적 관점의 근거가 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교 신앙이 탈세상적이고 피안적이며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단지 이 죄악의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만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수난에 대한 순응은 있을지라도 수난에 대한 저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땅위에 서 있고 그의 부활도 이 땅에서 일어나며 따라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승리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회퍼의 땅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신학적 관점의 중요성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전통적 시학에서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지상의 세계와는 무관한 천상의 세계에 두었었다. 우리는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나 설교할 때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라는 주장을 많이 들어왔다. 성직자들은 장례식장에서도 죽은 자를 애도하면서 이제는 고통과 질병과 온갖 범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떠나서 우리의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유족들을 위로하기도 한다. 정말 이 세상은 장망성이어서 불타서 없어져야 할 죄악의 땅인가?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할 땅, 땅에 대한 우리의 신실성을 보여주어야 할 곳인가?
본회퍼는 그가 테겔형무소에서 쓴 드라마와 소설에서 땅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그의 신학적 주제와는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지만 우리가 서 있는 기초(Fundament)를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자기가 서 있는 기초 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인리히: “나에게 서야할 기초를 주게-나에게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주게.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크리스토프: “서야할 기초 - 나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 - 자네 말이 맞네. 알겠어. 우리가 두 발로 서야할 토대, 우리가 살고 죽을 수 있는 토대지.” 여기서 우리는 본회퍼가 지구, 혹은 세계라고 하는 우리가 발을 붙이고 서있는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사는 이 땅, 우리가 서 있는 이 지구는 하나님이 창조한 곳이며 그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의 활동을 한 곳이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인간들에 의한 환경파괴나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적 재앙들은 모두 인간이 땅에 대한 성실성을 외면한데서 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과 거기서 나는 온갖 소산들은 인간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게 하기 위한 선물들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 땅과 거기서 나는 소산물들은 특정집단이나 국가의 독점물로 전락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다수의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 등으로 고통에 처해 있다. 세계인구의 1%가 세계의 부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독점적 지위를 독차지한 소수는 더 많은 탐욕으로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탐욕이 오늘날 지구에서 경제위기를 가져오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의 땅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신학적 주제는 오늘날 새로운 세계정책, 세계경제, 세계윤리를 요청하고 있다. 이 지구촌은 우리 모든 인류들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행복을 누려야 할 땅이다. 이것이 본회퍼가 말하는 땅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신학적 주제가 지향하는 목표이다.
3. 성숙한 세계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1783년 “계몽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곔몽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잘못된 미성숙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기의 오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말한다.”디트리히 본회퍼도 그의 신학적 개념들 “성숙한 세계”와 “세계의 자율성”을 다룬 편지들에서 칸트가 말한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고 있다. 본회퍼는 1944년 7월 16일자 그의 제자며 동료였던 베트게에세 쓴 긴 신학적 편지에서 성숙한 세계, 즉 자율성을 갖게 된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이런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어떻게 선포되고 가르쳐져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자 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etsi deus non daretur)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함이 없이는 우리는 성실해 질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 하나님 앞에서지. 하나님 자신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인식을 갖게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성인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태를 진정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우리와 같이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버린 하나님이니까(마가 15:34)! 작업가설이라는 하나님 없이 우리를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
유럽의 계몽주의 이후 사람들은 기독교적 전통에서 도덕적, 정치적, 자연과학적 “작업가설”(Arbeitshypothese)로서의 하나님은 폐기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는 세계를 자율성으로 이끌어 가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리고 신학에서도 영국의 헤르베르트(Herbert)나 데카르트는 이신론(理紳論)을 주창하여 전통적 인격신을 메카니즘이라는 자연법칙으로 대치시켜서 세계는 신의 간섭 없이도 운행된다고 보았다. 도덕에서 Bodin 같은 사람은 계명 대신 삶의 규율이 제창한다. 이렇게 계몽주의 시대에서는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이라고 하는 인격신을 몽학선생으로 모시고 그의 지침에 따라 살지 않고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성숙한 세계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가? 본회퍼는 모든 종류의 변증론을 거부한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말하는 것, 즉 그리스도교 진리를 이 세상에 적용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경건주의가 말하는 것 즉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현대의 세계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하려는 시도나 질병과 죽음과 같은 삶의 한계상황에서 믿음을 권유하는 식의 시도도 거부한다. 본회퍼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서 인간을 만난다.” 즉 그는 우리의 일상적 삶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고 같이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세계의 성숙성을 승인하고 현대인간이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게 해야 한다고 본회퍼는 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회퍼는 성서적 개념들을 과거와 달리 비종교적으로 해석할 것을 주창한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곧 비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성숙한 세계에서는 예를 들면 과거와 달리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으로 해석될 수 없고 오직 무력하고 수난 받는 분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었고 그는 세상에서 무력하고 약한 존재가 된 현실에서 우리는 더 이상 중세의 성직자주의적 방식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서의 “세상적 해석”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본회퍼의 대담한 신학적 입장 즉 현대의 세계를 그리스도교적 세계로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첫째 오늘날에도 본회퍼의 생각과 달리 많은 대중들은 미성숙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나치 시대의 독일의 다수 인간들은 히틀러의 선전에 속아 넘어가서 그를 숭배하고 그가 자행한 인간학살과 전쟁행위에 동참했었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적 선진국가에서도 대중들은 소수만을 위한 경제정책에 반기를 들지 않고 빈곤에서 묵묵히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날도 저개발 국가들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은 잘못된 세계정치체제와 경제체제 하에서 자기들에게 돌아와야 할 몫을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가난한 서민들의 다수가 부자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쓰는 정당에 투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 가운데는 연예계에서 주도하는 대중문화에서 성숙성 보다는 미성숙을 어떤 미덕과 같이 여기는 젊은이들이 지배적으로 많다.
둘째 19세기 종교비판에서 마르크스와 프로이드 그리고 그의 후예들은 당시를 비종교적 시대로 규정하고 있지만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 오히려 더욱더 종교적이고 종교적 구원을 갈망하고 있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기독교인 될 수 있기 전에 모두가 종교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과거의 것이 미신적인 종교적 기독교도 존재하고 깨어 있는 비종교적 기독교도 존재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이다. 그리스도가 시작한 참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삶의 참된 차안성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성의 자유로운 성숙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실존은 이 성숙한 세계에서 진정 인간적이고, 자율적이고 성숙하고 자유롭고 책임적인 실존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어떤 인간 타입을 만들기를 원치 않고 인간을 만들기를 원한다.”
4. 오직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미국의 어린이만화들 가운데 마이티 마우스(Mighty Maus)라는ㄴ 것이 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전통적 하나님 의 전능성이 투영되어 있다. 약한 쥐가 고양이에 의해서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마이티 마우스는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하강하여 쥐를 구해낸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우리들이 세상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기도하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침을 받았었다. 성인이 되었을 때도 우리가 어떤 한계상황에 처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구원을 간청하게 된다.
그런데 본회퍼는 성숙한 세계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고난 받는 하나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고난 받는 하나님”, “무신적 세계에서 하나님의 고난“, ”세상적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고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아적 고난” 등을 언급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로부터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근대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서는 이러한 고난 받는 하나님 개념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본회퍼는 어디에서 이 개념을 두출해 내고 있는가? 몰트만에 의하면 1933-35년까지 본회퍼가 영국 런던에서 목회할 때 당시 에큐메니칼 운동의 동역자였던 성공회 대신학자 William Temple 같은 사람에게서 이러한 개념에 접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신학자들 가운데 J. K. Mozley 같은 이는 1929년 “하나님의 무감각성. 기독교사상의 탐구”(The Impassibility of God. A Survey of Christian Though)이라는 책을 발표했는데 본회퍼가 아마 영국체류 당시 이러한 책을 접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본회퍼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골고다에서의 고난에서 그 성서적 논거를 찾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고난은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오늘날의 무신적 세계상황을 내포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고난은 무신적 세계 안에서의 고난이다. 이러한 고난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무신성과 희생자들을 돌보지 않고 외면하는 데서 오는 고난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나 히로시마 나가사끼의 핵폭탄을 통한 대량학살, 그리고 오늘날에도 세계 방방곡곡에서 자행되고 있는 전쟁들과 인권침해와 대량학살 등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근거한 십자가 신학이 다시 논의되어야 할 상황에 있다. 이러한 현실들에서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은 어떤 힘센 자들이나 부자들, 강대국들이나 그들이 가진 핵무기들이나 거대한 부들이 아니라 고난과 자기희생 통해서 수난 받는 자들의 삶에 동참하는 자들, 즉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본회퍼는 나치독재가 전쟁의 참화를 가져오고 무고한 자들을 학살할 때 희생자들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받는 하나님을 발견했고 그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제반 고난들은 강한 군대, 강한 정치가들, 강한 재벌들에 의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같이 감당하고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고난에 찬 동참의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