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995년은 남북한 교회가 합의한바 있는 “통일희년의 해”이다. 학국교회협의회가 1988년도 인천에서 열었던 세미나를 통해서 이 안을 제안하고 또한 북한 교회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이후 남북한 교회들은 1995년을 기필코 민족통일의 해로 마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력들이 지향하고 목표했던 것은 한마디로 민족의 화해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동서냉전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적대적 체제의 대립 충돌에서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사랑의 복음의 그 능력에 기초해서 왜곡된 분단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가능한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기도와 노력들의 결과로 1980년대 초기부터 해외 교회들의 지원을 얻어서 북한의 형제자매들과 만나는 자리들이 만들어졌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관 하에 몇 차례에 걸쳐서 스위스 글리온에서 한국교회협의회 소속 교단들의 대표들과 북조선 기독교도 연맹의 대표들 사이의 만남들이 성립되었고 또 북미주의 교회들과 일본의 교회들을 매개로 한 북한 교회들과의 만남이 가능했었다. 또 재일 대한기독교회의 주관 하에 성립되었던 3차에 걸친 “도쿄회의”에서는 남한에서 비KNCC계통의 교회들의 대표들도 다수 참석하여 북한의 대표들과 만나는 자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만남들은 그 동안의 상호불신의 벽을 헐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재확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었다. 그리고 그 동안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선언한바 있는 1995년의 “통일희년의 해”가 실현되도록 함께 협력하자는 다짐도 했었다.
이러한 일련의 만남의 과정에서 “북조선의 기독교도 연맹”과 남한의 다양한 교회들 사이의 관계설정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 동안 세계교회협의회의 지원을 통해서 글리온에서 남북한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이 주선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협의회가 당연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리잡아 갔다. 또한 북미주 교회들의 협의회를 통해서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만날 때도 당연히 한국교회협의회가 남쪽의 대표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재일 대한기독교회를 매개로 한 북한교회와의 만남은 그와는 성격을 달리했다. 이 경우에는 한국교회협의회가 북한과의 만남의 장소를 국내로 국한하기로 한 정책과 위배되어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재일 대한기독교회와 선교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교단들의 대표들이 주로 참가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기장과 예장및 감리교를 제외하고 합동측과 대신측 그리고 고려파까지도 참가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적 과제는 어떤 특정한 교단이나 단체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이 확인된 것이다. 민족의 통일문제는 남북한의 교회 전체 아니 전국민이 나서서 해결해야할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된 물음은 한국교회협의회가 그 동안의 기득권을 가지고 북한의 교회와 만나는 유일한 창구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긍정적 대답은 한국교회협의회와 북한의 교회대표들이 글리온에서 마지막으로 합의한 내용에 기초하고 있다. 즉 “여건이 허락되면” 앞으로는 해외에서 만나지 말고 국내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이러한 약속에 기초해서 한국교회협의회는 3차에 걸쳐서 그 총회시에 북한의 대표들을 남한에 초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 정부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시도들의 실패는 여전히 양 정부 차원에서의 관계가 바람직하게 발전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재일 대한기독교회가 주관한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한 도쿄회의”가 세 차례에 걸쳐서 열리게 되었다. 이 모임의 성격은 특수한 것이었다. 우선 글리온의 만남이나 북미주에서의 만남처럼 해외 교회들에 의해서 매개되고 지원되지 않고 일본에 있는 한국인 교단에 의해서 주선되었다는 것과 함께 한국교회협의회가 독점적인 대표권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비 KNCC계열의 교파대표들이 다수 참석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통일운동 특별히 교회내의 통일운동의 열기가 비NCC계통의 교파들 안에서도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새로운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참가교단들의 대표들은 이러한 계기를 통해서 북조선의 기독교도 연맹과 “일정한” 선교협력관계 내지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관계를 성립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교단들에 의한 20건 이상의 방북신청이 통일원에 접수되어 있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말하자면 경쟁적으로 북조선의 기독교도 연맹과 관련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의 배후에는 다양한 목표들이 도사리고 있는듯하다.
우선 이들 비KNCC계열의 교단들은 KNCC계열의 교단들의 대북한 창구의 독점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도 북조선 교회와 관계를 갖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통일문제에는 남한의 전체 교단들이 다 같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도들은 다수의 비 KNCC계열의 교단들이 교단내에 “통일위원회나”나 “북한선교위원회”같은 상설기구나 특별위원회를 가지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북조선의 기독교도 연맹과 “특정한”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들 교단들은 KNCC와 같은 “협의기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북조선의 교회와 관계를 맺는 것을 원하지 않고 직접 교단대 교단 차원에서 관계를 성립시키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직접적” 관계의 모색은 장로교단의 경우나 감리교단의 경우 자신들이 직접 북한 지역에서 선교를 하고 또 자신들의 교단을 북한지역에 이식시키려고 하는 의도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과거의 교회들을 “재건한다”는 발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자 한국교회협의회는 그 동안 이러한 난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1991년 KNCC 6개 교단을 주축으로 하고 여타의 교단들이 참여하는 “희년준비 위원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러한 희년준비위원회의 탄생은 한국교회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남북의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 앞에서 그 동안 갈라졌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었다. 이러한 민족사적 과제 앞에서 그 동안의 교리적, 제의적, 실천적 차이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희년준비위원회가 여러 교단들의 상호 협력 가운데 통일과정에서나 통일 이후에도 바람직한 활동으로 발전하느냐 하는데 있다. 말하자면 이 위원회가 남북통일 운동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남한 내에서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된 조국에서 통일된 교회를 만드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등장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본 논문에서는 통일 후에 북한 교회형성과 남북한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하는 문제를 하나의 시안으로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후 경색되었던 북미관계의 개선과 더불어 남북한의 관계도 여러 면에서 활성화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추세에서 그 동안 교회에서는 통일문제에 대한 연구에서 그 당위성과 함께 그 방법론에 집중해 왔으나 이미 남북한의 교회가 그 동안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같이 일해온 과정에서 등장한 ”남북한의 교회관계들”이라는 현안 문제를 좀더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의 필요성은 앞으로 통일되었을 때에 남북한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역사적 회고: 남북한 교회관계의 교회법적 문제들
남북한 교회의 인적 기구적 단절은 교회역사상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교리적 차이나 교회정치적 이해관계에 근거한 분리선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1945년 이후 남북한 교회들의 분단은 교회외적인 요인들 말하자면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분단에 의해서 강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법적으로는 남북한의 교회는 여전히 “하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법적으로 남북한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지만 정치적 분단에 의해서 둘로 갈라져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서 그들에 의해서 강제되었던 교단들의 통합이 “교회재건”과정에서도 남북한의 교회는 하나 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회재건 과정이 일본교단에로의 통합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말하자면 각각의 교단으로 분리되는 것이긴 했지만 남북한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하나 됨을 재확인했던 것이다.
남북한 교회는 하나라는 이러한 법적 이해는 장로교회의 경우 다음과 같은 남북한 교회의 선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5년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이북 5도 연합노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고 있다.
(1) 북한 5도 연합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한다.
(2) 총회의 헌법은 개정 이전의 헌법을 사용하되 남북총회가 열릴 때까지 그대로 둔다.
그 이듬해 즉 1946년 6월 12일 서울에서 열린 남부총회 역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1) 憲法은 南北이 統一될 때까지 改訂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2) 女長老職의 設定問題는 南北統一時까지 保留한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해방 이후 남북한의 교회는 통일된 민주국가와 더불어 통일된 “하나의 敎會”를 건설하겠다는 것을 다같이 총회에서 결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부총회가 위와 같은 결의를 한 것은 북한의 교회의 결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로교의 경우 정치적 분단에 의해서 당장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同一한 憲法”에 기초해서 교회를 운영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겠다는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장로제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남북이 같이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를 천명하고 있다. 동일한 헌법을 사용하는 한에서 당시의 남북한의 (적어도) 장로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남은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남북한 교회들은 통일된 조국, 통일된 민족 그리고 통일된 하나의 교회를 지향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염원과 결의가 깨어진 것은 1947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장로교회 제2차 남부총회에서 였다. 당시 대구에서 모인 남부총회는 스스로 1941년에 마지막으로 열렸던 31회 총회를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 남부총회는 북한의 교회와 상의도 없이 1년만에 기구적 단절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법적으로 보면 북한의 형제교회와의 헌법적 차원에서 기구적 단절을 공식 선언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법적 차원에서 보면 남북한 교회는 상호간의 독립체로서 갈라선 것은 아니었다. 당시 조건으로서는 남북한 교회지도자들의 왕래가 거의 불가능하고 또 접촉할 수 있는 방안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暫定的으로” 각각의 기구를 가지고 출발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독립선언에 대해서는 깊은 신앙적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47년도 남부총회가 31회 총회를 계승한다고 할 때는 북한의 교회와 협의를 하거나 합의를 봤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해도 그러한 노력을 다각도로 전개해야 했을 것이다. 특별히 북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주의 국가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여러 면에서 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더 그러하다.
이러한 단절 선언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남북한 정부가 각기 분단된 상태에서 독립된 국가를 세운 것이 1948년이다. 남한 정부의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통해서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을 선언하고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선포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남북을 분단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이어서 9월 9일에는 북한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창립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북한 정부들은 국민들의 열화 같은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을 외면하고 분단된 나라들을 세운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초래했고 나아가서 반세기가 되는 지금까지 서로 적대시함으로써 상호간의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정권들의 성립 이전에 이미 남한 장로교회가 스스로 교회의 분단을 선언한 것이 대구에서의 32회 총회라고 할 수 있다. 외 그렇게도 급하게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을까? 여기에는 장로교의 경우 남북한 교회들 사이에 과거부터 있어왔던 세력다툼 같은 것이 작용했을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때는 이미 북한의 중요한 교회지도자들이 남하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북한의 교회에 대해서 관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그후 북한에서의 교회형성에 있어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만든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북한의 교회에 대해서는 예배시간에 기도를 하는 정도의 지극히 소극적인 관심만을 가져왔던 것이다.
둘째는 독일의 경우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독일은 한국과 같이 분단국가였다. 따라서 교회들도 우리와 거의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1918년 이래로 구성되어 있던 독일개신교단(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이라는 하나의 교회가 분단 이후에도 법적 기구적 단절을 가져오지 않은채 1969년가지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 1969년까지 동서독 교회들은 헌법적 기구적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1961년 베르린 장벽이 쌓여지고 양 독일을 철저하게 갈라놓는 정치적 조치들이 취해졌으나 “하나의 國民, 하나의 敎會”라고 하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었다. 1969년 동독정부의 방해로 서로 만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부득이 동독에서 “독일기독교 연맹”(Evangelischer Kirchenbund)이라는 하는 독립된 교단을 구성하게 되었다. 독일 교회는 1945년 이래로 그 끔찍한 동서냉전 체제하에 분단된 나라에서 “하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25년 동안이나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가. 북한 교회의 역사적 도정
그 후 남북한의 교회들은 아무런 접촉이나 유기적 관계없이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갔다.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 체제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예배 및 선교활동이 지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당국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서 재구성되었다. 그것이 바로 “朝鮮 基督敎徒 聯盟”의 탄생이다. 이러한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구성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배경들을 가지고 되어진 것 같다. 이러한 배경들은 당시 북한에서의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는 당시 김일성의 ”저작들“에 나타난 종교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에는 종교에 대한 이해와 오해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종교라는 것은 일종의 미신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는 비과학적인 것이며 허황된 것을 퍼뜨리는 암적 존재라는 것이다. 샤머니즘과 같은 토착종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와 불교 등 고등종교 역시 미신적인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편파적 이해인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한국의 기독교가 지니고 있던 기본적 요소들이나 탈역사적 성향에 대해서 그들은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둘째는 종교 특히 기독교는 미제국주의와 결탁하고 있다고 그들은 이해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종교를 앞세워 식민지를 확장하고 나서 숭미사상을 불어넣음으로써 인민들을 노예화한다는 것이다. ”지난날 우리 나라의 조직경험은 宗敎人들이 거의 다 帝國主義 侵略의 길잡이였으며 間諜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共産主義者들은 宗敎를 反對합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지도급 인사들 특히 목사들과 장로들이 친미 내지는 숭미적이었으며 따라서 이런 제국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셋째 당시 기독교는 착취계급인 부루좌 계급의 온상이었다는 것이다. ”反動的인 長老들과 牧師들이 땅을 가지지 않았던 자가 없고 놀고먹는 부루좌 階級“으로 그들은 판단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지도자들 특히 장로급에 있던 사람들은 대개는 지주에 속했고 따라서 노동자와 농민계급을 착취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은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요소들 즉 미신적인 것, 제국주의적인 것 그리고 부루좌적인 요소들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요소들은 북한에서 부정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금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 계통의 신흥종교들의 미신적 행태가 늘 문제가 되고 있다. 또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주체적 역사의식을 상실하고 숭미사상에 적어 있어서 하나님 보다 미국의 핵무장이나 미군의 군사력을 더 믿고 있는 사람들도 남한에는 부지기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한의 대형교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은 이들 교회들이 중산층들의 안위처로 전락함으로써 민중들과 자기를 일치하려고 했던 예수의 정신에서 크게 이탈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남북한의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남한 교회들 안의 문제점들을 깊이 성찰하고 복음으로 되돌아가는 “悔改”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떤 물량적 조건에서 북한이나 중국의 교회들과 관계를 형성하려고 한다면 다시 한 번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북조선의 기독교도 연맹이 오늘날까지도 북조선의 기독교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기관으로 존속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도 연맹의 성립은 결과적으로 그 단체가 북조선의 국가적 정책에 순응하는 단체가 됨으로써 그 자율성은 거의 상실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도 연맹을 중심으로 하고 지속되어 온 북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상황을 몇 가지 단계를 구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재구성의 시기(1945-1953): 이 시기는 남한에서와 같은 교회재건운동 말하자면 교파단위로 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해방 후 북한에 있던 개신교는 260여명의 성직자와 1200여개의 교회를 다시 재건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윤하영과 한경직등에 의해서 이른바 신의주 사회민주당이 결성되고 반공학생들의 운동 그리고 일요일선거 반대운동등이 일어나면서 기독교는 당시 북한의 공산주의와 이념적 갈등을 노출하고 또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강점 하에서 유지되어 왔던 기독교 세력은 거의 대부분 공산주의에 대해서 이해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 친미적이고 반공산주의적 집단이었다. 따라서 당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기독교를 통제하는 일이 자신들의 혁명을 완수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재건운동은 북한정권담당자에 의한 “북조선 기독교도연맹”이 조직되면서 좌절되었다. 당시 북한의 권력자들은 “북조선 불교 총연맹”, “북조선 청우당”, “복조선 기독교도 연맹”등을 조직하게 하여 한국의 중요한 전통적인 종교들을 통제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전통 종교건 외래 종교건 자기들의 국가적 목표에 봉사하는 것들만 인정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이들의 국가적 목표란 외세의존적이 아니고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적 목표에 기여할 수 있는 사상과 종교들만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북한의 초기 종교정책이었다.
이 때 진보적 성향을 가진 기독교 지도자들 예를 들면 김창준과 같은 이들은 북한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도 연맹을 이끌어갔을 것이다. 물론 김일성과 친인척 관계에 있던 강양욱 목사와 같은 인물들이 기독교도연맹을 이끌어 갔었다. 그들은 이미 위에서 지적한대로 종교를 말살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들의 국가목표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개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기에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지위와 함께 역할이 주어졌으며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박해의 길이 주어졌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1946년 3월 5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다수의 종교재산들을 몰수하는 조처가 취해졌었다. 이는 종교단체들이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로서는 당시 지주계급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단행된 조치였다. 그러나 북한정권의 수립 이전에 만들어진 제1차 북한 헌법 14조는 “모든 인민은 종교적 활동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당시만 해도 종교에 대한 심각한 박해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북한정권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은 더욱 첨예화된 것 같다. 북한의 국가목표에 순응하지는 않지만 숨을 죽이고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쟁중에 다수 남한으로 내려왔고 월남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정권에 대해서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2. 은둔기(1953-1972년): 6.25 한국전쟁은 북한입장에서는 미제국주의 자들에 의해서 강점당하고 있는 남조선을 해방시키자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대다수의 지도적 기독교인들 특히 성직자들이 남한으로 피신해 버렸다. 이로 인해서 북한에서의 기독교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당시 정권잡은 자들의 박해도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지도적인 기독교인들의 탈출이 북한의 교회를 더욱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목자들을 상실한 교회들은 자연히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북한의 정권 잡은 자들은 기독교인들의 성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이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나서 북한에는 몇가지 새로운 과제들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민들을 보다 확고한 사회주의적 혁명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었으며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상무장의 과정에서 반종교적 선전이 절대적으로 강화되었다. 1959년에 나온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라는 문서에서 정하철은 종교가 기진 폐해를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같은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다. 1967-1970년 사이에 실시된 “주민재등록 사업”은 주민들을 사상성향을 분석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서 종교인들로 분류된 사람들에게는 많은 사회적 불이익들이 가해졌다. 그것 가운데는 종교인들을 특정지역에 이주시킨 일들을 들 수 있다. 이 시기가 북한에서의 반종교적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로 봐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신도들의 숫자는 급속하게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3. 관용의 시기(1973-1990): 1970년대 초는 남한에서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던 시기로 한국에서는 주로 개신교와 천주교인들에 의해서 촉발되고 추진되던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이 그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1972년의 7.4공동성명이 채택된 것을 계기로 해서 유신헌법이 만들어지고 북한에서도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70년대 초에 남한 교회가 전개했던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인해서 북한 정권이 이제까지 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왜곡되고 편협한 이해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란 단순히 미신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부루좌적인 것만이 아닌 것을 발견한 것이다. 기독교가 매우 민족적이며 역사변혁적이고 현실참여적인 것을 당시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그 동안 해외에서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이 통일 없이는 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다는 인식 하에 70년대 중반부터 북한과의 접촉을 전개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더욱 심화된 것 같다. 그것은 1979년 비엔나에서 열렸던 해외 기독교인들과 북한의 기독교도 연맹 및 평화통일위원회 사이의 최초의 만남에서 북한의 주요인사들이 대거 참가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어서 미국의 김성락목사 등이 1981년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을 면담했으며 1983년에는 “新約聖書”가 북한에서 출간되었다. 그 이후 1984년부터 미국, 일본 캐나다, 서독의 교회대표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또 북한 기독교 대표들을 자국에 초청했으며 세계교회협의회도 북한을 방문한바 있다. 이러한 상호 방문은 북한정권으로 하여금 전통적 기독교 이해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류과정에서 들어난 것은 그 동안 은둔상태에 있던 가정교회들이 공적으로 자기의 모습을 들어낸 것이리라. 이것은 북한 정권의 기독교에 대한 관용정책으로도 가능했을 것이고 북한을 방문하는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북한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과 함께 예배를 통해서 구체적인 사귐을 갖기를 바라는 염원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리하여 북한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실체가 어느 정도 공적으로 드러난 동시에 과거보다는 넓은 종교생활의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생활의 공적 영역에로의 확대로 1989년 말 현재 두개의 개신교와 한 개의 카톨릭 교회가 평양에 설립되었다. 이것은 북한에서의 공적 종교활동의 폭이 가정교회 차원에서 제도교회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은둔의 교회에서부터 공적관용의 시기로 넘어온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1974년 2월 북조선의 기독교도 연맹이 남한에서의 인권탄압 및 종교탄압을 비판한 점이다. 이것은 모든 정치적 제약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북한의 교회가 남한의 수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적인 연대를 표시한 것이었다. 이것은 남북한 그리고 해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피차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귐을 나누려고 노력해 온 구체적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대의 가장 구체적 결실들이 1988년 한국교회협의회가 채택한 “평화통일을 위한 희년선언”에 대한 동의이다. 이것을 통해서 남북한 교회는 적어도 통일운동의 기본노선에서 합의를 이루고 1995년 희년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협력하고 있다. 이러한 협력들은 8.15해방절을 같은 예식문으로 예배를 들이는데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또한 세계교회협의회를 비롯해서 북미와 유럽 그리고 일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형제적 사귐의 관계를 원하고 있으며 장차 그리스도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위치와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아직도 어느 교단과도 공적으로 법적 관계나 선교적 관계를 맺은 경우는 없었다.
나. 남한 교회의 대북관계의 방향들
해방 이후의 남한 교회는 “敎會再建”이라는 테두리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위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한바 있지만 남한의 큰 교회들(장로교와 감리교 등)은 교회재건이라는 이름으로 일제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 강제로 일본기독교단에 편입되었던 것으로부터 독립해서 각기 교파별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일차적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는 이미 남한 정부가 성립되기 이전에 1945-7년 사이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회재건과정은 북한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교회들과 협의하거나 공동으로 수행하려고 하는 의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모든 것이 남한 교회들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서 되어졌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북한 및 북한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나 관계규정 같은 것은 공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 민족 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지나 생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후 한국전쟁 과정에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남하하면서 또 그들의 증언에 의해서 북한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이해는 단순했다. 당시의 남한 교단들의 북한 및 북한 교회에 대한 인식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독교는 유신론이며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기 때문에 이 둘은 상극이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그들이 유물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인본주의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데 비해서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유심론적 사관을 가지며 하나님의 세계섭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는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나 공산주의는 증오와 혁명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는 그 실천에 있어서 인간과 사회를 자비와 사랑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증오와 폭력으로 사회를 뒤엎어서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혁명을 달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셋째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이며 기독교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다. 또한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이나 시장경제원리를 부정하고 사람들의 사상과 삶 전체를 통제하여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말살하려는 악마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의 기독교 안에서의 공산주의 비판은 그것이 가진 무신론, 폭력혁명 그리고 전체주의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한 교회들의 기도의 제목은 북한공산주의의 조속한 멸망과 그곳에 포로로 잡혀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해서 신앙과 삶의 자유를 획득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북한과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勝共統一論” 내지는 “北進統一論”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하자면 “北韓宣敎論”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이러한 통일론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당시 장로이면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었고 교회는 이러한 통일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을 먹는 식의 북진통일론이 미국의 지원하에 가능하다고 큰 소리쳤던 것이다. 당시는 이승만의 강권통치하에서 어떠한 대안이나 통일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통일은 단지 승공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와 신학자들이 통일에 대해서 좀더 독자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독재정권이 학생들에 의해서 붕괴된 후 나서 언론의 숨통이 좀 열렸을 때인 1960년대 초부터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중립화통일론의 문제였다. 1960년 10월 22일 미상원의원이며 민주당의 총무였던 맨스필드가 한반도를 오스트리아 식으로 통일시키자는 제안을 한바 있다. 여기에 대해서 교계에서는 강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中立化“란 곧 공산주의를 용인하자는 것으로 이해한 강원용목사는 ”남북통일과 우리의 과제“라는 글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오스트리아는 분단되었었지만 우리처럼 이념적으로 분단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 모델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는 기독교는 특정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와는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에서 그는 공산주의는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김석찬은 기독교사상 같은 호에 ”남북통일과 우리의 과제“라는 글에서 ”생명보다 귀한 자유가 보장되는 통일인가 아니면 공산당 독재하에 통일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반공내지는 멸공통일만이 기독교인들이 지향할 목표라고 주장하고 있다. 같은 방향에서 한철하는 ”국토통일에는 자유통일이냐 아니면 노예통일이냐 두갈래 길밖에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승공통일론의 허상을 지적하고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려고 한 최초의 신학자는 박상증목사이다. 그는 ”살기 위한 남북통일“이란 글에서 동서독교회의 관계를 소개하면서 교회는 어느 이데올로기에 편들지 말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일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당시 이런 입장은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토인비를 인용하며 동서냉전의 갈등관계를 순전히 권력투쟁으로 이해하고 교회가 이런 두 마리용의 싸움에 어느 편에도 서서는 안 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칼 바르트가 1968년도 소련의 체코 침공과 관련해서 라인홀드 니버와 논쟁할 때의 논제와 같은 것으로 박목사는 이 논제를 바르트 보다 10여 년 전에 제시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반적으로 봐서 1960년대는 승공통일론이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방법은 북진통일이요 교회로서는 ”북한의 복음화“ 혹은 “북한선교론”을 궁극적 목표로 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정은 좀 더 달라졌다. 이 때부터 교회는 남북통일을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면서 북진통일론을 극복하고 “민족의 和解”를 위한 담당자로 자처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박정권의 대북한정책의 전환과도 관련이 있다. 197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정희대통령은 대북한관계를 재정립하는데 여기서는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북진통일론의 수정된 형태이긴 하지만 이러한 경쟁론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체제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또 그는 이념은 변하지만 민족은 영원하다는 명제를 제시하기도 했었다. 이 때 기독교사상지는 “교회와 한국통일”이라는 특집을 만들었는데 김관석 목사는 “교회와 남북통일”이라는 글에서 통일신학의 연구를 제창하면서 통일이란 단순히 정치적 문제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창출해 내야 하는 생의 과제로 제시했던 점에서 새롭다. 한철하 교수는 같은 특집에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전제로서 한국교회의 분열의 극복과 함께 보다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이 급선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통일을 위한 남한교회들의 자체반성의 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이다.
1972년도 7.4공동성명이 나오면서 사정은 조금 더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문익환 목사는 “남북통일과 한국교회”라는 글에서 탈 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이하면서 교회는 이 땅에서 민족의 화해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문목사는 “화해의 신학”으로서 통일신학을 제창하고 민족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다. 같은 방향에서 박형규목사도 “화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처하는 교회는 민족의 화해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화해자로서 남과 북 “사이에” 자기의 위치를 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의 과제로서 통일론”은 좀 추상적인 차원에서 민족의 화해를 통일의 당위로서 제시하고 있지만 통일 후의 사회상이나 교회상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것은 통일을 여전히 당위론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고 그것의 현실성을 다루기는 힘들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통일문제 및 북한교회와의 관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이는 박순경교수이다. 그는 1983년 3월 기독교사상에다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이론과 현실”이라는 글을 통해서 남북한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주의와의 대화를 통해서 ‘제3의 입장’, 내지는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을 제창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제3의 길이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봄으로써 바르트 신학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지향“의 길은 물론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목표로서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사회주의적 북한 사회와 자본주의적 남한사회라고 현재의 갈등관계를 어떻게 그것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 안은 말해주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미래적인 가능태일 뿐이다. 그는 또 1987년 6월 기독교사상에서 “현대신학과 한국 기독교 사상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글에서 분단을 넘어서는 길은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양자(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서로를 재해석하고 협동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두개의 이데올로기가 피차 오해했던 것을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극복한다면 같이 협력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상호간의 재해석과 협력의 길을 제3의 길로 파악한 듯 하다. 이러한 제3의 길에 대한 모색은 그가 기독교사상 1991년 3월 호에 실린 “민주통일운동의 역사적 조명”이란 글에서 “체제들과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는 민족대단결에 의한 평화적 통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고 민족대단결을 이루었던 전통의 기원을 1920년대 좌우연합전선의 결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민족대단결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보다 좀더 현실적인 안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좌우합작 모델에서 그 가능성을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모델이었고 또 오늘날 남북갈등은 그 당시와는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족대단결의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신학적 주제가 한민족의 통일, 아니 세계인류의 통일을 위한 전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북한과 남한 사이의 상이한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는 단초로서는 너무나 미래적이다. 말하자면 무신론적 이념체제가 지배해 왔던 북한 사회나 자본주의적 체제가 지배하고 있는 남한 사회릎 하나로 통합하는 축으로서 하나님 나라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정치적 힘으로 변환되기에는 비현실적 개념같이 보인다. 그리고 남북한의 갈등은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만이 아니기 때문에 이 양자의 재해석이나 상호 협력으로는 문제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한 민족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내면화되어 있는 개념인 “민족”을 그 매개로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이 보인다. 말하자면 남북한의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민족”을 통해서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극복이란 말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념들을 가진 사람들이 “민족대단결”이란 이념을 기초로 해서 공존하고 공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통일을 남북한이 하나의 이념과 정치체제에 의해서 하나가 되는 것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개념을 민족화해와 통일의 매개체로 파악할 경우 나서는 문제는 앞으로의 남북한 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다원론“을 ”이데올로기 다원론“의 차원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북한에서 제시하고 있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은 남북한의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말하자면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와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를 그대로 두고 연방제를 실시함으로써 통일 국가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풀어야 할 문제는 상호 대립되는 이데올로기를 갈등과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상호 보충하는 변증법적 발전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대립할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에서는 상호 보완하는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 구라파와 서유럽의 나라들 특히 통일된 독일의 경우이다. 이러한 두 이데올로기의 공존은 부분적으로는 이미 실험되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가진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그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이나 차이를 매개할 수 있는 중심축으로서 “민족”의 중요성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남북한 정권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이후 민족문제는 이데올리기적 대립의 배후로 후퇴해 버렸었다. 특히 남한의 경우 해방과 더불어 친일적인 정부가 친미적인 정부로 바뀌어 가면서 민족문제는 정치적 사안의 중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민족주의적 정치가였던 김구같은 이들의 암살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3년에 걸친 미군정의 정치적 의도 즉 친미반공정권의 수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실종은 교회 안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미국선교사들의 지원을 받고 있던 당시의 교회들로서는 불가피한 현상이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상실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그것은 통일운동이 본격화되던 80년대 중반부터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점차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지양할 수 있는 매개개념으로서 “민족”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북한과의 대화의 기초 역시 민족이 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민족대단결을 대화의 기초로 삼아서 ”이념적 다원주의“의를 살아가는 방식이 곧 현재의 갈등들을 극복하고 민족이 공생하는 길일 것이다. 이미 세계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그대로 둔채 서로 협조하는 길들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독일인들과 같이 통일 보다 먼저 민족간의 평화추구를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문제는 이러한 두 이데올로기들을 인류를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출현의 필요이다. 우리는 그 동안 통일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사상이나 체제문제에 매달린 감이 없지 않다. 통일문제는 이러한 외적인 문제(Sache-Ethos)인 동시에 인간적 문제(Personal Ethos)의 문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하나의 통제된 이데올로기에서만 살 수 있는 인격이 아니라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격들을 만들어내고 교육해 내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통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통일이란 단순히 국토나 체제 그리고 정부의 하나됨이 아니라 여러 생각을 가진 국민들 한 민족으로서 같이 사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 좋은 통일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을 서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창의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통일이고 민주적 통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교회와 적극적으로 통일을 염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승공통일에 기초한 ”북한선교론“에서 출발하여 복음에 기초한 민족화해를 제창한 ”선교적 사명“으로서의 통일론을 거쳐서 다양한 사람들의 공존과 공영을 전제로 한 ”민족대단결“의 통일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의 서술들은 한국의 교단들이 공적 의결과정을 거쳐서 합의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이러한 통일운동을 이끌어 가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걸어간 길을 나름대로 스케취해 본 것이다. 교단에 따라서는 여전히 ”北進統一論“ 혹은 ”吸收統一論“에 기초한 ”북한선교론“을 견지하는 교단들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북한의 공산정권의 몰락과 함께 그 지역에 자신들의 교회를 이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교단으로서 감리교회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북한 지역에다 감리사들을 임명해 놓고 때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승공통일론 내지 ”북한선교론“의 경우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으로 ”해방의 대상“이고 종교적으로는 ”선교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이 경우 북한선교론의 실천방식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빨리 그리고 많은 자기 파의 교회를 북한에 설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론의 발전과정에서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의 북한교회에 대한 태도들도 변하고 있다. 통일을 선교적 사명으로 이해하고 민족대단결을 주장하면서 북한 교회는 더이상 “해방의 대상”이나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1980년대 말부터 글리온 만남과 더불어 북한 교회가 해외 교회들과 접촉을 시작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북한의 교회가 남한의 선교의 ”대상“즉 객체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고 선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북한 교회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과 더불어 통일 이후의 북한 교회의 형성과 거기에 따른 남북한 교회의 관계가 주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통일 이후의 북한 교회의 모델에 대한 시안들
통일 이후의 북한교회의 자기형성은 전적으로 북한 그리스도인들의 주체적 책임 하에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법적으로나 선교신학적으로 봐서도 자명한 일이다. 남한의 교회들이나 해외의 교회들은 그들의 선교활동을 지원하는 파트너로서 머물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일부 교단들이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북한선교론“이 통일 후에 실천될 경우에는 남한에서와 같이 북한에서도 분열된 교회 혹은 교파교회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로 영미계통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식된 교파교회들은 교회성장 등에 기여한 점도 있지만 교회분열과 사회통합의 저해라고 하는 좋지 못한 부산물도 낳았던 점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통일 이후의 북한 교회의 새로운 형성을 위해서 몇 가지 역사적 교회모델들을 제시해 보겠다.
가. 일본 교단의 모델
일본의 ”교단“은 1939년 4월부터 시행되었던 이른바 ‘종교단체법’에 의해서 탄생되었다. 전시체제에 돌입했던 일본은 통제와 동원을 목적으로 종교들을 이 법에 따라서 규제하려고 했다. 일본정부는 교단설립 기준을 교회 수 50개 이상 신도 수 5천 이상으로 하도록 했고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교파는 상호 합동하여 이 숫자를 채우도록 했다. 구세군 사건으로 인해서 각 교파들은 자신들의 존속을 위해서 자기 교파를 해산하고 교단을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1년 6월 일본 기독교단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34개의 교파가 합류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 교단의 성립이 정부의 지령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자발적인 것일가 하는데 대해서는 의견들이 갈라진다. 학자 따라서는 대체로 이러한 성립을 자발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교단 규칙 7조의 생활강령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곧 “皇國의 道에 따라서 신앙을 철저히 하고 각자 맡겨진 분야에서 있는 힘을 다해 皇運에 기여하고 받들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1942년 10월 문부성의 요청에 의하여 기초된 “전시포교방침”은 이러한 교단의 형성배경을 더욱 분명하게 파악하게 해 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강령들이 기술되어 있다.
1. “국체의 본의를 철저히 이행해서 大東亞戰爭의 목적 완수에 매진을 기하고
2. ”본 교단의 총력을 집중해서 솔선수범 宗敎報國에 성실을 다하고
3. “일본 基督敎 確立을 도모하여 본 교단의 사명완수에 노력을 기한다.”
한마디로 교단의 성립은 일본의 여러 교파교회가 사라진 것이며 동시에 기독교가 일본 전시체제하에서 어용화된 것이었다. 종교와 신교의 자유는 자취를 감추고 일본의 정치적 목적에 교회는 전적으로 굴복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점령군은 종교관계에 대해서 國家神道의 해체만을 선언했으므로 교단 통리는 1945년 8월 “시국의 격변에도 관계없이 교단의 조직체제는 조금도 움직이지 말고“ 전도와 교회부흥에 매진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면 왜 교단은 전쟁 후에 붕괴되거나 해체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1)교단에서 합동교회라는 의의를 재발견했고 이것을 지탱해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2)교회적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없었던 교단이 북미 선교회들의 지지협력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공회, 침례교연맹, 루터교회, 구세군등은 독자적으로 교단을 성립시켰다.
나. 독일교회의 모델
앞서 장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독일의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역적 유산과 신앙고백적 유산을 동시에 물려받았다. 지역적 유산이란 한마디로 과거의 정치적 단위에 따라서 서독에는 16개의 독자적인 지방교회(Landeskirche)와 동독지방에는 5개의 지방교회를 성립시킨 것이다. 이 교회들의 연합체를 가리켜서 “독일개신교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라고 불렀다. 이 독일 개신교회는 1945년에 성립된 이래로 1969년 동서독의 통행이 거의 불가능하게 됐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말하자면 국토와 민족은 분단되었지만 그때까지 교회는 하나로 남아있었다. 더 이상의 교류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동독에는 “독일개신교연맹”(Evangelischer Kirchenbund) 조직된 것이다.
신앙고백적 유산이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그리고 이 둘을 합한 연합교회라는 세 가지 형식으로 교회가 구성되었다는 말이다. 카톨릭을 제외하고 법적으로 종교세를 분배받는 교회들이 바로 이들 교회들이다. 이들 교회가운데 서독의 경우 일곱개의 ”지방교회“는 루터교와 개혁교의 연합교회며 일곱 개의 지방교회는 루터파 교회이고 나머지 두개는 개혁파 교회가 되었다. 동독의 다섯 교회들도 서독과 같이 지방교회형식을 취하고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지방교회들은 신학, 예전, 조직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신앙고백적 전통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 이른바 자유교회들(Freikirchen)에 속하는 군소 교단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감리교회, 메노나이트, 유럽 형제단 교회(헤른후트), 구세군, 퀘이커, 오순절 교회, 고카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들이다. 이들은 종교세를 통해서 운영되지 않고 참석하는 교인들의 헌금에 의존해서 운영된다.
1990년 8월 22일 동독의회는 서독의 기본법 23조에 의거해서 10월 3일자로 서독에 흡수통일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9월 20일 양 독일 의회는 이 안을 가결했고 이렇게 해서 양 독일은 통일되었다. 서독의 기본법 23조는 주변영토가 병합을 원할 때 주의 단위로서 서독에 귀속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동독의 다섯 개 주들이 각기 독자적으로 서독의 연방으로서 가입한 것이다. 이러한 절차는 교회의 통합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동독 지방에 있던 다섯 개의 지방교회가 각기 독자적으로 독일개신교(EKD)의 일원이 됨으로써 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서독의 지방교회들과 같이 동독의 지방교회들도 독자적인 헌법과 기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체 교회인 독일개신교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1969년 서독으로부터 분리되었던 동독지역의 다섯 개의 지방교회가 다시 제 위치로 되돌아 온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우리는 정치적 이유들로 인해서 강제 통합되었거나 분열되었던 교회들 가운데 대표적 교회인 일본의 “교단”과 독일의 개신교를 살펴보았다. 일본 교회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 강요되었던 통합을 전쟁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경우이다. 물론 앞서 보아왔듯이 교회의 재건과정에서 교파교단으로 되돌아간 경우도 없지 않다. 독일 교회는 정치적 분단으로 인해서 강제로 분단되었던 교회가 통일 이후에 전과 같이 하나가 된 경우이다. 이 두 가지의 경우들은 앞으로 통일 이후의 북한 교회의 형성과 남북한 교회 사이의 관계설정에 중요한 참고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일본의 교단과 같이 현재 북한의 “조선기독교도 연맹”이 하나의 개신교적 기구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교회“(One Church) 혹은 “에큐메니칼 교회”(The Ecumenical Church)로 발전해 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북한의 “조선기독교 연맹”이란 명칭은 교회나 교파들의 연합체라기 보다는 개개 교인들의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남한의 경우 지역 YMCA의 조직과 유사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개개 단위교회들의 연합체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개개 단위교회의 연합체가 될 경우에는 남한의 교단적 성격을 띨 것이다. 일본의 경우 교단은 지교회의 연합체로 남은 셈이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앞으로 북한에서는 단일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정치적 조건하에 하나의 “연맹”으로 단일화된 개신교를 다시 교파교회로 갈라놓는 것은 선교사적 경험에서나 우리 나라의 교회사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강제로 통합되었던 “교단”이 전쟁 후에도 어느 정도 통일된 개신교 단체로서 별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서 분단되었던 독일의 개신교회는 정치적 통일과 더불어 다시 하나의 개신교회로 되돌아왔다.
만일 통일 후에도 북한에 단일 교회의 상이 깨어지고 다양한 교파교회들이 이식된다면 사태는 남한의 경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크게는 한국기독교 협의회 계열의 교회와 거기에 속하지 않은 집단으로 분열되고 대립될 것이다. 나아가서 남한에 있는 모든 교파들이 북한에 들어가 제각기 교단을 설립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선교활동에서도 불가피하게 경쟁과 다툼이 벌어질 것은 자명하다. 지금 남한 교회들 안에서는 한편으로 이것을 우려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 후의 북한 기독교의 형성에 있어서는 필자의 소견으로서는 현존하는 “조선기독교도 연맹”이 주축이 되어 “주체적 독립교회”로서 “하나의 개신교회”를 지향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교회법적으로도 선교론적으로도 타당하다. 북한의 개신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조선기독교 연맹”이기 때문에 통일 이후에도 거기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의사에 따라서 교회가 형성되어야 한다.
남한의 교회들과 교회단체들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 동역자들로서 새로운 교회 형성에 봉사할 뿐이다. 이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남한의 교단이나 단체들은 북한의 “조선기독교도 연맹”과 더불어 법적 관계와 선교적 협약 등을 체결함으로써 통일에 대비하는 것은 물론 북한에서 형성될 교회를 지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남북한 교회의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을 경우 정복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쟁원리에 기초한 “북한선교론”을 신봉하는 남한의 교파들의 경쟁적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앞으로 한민족 선교에 심각한 장애요인들이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장애요소들은 이미 러시아를 비롯하여 구 사회주의권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로 인해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