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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3 19:14
한국교회의 사회선교에 관한 연구
글쓴이 : 손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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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념 규정
 
사회선교(The Social Mission)란 개념은 그동안 사용되어 오던 전통적 선교개념과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사용된 개념이다. 이 사회선교란 개념의 사용은 그동안의 전통적 선교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새대와 환경, 말하자면 산업화 사회 혹은 산업화 후기 사회에 처해서 그것을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데서 사용된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개념들 사이에는 대립적이명 동시에 보완적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그동안 이 개념들을 사용하는 양대 개신교 집단들 사이에서는 학문적으로 오해되거나 실천적으로 오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오해와 오용은 그동안의 선교실천에서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선교전망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정확한 이해와 상호보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우선 이 두 개념들의 차이들을 밝힘으로써 보다 정확한 선교이해와 함께 선교실천을 위한 논거들과 목표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전통적 선교론이 인간의 영혼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사회선교론은 인간의 통전적 구원을 문제삼는다. 전통적 구원론이 인간을 영과 육신으로 분리한다면 사회선교는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될 수 없는 통전적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개의 각기 다른 선교론은 안간이해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이해의 차이는 성서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서 특히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별해서 이해하고 있지만 이 둘이 분리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인간이해도 본질적으론 이러한 구약의 인간이해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 문서들 가운데 이방 기독교, 특히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활동했던 기독교에서 우리는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원론적 사상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이원론적 사상은 영지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시리아를 배경으로 했던 요한복음의빛과 어둠의 이원론이나 바울 서신들, 특히 로마서 등에 나타나 있는영과 육의 이원론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인간이해에 기초한 구원론이 그동안의 전통적 선교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전통적 선교론이 인간의 사후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면 사회선교는 현재 살이 있는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전통적 선교론은 인간의 구원문제를 내세와 관련시켜 생각하지만 사회선교는 인간의 구원문제를 현재의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즉 이 두 개의 선교론에서는 그것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시간이 다른다. 전자는 미래의 시간을 중요시하고 다른 후자는 현재의 시간을 문제삼는다. 전통적 구원론은 현재의 시간을 미워하고 사회적 선교론은 미래를 부정한다. 한마디로 전통적 선교론은 미래의 종말적 하나님 나라에 관심한다면 사회선교론은지상에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문제삼는다. 전통적 선교론은 우리가장차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문제삼지만 사회선교론은 하나님 나라가오늘우리를 향해서 오는 것을 문제삼는다. 따라서 전통적 선교론은 인간이 지향해 가는 미래(Futurum)를 문제삼지만 사회선교론은 하나님에 의해서 닥아오는 미래(Adventus)를 문제삼는다. 전통적 선교론은 인간의 신화(Vergottung), 사회선교론은 하나님의 인간화 즉 성육신(Menschenwerdung)을 문제삼는다. 전통적 선교론은 그리스도의 높임받음을 중요시하지만 사회선교론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문제삼는다. 전통적 선교론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중요시하고 사회선교론은 오심 즉 성탄절을 중요시 한다.
 
마지막으로 전통적 선교론은 개인주의적 차원에서 개개 인간의 인격적 실존을 문제삼는다면 사회선교론은 사회적 차원에서 안에서의 인간의 관계성을 중요시 한다. 따라서 전통적 선교론에서는 구원을 향한 인간의 개인적 회심과 결단이 문제되며 동시에 윤리적 차원에서도 개개인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 중요시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선교론에서는 개개인의 구원을 사회적 연계성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조건들의 변혁이 문제되며 윤리적 차원에서도 인간들이 살아가야 할 공동체성에 합치되는 행위들을 중요시 하게 된다. 사회선교론에서는 고독한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조건으로서 인간들 사이의 연대성이 문제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선교론에서는 인간을 개체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실체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선교론은 사회와 자연 등 하나님의 창조 전체의 구원을 문제삼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 선교론과 사회선교론은 인간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구원론에 있어서도 그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이 둘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나 목표에 있어서 각기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 사회선교론의 전역사
 
사회선교론의 기원을 그 뿌리로부터 파악하려고 한다면 신구약 성서의 문서들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16세기, 진정한 의미에서 리베리아식의 식민지 시대의 카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에서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카톨릭 선교역사에서 사회선교의 뿌리로 알려졌던 사건 즉 라스 카사스(Fray Bartolome de Las Casas)의 투쟁을 살펴보자. 1492년 칼럼버스의 미국 점령 이후 1514년 스페인의 남미탐험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식민지 확장을 위한 탐험대에 군목(Kaplan)으로 동참했던 라스 카사스 신부는 볼리비아에서 식민주의자들에게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수탈당하는 원주민들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그때부터 스페인의 카톨릭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인디안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선교적 사명으로 이해한다.
그는 스페인의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 사상에 기초해서 미대륙에서 식민자화의 법적 기초와 방법들에 대한 이론을 수립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원주민들도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들로서 그들은 인간적으로 대우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스페인에서 통용되던 법에 따라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온 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기독교인의 의무는 타민족들이 우리를 받아들이고 또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는 1542년 황제 칼 V세에 의해서 소집된 스페인 의회(Junta)에서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 체제를 고발하여새로운 법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사제로서 원주민을 위한 법적 투쟁에 실패하자 그는 무기를 들고 그들의 편에 서서 싸웠다. 그는 그후 본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의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의 불의한 행동을 규탄하는 운동을 전개는데 일생을 보냈다.
 
개신교 선교사에서 사회선교의 시효라고 할 수 사건은 인도에서 일어났다. 그 대표적 인물은 인도에서 개신교 선교와 교회의 창설자라 할 수 있는 지겐발크(Bartholoaeus Ziegenbalg=1682-1719)이다. 그는 독일의 삭센 출신으로서 할레의 경건주의운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프랑케(August Francke)의 제자로서 인도의 선교사로 파송받아 활동했다. 그는 힌두교 세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몇가지 선교사적으로 볼 때 특이한 업적을 달성했다. 첫째는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토착민의 안수권을 주장했다. 그 다음으로는 당시 홀랜드의 동인도 회사의 경제적 착취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다. 물론 당시 할레의 선교사들이 덴마크 왕 프리드리하 IV세의 지원을 받아서 선교와 식민지의 야합모델 속에 출발했지만 그는 이러한 모델에 대해서 최초로 회의를 갖고 그것을 부정하려고 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 의하면 선교는 오직 피선교지역 주민들의 영혼구원과 함께 그들의 복리를 위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선교사들이 비록 왕가나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 해도 식민지 지배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철학은 그의 사상의 요람이 되었던 할레의 경건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식민주의자들의 착취에 저항한 지겐밮크는 당시 식민주의자들과선교와 식민주의의 종합을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인도에 나타난 토마스 뮌쳐(Thomas Muentze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식민주의와 선교의 종합이라는 전통적 카톨릭의 신정론 모델이 사실상 종교개혁 원리에 의해서 부정되었지만 그것은 개신교 선교에서 다시 등장했었다. 그동안 개신교 선교사들은 거기에 대한 회의 없이 활동했다고 하는 점이다. 이것은 19세기에 들어 와서도선교사가 오면 그 다음에 영사가 오고 마지막에는 군대가 온다는 한 아프리카 추장 줄루(Zulu)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렇게 식민주의와 선교의 종합모델을 거부한 예는 중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선교 즉 복음의 선포는 식민주의자의 앞잡이나 지원 세력이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선교는 장기적으로 중국인의 해방을 위한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했던 독일 선교사 구쯜라프(Karl Guetszlaff) 1841년 아편전쟁 과정에서 중국인의 식민지 해방투쟁을 보고지금의 투쟁은 세계사에서 한 전기를 만들 것이다라고 술회한 바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들의식민주의와 선교의 종합모델들에 항거한 일부 선교사들의 투쟁은 눈에 띠는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근대적 의미에서 하나의 새로운 선교모델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투쟁은 식민지 시대라고 하는 역사적 조건 하에서 전개된 운동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 와서도자본주의와 선교의 종합모델이 일부 선교단체들에 의해서 추동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전의 이베리식 식민지 선교의 병용이라 할 수 있다.
 
4. 사회선교론 원역사
 
이전의 카톨릭 교회나 유럽의 개신교 국가교회의 세계선교의 기초원리가 되었던식민주의와 선교의 종합모델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어느 정도 붕괴되었다고 하지만 식민지 세기가 끝을 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19세기 중엽부터 어느 정도 달라진 분위기에서 주로 영미계통의 교파교회들에 의해서 전개된 세계선교 활동들도 이러한식민주의와 선교의 종합모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이들 개신교의 선교들은 주로 경건주의적 각성운동의 영향하에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렇다할 사회선교적 요소들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다. 그 다음으로 이들 교파교회의 선교사들도 사실상 직접간접으로 식민지 모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원과 보호 아래 활동했었다. 이러한 이해는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서구식민지 확장을복음을 위한 길예비로 파악한 데서도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은 19세기를 교회사적으로 봐서 식민지 세기가 아니라위대한 세기로 평가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실상 19세기는 서구인들에게는위대한 세기였지만 비서구인들에게는굴욕과 고통의 세기라는 것을 당시 선교사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당시 선교사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의식성의 한계를 보게 된다.'
 
19세기말 한국에 들어온 영미 계통의 선교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로 대륙의 경건주의와 영미의 각성운동을 그 신학적 배경으로 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의 궁극적 목표를조선인의 영혼구원에서 찾았었다. 그들은 19세기말 20세기 초반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한반도의 식민지화 과정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처음부터 끝까지조선인의 영혼구원에만 집중했다.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역사와 삶의 터전인 국가와 영토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보호조약 체결과 1910년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이라고 하는 국가의 운명이 달린 투쟁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운동은 1907년 이른바대부흥 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의 목표는 일본의 식민지화에 직면해서 독립쟁취를 위해서 투쟁하던 이른바정치화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교회를 정치운동으로부터 정화하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1907년도의 부흥운동은 선교사들과 그 추종세력들의 교회 내에서의 교권장악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후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신앙적 방향을 규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홀동방향은 별 장애 없이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어떤역동적즉 역사변혁적 사회의식, 사회선교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단지자선적차원에서 학교설립. 병원설립, 고아원설립 등과 같은 비역동적 사회의식만을 가지고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의식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로 관심했던자선적차원에서의 사회활동도 한국의 개화와 근대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개신교의 신학과 신앙에서 새로운 전환이 시작된 것은 1930년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 보다도 1920년대 중반의 사회주의에 의한반기독교운동과 1930년대부터 일본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대륙신학은 영미계통의 경건주의적 신학에 기초한 한국교회의 단선적 신앙과 경건에 새로운 도전으로 당장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일어났던 사회주의 운동은 당시 개신교를 일차적 타도대상으로 삼고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당시 개신교회를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며 민족해방과 사회변혁에 장애물로 파악했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서 감리교회 같은 경우 이른바사회신조로 대결했지만 그 내용은 역시 변혁적 차원을 갖지 못한 자선적 차원의 것이었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일본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유럽의변증법적 신학”, 특히 바르트 신학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닥아왔다. 사실상 변증법적 신학은 계몽주의 신학, 혹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기 위한 일단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추동된 것인데 당시의 한국교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해외에서 공부했던 장공 김재준과 복음교회의 최태영등이 이러한 새로운 신학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한국복음교회의 창설자였던 최태영은 그리스도 교회와 사회적 민족적 책임성을 결합시키는 차원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교회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새로운 신학운동과 교회운동을 통해서 한국에서도 비로소 민족과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을 어느 정도 자각하게 되고 따라서 미약하나마 사회선교적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5. 1960년대 이래 한국교회의 사회선교운동
 
  1) 사회선교운동을 추동한 외 조건들
 
한국에서 본격적인 사회선교운동의 시작은 1960년대 초로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 당시 이러한 사회선교운동이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을 몇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1960년대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들 수 있다. 해방 이후 10여년에 걸친 이승만의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의적 정권이 1960 4월 학생들과 시민들의 혁명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이 혁명을 통해서 고양되었던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에 대한 국민적 의식과 희망이 1년이 지나자 일단의 정치군인들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학계와 교회는 교회의 정치적 봉사(The Political Diakonia)를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깊은 반성과 참회와 함께 새로운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승만 정권 하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나 그들은 정치적 민주화에 아무런 책임있는 역할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이승만과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을 개신교의 장로였다는 이유로 선거등에서 공공연히 지원했고 이들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햇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학생들이 피흘려 쟁취했던 민주주의적 기초를 군사구테타로부터 지켜내는 일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었다. 이리하여 신학자들과 교회는 깊은 정치적책임성을 깊이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당시 한국에서의 사회선교를 위한 신학적 기초가 소개된다. 그것은사회참여의 신학혹은정치신학으로 명명되었다. 그것의 대표적 예로서 독일의 히틀러 치하에서 그를 암살함으로써 나치독재를 종식시키려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애 대한 소개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본회퍼에 대한 소개의 선구자는 오재식이다. 그는 1959기독교 사상본회퍼의 현대적 의미란 글을 통해서 그의 생애와 정치투쟁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미친 운전자가 자동차를 몰고 질주할 때 교회는 희생된 자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는 단체가 되어서는 안되며 그 운전자를 차에서 끌어내려서 그 차를 멈추어 희생을 막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민주정부를 군사구테타로 전복하고 새로운 군사독재체제가 굳어가던 정치적 와중에서 민주적으로 고양된 기독학생들과 참여적 신학자들에게 본회퍼의 혁명적이고 순교자적 그리스도인 상이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러한 본회퍼의 삶과 활동은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삶과 사상과 비교되어 이장식 교수에 의해서 소개되기도 했다. 이장식 교수는본회퍼와 주기철이란 글에서 주기철은 순수 종교적 차원에서 신앙을 고수하다 순교를 했으나 본회퍼는 신앙적 차원에서 교회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투쟁하다 죽었으므로 그는 순교자인 동시에 애국자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신학자 본회퍼의 삶과 사상은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치적 봉사와 사회적 책임성이라는 테두리에서 한국에 소개된다. 이렇게 본회퍼의 삶과 사상은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참여적 신학자들에게 사회선교의 모범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고려할 것은 당시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적 동향이다. 1950년대 말 60년대 초부터 에큐메니칼 운동 차원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신학적 주제들은 대체로 세가지 동심을 중심으로 움직였었다. 첫째는 당시 동서간의 냉전 체제 하에서 이념적 대결로 빚어지는 온갖 불평화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특히 강대국들의 핵무기 경쟁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위협은 교회가 앞장 서서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다음은 교회가 세계 고등종교들과의 관계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동안 기독교는 오만한 독선적 진리의 주장과 함께 전투적 선교론을 통해서 여타의 고등종교들과 대결적 자세를 견지해 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군적 선교신학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서구 지역에서 타종교들의 르네상스가 왔고 오히려 기독교 선교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이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타종교와의 문제는 그후 카톨릭 교회와 상호 신학의 자극을 받으면서 종교다원주의라고 하는 선교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종착된다. 마지막으로 제3세계 교회들이 주로 제기했던 문제는 국제간의 사회정의 문제였다. 이러한 사회정의 문제는 그후 빈곤문제, 개발문제등과 연관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책임성의 문제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세 개의 신학적 중심축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부수적인 문제들이 등장했었다.
 
  2) 사회선교운동의 신학적 배경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상위개념으로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책임사회론”(Responsible Society)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책임사회론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이 세상의 삶의 전 영역,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자유로운 책임적 존재로 창조되었고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적으로 응답하고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주개념인책임사회론하나님의 선교개념과 결합되면서 보다 새롭고 확대된 신학적 지평을 열어간다.하나님의 선교개념에 따르면하나님은 교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도
 되시며 따라서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개념은 전통적 전도개념을 대치할 뿐만 아니라 선교론과 교회론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게 된다. 즉 전통적으로 선교를 다룰 때 우리는 하나님-교회-세계란 도식으로 말했지만 하나님의 선교신학에서는 하나님-세계-교회라는 도식으로 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in) 혹은 교회를 통해서(durch) 선교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outside)에서 선교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하나님의 선교의 현장인 세상에서 책임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적 사명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적으로 참여해야 할 하나님의 선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평화의 구현, 사회정의의 실현, 그리고 민족들 간의 화해를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가 담고 있는 메시지들은 특히 예언자들과 예수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신구약 성서의 중심개념이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1973년 방콕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의 주제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에서 좀더 구체화되었다.  오늘날의 구원개념의 대전제는 전통적 선교개념, 즉 영혼구원, 미래의 구원, 개인의 구원을 극복하고 통전적 구원, 현재의 구원, 그리고 사회구원을 그 주된 목표로 제시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계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교현장으로 나아가서 거기에 동참하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의 중심적 내용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사상은 사실상 칼빈주의 신학에서 온 그리스도의 왕권통치 도식을 하나님의 왕원통치 도식으로 대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전통적 루터신학에서 다루어지던 두 왕국론을 통합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 선교론은 종교개혁 전통을 현대적 상황에 알맞게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신학적 자극들은 한국에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초반군사독재 정권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추진되었던 근대화 혹은 산업화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그 해석학적 틀을 형성해 간다. 당시 박정희는 1965년 한일굴욕외교를 통해서 국교정상화를 이루고 나서 약간의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지원받아서 이른바근대화라는 것을 추진한다. 그리고 이런 근대화 혹은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과 수탈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교회의 진보적이고 의식있는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이들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함께 깊은 선교적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이전의 전통적 전도운동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사회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사회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산업전도 혹은 산업선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다.
 
사회선교가 산업전도 혹은 산업선교란 이름으로 전개되게 된 것은 당시 선진공업국가들의 자금과 기술지원하에 제3세계에서 시작되었던 이른바 산업화 혹은 공업화와 거기에 상응하여 혹은 반대하여 세계교회혐의회나 아시아 교회협의회에서 논의되던개발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권에서는 시장의 절반을 사회주의권에 상실하고 나서 과도하게 축적된 금융자본 및 낙후한 기술의 처리를 위해 고심하게 되었었다. 이러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제3세계의 빈곤한 국가군들에게 이른바개발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서 그들을 산업화로 몰아넣었다.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제3세계 국가들은 선진공업국가들로부터 자본과 기술지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신식민지적 종속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세계경제에서 이른바 외채위기로 종착되게 되었다. 이러한 제3세계의 산업화 고정에서개발독재”, “신식민지”, “종속이론등이 새로운 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 이것은 당시 이러한 개발에 동참했던 한국에서도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순으로 나타났었던 것이다.
 
  3) 산업전도와 산업선교
 
이러한 산업선교운동이 한국개신교단들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선교프로그람으로 채택되어 실행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부터이다. 당시 보수적인 교단들은산업전도란 이름으로 그리고 좀더 진보적인 교단들은산업선교란 이름으로 사회선교를 시작했었다. 산업전도를 실시했던 교단들은 초기에는 대체로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기업들의 지원을 받아서 그들의 공장 안에서 일요일 근무로 인해서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노동자들을 위해 예배를 드려주는 것을 곧 산업전도로 이해했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방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을 산업전도 혹은 산업선교의 일차적 목적으로 삼았다. 따라서 산업전도가 하는 일은 기존의 교회에서 하던 목회활동을 산업현장으로 올겨 놓은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산업전도 운동은 유럽의 산업화과장 초기에 세속화된 노동자들을 맑스주의적 노동운동으로부터 구출해서 교회에 잡아두려고 했던 초기의 산업선교의 목표와 유사한 방향에서 진행되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전도 과정에 뛰어 들어서 목회를 하던 목사들이나 실무자들이 발견한 것은 노동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제반 모순들이었다. 이러한 모순들 가운데는 무엇 보다도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이었다.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점차 드러났다. 특히 마산등 수출공단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 기업체들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인권의 문제가 산업전도 현장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모든 산업전도 종사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눈을 뜬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종사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을 산업선교 현장에서 실무자로 일했던 조승혁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선교실무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전도 사업에 관한 회의와 함께 세계교회들의 선교신학적 흐름에 눈을 뜨게 됨에 따라서 종래의 교회의 가치규범을 노동자들에게 가르치고 적용시키는 것은 교회 전도의 수단을 될 수 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는 아니라는 반성과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거의 모든 산업선교 실무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반성과 자각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선교실무자들의 반성과 자각이 그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인권과 인간화 문제를 그들이 수행하던 산업선교의 일차적 과제로 삼게 만들었다. 그들은 복음화에 앞서서 인간화(Humanisation)을 문제삼았다. 그들은 전도에 앞서서 노동자들의 인권보호와 신장에 더욱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그들은 전통적 전도에서 치중하던영혼구원선행해서 노동자들의전인구원헉은사회구원에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실무자들의 의식변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현상은 1960년대 말경부터 이들이 산업전도란 말 대신에 산업선교란 개념을 중심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선교란 개념의 사용은 무엇 보다도 이전의 전통적 전도개념이 지향했던 교회중심적 선교개념에서부터하나님의 선교개념으로 그 방향이 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때부터 한국 교회에서의 산업선교는 명실공히 사회선교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등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집단들이 한국교회의 사회선교운동의 중심적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인권을 되찾아 줌으로써 이들의 전반적 인간화를 달성하는 것을 선교의 궁극적 목표로 삼게 된 것이다.
 
  3) 사회선교운동의 기구적 발전
 
앞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산업전도 혹은 산업선교는 한국교회협의회에 가입한 6개 교단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957 4 12일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총회 산하에 중앙산업전도회를 조직을 필두로 시작된 감리교회가 1961 9월 인천에서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1962년 대한성공회가 황지의 탄광지대에서 그리고 한국기독교 장로회가 1963 6 5일 인천 대성목재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이렇게 조직되기 시작한 산업선교운동은  서울 및 경인지역을 필두로 해서 대단위 공단들이 있는 지방의 중소도시들로 확산되어 갔다. 인천, 영등포, 대전, 청주, 부산, 태백등 산업체와 탄광지대등 노동자들이 집결되어 있는 지역들에서는 사회선교 센터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지역의 사회선교 센터들은 그 지역에 있던 노동운동 단체들과 협력하여 활동했다.
이렇게 교단별로 진행되어 오면서 여러 방면에서 새롭게 경함되고 또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을 공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협의체 구성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실무자들 사이에 생기게 된다. 이러한 인식과 실천과정에서 제기되는 제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서한국 크리스챤 행동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이 단체는 후에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체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단체와 더불어 한국교회 안에서사회선교란 개념과 실천의 내용이 더욱 분명해졌다.
 
5) 사회선교의 프로그램 개괄
 
1960년대 초에 실시되던 산업전도의 과정에서는 그 성격과 목표가 말해주듯이 역동적 프로그람 보다는 비역동적 프로그람이 주를 이루었다. 그것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잇을 것이다.
우선 예배 프로그람이다. 노동현장에서 일요일에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을 위해서 일요일에 현장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일요예배 외에도 정기적으로 수용일이나 다른 요일에 예배를 드렸었다.
그 다음으로는 성서연구를 들 수 있다. 예배 외에 일정한 날자를 정해서 성서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여기에 관심이 있는 참여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 다음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우회 조직이다. 이들이 예배와 성서공부를 조직하여 공장교회를 이끌어가며 노동자들의 상부상조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했다. 이들에 의해서 전도지등이 배포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목회자의 형장방문과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초기의 프로그람들은 전통적 교회의 프로그람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서 전통적 선교의 전형적 프로그람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1968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사회선교 개념이 도입되면서 거기에 따른 프로그람의 성격과 목표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산업선교가 전통적 전도의 범주를 뛰어넘어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권신장을 그 주된 목표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권신장 혹은 인권선교는 신학적으로는 인간화란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들과 그들의 인권신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선교방법들과 프로그램들이 제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사회선교 현장에 투입되어 일할 수 있는 실무자들의 훈련프로그람이었다. 이러한 실무자의 훈련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직접 현장으로 온 실무자들이나 이미 전통적 목회현장에서 일하다가 현장으로 투입된 실무자들이나 사회선교가 수행되어야 할 현장에 대한 경험은 전무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일정기간 일정한 훈련을 받는 프로그람을 제공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이런 훈련 프로그람은 자체적으로 개발해서 수행되기도 했지만 해외 특히 아시아 교회협의회나 세계교회협의와의 공동 프로그람을 통해서 수행되었었다.
이러한 프로그람들을 우리는 실무자들의 훈련을 위한 프로그람과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위한 프로그람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實務者들을 위한 프로그람 내용들로서는 성서와 에큐메니칼 신학의 흐름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노동사목자들의 활동, 남미의 기초공동체와 해방신학, 아시아 교회들의 민중선교활등등이 소개되었다. 나아가서 사회학에 대한 일반적 인식, 사회조사 방법론, 도시화의 사회학, 빈곤의 사회학,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심리학 및 그들의 삶의 현장에 대한 체험들이 포함되었다. 동시에 실무자들이 활동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요소들 특히 정부나 기업주들의 전략과 전술을 익히는 일도 중요했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조직화를 위한 기술등이 연구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노동자들의 意識化 敎育 프로그람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의식화 프로그람은 무엇 보다도 노동자들이 세계현실과 자아를 보다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당시 이러한 의식화 프로그람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던 것은 무엇 보다도 남미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어리의 의식화 교육방법론, 죤 두이의 교육방법론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의식화 교육 프로그람 가운데는 1960년대 말부터 실시되었던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교육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1) 노동둔동의 이론과 (2) 세계노동운동의 역사 (3) 노동조합 운영의 실제 (4) 노동운동의 지도자론 (5) 회의 진행법 (6) 사례연구 (7) 노동관계법의 해설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훈련 프로그람들은 노동시간 이후 야학 등을 통해서 실시되는데 이 때 수 많은 의식화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이 교육과정에 협력자들로 동참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선교 운동을 결정적으로 지원한 집단은 한국기독학생연맹, YMCA등 진보적인 기독교 학생운동단체들이었다. 한 때는 한국 크리스챤 아카데미도 이 일에 동참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그리고 지식인 집단들이 매개되었고 이렇게 됨으로써 사회선교활동은 더욱더 큰 힘과 결실을 얻게 되었었다.
 
결론: 현실과 전망
 
이상과 같은 한국 개신교의 사회선교 운동은 그 동안의 여러 측면에서 환경변화를 거치면서도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급격한 상황변화는 한국 개신교 사회선교 운동의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여기서는 80년대 중반 이후의 상화변화를 간략하게 살펴 보자.
1979년 독재자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그동안에 노동자들과 학생들 그리고 지식인들의 저항을 통해서 축적된 민주주의적 기반을 송두리채 붕괴시킨다. 광주학살이 자행된 이후 80년대 중반까지는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은 더욱 강력하게 억압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의 집권기가 끝나가던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 정권이 그동안 성장하여 강력한 영향력으로 집결된 저항운동을 지속적으로 억압할 수는 없었다. 그는 1986년 이른바 6.29 선언을 통해서 민주세력에게 항복함으로써 민주화와 인권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지하게 된다. 그러나 1987년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주의의 진영의 분열로 인해서 전두환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노태우가 임기 5년의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사실상 민주화운동은 다시 한번 깊은 좌절을 경험한다. 그러나 노태우는 그의 전임자들 처럼 민주화 세력들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민주화 세력은 이미 더 이상 자의적으로 탄압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사회선교 운동의 대상이었던 노동운동도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을 들자면 노동운동의 놀라운 성장이다. 그동안 노동운동은 양적으로나 질적 수준에서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사회선교 운동가들과 같은 몽학선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화 수준에서 사회선교지도자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그리고 양적으로도 엄청나게 성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선교의 보호영역에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나 성장했고 너무나 거대한 세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성장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고 독자적 조직운영 체제를 갖추었다.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와 같이 교회에 속한 사회선교 지도자들의 지도 하에 머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운동은 종교와는 무관한 세속적 운동이 되었다. 서구 유럽에서 처럼 노동운동은 세속적 운동이었고 따라서 이 운동은 자신의 본래적 위치로 되돌아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실상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과 이 운동이 사회선교운동으로부터 독립된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세속화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동운동운 교회의 사회선교적 울타리에 머물 수 있는 성질의 운동이 아니릭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그 동안 사회선교에 종사하던 실무자들의 위상들도 변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환경과 노동운동의 성장이라고 하는 외적 조건들의 변화와 더불어 더 이상 과거의 지위나 역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그들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서 더 이상 자신들의 과제를 찾을 수 없게 된 것디다. 그들은 다시 교회나 교회기관들에서 자기들의 과제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이런 결단을 강요당하게 된 것은 그 동안의 사회선교 운동을 위한 물적 지원의 중단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사회선교 운동의 신학적 물적 지원은 대부분 해외 교회들에 의존했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을 내세운 해외 교회들의 원조의 감소로 사회선교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국내 교회나 교단들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환경변화는 한국교회의 사회선교를 심각하게 위축시켰고 9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에이르게 되었다. 각 교단에 사회선교를 위한 조직들은 남아 있다고 해도 실제로 예산을 배정하고 실무자들을 두어서 활동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어지고 만 것이다. 사회선교운동의 이러한 위축은 첫째로 사회선교운동가들 사이의 이념적 정치적 분열과 둘째 그들이 사회선교의 본질적 문제인 노동자들의 인간화와 산업사회의 구원보다는 정치적 관심에 기초한 노동운동의 이념문제나 통일문제와 같은 데로 정향이동에 집중한 데서 찾으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러한 해석은 부분적으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진행된 사회선교의 위축원인들은 좀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첫째 한국개신교 사회운동은 그동안 신학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과도하게 해외 교회들과 단체들의 지원에 의존했었다. 그것은 곧 전통적 선교론에 의존하고 있던 국내교회들을 사회선교로 나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추동하는 일을 게을리 했음을 의미한다. 한국교회들은 한편에서 사회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미국등지에서 수입된 이른바교회성장주의적 선교론을 통해서 교세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5000천교회 혹은 1만교회 배가운동등이 이 시기에 전개되었었다. 따라서 70-80년대 한국 개신교회들 안에서는 전통적 선교론과 사회선교론이 대립 내지는 평행선을 그으면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사회적 여건이 바뀌고 해외의 지원이 중단되면서 사회선교론은 교단들이나 개교회들의 지원을 획득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설 자리조차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참담한 결과는 교회의 신학적이고 체계적 지원을 받아서 진행되던 카톨릭 교회의 사회선교 운동이 오늘날까지도 그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문민정부 들어와서 있었던 서울 지하철 노동조합의 파업과 함께 노동법 날치기 통과(1996 12 26)에 항의하는 민주노총의 투쟁이 주로 카톨릭 교회(명동성당)의 지원하에 성과적으로 해결되었던 것을 회고해 볼 때 개신교회의 사회선교 운동의 현주소를 새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지하철 노조 파업 때 노동자들은 개신교를 찾지 않고 조계사와 명동성당을 찾았었다. 왜냐하면 개신교 안에는 교단적 차원에서나 개교회적 차원에서나 이들의 투쟁을 지원해줄 의사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앞으로 개신교의 사회선교 운동에서나 전통적 선교 운동에서나 위기감을 갖게 하는 현상이라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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