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살아가는데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돈과 관계를 맺게 된다. 어린 시절은 부모님들 밑에서 성장하고 공부하며 인생을 준비할 때 부모님들의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지불하거나 산다.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부모님들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게 된다. 유럽 등 선진국의 경우 성인이 되면 그 때부터 젊은이들은 심리적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녀들의 양육의무에서 벗어나며 자녀들은 양육 받을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인이 된 자녀들은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18세가 되어 성인이 되면 대학에 들어가는데 대학 등록금은 없으나 그래도 생활비는 마련해야 한다. 만일 부모님 집을 떠나서 다른 도시의 대학에서 공부할 경우(대개의 경우 그렇게들 한다) 그들은 집세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 때 형편이 여의치 못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국가가 주는 대여금(Bafög)으로 충당하면서 공부한다. 그리고 만일 학생이 부님 집에서 거처하며 식생활을 해결하면서 학교에 다닌다면 그는 일정한 생활비를 부모님에게 지불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법적으로 이미 성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벌지 못하면 그것도 대여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처럼 부모들이 성인이 된 자녀들의 생활을 지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라마다 성인이 되는 나이를 법률로 정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처럼 형식적 의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부모님의 경제적 후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국가에서 받은 대여금은 졸업 후 직장을 가진 다음부터 무이자로 상환하며 직장을 갖지 못하거나 여성들의 경우 가정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 경우 대부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유예되거나 탕감된다.
이렇게 유럽 등 선진국들에서는 성인이 될 때까지는 자녀들의 삶을 위해서 부모들이 돈을 지원해주는데 그것도 물론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부모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처벌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자녀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부모들은 자녀부양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인이 된 자녀가 직장도 갖지 못하고 공부도 하지 못하는 경우 그는 국가에다 실업자로 등록하고 실업보험을 받아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실업보험을 받는 사람들은 노동청에서 소개해 주는 직장(대부분은 좋은 직장이 아니다)에 다녀야 하고 3회 이상 거부하면 실업보험에서부터 사회보험으로 넘어가는데 그 때는 보험금이 더욱 줄어들게 된다. 이 사회보험이 액수는 “죽기에는 너무 많고 살기에는 너무 적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유럽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사회제도와 돈의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현직에서 은퇴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돈과 관계 맺고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면서 몇 가지 체험한 것들을 여기서 말해보려고 한다.
첫째 돈이라는 것은 스스로 생산한다고 할까 아니면 증식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돈은 은행에 예치를 통해서나 타인에게 대여를 통해서 이자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돈은 그것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로 모여드는 성향을 갖는다. 돈은 땅속에 묻혀 있지 않고(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나아와서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복음 25:24-25) 은행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순환하는 경우 이자나 이익을 낳는다. 사람들은 일요일이나 공휴일이 되면 휴식을 취하지만 돈은 노는 날이 없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 있어서 절대적으로 쉬어야 하지만 그들의 은행의 돈은 안식일을 모른다. 따라서 안식일이나 일요일이나 공유일이라고 해서 이자를 깎아주는 은행은 없다. 따라서 결국 돈은 적게 가진 사람으로부터 많이 가진 사람에게로 모여든다. 그래서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점점 더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된다. 그래서 세상에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생겨났다.
둘째 돈의 속성은 물과 같이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지 않고 위로만 올라가려 한다. 돈은 낮은 사람의 주머니에서 나와서 높은 사람의 주머니로만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돈이 부자들, 돈이 많이 있는 곳으로 모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예를 들어서 돈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돈을 꾸어야 하고 그들에게 꾸어준 부자나 높은 사람에게 이자를 갚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돈은 권력 있는 높은 사람에게로 모여든다. 권력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돈을 주어야 인허가를 얻어낼 수도 있고 때로는 처벌을 면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래 사람이 윗사람에게 돈을 주게 마련이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꾸거나 이자를 갚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권력이나 명예가 없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인허가를 부탁하거나 어떤 청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돈을 부자나 명에나 권력이 있는 높은 사람들에게로만 모여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필자가 일생동안 살면서 돈과 관련해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다. 따라서 결국 이 원리가 맞는다면 빈익빈 부익부 현상,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원리인가? 이것이 자본주의적 고전경제학의 이론인가?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법칙에다 인공적 법률들을 가미해서 생겨난 자본주의 사회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손”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인공적인 인간의 손이기 때문이다. 돈은 인간 속에 흐르는 피처럼 자율신경계통에 의해서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 조작에 의해서 순환되는 것이다.
성서에서 적시된 대로 돈은 교환의 수단인 동시에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악마적 힘을 가진 맘몬이다. 따라서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이 맘몬을 섬길 대상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대상이며, 사랑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싸워야 할 것이기도 하다. 돈은 숭배 받아야 할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억제해야 할 상대적 존재이다. 이 돈이 많은 곳으로 집중되는 것이나 상위자에게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 본래의 성격인 교환수단을 넘어서서 지배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위자나 부자에게 돈이 과도하게 집중된 사회는 돈이 악마화, 맘몬화되어 인간들을 지배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돈이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에게 집중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원활하게 유통되면서 상품들의 교환수단이 될 때 돈은 본래의 기능으로 돌아오며 그 때 사람들은 물건들의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이 때 사람들은 돈이 잘 돌아간다고 말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사코 가운데로 모이려고만 하고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는 돈을 흩트리고 아래로 내려 보내는 일이다. 특히 정치가 할 일은 돈을 높은 사람들과 부자들의 주머니에만 머물게 하지 말고 낮은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의 주머니가 차게 되면 그들은 돈을 쓰지 않고 못 배긴다. 그들은 돈이 주머니에 들어오는 즉시 시장으로 달려가서 그동안 사지 못했던 것들을 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이 없어서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기 시작하면 시장의 물건들은 동이 날 것이고, 식당들은 손님들로 꽉 들어 찰 것이다. 그러면 상인들은 장사가 잘되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공장으로 주문할 것이다. 물건주문이 많이 들어오면 공장은 더 많은 물건들을 생산해서 시장의 수요에 응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기계도 필요하고 인력도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 공장은 더 많은 기계와 인력을 확충하고 더 많은 원자재를 사들여서 생산을 늘려야 한다. 그 결과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져서 사람들이 고용되게 된다. 사람들이 많이 고용되면 실업자가 줄게 되고 지급된 노임들은 노동자들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그들은 다시 그 돈으로 시장으로 달려가서 또 물건들을 사게 된다. 그러면 시장과 공장은 돌아가고 노동자는 더 많이 채용된다. 따라서 이렇게 경제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려면 돈은 어느 한 사람이나 기업에 집중되지 말고 돌아야 하며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보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특히 금융(돈)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은 이렇게 돈이 위로 집중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토머스 홉스가 말한 우리 몸의 피(돈)의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고 모든 피(돈)가 머리로 올라간 것과 같아서 자본주의가 뇌출혈에 걸린 것이다. 이러한 돈의 속성을 고치겠다고 나선 것이 사회주의였다.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는 돈을 통제해야 할 국가체제, 관료체제의 타락해서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 지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협안으로서 유럽의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한 나라들, 예를 들면 스칸디나비아 제국과 독일이나 프랑스 등이 비교적 돈(화폐)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 돈의 속성 즉 마성을 통제할 국가체제가 준비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지금 경제민주화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화두이다. 무엇보다도 정치가 금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그 집중화를 막는 데서부터 경제민주화는 시작된다. 정치민주화가 권력의 분산이라면 경제민주화는 금력의 분산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서 정치가들이 특권을 내려놓는다면서 돈을 차지하려해서는 안 된다. 자본가들이나 기업가들이 부를 나누지 않으면서 권력까지 차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제대로 대우하여 그들이 기업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을 마음대로 살 고객이 되도록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수시장이 살아나서 기업의 항구적인 시장이 보장된다. 뇌로만 올라와서 과도하게 집중된 피가 몸 전체로 순환하도록 혈관을 열어주어 대한민국이라는 몸(국민) 전체가 건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이 일이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나라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