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필자는 늦은 나이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초등학교 3학년에 갖 올라간 딸과 2학년짜리 아들을 데리고 갔다. 하이델베르크 근처 지겔하우센이란 동네에 살았는데 집근처에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이름을 딴 작은 초등학교가 있었다. 우리는 독일 말을 하나도 모르는 두 아이를 입학시키려고 학교를 찾아가자 여성사무직원이 교장실로 안내한다. 두 아이가 독일 말을 하나도 모른다고 했더니 젊은 교장은 둘을 당분간 함께 2학년 반에 들여보내자고 한다. 그리고 나서 교장은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중인 2학년 교실로 가서 우리 아이들을 소개하고 자리에 앉게 했다. 그리고 나서 교장은 수업이 끝나면 자기가 새로 입학한 터키와 일본아이들과 함께 우리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 시간씩 독일 말을 가르쳐 주겠다고 우리에게 했다. 교장은 약속대로 학교공부가 끝나면 하루에 한두 시간씩 아이들에게 독일 말을 가르쳐 주었고 가르쳐주었다. 한국의 초등학교에서 교장실 앞을 두려워서 까치발로 걸어 야 했던 아이들에게는 독일교장은 너무나 달랐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동네에서 산지 1년 만에 가족을 가진 학생들에게 싸게 지공되는 기숙사가 완공되어 에펠하임이란 동네로 이사했다. 아이들을 다시 전학시키려고 그 동네 학교를 찾아갔더니 교장은 아이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큰 딸은 4학년에 아들은 3학년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을 것 갔다고 했다. 그 학교의 교장선생님도 우리 아이들만을 위해서 방과 후 한 시간씩 보충수업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정말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어서 감탄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곤 했다.
그런데 필자는 다시 채 1년도 지나기 전에 프랑크푸르트가 위치한 헤센나사우(Hessen-Nassau)지방 독일교회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어 이사하게 되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와 그 주변지역(라인마인지방)에 사는 한인들을 위한 목회와 함께 독일교회의 선교와 에큐메니칼 담당부서에서 일하는 직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그 직책을 수락한 것은 첫째 당시 독일교회에서 받던 장학금으로 너무 쪼들렸었고, 그 다음으로는 독일교회에서 일함으로써 좀 더 신학적 목회적 경험을 넓히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긴 문제는 딸의 상급학교 진학문제였다. 왜냐하면 독일에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면 모두 상급학교로 진학하는데 성적에 따라서 3개중 1개의 길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길은 성적이 가장 우수한 약 20%의 아이들은 이른바 김나지움(Gymnasium)으로 들어가 9년 동안 공부한 다음 대학으로 진학하는 코스이다. 김나지움 가운데는 인문학적 김나지움, 새로운 언어 중심의 김나지움, 수학과 자연과학 중심의 김나지움 등이 주종을 이룬다. 물론 음악이나 스포츠를 중심으로 하는 김나지움도 존재한다.
두 번째 길은 성적이 약간 낮은 학생들 약 40%는 레알슐레(Realschule)로 직학을 하는데 그들은 약 6년 동안 공부한 다음 중간적 전문직종의 공무원들이나 여러 직종에서 마이스터로서 일할 수 있는 직업학교로 진학한다.
세 번째 길은 성적이 더 낮은 학생들 약 40%는 하우프트(Hauptschule)로 진학을 하는데 그들은 5-6년 동안 공부한 다음 보다 실질적인 것을 배우는 직업학교들로 진학한다. 예를 들면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을 도축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로부터 벽돌쌓기나 전기배선, 하수도관 설치 그리고 페인트칠과 도배하는 것 등을 배우는 학교들이 그것들이다. 독일사람들은 직장에 들어가려면 어떤 종류의 직업학교를 졸업한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직업에는 직업학교들이 존재한다. 대학교육은 물론 이들 직업교육들도 국가의 지원으로 공부하게 된다. 따라서 공부하는 것에는 개인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딸은 독일에 와서 약 2년밖에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단계의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지 초등학교에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중간단계인 레알슐레에 입학하는 것은 추천해 줄 수 있으나 최고수준인 김나지움에 입학살 수 있을지 할 수 없다고 했다. 만일 김나지움에 진학하여 대학에 가기를 바란다면 학교에서 실시하는 간단한 시험에 통과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침 자식들을 레알슐레에 입학을 원치 않는 독일 학부모들도 몇 명 있어서 김나지움입학을 위한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딸은 다행히 시험에 합격되었으나 독일 아이 하나는 낙방하여 레알슐레로 들어갔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우리네처럼 공부에 뒤진다고 과외를 하여 억지로 성적을 올리려 하거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큰일이나 난 것처럼 난리를 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직업학교들이 발달되어 누구나 거기에서 공부하면 적정한 직업세계에서 적정한 대우를 받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딸이 하이델베르크의 초등학교에서 받은 시험성적을 가지고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해서 집근처에 있는 지엔 김나지움(Ziehen Gymnasium)에 입학시켰다. 우리 딸은 9년 동안을 그 학교에 다니고 나서 기센(Gießen)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지금은 쾰른 근처시립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아들은 프랑크푸르트로 이사 와서 초등학교 4학년에 입학하여 1년들 더 다니고 졸업하고 누나가 다니는 제엔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9년 동안을 다니고 졸업했다. 마인츠 대학의과대학을 나와서 지금은 바이에른에 있는 뮌헨대학병원 심장내과 과장으로 일한다.
독일이나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나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제국 등은 초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독일과 비슷한 교육제도를 가지고 가르친다. 그들이 초등학교 이후 세 개의 성적별 로 구분된 교육과정을 통해서 공부시키는 방식은 매우 과학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인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능지수는 차이가 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아이들을 나누어 교육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고 효과적일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부담이 덜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에서처럼 지능지수가 높은 아이들과 낮은 아이들을 모두 한 반에 넣고 똑 같은 수준의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동시에 비인간적이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어디에다 초점을 두고 가르칠지 혼란스럽고 배우는 학생들도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교과진행에서 지루하거나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수업에서 지능지수가 높은 아이들이나 지능지수가 낮은 아이들 모두가 흥미를 잃게 되기 쉽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중고등학교교육에서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우수한 지능을 가진 약 20%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전문적 지식을 얻고 창조적 직업을 갖고 인간의 삶을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인류에게 공헌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의 사람들은 직업학교에 들어가서 자기 지적 수준에 맞는 분야를 공부하여 전문적 지식을 가진 인간들이 창조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을 사용하여 인간의 삶에 기여할 생산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의 낮은 지능을 가진 사람들도 자기들에게 맞는 수준의 직업교육을 받아서 생산직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현재 중고등학교에서는 지적능력을 따지지 않고 같은 코스에서 같은 학과목을 가지고 가르침으로 인해서 학생들 사이에 우열이 생기고 그것은 학생들 사이의 관계와 학습 진행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 지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은 자기발전에 지장을 받고 적적으로 열등한 학생들은 심리적으로 장애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가운데 75%정도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독일의 19-20%의 대학진학률을 비교해보면, 한국의 경우 약 50%정도의 학생들은 대학에 갈 지적능력이나 필요가 없는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 8천 2백만 명의 독일에 79개 대학(63개의 일반대학과 16개의 공과대학)과 인구 4700만의 한국에 대학이 400개가 넘는다는 것은 고등교육기관의 과잉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현재는 지방대학들 가운데 여러 대학들이 학생수부족으로 문을 닫을 처지에 있다.) 한국대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대학에서 창조적 교육을 받을 능력이 없는 학생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대학졸업 후에도 창조적 직업에 종사하기보다는 생산직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교육과잉은 (지능지수가 낮은) 어린학생들에게 과외 등을 통해서 과도한 학습 부담을 주고, 불필요한 (가난한) 학부모들의 교육비와 정부의 교육예산의 낭비와 함께 학생들에게는 불필요한 교육기간연장만을 초래한다. 이러한 한국의 고등교육과잉현상이 학생들 강에 불필요한 경쟁을 낳고 나아가서 사회적 갈등구조를 양산하여 국가에 막대한 폐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지금까지도 공교육문제를 않고 씨름을 하고 있다. 지금도 공교육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공교육은 좌초되고 사교육시장은 독버섯처럼 자라나서 가난한 학부모들의 등공을 휘게 만든다. 그 뿐만 아니라 학생들은 과외수업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입시지옥에서 청춘을 탕진하면서 고통당하고 있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인간취급도 베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 뿐인가 학교폭력은 어떠한가? 성품이 얌전한 학생들이나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왕따를 당하고 때로는 (공부하기 실은) 힘센 아이들의 폭력과 괴롭힘을 당한다. 학교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못해 정신치료를 받는 아이들이 수 없이 많고 개 중에는 자살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교육수장이 새로 들어설 때마다 수많은 실험들과 처방전들이 제시되었으나 백약이 무효했다.
따라서 한국의 공교육은 차제에 철저한 개혁을 해야 한다. 현재의 공교육이 더 이상 개선될 수 없다면 정부는 교육부를 폐지하고 교육시장에서 손을 떼고 교육을 민영화해서 사교육시장에 넘기는 것이 더 낳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왜곡된 공교육과 그로 인해 생긴 왜곡된 사교육시장이 오늘날처럼 병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럽의 공교육에서처럼 학교제도개혁을 통해서 지적수준에 따라서 3개의 단계별 학교들에서 아이들을 공부시켜서 꼭 필요한 인재들만을 대학에서 공부시키고 다른 학생들은 직업학교제도를 통해서 적절한 직업인으로서 교육받게 하는 것이 시간과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효과적 방법이다. 이러한 획기적 교육개혁은 나태하고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는 교육 관료들이나 학교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사안으로서 정치가들과 함께 시민사회와 더불어 온 국민이 나서야 할 후손들을 위한 백년대계인 것이다. 아직도 1911년과 1915년 일제가 우리 민족의식이나 민족교육을 압살하기 위해서 우리 선조에게 뒤집어씌운 놓은 식민지교육시대의 국정교과서나 검인정교과서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과료들의 왜곡된 사고가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료들을 지배하고 거기에 편승하는 한국교총의 교육마피아들을 사로잡고 있는 한 한국교육의 미래는 없다. 왜 국어와 역사교과서는 수구적 교육 관료들에게 검정을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족교육을 억압하기 위해서 생겨난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악습이고 그 잔재가 아닌가? 유럽의 선진 국가들에서는 국정이나 검인정이나 하는 교과서들은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교과서들 가운데 선생들이 적당한 교과서들을 취사선택하여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사용한다. 21세기에 한국에서는 어쩌자고 일본극우파들의 제국주의 침략사관에 근거한 (새)역사교과서 개정작업이라는 퇴행적 대열에 우리나라 교육부장관과 그 관료들 그리고 교육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평승하지 못해서 환장을 하는가?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 시대정신과 국민의 영망을 감당할 교육에 자신이 없다면 정부는 공교육에서 손을 떼고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처럼 지방정부나 (시민)단체들이나 종교단체들 그리고 뜻있는 개인들에게 교육권을 양도하여 교육을 국가주의적 사고와 구시대의 낡은 제국주의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바란다. 이렇게 할 때 그동안 전근대적이고 국가주의적이며 식민지적 의식구조에 사로잡혀 교사들과 학생들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던 교육체제에서 벗어나서 교육자들이나 피교육자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학교들을 만들과 선택하여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서 오늘날 새롭게 생겨나는 다양한 직업들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처럼 공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교육권을 독점하고 교육전문가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만든 교과서를 가지고 3년 혹은 6년 동안 중고등학교에서 억지로 공부하는 것은 민주적이지도 않고 오늘날 시대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왜 우리 자손들은 그렇게도 낡아빠진 교육이념과 체제에 젊은이들을 가두고 그들이 원치 않는 학과내용을 강제로 주입하려고 하는가?
공교육제도는 원래 유럽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산업화과정에서 필요한 산업일꾼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부르주아국가에서 고안해 낸 것이다. 국가가 산업일꾼들의 양성하여 산업현장에 투입하기 위해서 의무 교육제도를 도입하여 젊은이들을 강제로 학교교육에 참가시켰다. 이리하여 국가가 국민이 낸 막대한 세금으로 교육을 실시하여,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들을 보급해 줌으로써 초기 산업사회에서 기업이 부담하던 노동자 훈련비용을 덜어주었다.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에서는 모든 기업들 특히 세계적 다국적 기업들은 자기들이 부담해야 할 노동자들의 훈련비용을 전적으로 공교육을 담당한 국가에, 엄격히 말해서 국민들의 세금에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가 공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훈련의 짐을 국가 아니 국민에게 떠넘김으로써 자기들의 막대한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들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노동자들을 자기들이 세운 직업학교에서 자기들의 부담으로 양성해서 생산에 투입해야 한다. 그들이 필요한 노동자들을 왜 국민들의 세금으로 국가가 맡아서 교육해 주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공교육제도는 해체되어야 한다. 사람이 자유롭게 가르치고 자유롭게 배울 수 있도록 제도화된 공교육체제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학생들은 직업학교에 들어가서 커피 만드는 바리스타 과정을 이수하고 커피전문점을 내거나 거기에서 일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또 전통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구태여 대학에 갈 것 없이 술 만드는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나서 다양한 전통주를 개발하며 살아갈 수도 있어야 한다.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인테리어 학교에서 공부하고 그 업종에 종사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IT 산업자본주의 시대로 그리고 이제는 금융자본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제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갖고 살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공부가고 노력해도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 수많은 젊은 실업자들과 알자리에서 쫓겨난 실업자들이 전 세계에 차고 넘친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 국가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 금융위기를 격고 있다. 국가는 더 이상 국민들의 일자리와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처지에 빠진 것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세계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의 미래는 더욱더 어둡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역상대국들이 거의 모두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고 따라서 다량의 실업자들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수출하는 물건들을 더 이상 사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보다 먼저 70-80년대 세계무역시장에서 활개를 치던 일본이 지난 20여 년 동안 경제침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적은 나라 핀란드 같은 나라는 공업보다는 농업에 더 역점을 두어서 국민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식량생산에 진력함으로써 세계에서 어떤 경제적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국민들을 기아와 빈곤에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고 있는 나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세계에서 어떤 곳에서 어떤 형태의 경제위기가 발생해도 자기 나라의 국민들이 굶어죽는 일은 없도록 국가는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유럽의 선진국들은 오늘날 특별히 농업부문에 많은 투자를 하고 곡물생산에 힘을 쏟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선진국은 공업 국가이면서도 농업국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기를 맞아 낡은 이데올로기와 낡은 교육체제 안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새로운 미래 세대들을 잘못된 교육체제의 올가미에 가두고 그들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삶의 질서를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기 위해서 새로운 배움의 장과 방식을 개발하여 욕심 없이 순박한 곳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는 일에 나서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