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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2-08 07:11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 나치수용소 다하우 방문기
글쓴이 : 손규태

독일 체류 10년 동안 많은 곳을 여행했었다. 알프스를 인접하고 있는 독일의 남부지방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역사적인 장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루드비히 2세가 지었다는 아름다운 백조의 성 노이슈반스타인은 특별히 잊을 수가 없다. 아름다운 알프스 산과 호수를 내려다 보고 서 있는 이 성에 오르면 평범한 감성의 인간이라도 금방 아름다운 공주가 되고 또 잘 생긴 왕자가 되어 정원을 거닐면서 사랑을 나누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음악가 봐그너와 친히 지냈다는 예술의 왕 루드비히 2세는 그의 음악연주를 듣기 위해서 성 안에 정말 아름답게 장식한 방을 만들었는데 이 방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런 아름다운 환경 가운데 산 왕 루드비히는 정신착란증으로 호수에서 익사하고 말았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 성의 아름다움만 보더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여행을 10월 초로 잡으면 돌아오는 길에 뮌헨에 들려서 10월 축제마당에 끼어들 수 있다.. 끼어든다는 것은 넓은 광장과 같은 곳에 간이로 만든 나무 식탁과 긴 나무의자들에 사람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는데 그 곳 어디엔가 빈 곳이 있으면 같이 앉게 되는 것을 말한다. 뚱뚱하지만 그러나 애교어린 표정의 여인들이 한 손에 5개 이상의 쪽끼를 들고 날라다 주는 그리 독하지 않은 맥주로 여독을 풀어 본다. 거기에 다 그 곳 특산물인 쏘세이지를 연한 겨자에 찍어서 신 김치를 푹 끓여서 만든 것과 같은 맛을 내는 싸워크라우트를 곁들여 먹는 것은 정말 일미다. 간이무대에서 바이에른주의 특유한 복장을 한 이들이 연주하는 왈쯔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축제의 흥은 절정에 이른다. 그 음악에 맟추어서 무대 넓은 곳에서는 흥에 겨운 사람들이 어울어져서 춤을 춘다.

이 뮌헨의 10월 축제는 그 이름이 전 유우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까지 알려져서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 든다. 그래서 여기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1년 전부터 호텔을 예약해 두어야 할 지경이다. 어떤 사람들은 2주일 가까이 계속되는 이 축제에 참석해서 내내 맥주를 마시면서 일년 동안 쌓인 온갖 스트레스를 풀고 일터로 돌아간다.

이런 축제에 참가해 보고 느낀 것은 독일인들은 지극히 단순한 것들 즉 맥주와 쏘세이지와 같은 간단한 음식을 들면서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것이다. 퇴폐음란 업소들에서 하루 저녁에 수십, 수백만원을 탕진하는 우리네의 향략문화는 찾볼 수 없다. 음악은 있으되 우리 나라의 유행가 처럼 한에 차있거나 아니면 퇴폐적이지 않다. 춤이 있지만 우리 나라의 행락객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무질서와 난장팡이 아니다. 술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술주정이나 싸움질은 없다. 쾌락이나 향략이 아닌 삶의 기쁨이 넘치는 곳이 이 곳 10월 축제의 장이다.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단순한 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독일인들의 축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소개하자고 하는 것은 실은 역사의 흔적이 담긴 백조의 성의 아름다움이나 현재의 독일인들이 즐기고 있는 뭰헨의 10월축제가 아니다. 독일인들 아니 히틀러의 폭정에 시달리던 양심적인 독일인들과 그리고 유대인말살정책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그리고 까스실에 넣어 죽게 했던 집단 수용소인 닥하우(Dachau)를 소개하고 싶은 것이다. 뭰헨에서 차를 타고 뉘른베르그를 향해 넓직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약 80킬로 지점에서 좌회전을 해서 약 30분 정도 달리면 인구 2천명의 작으마한 도시 닥하우가 나선다. 이 도시는 도시라기 보다는 시골풍치를 담고 있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그러나 이 마을은 연합군의 점령이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집단 수용소로 인해서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의 방문지가 되고 있다. 집단 수용소라고 하면 폴란드 땅에 있는 아우슈비취를 연상하게 되는데 그 규모는 적지만 현재 독일 안에 있는 것으로는 닥하우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수 만평에 달하는 수용소 부지에는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고 또 여기서 희생된 이들의 추모하기 위한 시설들이 여기저기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보존은 실상 연합군에 의해서 된 것이며 신나치적인 성향을 거진 이들은 이러한 수용소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후세에 경고와 교육을 위해서 이 시설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나치가 만들었던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는 영내로 들어 서면 전시실과 영사실이 있어서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람이 정기적으로 소개된다. 인상적인 것은 많은 독일의 중고등학생들이 역사시간의 공부의 일부로서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교과서를 통해서 독일인들의 잔혹성들을 그대로 소개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현장학습을 시킴으로써 전쟁과 독재, 인종주의와 이념적 광기가 가져다 준 비극과 피해를 가르친다. 이 점에서 독일인들은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일본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전시장을 나와서 큰 운동장 같은 곳을 건너질러 가면 한쪽 구석에 화장터 건물들이 나온다. 독까스실들은 샤워장과 꼭같이 만들어서 사람들이 옷가지를 벋는 곳과 천정에 샤워꼭지들이 몇개씩 달려 있는 방을 지나면 시체를 불태우기 위한 가마들이 설치된 화장방이 나온다. 이 화장터 건물들이 운집해 있은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편에는 우리 보통 사람 보다 조금 적은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이 동상은 이 집단수용소에서 희생된 한 유대인 어린이를 그 모델로 한 것 같았다. 굶고 허기지고 영양실조에 걸려서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다. 그의 표정은 언제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태의 불안과 절망 그리고 처절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자료들에 보면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구출된 사람들의 처절한 몰골을 그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상을 받들고 있는 1 메터 남짓한 바침석 앞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마라 . 이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대체로 희생당하고 수난당했던 이들이 같은 동지들, 동료들에게 하는 피나는 절규의 말 그리고 권면의 말일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고 마침내는 깨스실에서 채 죽음도 준비하지 못한채 기만상태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괴롭혔던 나치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직도 네오 나치가 등장해서 제3제국의 영광을 못잊어 하고 또 히틀러를 찬양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그 끔찍했던 과거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1985년 5월 8일 서독의 현대통령 봐이체카는 2차대전 종식 40주년 기념사에서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마라 라는 요지의 말을 했었다. 그는 독일인들의 역사적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서도 이 만행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호소햇다. 그는 독일인들에 의해서 고통을 당했던 유대인들과 그리고 이웃나라 사람들의 용서를 정중하게 빌었다. 그 뿐만 아니라 독일은 아직도 반나치법을 통해서 나치의 망령들이 되살아 나는 것을 막고 있으며 이스라엘에는 4백억 달라 이상의 보상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하기로 하고 있다. 독일의 대도시 마다 정부가 예산을 들여서 유대인들을 위한 시설들을 꾸준히 마련하여 사죄를 향한 조건들을 사심 없이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1960년대에는 서유우럽의 나라들과 화해를 했고 70년대에는 동구의 나라들 특히 폴란드, 첵코, 유고등과 화해를 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 와서는 소련과 동구라파 나라들과 화해를 이루었고 마침내는 동서독의 통일을 달성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용서를 위한 노력, 회해를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독일의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같은 기간의 역사적 시간들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한일관계의 청산이 제대로 이루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여기에는 물론 가해자였던 일본의 책임도 있지만 역사적 부채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너무나 철저하지 못했었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기 전에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린 것이 아닌가! 60년대의 한일 국교정상화도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졌고 또 정신대 문제와 같은 것은 아직도 처리도지 않은채 남아 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와의 관계문제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문제이다. 남북이 문단된지 30년만에 7.4 공동성명서가 나왔고 분단 40년이 넘어서야 겨우 남북 화해와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나왔다.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과거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청산에 있어서 너무나 서로 인색하고 소아병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6.25를 마지할 때마다 상기하자 육이오. 무찌르자 오랑캐! 라고 외쳐왔었다. 6.25는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대리전쟁의 성격을 띤 이 무모한 전쟁, 동족상잔의 전쟁은 어떠한 구실을 가지고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후세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더이상 과거의 적대감을 계속할 수는 없다. 이미 6.25전쟁에서 피를 흘린 세대들은 역사의 중심에서 후퇴했고 새로운 세대가 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그리고 과거의 세대들이 가졌었던 원한과 적대감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거나 강요하는 것은 앞서 가는 세대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통일된 민주적 조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거를 과감하게 청산하고 전진적인 자세로 미래를 건설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북화해와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회담들의 성과는 국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다시 7.4공동성명서와 같이 모든 것이 휴지조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이 점에서 저 닥하우에 있는 나치의 집단 수용소의 희생자를 기념하는 동상 앞에 새겨진 글귀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마라! 고 한 충고에서 배울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서로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는 화해도 교류도 협력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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