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독일 유학시절에 프랑크푸르트에 살면서 예쁜 고양이 한 마리를 길렀었다. 이 고양이는 독일에서 5년 그리고 한국에서 11년 동안 우리 식구 중에 하나가 되어 우리와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었었다. 이 고양이가 죽은 지 10여년이 가까워 오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디 가서 나를 오랫동안 외롭게 지내게 했느냐고 불평을 하면서 거실 바닥에 들어 누워서 한참 동안 떼를 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 아내는 늘 말하기를 죽어서 어디든 가면 이 고양이를 만날 수 있으면 정말 기쁠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 고양이는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적은 도시 바드 홈부르크(Bad Homburg)의 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우리 딸 미영이는 말을 가진 친구가 있어서 주말은 물론이고 주중에도 오후에는 같이 말을 타러 다녔었다. 그런데 미영이는 그 마구간에서 태어난 고양이 새끼들 중에서 한 마리를 데리고 왓는데 우리는 이름을 소냐로 붙였다. 우리 집에 왔을 때 소냐는 약 4주 정도 된 어린 고양이었다. 소냐의 한쪽 눈에 균이 들어가서 충혈 되어 있었고 가려운지 계속 앞발로 비벼대고 괴로워했다. 우리는 급히 가축병원에 보이고 안약을 얻어다가 치료해 주었다. 어린 고양이지만 내가 약을 발라 주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얌전히 누어있는 모습이 우리가 해 주는 치료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이삼일이 지나자 눈병은 곧 나았다.
그 후부터 어린 고양이는 내 품에 안겨서 두 앞발로 내 가슴 쪽을 밀면서 소매 자락을 빨기 시작했다. 어린 소냐는 눈병 치료를 해준 나를 아마 엄마로 정하고 엄마에게서 하듯이 내 소매 자락을 빨았던 것 같다. 그 후부터 소냐는 내 무릎에 올라와 앉아 있거나 소매 자락을 빨곤 했다. 나는 당시 학위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서제에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소냐는 내 무릎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가슴으로 기어 올라와서 목 위에 앉아 있거나 누어서 잠을 자기도 했다. 소냐가 무릎 위에 앉아 있으면 나는 논문을 타자로 치면서 다리를 펴지도 움직이지도 못했고 목 위에서 잠을 자면 깰 때까지 거의 거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냐는 서제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으나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문을 열고 들어와 논문에 집중해야 할 나에게 놀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논문을 쓰는 동안 소냐와 같이 지내기로 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어찌 생각하면 내 논문은 소냐와 같이 썼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고양이 소냐는 내가 논문을 쓰는 동안의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힘을 내서 논문을 마치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양이를 기르게 된 것은 아내의 요청에 의해서다.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늘 고양이와 함께 자랐고 시집와서도 우리가 수유리에 살 때 아이들이 태어나자 우리는 다시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살 때도 고양이를 길렀으나 1977년 목회와 공부를 겸하기 위해서 한인교회가 있는 프랑크푸르트로 이사 오면서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양이를 학생 기숙사에 두고 온 일이 있다. 프랑크푸르트에 와서는 여러 가지 분주한 나날을 보내다가 몇 년이 지나서 86년에야 소냐를 만나서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당시만 해도 나는 고양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고양이는 나에게는 하나의 낮선 존재요 “전적 타자”였다. 왜냐하면 당시까지 나는 고양이라는 동물, 아니 다른 생명에 대해서 별로 감수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살 때 고양이가 자주 무릎이나 가슴에 안겨왔고 나는 박대는 하지 않았지만 늘 무관심했고 고양이가 나의 체온에서 온기를 얻으려고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한국 사람이 생각하듯이 고양이는 이기적인 동물, 혹은 요물로만 생각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동물에 대한 아무런 감수성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소냐와의 만남에서 나는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나의 삶과 동물의 세계에 대해서 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자세를 갖게 되었다.
내가 소냐에게 홀딱 반하게 된 것은 우선 소냐가 다른 고양이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예쁘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냐는 다른 고양이들과는 달리 눈이 마치 부엉이 눈처럼 크고 둥글며 눈가에는 연한 회색이 둘러쳐졌고 그 다음으로 검은 아이라인을 가지고 있어서 여인들이 눈 화장을 잘 한 것처럼 시원해 보였다. 그 눈을 마주 들여다보면 마치 깊은 호수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귀들도 똑바로 서 있어서 귀여운 토끼를 연상하게 하고 회갈색으로 된 털은 화려하나 천하지 않은 모피 옷을 입은 것을 연상하게 했다. 목과 가슴은 펭귄같이 흰털로 장식되어 마치 연미복을 입은 것 같고, 앞 뒤 네 발도 발목까지 흰털로 덥혀서 마치 여인들이 흰 장화를 신고 걸어가는 것 모습같이 보였다. 이러한 잘 생긴 외모에다 그가 늘 그랬듯이 의자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어찌나 당당하고 우아한지 큰 수사자가 큰 바위에 앉아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 잘생긴 용모를 다 말하자면 한이 없다.
소냐는 이렇게 외모만 잘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태는 가히 일품이었다. 그는 늘 우리 식구들과 소통을 했고 시선을 끌어 모으는 일들 했다. 그는 동물이지만 우리 집에서는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가족이었다. 소냐는 우리 가족이 식사할 때면 언제나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식사에 동참한다. 물론 자기의 먹이는 따로 먹지만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식탁에 앉아서 치즈나 고기 혹은 야채도 얻어먹었다. 그리고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서 일어나면 자기도 의자에서 내려와 자기 일을 한다.
우리 아들 해영이가 휴지 같은 것을 멀리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려고 하면 소냐는 급히 쓰레기통 앞으로 달려가서 날아오는 구겨진 휴지뭉치를 앞발로 처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는 늘 유지뭉치를 일부러 만들어서 던지고 고양이는 잡아서 통에 넣는다. 그 일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하기도 한다. 그것을 보고 나도 폴리를 적은 공처럼 만들어서 어디든지 던지면 그는 개처럼 그것을 주워서 입에 물고 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심심하거나 고양이가 놀아주기를 바라보고 쳐다보고 앉아 있으면 우리는 늘 그와 놀아주는 게임을 하면서 잠시 휴식도 취하고 스트레스도 풀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양이를 우리 가정의 오락부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양이가 우리 집에 온 이후부터 우리 가족들은 자주 거실에 모여서 고양이를 중심으로 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전에는 가족들 사이에 별 대화가 없었던 생활에 활기를 얻게 되고 또 가족들 간에도 대화와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목회활동으로 대학생활로 늘 가족들과 만나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고 아이들도 학교생활과 친구들과의 지내는 일에 늘 바쁘게 돌아갔었는데 고양이가 식구가 된 이후에는 가족들이 모여 앉는 시간이 많아졌다. 보통 날에는 저녁을 먹고 나면 대개는 식구들이 각기 제방으로 들어가서 자기 일에 열중했으나 고양이와 같이 지내면서 식후에도 한 자리에 남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1987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나는 독일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한국에는 이렇다 할 일자리가 보장되어 있은 것도 아니었다. 딸 미영이는 그동안 마르부르크 근처의 기센(Gießen)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1년을 마쳤고 아들 우영이는 아직 대학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무조건 한국행을 고집하는 나에 대해서 아내나 아이들은 불안해했다. 50이 다 된 나이에 독일에서 10여 년 동안 뿌리내린 보장된 삶을 모두 버리고 아무런 약속도 없는 고향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나의 결정을 매우 무모한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랬다. 그러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몇 개 대학에 시간강사를 한지 1년 반 만에 성공회대학교 이재정 총장의 호의와 그의 초청으로 대학교수가 되었다. 당시의 성공회대학교는 두 개의 학과(신학과와 사회복지학과)에다 약 30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보잘것없는 학교였다. 그러나 이재정 총장의 우정 어린 호의와 “같이 학교 좀 잘해 봅시다.”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이 대학의 교수가 된 것이다.
교수가 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아내는 아들 우영이를 마인츠 의과대학에 입학시키고 기숙사에 들여보낸 다음 귀국했다. 귀국할 때 몇 안 되는 짐은 항공화물로 부치고 아내는 우리가 기르던 고양이를 소냐를 안고 김포공항에 나타났다. 나는 고양이를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데려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고양이 여비로 보태라고 우영이가 100DM를 주었는데 공항에서 우리 교인의 남편인 보코프(Borkof)가 카운터에서 싸게 해주어서 50DM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거의 8kg이나 나가는 고양이어서 300마르크는 주었어야 했다고 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공한에서 잠간만 보고 동물입국 규정에 따라서 10일간 강서구의 공항근처에 있는 검역소에 있어야 했다. 우리는 고양이와 강제로 이별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가 검역소생활 10일 동안 우리는 두 번이나 면회를 갔었다. 고양이가 10일째 되는 날이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일요일은 공휴일이어서 고양이가 집으로 올 수 없고 그 다음날 즉 11일째 되는 날인 월요일에나 거기서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면회를 간 날 우리는 검역소 직원들에게 따졌다. “구치소에서는 석방일자가 일요일이면 하루 먼저 토요일에 사람들을 석방하는 것처럼 우리 고양이도 토요일에 석방해 줄 수 없는가?” 그러자 검역소 직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고양이는 인간이 아니다. 둘째 검역소는 구치소가 아니다. 공무원들로서는 그럴듯한 대답들을 했지만 동물의 권리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태도들이었다. 물론 고양이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하고 가까이 식구처럼 지내던 고양이가 일요일에는 사람들도 없는 검역소에서 하루 종일 외롭게 먹이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지내야 한다. 그리고 검역소가 교도소는 아니지만 동물을 철창이 달린 우리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은 비인간적 처사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고양이가 들어가 있는 적은 우리들에는 다른 고양이들은 한 마리도 없었다. 말들은 여러 마리들이 적은 운동장 같은 곳에서 검역을 기다리고 개들도 여러 마리가 있어서 같이 지내거나 떨어져 있어도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데려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우리 고양이만 외롭게 홀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토요일 석방을 위해서 대화와 설득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으나 결국 하루 더 지내고 월요일에야 우리 소냐는 석방되어서 집으로 왔다.
인간들은 교도소 석방일자가 일요일이면 토요일에 석방되는데 왜 동물인 고양이는 겸역소에서 하루 더 있어서 월요일에야 석방되어야 하는가? 나는 그 때 한국 사람들의 동물에 대한 태도랄까 무감각성에 절망했다. 하기야 한국인들은 자기가 기르던 집동물인 개도 잡아먹지 않는가! 왜 인권이란 사람들에게만 있고 다른 생물에는 없다고 생각하는가? 사람과 더불어 모든 생물은 배고픔과 고통을 같이 느끼고 또 희로애락을 같이 경험한다. 그런데 왜 동물만 하루 밤을 캄캄하고 외로운 방에서 이틀이나 더 지내야 하는가? 동물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단 말인가?
독일에 가기 전에 나는 아내와 같이 정월 초하룻날에는 대학교 선생님들을 찾아가 꼭 세배를 했다. 한신대학교 선생님들, 장공 김재준, 문익환, 전경연, 박봉랑, 이우정, 안병무 등 선생님들에게 세배를 하면 하루가 결렸었다. 그 분들에게서 나는 지식(성)과 함께 인간됨의 길을 배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분들은 우리에게 지식과 지성을 가르쳐 준 분들이다. 그런 분들을 1년에 한번이라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는 것은 인간됨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독일에서 정월 초하루가 되면 우리 고양이 소냐에게 세배를 했고 그에게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었다. 왜냐하면 소냐는 나에게 우리 선생님들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것 즉 감수성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제 아내는 나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감성, 감수성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던 당신이 소냐가 오고 나서부터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 좀 사람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소냐와 같이 산 이후 나는 동물들 아니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말한 생명에 대한 경외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 후부터 길을 갈 때도 작은 개미들을 밟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걷는다. 낚시질을 하는 사람들이 낚시 바늘에 끼어 매달려 올라오면서 버둥대는 물고기를 보며 환성을 지를 때 나는 물고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고 가슴이 저며 온다. TV 프로그램 같은데 나오는 동물의 세계에서 사자 같은 동물이 약한 동물들을 덮치는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들짐승을 잡겠다고 올무나 트랩 같은 것을 놓아 거기에 걸린 동물들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 소냐 생각이 난다.
동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식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달라졌다. 식물들은 베임을 당하거나 나무들이 태풍에 쓰러져도 전에는 특별한 감정이 없이 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식물들도 동물들처럼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인간들이나 자연의 공격을 받으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동물을 기르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평화교육으로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려서부터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애완)동물들과 같이 자란 사람들은 그 성품이 평화적이어서 불량청소년이 되거나 성인이 되어서 난폭하고 잔인한 범죄자가 되는 확률이 적다는 것이다. 타인이나 다른 생물들의 아픔에 대해서 감수성을 갖지 못하는 인간들은 살상을 일삼고 커서는 전쟁광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2003년 우리 고양이가 암에 걸려서 1년 남짓 괴로워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안락사 시켰다. 목동에 살 때인데 동네 가축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간단한 검진을 받은 후 더 이상 살 가능성이 없고 고통만 심해지는 것 같아서 안락사 시키기로 했다. 여자의사가 고양이 앞다리에 강한 마취제를 주사하자 고양이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내가 고양이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며 통곡하자 여의사는 고양이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마지막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아직 체온이 남아있는 고양이를 적은 상자에 넣어 나에게 넘겨주었다. 상자를 받아든 나는 자동차로 가서 옆자리에 죽은 고양이가 든 상자를 놓고 30분 가까이 큰 소리로 대성통곡했다. 나는 얼마 전에 아버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이런 통곡은 하지 않았다. 내 자식들이 죽으면 이런 통곡이 나올까? 나는 옛 어른들이 자식을 잃거나 남편이나 아내를 잃고 대성통곡하는 것을 영화 같은데서 본적이 있지만 그 때는 실감을 하지 못했다. 대성통곡을 하고 나는 고양이를 우리 대학교 뒷동산에 묻었다. 아내는 보내는 고통을 직접 경험하게 하기 싫어서 동행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우리는 고양이를 기르고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소냐와의 마지막 이별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다시는 헤어지는 고통을 경험하기 싫었다. 지금도 가끔 길을 가다가 고양이들을 만난다. 그 때마다 우리 고양이 소냐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