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9일
들어가는 말
영국의 신학자 에드워드 허버트(Eduward Herbert)는 1624년 출간한 "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라는 책에서 이른바 이신론(Deism)이란 것을 주창했다. 이신론이란 이제까지 기독교가 주장하던 인격신론(Theism), 즉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역사와 삶을 일일이 주관하고 간섭하는 신 대신에, 우주와 역사에 일정한 메커니즘을 부여하여 인간이 그 법칙에 따라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시계라는 기계를 만들어서 태엽을 감아주거나 아니면 배터리를 넣어주면 시계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주와 역사에 일정한 기계장치(mechanism) 같은 것을 넣어주어서 거기에 따라서 작동하도록 해 주었다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은 더 이상 수염달린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자식들에게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지켜야 할 일정한 규정들만을 만들어주고 그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17세기말부터 유럽 특히 영국에서부터 강력하게 등장했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때로 말하자면 영국은 크롬웰의 혁명시대를 거치면서 신구교간의 종교적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고 또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광교회주의를 중심으로 신학의 합리성을 추구하던 때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1688년 영국에서는 스튜어트의 절대군주체제가 문어지고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이 주어졌다. 말하자면 계몽주의는 그동안 기독교라는 가정교사 아래서 엄격한 종교적 교육을 받고 통제를 당하던 미성숙한 서구인들이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이성을 가진 성숙한 인간들로서 자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을 의미한다.
이신론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스스로 잘못된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 즉 계몽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의식이다. 이제 인간들은 계몽(성숙)됐으니 더 이상 매사에 하나님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고 또 교회의 교리나 가르침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숙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신으로부터의 자유 즉 종교적 굴레로부터 자유로부터 시작해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계몽주의 시대의 정치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시장을 군주들이나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계몽주의 시대가 성숙되어가던 18세기 말 자유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아담 스미스는 그 이론을 국부론을 통해서 이론화한다. 시장도 전제군주체제나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여기서는 이신론을 염두에 두었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헤겔이 갈파한대로 인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자유를 향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늙은 신이라는 관리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도 어린이는 일정기간 부모의 보호와 통제 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성인이 되면 그 부모를 떠나서 결혼도 하고 새로운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독립적 인간이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인이 될 나이에도 늙은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요즘의 캥거루 족으로 불리는 젊은이들처럼 제구실을 다하지 못할 때 그는 성숙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들의 자유의 추구는 이신론의 관점에서 보면 신이나 신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는 데서 무신론 내지는 반신론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신론적 전통에 서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몇몇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간 사람들은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를 내걸고 있기도 하다.(헤겔, 니체).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자유추구는 필연적으로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거나 아니면 신을 반대하는 반신론의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무신론적 내지는 반신론적인 인간의 자유추구의 역사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된다. 그 하나는 바로 인간의 무제약적 자유추구가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간들을 노예화 하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무제약적 자유추구는 인간을 무절제와 함께 무제약적 욕망추구의 도구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자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520년 11월에 쓴 종교개혁 문서들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에서 자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내적 인간에 따르면 즉 신앙 안에서) 모든 것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따라서 누구에게도 굴종당하지 않으며, 또 그리스도인은 (외적 인간에 따르면 즉 행동에서는) 모든 것의 충실한 종이며 누구에게나 예속된다.” 루터는 자유인과 종이 사회적 관계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중세적 세계관 속에 살면서도 이 자유가 갖는 양면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다. 그래서 루터는 개신교적 봉건영주들의 지원을 받아서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그들 하에서 노예상태에 있던 농민들의 폭력적 봉기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란 인간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지만 동시에 폭력적 혁명은 다른 인간들을 노예로 만드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간파했었다.
사회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루터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개념이 부르주아적 자유개념의 구성과 특별히 부르주아적 권위형성의 기초를 놓았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자유를 인간의 내면 영역에 예속시키는 것은 그리고 외적 인간을 세상의 정치적 권력에 예속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한다. 그리고 세상적 권위들의 체제를 사적 자율성과 이성을 통해서 초월시키는 것, 이중적 도덕을 가지고 인격과 행위를 갈라놓는 것, 실재하는 부자유와 불평등을 내적 자유와 평등의 결과로서 정당화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상 루터는 중세적 인간이며 봉건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인간의 내적 자유를 추구하고 있어서 그의 사상세계는 어느 면에서는 부르주아적 자유개념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부르주아 사회의 출현 훨씬 이전 사람으로서 바울의 선교 신학적 모티브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 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로서 살아가게 하려는 바울의 선교적 동기가 자신을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종으로서 행동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의 인간학적 동기가 자유인과 종을 병치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갈 3:11)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통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고 살아가게 하려는 동기가 바울로 하여금 자유와 종의 변증법적 병치를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우나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자유와 동시에 타인을 섬기는 자유가 함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 없는 섬김은 노예생활이고 동시에 봉사 없는 자유는 방종이다. 타자에 대한 무제약적 자유는 타자에 대한 지배요 착취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무제약적 자유는 타인의 노예화나 타자에 대한 착취로 나타난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인들의 자유는 인류에게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그들의 무제약적 자유는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인들의 남미의 식민지화와 약탈, 그 후에는 영미인들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와 자원강탈로 나타났었다. 그들은 이러한 자유의 남용을 시장의 자유, 무역의 자유를 식민주의를 통한 자유로운 자본축적의 기회로 사용했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를 자유시장경제적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들은 1990년 소련과 동구라파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몰락 이후 전통적 민족국가의 울타리들을 붕괴시키고 이른바 세계무역기구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만들고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WTO라는 세계무역기구가 있으나 그것이 규재하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개개 국가간의 자유무역협정(FTA)를 체결함으로써 개별국가를 격파하여 세계시장을 모조리 자기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다. 즉 그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본, 즉 맘몬의 자유가 지배한다. 맘몬의 자유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노예가 된다. 맘몬이 지배하는 데서는 인간들 사이에 섬김은 사라지고 무제약적 인간속박과 착취가 지배하게 된다. 여기서는 인간들 참된 자유의 내용, 즉 인간들 사이에 믿음, 소망, 사랑은 사라지고 불신과 절망, 증오만이 지배한다. 우리는 이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상실하고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