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역사적 회상
2015년은 한반도가 일본제국주의 지배에서 해방된지 70년째 되는 해다. 금년은 당시 강대국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고 따라서 통일된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한지도 70년이 되는 해다. 그 분단의 결과는 남북간에 처참한 내전을 가져왔고 수많은 사상자와 재산피해를 내고 3년간 만에 휴전으로 끝났다 그 후 남북은 38선을 경계로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정치적으로 적대시하고 있다. 제2차 대전 후 베트남, 독일, 예멘 등 모든 분단되었던 국가들은 통일되었으나 한반도의 통일은 아직 요원하다. 이러한 분단으로 남북한 국민들은 여러 측면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 분단은 남북한에 비민주적인 비정상적 정권들이 들어섰다. 그동안 남한에는 연이어 독재정권들이 등장하여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 그리고 인권침해를 자행했었다. 북한에는 비민주적이고 비상식적 세습정권이 계속되어 인권은 물론 생존권마저 위혐하는 전대미문의 군사독재가 지배하고 있다.
둘째 경제적으로 남북한은 막대한 군사비지출과 무기증강으로 국민들의 생활향상은 어려워지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택하여 분배에 역점을 두었으나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국민들의 기본적 삶의 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남한은 경제발전에 성공했다고 하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서민들의 삶은 파탄에 이르고 있다.
셋째 분단으로 가장 고통당하는 이들은 이산가족들이다. 그들은 상호 방문과 통신교환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비인간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노령의 이산가족들은 상봉ㅇ을 기다리다 죽어가고 잇다.
이러한 분단 상항에서 남북한 모든 국민들은 화해와 통일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강대국들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와 간섭으로 그리고 내적으로는 남북한의 반통일 기득권세력들로 인해 통일의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남한의 경우 이러한 반통일 세력들 가운데 가장 큰 집단은 바로 보수적이고 친미적 기독교 세력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받고 남하한 기독교인들과 그 후손들이다. 또 하나의 반통일적 집단은 남한에서 일제하에 특권을 누리던 친일 집단과 미군정 이후 그들의 지원을 받아 오늘날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장악한 보수적 기득권 집단이다.
그러나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남북의 통일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각기 다른 방향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했었다.
첫째 보수적 기독교인들 집단이 그동안 추구해 온 것은 북한 공산정권으로부터 북한 동포들을 구해내서 그들을 복음화하자는 통일운동이다. 이러한 북한복음화 통일론의 근저에는 악마적 북한정권의 붕괴론이 자리 잡고 있다. 북한정권은 무신론적이고 전체주의적이어서 인민들에게 신앙과 정치의 자유를 영납하지 않기 때문에 붕괴되어야 하고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복음화 통일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서 그 씨앗이 뿌려졌고, 박정희 정권의 승공통일론에서 싹이 나고 후 연이은 보수정권들의 흡수통일론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북한복음화 통일론은 특정 조직이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실천되기 보다는 주일예배니 북한 동포들을 위한 기도회 등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전개되었다. 보수적 개신교 중 10여개 보수교단이나 단체들이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기도모임 형식의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둘째 남북한 화해를 지향하는 통일운동은 한국교회협의회 회원교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1970년대부터 이들은 당시 세계교회협의회의 새로운 선교 신학에서 영감을 받았다 1952년 독일 빌링엔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의 “하나님의 선교개념”)Missio Dei), 1972-3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의 “오늘날의 선교개념”(Salvation Today)을 통하여 전통적 개인구원이나 교회성장을 선교론을 넘어, 전체적 인간 그리고 사회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선교방향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회구원의 통전적 선교론에 따라서 한국교회협의회원 교회들은 역동적 선교활동 즉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등을 전개하게 된다. 그 프로그람의 일환으로서 선업선교, 도시선교, 농촌선교 활동들이 추진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새로운 선교활동을 하던 중에 직면한 가장 큰 난관은 남북분단을 빌미로 한 독재정권의 안보 이데올로기였다. 독재정권은 국가안보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권을 단압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협의회 회원교회들은 분단극복이야 말로 힌극의 제반 모순들을 극복하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1980년 전두환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남북의 화해와 통일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세계교회협의회와 해외교회들의 지원으로 남북한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만나서 화해와 통일을 위한 운동들을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분단 50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 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그 해에 통일이 달성되도록 노력하기로 했었다.
한국정부의 통일 정책애 대한 비판적 고찰
이제부터는 그동안 남북한 정부들의 통일을 위한 노력들을 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자.
1986년 제정된 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서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헌법전문)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헌법 제4조)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분단된 남북의 통일과 함께 민족적 대단결이 대한민국의 국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도 말한 대로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 박정희정권은 승공통일, 그 후 정권들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정책”을 말함으로써 명시적으로 흡수통일을 추진하고 있다.
1990년대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사회주의체제 국가들은 거의 사라졌거나 중국, 베트남처럼 변용된 사회주의 체제를 택한 나라들은 아직 남아있다, 그런데 북한은 여전히 사회주의체제인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어서 정치체제나 경제제도에서 남한과는 대립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통일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체제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면 안 된다.
그동안 남북정부는 통일을 위한 대화들을 가졌었다. 1974년 박정희 정부의 “남북공동성명”, 1992년 노태우 정부의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불가침 협정”이 체결되었었다. 그리고 1986년 민주화 이후 2000년 김대중과 김정일 정상회담에서는 “6.15 남북공동성명”, 2007년 노무현과 김정일의 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국가 간 구속력 있는 조약체결의 성격을 갖지 못했고 또 남한의 경우 국회의 비준을 받지 못함으로써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에는 아무런 효력도 갖지 못하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남북정부간의 대화나 이러한 공동성명들은 정권들의 위기 타개의 수단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동안 남한정부는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서 북한지원 활동, 식량과 의약품, 비료지원 등을 했으나 이러한 인도주의적 지원도 남북한 화해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월등한 남한정부는 지원 사업에서 늘 상호주의 원칙을 내세움으로써 경제적으로 열등한 북한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남한정부는 그동안 창구독점화 정책을 내세워 종교단체들이나 민간단체들의 자발적 대북접촉이나 지원에 대해서 통제하거나 매우 소극적이어서 민간단체들을 통한 화해협력 사업들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한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실천한 프로그램은 아마도 이산가족 상봉사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업에 대해서는 북한정부가 매우 소극적어서 이제까지 소수의 이산가족들만이 서로 상봉했다. 아직도 많은 이산가족들이 상봉날짜를 기다리다가 죽어가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의 남한의 보수정부들의 대북자세를 고려해 볼 떄 화해와 통일을 위한 확고한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도 그랬었지만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인 남북한 신뢰프로세스나 독일 드레스덴 선언 등도 단지 구호에만 그치고 그 결실을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남한정부는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정책이나 실천에서 앞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얌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남한정부는 이미 체결한 약속들(공동성명들)을 철저히 준수해야 할 것이다. 남한정부는 앞으로 보다 적극적 자세로 남북 간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프로그람들을 개발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한정부는 종교단체들이나 민간단체들이 추진하는 화해와 협력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남북한의 통일을 앞당겨야 할 것이다.
둘째 그동안 남한정부는 대북관계에서 항상 “상호주의” 원칙을 내세웠다. 상호주의란 서로 동등한 조건에서 동일한 대가를 상대에게 요구하는 원칙이다. 그러나 현재 남북한 사이에는 인구에서나 경제력에서 큰 격차가 있고 또 군사적으로도 비대칭적 관계에 있다. 따라서 남북 사이의 이러한 비대칭적 조건에서 상호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대화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비대칭적 관계에서는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선의를 갖고 보다 많은 것을 양보하는데서 대화와 화해가 가능하다. 따라서 남한정부는 북한에 대해 상호주의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셋째 7.4 공동 성명서에 나타난 3대원칙, 평화적 방식에 의한 통일, 외세가 아니라 자주적 방식에 의한 통일, 그리고 민족 대단결에 의한 통일원칙들은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주목할 것은 통일방식이 평화적일 뿐만 아니라 통일목표도 평화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멘은 통일되었으나 부족 간의 분쟁이 심하고, 베트남은 통일되었으나 아직도 정의로운 사회질서는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독일도 통일되었으나 동서독 사이의 사회적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운동은 민족적 통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통일을 통해서 차별 없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이룩해야 한다.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의 지향성과 목표점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확실히 인식해 두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국제정치적 이해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강제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난 70년 동안 남북정권들의 적대적 대립의 본질은 외세에 의존히는 남북한 지배세력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븐단을 강요했던 강대국들과 이에 의존하는 국내의 지배세력들이 곧 분단고착화 세력이고 반 통일세력이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놀라운 신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냉전시대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대결의 본질을 분석했다. 그들의 대립투쟁은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세계지배를 위한 권력투쟁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강대국 미소간의 대결을 구약성서 다니엘서에 나오는 악한 짐승들의 이권다툼에 비교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악한 싸움에 가담하거나 어느 편을 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Karl Barth, Der Götze wackelt, Hrg., von Karl Kupisch, Köthe Verlag, 1961, S. 124-142).
미국편도 소련편도 아니었던 중립국 스위스에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던 칼 바르트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그리스도의 황권통치”의 입장에 서서 미소간의 권력투쟁에 숨겨진 악마적 본질을 분석하고 있다. 국가를 바다의 괴물 레비어단(욥기 3:8; 아모스 9:2; 시편 74;13-24;104:26; 이사야27:1)으로 명명했던 영국의 정치학자 토머스 홉스(Tjomas Hobbes)처럼 바르트도 국가 특히 오늘날 강대국들의 본질을 타락한 바다짐승의 악마적 이미지에서 보고 이들의 싸움을 순전히 세계지배의 기득권 확보에서 파악했다. 이러한 바르트의 통찰은 오늘날 신 자유주적 금융자본주의를 통해서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 등 강대국들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유럽의 그리스 등 세계 각국에서 나타나는 금융위기와 가난한 국민들에게 전가되는 고통은 바로 금융자본들의 무자비한 약자착취의 현실을 반영한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1200조, 국가부채와 공기업 등 공공부분 부채도 약 1000조원에 달한다. 이 모든 부채의 주인은 미국 등 강대국 지배하에 있는 IMF와 World Bank 등이다, 우리는 이들 부자들에게 1년에 약 120조원 이상의 이자를 물고 았더, 그래서 한국애서는 대기업 보다 중소기업이, 고액연봉자 보다는 저액연봉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오늘날 세계경제체제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바울은 로마제국의 악마적 지배체제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여러분은 이 세대의 풍조(이데올로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시오.”(롬 12:2)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동안 맹목적으로 강대국의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인 자본주의를 기독교와 동일시했고 한반도 분단의 주역인 미국을 무작정 숭배하면서 반통일적 분단 사고에 사로잡혀 왔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잘못된 분단과 반통일적 사고에서 벗어나 민족의 화해와 통일운동에 매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회개행위(metanoia)고 나아가서 남북의 화해와 통일운동에 매진해야 할 자세이다.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부터라도 구체적으로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실천할 방안들을 성서적 증언들에 따라서 몇 가지로 용약해 보자.
1. 적대관계에서 화해관계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낸 것은 하나님이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또 인간들을 서로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너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너희에게 화해의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 5:18-19). 분단국가였던 서독 교회는 사도바울의 이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 당시 동독과 동구라파 국가들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1965년 “동방백서”(Ostdenkschrift)를 발표했고 서독정부로 하여금 이 일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교회의 화해노력으로 당시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69년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하게 되었다. 동방정책은 동독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s durch Annäherung)를 통해서 화해를 시도한 평화정책이다. 이러한 독일교회의 동방백서와 독일정부의 동방정책을 통한 동서간의 화해노력으로 상호간 교류협력이 활발해지고 동독과 폴란드 등 동구국가들과도 적대관계가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다..이러한 화해정책과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1990년 동서독은 마침내 통일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 통일된 독일의 대통령 요아킴 가우크(Gauck)는 동독출신으로 로스토크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목사며, 현 독일의 여성총리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분단시대에 사회주의국가인 동독에서 목회하기로 결심하고 그곳으로 이주했던 서독 함부르크 출신 목사의 딸로서 그도 학생시절부터 양독일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헌신했었다.
예수님은 인간들 사이의 화해행위를 어떤 종교행사보다 강조했다. “제물을 드리려다가 너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에게 가서 화해하고 나서 제물들 드려라.”(마태 5:23-24) 구약성서의 율법의 예배법이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나님 예배는 신자 됨의 가장 기본적 조건이다. 그런데 율법의 사회법 전통을 중시했던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종교행사보다 인간들 사이의 화해행위를 더 중시하고 있다.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예뱨)행사도 중요시해야 하나 남북한의 통일을 위한 화해행위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 2. 안보체제에서 평화체제로
남북한은 70여 년 동안 분단된 채 상호 적대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전쟁 후 1953년 체결된 휴전협정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비정상적 휴전상태가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100만이 넘는 군대가 중무장하고 대치하고 있다. 전쟁이 종식되지 못하고 중단된 채 남아 있는 휴전체제는 양편이 안보를 강제하는 대결체제다. 따라서 안보를 강제하는 휴전체제는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대가를 요구한ㄴ다. 남한에서는 정치적 탄압, 경제적 불의, 사회적 갈등, 문화적 차별이 지배하고 막대한 세금(년 40조원 이상)을 쓰면서 오랫동안 전쟁하지 않는 군대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이러한 안보 이데올로기는 원래 세계 제국이었던 “로마의 평화”(Pax Romana) 개념에서 유래했다. 로마제국은 무력으로 점령한 민족들의 소요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했다. 그것이 곧 로마의 평화, 곧 국가안보체제다. 이러한 로마의 평화, 곧 안보란 공동묘지의 평화 말하자면 굴복당한 민족들에 대한 억압적 지배를 의미한다.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영국인들은 이러한 로마의 평화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이러한 억압적 상태, 즉 국민들에게 안보를 강요하고 군비증강을 부추기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요구가 제기되었고 다행히 북한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화해와 통일을 달성하고 항구적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의 로마적 안보체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3, 대칭적 상호주의에서 호혜적 일방주의로
그동안 한국정부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늘 “상호주의”를 원칙으로 내세웠음을 앞서 지적했다. 그동안 남북한의 제반 조건들은 비대칭적으로 바꾸었음도 언급했다. 모든 면에서 특히 경제적 군사적으로 남한은 북한보다 월등하다. 따라서 이러한 비대칭적 상항에서 상호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남북 간의 신뢰를 통한 화해협력과 통일을 위한 합리적 조건이 될 수 없다.
마태복음 산상설교에 보면 예수님은 적대관계 청산을 위해서 호혜적 일방주의를 권하고 있다. 구약성서 율법에서 “원수를 미워하고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되갚으라.”는 상호주의 대신 예수님은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고 호혜적 일방주의를 가르쳤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프란츠 알트(Franz Alt)는 그의 책 “산상설교의 정치학"에서 오늘날 세계의 제반 중요한 갈등들은 산상설교의 정신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 Niebuhr)도 산상설교 정신이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Impossible Possibility) 라고 갈파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지속되는 남북한 적대관계는 남한의 호혜적 일방주의를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산상설교의 호혜적 일방주의에 대한 신뢰야 말로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시금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