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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7-01 11:47
세계화 시대와 사회적 평화
글쓴이 : 손규태

들어가는 말: 세계화의 역사

 

지난 몇 년 전 한국에서는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는 말이 화두가 되기 시작했으나 근래에 와서는 신문지상이나 방송매체들을 통해서 세계화 혹은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차원에서도 이 세계화 혹은 지구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말은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을 양극점으로 해서 전개되었던 자본주의적 질서와 사회주의적 질서, 즉 냉전질서가 끝나고 등장한 새로운 질서 즉 미국을 초극점으로 하고 등장한 자본주의 질서의 영향력을 세계적 차원에서 지칭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질서가 소련 연방의 몰락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해체로 인해서 생겨난 자본주의적 세계질서가 세계적 차원에서 관철되어 가는 것 말한다. 이 새로운 질서란 말은 미국 대통령 아버지 조지 부시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개념으로서 오늘날 전 세계적 차원에서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미국에 의한 질서의 틀이 만들어졌음을 말한다.

오늘은 이러한 세계화의 기원과 논의들을 간단히 성서적, 신학적 차원에서 검토해보고 또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삶과 우리의 생활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예수는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부탁을 한다. 즉 너희 제자들은 온 세계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사람들을 세례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제자가 되게 하라는 분부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 그의 가르침을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을 넘어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모든 사람들이 믿고 그의 제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실 세계화 지구화라는 것은 예수님의 최종 명령 가운데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지난 이천년간의 기독교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계로 나아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게 하려는 일종의 복음을 통한 세계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세계화의 물결은 사실상 15세기까지는 유럽이라고 하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7세기에 등장한 모슬렘 세력이 아시아 쪽으로 선교를 가로 막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그리스도교가 선교했던 여러 지역들을 점령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의 대교구였던 로마로 넘어가고 동방교회는 그 세력을 발칸반도 지역일부와 러시아 쪽으로 뻗어나갔다. 어쨌든 이슬람 세력의 출현은 그리스도교의 세계선교 내지는 세계화의 꿈에 커다란 좌절을 가져왔었다. 서방교회는 이러한 세계선교 내지는 세계화의 꿈을 11-12세기에 전개한 몇 차례의 십자군 운동들을 통해서 다시 시도했으나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십자가에 자기를 희생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교가 가장 비 그리스도교적인 방법, 즉 무력으로 성지를 되찾고 그곳을 재 기독교화 하려고 했던 것이다. 과거 독일에서 종교사회주의자였으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문화신학자가 된 폴 틸릭(Paul Tillich)이 말한 대로 십자가는 십자군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여기에서 제도화되고 정치적 권력화 된 그리스도교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정치 권력화 된 그리스도교는 15세기에 이르러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달하고 특히 항해술이 발달하자 그 시선을 유럽 밖의 세계로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외 특히 아시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탐험에 나섰었다. 이러한 탐험은 초기에는 호기심으로 시작되었지만 당시 이탈리아 등지에서 성장하던 자본주의적 경제적 동기와 맞물리면서 점차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벌로 나아가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탐험가들 가운데는 매우 경건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어서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복음전파라고 하는 종교적 동기도 여기에 가세한다. 따라서 이러한 유럽인들의 탐험가 정신에서는 경제적 동기와 종교적 동기가 시간이 가면서 결합되어 갔고 그것을 결국 선진문명이 발달시킨 무력수단들로 미개발 민족들을 점령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적 동기도 한 몫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선교와 제국주의의 결합이라고 하는 불행한 도식이 탄생한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의한 정치와 종교의 종합도식이 낳은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는 여기서 유럽인들의 본격적 세계화의 과정을 15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전개된 것을 간략하게 간추려 보고자 한다.

첫째 세계화의 제1물결은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에 의한 세계화의 시작이다. 1492년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 페르디난도(Ferdinando)와 여왕 이사벨라(Isabella)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인도를 향해서 출발한 항해가 미국이라는 신대륙을 도착함으로서 유럽인들에 의한 본격적인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지방의 대도시 바르셀로나(Barcelona)에 있는 가톨릭 대성당에서 대주교의 집전 하에 출발예배를 드렸다. 그는 그 예배에서 가톨릭교회의 대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문 주님께서는 야만인들이 모든 우상을 물리치고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를 낭송했었다. 그는 탐험과 정복의 의지와 함께 선교라고 하는 종교적 의지를 동시에 갖고 출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콜럼버스에 의한 신대륙 점령으로 유럽인들과 문명이 중남미로 이식되는 진정한 의미의 식민지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유럽의 문화와 유럽의 종교, 유럽의 생활습관 등이 중남미 쪽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세계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유럽인들의 세계화는 일종의 식민지화였으며 나아가서 그리스도교의 선교화이기도 했다. 세계화, 식민지화, 선교화가 삼위일체로 동시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선교사가 오면 이어서 영사가 오고 그 다음에는 군대가 온다.”는 아프리카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서구인들은 이런 식의 세계화를 문명들 간의 만남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만남이라기보다는 점령이었다.

그 다음 세계화의 두 번째 물결은 영국인들에 의한 영국식 북부 유럽 국가들의 세계화이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의 윌슨제독의 함대에 대패하면서 유럽의 세계화 세력은 영국에 의해서 재편되면서 대영제국이라는 세계화 과정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영국은 tm페인과 포르투갈 대신 대양을 지배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영국은 막강한 해양세력으로서 스페인보다 더 많은 나라들을 식민지화했다. 영국은 북미와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아시아에서 다수의 식민지 국가를 장악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후에는 독일 등 다수의 유럽 국가들이 영국을 따라서 식민지 개척에 나왔다. 결국 선진 유럽 국가들이 세계 여러 대국들로 식민지 정복에 나서게 됨으로써 유럽 세력들에 의한 본격적 식민지가 시작된 것이다. 유럽국가들 안에서는 정치적으로는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영국과 유럽의 국가들에 의한 두 번째 세계화의 물결에 동반한 것은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선교사들이었다. 세계화의 제1차 단계에서는 가톨릭교회에 의한 남미에 대한 선교가 수반되었다면 유럽에 의한 세계화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국가들에 의한 중동의 회교국들을 비롯하여 여타의 아시아국가와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선교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선교과정을 거쳐서 그리스도교 복음은 거의 전 지구적 영역에서 전파되었다.

그리고 세계화의 세 번째 물결은 20세기 말에 들어와서 구소련과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초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적 혁명이 성공한 이후 영국과 유럽 국가들에 의한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은 사회주의적 이념국가의 출현으로 인해서 장애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국가들과 사회주의적 국가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는 지속되었으며 그 후에는 양 진영의 냉전체제가 1990년대까지 지속됨으로써 한 세력에 의한 일방적 세계화추동은 불가능했었다. 그러나 1990년 구소련 연방이 몰락하고 동구라파 사회주의권이 해체됨으로써 미국에 의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추동되게 된 것이다. 결국 구소련과 미국 사이의 냉전체제가 해소된 이후 미국이 유일한 세계지배세력으로 남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질서 혹은 세계화, 지구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최초로는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이 남미로 그 세력권을 확산함으로서 세계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고 두 번째로는 영국을 선도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세계를 제패함으로서 세계화 단계가 더욱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미국이라는 최강대국가가 이전의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서 다양한 형태로 형성되었던 세계화 질서를 총괄하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화, 특히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의 세계화룰 진행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화의 정의: 구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러면 이 세계화라고 하는 것을 추동하는 사상들은 어떤 것인가? 세계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사상을 우리는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자유주의 사상의 등장과 그 발전과정은 어떠했는가? 여기서는 우선 이 자유주의 사상의 출현배경을 신학적으로 생각해 보고 나서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설명해 보자.

영국에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과 윌리엄 III세의 종교에 대한 관용법(1688)이 반포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150여 년 동안 진행되던 종교 혹은 종파 간의 싸움들은 끝장난다. 종교개혁 이후에 이렇게 지루하게 진행되던 종교내지 종파간의 전쟁과 갈등들이 끝나자 유럽국가들 안에서 사회적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종교에 집중되었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전적으로 세상적인 것, 특히 정치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그리고 경제적인 것에 집중되게 된다. 이러한 관심의 전환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인간들의 자율성,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정신이었다. 특히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려고 하는 풍조가 지배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서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이 계몽주의 특징들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종교배판, 계몽주의는 어떠한 계시종교의 속박에서도 자유롭다. 2)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자의식의 형성: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적 사고에 기초한 정확한 사물들에 대한 판단을 존중한다. 3) 학문의 체계적 질서의 확립, 4) 삶의 운영과 사회적 구성에서 합리적 가르침의 존중 등이다.

특히 영국에서는 1688년 스튜어트 절대군주체제가 붕괴되고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자 계몽주의가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특히 이신론(Deism)적 사상이 등장하여 전통적 종교의 교리들의 비판에 가세하게 된다. 이신론의 대표주자는 체베리의 에드워드 허버트(Edward Herbert of Cherbury)로서 계시 종교와 자연종교를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허버트는 더 이상 인격신(Theism)이 역사를 일일이 주관하지 않고 4계절의 변동처럼 일정한 우주적 메커니즘에 맡겨서 운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제 성숙했기 때문에 신이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따라서 성숙한 인간은 자유롭게 자기의 이성의 판단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숙한 인간의 자유는 우선적으로 신으로부터의 자유 즉 종교로부터의 자유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즉 계몽된 인간은 이제는 더 이상 인간들이나 인간들의 체제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몽주의의 자유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유럽에서는 절대군주체제라고 인간의 억압의 사슬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간다. 이러한 결정적 사건이 바로 1789년에 일어나 역사적 사건인 프랑스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계몽주의의 특징을 들자면 한마디로 인간의 자유 혹은 자율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교회라고 하는 전통적 굴레로부터 즉 신으로부터 자유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의 지배체제로부터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계몽주의를 통한 인간의 자율과 자유사상은 종교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적 영역에서 절대군주체제가 붕괴됨으로써 국가는 더 이상 교회와는 무관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체제를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국가체제는 순수하게 세속적이 것이 된다. 그리하여 국가 체제는 백성과 정부 사이의 계약에 의해서 지배된다(Thomas Hobbes).

그리고 경제와 사회의 영역에서는 무엇보다도 제3계급인 시민계급의 등장하여 과거의 지배세력인 귀족들과 승려계급들을 역사의 무대에서 추방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계몽주의의 담당자가 되었다. 중세적 경제이론을 거부하고 새로운 자연경제이론을 제창한 사람은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인데 그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이론의 창시자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이론이 지향하는 것은 시장을 이전의 봉건적이고 절대 군주적 지배체제에서 해방시켜서 모든 사람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상행위를 영위하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유로운 시장행위에서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 상품의 가치가 자유스럽게 결정되는데 이러한 원리를 그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한 시장조절의 원리라고 불렀었다.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거나 개입하면 시장이 그 자유를 상실하고 그 결과는 시장을 왜곡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반 원리들을 가리켜 우리는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고전적 자유주의 정치체제 하에서는 절대군주체제 하에서처럼 사람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가 정치적 지배원리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것을 넘어서서 법 앞에서 평등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시장 원리에 기초한 경제체제 하에서는 사람들의 사유재산권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었다. 사유재산권의 보호가 없이는 실질적인 개인의 자유의 보장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한 자유시장경제적 자본주의는 급속하게 근대적 경제발전을 가져왔으나 다른 한편 자유가 보장하는 경쟁체제에 기초하여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간에도 무한 경쟁이 지배하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가난한 약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즉 무산계급으로 전락함으로써 빈부의 격차와 계급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과학과 기술이 먼저 발달했던 유럽 국가들은 다른 나라들의 원료와 부를 약탈하는 전쟁을 일삼았다. 그것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가져왔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자유시장경제체제는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피식민지 국가들의 백성들에 의해서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되었었다.

19세기 중엽으로부터 불기 시작한 이러란 구 자유주의적 세계체제에 대한 가난한 사람들과 이른바 피식민지 국가들의 도전은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적 혁명이 일어났고, 여기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은 피식민지 국가들은 민족자결을 내걸고 강력한 민족해방운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도전들과 갈등들은 결과적으로는 제3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로서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국가들 즉 이념국가들이 탄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피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함으로써 이른바 제3세계국가들이 점차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자유가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 관료체제로부터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통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겠다는 생각이 점차 확대되었다. 그런데 17세기에서 19세기 중반에 전성기였던 고전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산업발전은 결과적으로 강자들이나 자본을 가진 자들이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됨으로써 빈익빈 현상 부익부의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자유로운 시장에서의 경쟁은 모든 것을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능력 있는 사람은 굉장한 부를 누릴 수 있으나 사회적 약자들이나 또는 신체적 약자들은 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됨으로써 빈곤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부자는 점점 부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는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이것은 비단 개인의 관계뿐 아니라 국가 관계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자본과 기술을 축적한 나라들은 부를 축적하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식민지가 되어서 부와 원료를 탈취 당하고, 단순히 부자 나라의 잉여 생산물의 시장으로써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되어 가난한 나라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 국가였던 미국의 대공황을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1920년대에 있었던 전 세계의 공황이다.

결국 국가간의 불황 타개와 경제적 이익을 확장하기 위해 세계1차 대전, 2차대전과 같은 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다. 이러한 고전적 자유주의는 인간들을 우선은 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세속화의 세계를 가져오는 한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들에게는 만인 대 만인의 대결이라는 끔찍한 무한 경쟁의 세계를 낳기도 했다.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들은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인간들을 노예화하고 착취하는 약육강식의 종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논리는 자본주의적 경제이론과 결합하여 이른바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탄생시키고 그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조절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제시된 대안이 이른바 시장에서의 탈규제화라는 표제어이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세계적인 차원에서, 특히 자본주의 영역에서, 경제 불황에 빠진 영국과 미국에서 출생한 단어다.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시장을 국가에 의한 통제나 규제화의 제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즉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어려움에 처하게 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기업을 규제하는 것을 제거하여 보다 더 시장이 자유로운 경쟁력을 갖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표제어는 기업의 탈규제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기업의 탈규제화는 결국은 금융자본의 탈규제화 혹은 세계화로 주장되었다. 금융자본의 세계화는 자본 축적이 많은 나라, 특히 선진국 미국이라든지 서유럽국가 안에서 축적돼있던 금융자본을 민족국가라고 하는 과거의 장벽을 넘어서 세계 어디서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세계적 조건들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구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에는 다수의 국가들이 자국의 기업이나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을 갖추고 대체로 보호무역 장벽을 만들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과거의 낡은 관행 즉 보호무역의 장벽을 헐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만 세계경제가 부진에서 벗어나고 산업도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전 세계적 차원에서 시장개방을 유도해 나갔다. 즉 산업자본이나 금융자본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마음대로 이동하고 투자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경제 불황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품과 자본의 자유화를 이뤄야 된다는 것을 주장을 했다.

세 번째로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지금까지 국가차원에서 운영되고 있는 이른바 공기업들의 민영화라고 하는 것을 들고 나왔다. 예를 들자면 국가가 운영하는 철도나 전기, 상수도나 항만과 도로와 같은 기간산업들이 적자를 내는 것은 국가가 그것들을 비효율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 불황에 빠져있는 것은 나라의 경제주체가 국가가 되어서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철도, 전기, 석탄 등등의 기간산업들을 운영하기 때문에 창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고 따라서 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적자를 보고 그것을 국민의 세금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가 활성화되어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공기업을 민영화해서 민간인들에 의해서 창의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 세 가지 것, 즉 기업의 규제나 금융자본의 자유화, 그 다음 공기업의 민영화라는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결국은 경제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 자유주의가 내걸고 있는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거대 자본, 또는 다국적 자본, 다국적 기업 등의 세계화 내지는 자유화를 위한 투쟁이라 말할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기업과 자본, 특히 금융자본이 특정한 국가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마음대로 활동함으로써만 결과적으로 경제 불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의 국가 규제의 제거, 금융자본의 자유화, 공기업의 민영화조치를 우리는 전반적인 의미에서 이제까지의 기업을 구조조정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적 금융기관들을 앞세워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확보하고 그리고 세계 무역기구(WTO)를 통한 세계통상을 자유롭게 확보해 나아가는 단계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이념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관철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한국의 기업들도 제반 규제들이 철폐되어서 세계 어느 나라에나 가서 기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나라 기업이든지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자유로이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다. 외국의 기업들 가운데 론 스타 같은 기업은 IMF 위기 때 한국에 들어와서 외환은행 등을 싼 값에 인수하여 막대한 이익을 보면서 영업을 하고 있다. Seven-Eleven과 같은 판매회사들도 한국에서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 가운데 많은 기업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들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의 결과들

 

이렇게 새로운 지구화, 세계화라고 하는 것,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세계적 차원에서 관철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많은 뜻있는 학자들이 비판적인 의견들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세계화는 문명들 사이의 만남이고 교류가 아니라 우수한 문명이 그렇지 못한 문명을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킥 패트릭 세일(Kirk Patrick Sale)이라고 하는 사람은 파라다이스의 점령(Conquest of Paradise)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되는 서구문명의 승리는 오늘날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도 잘 팔리는 코카콜라에 이르기까지 정복자들의 창던지기와 대포소리와는 달리 정신의 세계요, 심리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은 분명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되는 서구문명의 세계확대 혹은 세계화의 시작은 서구인들에 의한 단순한 물리적 점령이 아니라 그들에 의한 정신세계까지의 지배를 말한다. ‘페르디낭 브로델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역사학자는 문명과 자본주의’ (Civilization and Capitalism)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양의 항해 기술은 유럽인들과 비유럽인들 사이의 대칭관계를 만들었고, 따라서 세계적 척도에서 유럽인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 졌다.” 갈레아노(Galeano)는 이렇게 말한다. “콜럼버스 이래로 유럽인들의 눈에는 남미의 인디오의 문화는 민속으로 그들의 종교는 미신으로 그들의 언어는 방언으로 그들의 예술작품은 수공업으로 이해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서양음악을 음악이라고 부르면 우리 음악을 국악 혹은 민속음악이라고 부른다. 서양의 춤은 그냥 춤이라고 부르지만 우리의 춤은 민속춤이라고 부른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 특히 영어를 많이 배우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화가 가져다주는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이런 세계화 과정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깊이 생각해봐야할 것은 신앙심이 깊던 가톨릭신자였던 콜럼버스는 1494년 범선을 타고 대서양의 망망대해를 항해를 떠나면서 그는 성 어거스틴의 기도를 이렇게 되뇌었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그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의 우상을 비로 쓸어버리고 그들이 자기의 처한 곳에서 하느님을 경배할 것이다라고 되뇌었습니다. 당시 신앙심이 깊었던 콜럼버스는 다른 나라를 점령한다는 생각보다도 하느님의 세계지배를 생각하면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등장한 세계화, 지구화의 세계에서 볼 때는 이는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세계질서에서는 사실상 하느님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즉, 맘몬, 돈이 지배하는 세계가 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994년 콜럼버스 미 대륙 점령, 혹은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에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서구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질서 , 즉 세계화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용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제 신의 현현은 주가지수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며 그의 나라는 크레믈린의 즉 소련의 러시아의 지도자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 문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현실

 

이러한 부정적인 것을 가져다주는 세계화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한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첫째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특히 경제적 현실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바는 순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에 의하면 한국의 현실에서 이러한 순수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추진할 수 있는 주체세력들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재벌들도 있고 기업들도 있지만 이들은 성장과정이나 오늘의 상황에서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왜냐면 이들은 여전히 순수한 의미의 자본적 시장경제를 추구하고 거기 따라서 기업하는 것이 아니라 전 근대적 방식, 즉 족벌경영, 선단경영 등을 하고 있고 또 오늘날의 재벌들은 재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책임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경제학자들이 보는 입장이다.

둘째로 한국의 재벌들은 순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서 성장하고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의 정경유착과정을 통해서 성장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원리에 의한 공정한 경쟁원리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서 한국에서 재벌들이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대우라고 하는 기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게 된 것은 족벌경영과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버림으로 인해서 몰락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우리 날의 재벌들은 기술면에서나 자본면에서 외국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어서 세계화 속에서의 경쟁력이 없다. 그리고 한국의 재벌들이나 기업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대단히 중요한 덕목가운데 하나인 노동자들을 자기 진정한 파트너로 보고 있지 않는다는 데도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을 진정한 파트너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돌아가고 그들이 차지해야 할 몫을 그들에게 주지 않고 그들이 요구할 때는 정경유착의 방법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정치적 권력을 통해서 그들을 억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오고 있고 그것이 아직도 그대로 상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거대 기업들은 앞에서 말했던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실행 할 경우에 한국에 있어서 국가의 규제 철폐는 시장의 공정한 경쟁보다는 거대기업, 또는 외국기업들을 포함해서 재벌들의 이윤극대에만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또 금융자본의 자유화는 거대자본의 시장지배만을 보장하고 약자들을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공기업의 민영화는 거대기업의 공영화를 보장할 뿐이다.

따라서 세계적 차원에서 경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정경유착이라든지 족벌경영을 하는 기업들이 세계적 차원의 경쟁을 하기란 굉장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경영하는 주체들 사이에서 비정상적으로 과도한 경영으로 인해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나 또는 세계적 차원에서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20:80이라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점점 우리나라에도 심화되어가고 있는 처지를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지배 결과는 시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 경제적 측면을 떠나 좀더 생각해 보면 우선 가치관의 왜곡이 심해진다. 정신적인 세계보다는 물질, 돈이 지배함으로써 그것을 얻기 위한 온갖 부조리, 범죄, 인간파괴가 점점 더 자행되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절도, 강도, 심지어는 인신매매, 살인등과 같은 범죄들을 보면 왜곡되고 전도된 가치관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지배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 젊은이들은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어서 그들의 미래가 대단히 암담하다고 볼 수 있다. 어린시절부터 공부경쟁, 입시경쟁, 취직경쟁 등으로 인해서 즐겁게 지내야할 젊은 시절들을 상실하고 있고 유치원에서부터 교육에 시달리고 있다. 또 사교육, 조기교육, 영어교육, 이민교육 등등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이러한 교육영역에서의 부조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건전하게 성장하고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지내야 할 젊은이들을 우리는 파탄으로 내모는 형편에 있다. 또 이렇게 애써서 젊은이들이 공부를 하지만 정작 대학을 졸업해서는 취직을 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취직을 한다 해도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없고 자기인생을 걸고 완성할 수 있는 그러한 직장을 얻을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는 소위 노동시장유연성이라는 것을 강요해서 노동자들의 반 이상의 사람들이 임시직에 고용되어 있어서 언제 그 직장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에서 일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임시직이기 때문에 자기가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것도 전체 노동자의 50%이상의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들, 교육문제라든지 정신적 세계의 가치관의 전도라든지 젊은이들의 문제라든지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의 문제 등의 사회적 모순들을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러한 처지가 우리가 처해있는 우리의 현실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기술도 발전하고 통신수단도 발전하는데 왜 우리는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가? 왜 이렇게 불안해지는가? 왜 이렇게 인간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고 또 사람들은 점점 더 경쟁이 심해지는가? 또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까 서로 사악해지고 또 범죄가 심하게 자행되는 이렇게 살기 어려운 세계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회의를 품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그리스도인의 길

 

복음이 전 세계로 뻗쳐져서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례를 받고 평화롭게 살아야한다는 성서적 의미에서 세계화라고 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고려해볼 때, 우리는 세계화 문제, 즉 경제에 의해서 맘몬에 의해서 세계화된 오늘 현실에 대해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떠한 입장에서 대처해나가야 할까라는 문제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 교회 현실을 보면 우리 교회현실도 사실상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에 물들어서 교회 안에서 물질중심의 사고 등등의 여러 가지 잘못된 모순들이 많은 부분에 침투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마귀의 유혹을 받고, 마귀의 유혹을 극복했다고 하는 마태복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본 즉 맘몬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방향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소위 예수님이 이기신, 또 앞으로 이기고자 했고, 또 앞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극복해야 할 이 세 가지 유혹의 내용들을 살펴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찾아 이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 보자.

첫째,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는 유혹에 대해서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은 그리스적 유혹, 희랍적 유혹이다. 저는 이것을 도구적 이성에 의한 과학만능주의의 유혹이다. 이 돌로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듣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서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삶에서 컴퓨터라든지, 과학기술을 많이 발전시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유혹이다. 서구의 신학자 로데(Rohde)같은 신학자는 과학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물질적인 것에 속박되고 모두가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하는 데 처해있다. 오늘날 컴퓨터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는 상실을 더욱더 느끼게 되고 또한 과학 발전 이면에는 자연과 환경의 파괴 등에 의해서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환경을 파괴했는가? 오늘날은 파괴된 환경에 의해서 인간이 파괴당하고 있지 않는가? 야생동물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질병들이 인간들을 괴롭히고 있다. 단적인 예로서 한국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앓고 있는 아토피나 알레르기는 모두가 이러한 과학만능주의와 개발주의에 의한 자연파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둘째, 마귀는 높은 성정에 올라가서 뛰어내려 보라고 한다. 이것은 유대적 유혹, 즉 종교적 유혹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까지 시험해 보라는 유혹이다.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인간은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유혹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 종교인들 특히 많은 성직자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자기선전으로 만들고, 기만적인 치유목회를 통해서 자기의 이속을 챙기는 자들이 목회의 성공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들은 설교를 만담이나 코메디로 만들고, 치유기도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기의 능력인양 업적을 자랑하여 종교(경건)이권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딤전 6:6)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자본주의의 업적주의와 성공주의에 사로잡혀서 예수의 십자가 정신과 섬김의 정신을 상실하고 있다. 큰 돈을 모아서 큰 교회를 짓고 그것을 성공으로 그리고 자기업적으로 자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수많은 교권주의자들과 성직자들이 교회나 학교 같은 기독교 기관들을 사유화하고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는 인간의 능력, 인간의 업적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종교개혁의 전통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가 종교적 유혹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직자들이 종교적 유혹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종교개혁의 은총 만으로라고 하는 전통을 상실하고 모든 사람을 업적주의자로 만들어서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그러한 사람과 비슷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셋째로 마귀는 온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다 줄 것이니 자기에게 절하라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로마적 유혹이라고 볼 수 있다. , 권력에 대한 유혹이다. 성직자들이나 종교인들이나 오늘날 과도하게 권력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모든 영광과 권력을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인들의 수자증가와 경제성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종교 세력으로 등장했다. 특히 박정희 등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거기에 음양으로 협조하면서 보수적인 기독교는 자기들 세력을 확대해 갔고 그 결과로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종교권력으로 등장하여 선거 때만 되면 정당을 만든다느니 또는 어떤 특정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정치적 세력과 유착했다. 이렇게 특정 권력집단에 절하면서 세력을 확대한 한국의 기독교, 특히 보수적인 성직자 집단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실하고 영광의 자리에서 권력을 누리는 특권 귀족으로 등장했다.

 

마치는 말

 

오늘날의 지구화된 세계, 자본이 왕 노릇 하는 세계에서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을 극복하려한다면 교회는 예수가 극복했던 이 세 가지 유혹을 극복하고 제 모습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돌로 떡을 만들고자 하려는 그리스적 유혹, 이런 과학적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많은 물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과도하게 만들고 사고 팔고 하는 과정에서 인간들이 파괴되고 또한 자연마저도 파괴되어 오늘날과도 같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전에서 뛰어내리려는 종교적 유혹 자기교만과 종교적 업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기적을 낳으려고 하는 유혹으로 인해서 성직자들은 거짓과 교만을 일삼고 신자들을 현혹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는 자기자랑과 우상의 성공주의에 빠져서 종교의 본질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온 세상과 그 영광을 차지하려는 로마적 유혹, 권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섬기는 단체입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서 부정한 방식으로 감투싸움을 하면서 세상에서 이뤄지는 온갖 종류의 부정한 권력다툼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극복하려는 이런 것들이 바로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맘몬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이었던 것을 우리는 여기서 확실하게 발견할 수가 있다. 이 신자유주의라는 맘몬이 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고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콜럼버스가 그것을 외우면서 망망대해를 여행했던 그 기도,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이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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