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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16 11:40
독일 전대통령 리처드 폰 봐이체커를 추모하며
글쓴이 : 손규태

I

2015년 1월 31일 리처드 폰 봐아체커(Richard von Weizsäcker) 전 독일 대통령이 타계했다. 그의 나이 95세였으니 거의 한 세기를 산 셈이다. 한국 언론에서는 그의 서거를 매우 간략하게 보도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현직에서 떠나 오랫동안 세계뉴스에서 사라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그를 추모하는 까닭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개인적 친분도 있었지만 특별히 그가 대통령으로서 1985년 5월 8일 세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에 독일연방의회에서 행한 기념식 연설에 대한 깊은 인상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종전 40주년 기념연설을 통하여 독일 국민들에게 특별히 감동적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었다. 대통령의 연설을 들은 독일 국민들은 그 연설을 다시 듣기를 원해서 대통령 연설의 재방송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나기도 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체 국민들의 열화 같은 요청에 의해서 그 연설문이 소책자로 인쇄되어 전 국민들에게 배포되기도 했었다. 필자도 당시 그 연설문 한부를 얻어서 간직해 두었었고 봐이체커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듣고 필자는 그 소책자를 찾아내어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역시 감동적이었다. 이런 대통령을 두었던 독일인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다.

필자가 봐이체커를 만나본 것은 한국에서 한번 그리고 독일에서 두 번이었다. 필자가 한국에서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국회의원으로서 한국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방문했을 때이다. 잘 알다시피 독일정부와 교회의 재정적 지원으로 설립되었던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1970-80년대 한국에서 대화 프로그람을 통한 사회적 갈등의 조정자로서 그리고 중간집단형성을 위한 교육의 요람으로써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이 때 독일의회의 의원이었던 봐이체커는 대화모임의 강사와 참가자로서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방문하여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발전에 관해서 강연을 하고 토론을 참가한바 있다.

그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역사를 공부한 해박한 정치가로서 당시 한국의 군사독재 하에서도 대화모임에 참가한 정치가들과 그리스도인들 지도자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었다. 특히 필자는 그가 가졌던 그리스도인 정치가로서 학식과 신념 그리고 용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왜 한국의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은 그리스도교 진리대로 살지도 못하고 따라서 정의로운 정치적 역할도 하지 못하는가? 그리스도교 장로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법률 중에서도 가장 악법이고 반 기독교적 법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 법안과 파견법을 성탄절 다음날 날치기로 통과시킴으로써 오늘날과 같이 비정규직의 남발과 함께 알바천국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도 많은 여야 그리스도인들이 국회에 있지만 그들이 진정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지 뭇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봐이체커를 다시 만난 것은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목회하는 동안(1977-1984년) 바드 리벤첼(Bad Liebenzell)이라는 슈바르츠발트의 한 시골 수양관에서 열렸던 동아시아선교회(Ostasienmission)의 세미나에서였다. 그는 국회의원으로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세미나 장소까지 방문하여 인사말과 함께 독일교회의 선교사업에 필요한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가로서 국회의원이면서도 특히 독일교회가 세계, 특히 제3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선교하고 또 재정적 원조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동참하고 있었다. 독일교회는 그동안 세계교회협의회의(WCC)의 예산의 절반 이상을 지원함으로써 세계 에큐멘칼 운동에 재정적으로 크게 기여했을 뿐만 세계에서 “정의, 평화”를 위한 신학적 기반과 실천으로 위한 프로그람에 막대한 지원을 해 왔었다. 이러한 신학과 활동의 테두리 안에서 독일 개신교회는 60-80년대 한국의 군사독재시절에 한국교회가 전개한 인권과 민주화 그리고 통일운동에 물신 양면으로 지원했었다.

그 다음으로 필자는 1977년 봐이체커 대통령을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의 개신교 신도의 날”(Der deutsche Kirchentag) 행사에서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다. 독일의 신도대회 행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180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전쟁 중에는 중단되었으나 전후에는 1949년 하노버(Hannover)에서 다시 시작되어서 매 2년마다 대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열린다. 약 30만 명에서 50만 명의 성직자 평신도들 참가하는데 이 때는 정부나 이호지도자들은 물론 노조 등 사회단체의 대표들도 참가한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하는데 이들이 장차 독일 교회를 걸머지고 나갈 희망의 상징이 되기도 하며 그들을 위한 많은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1977년 필자가 봐이체커 대통령을 만났던 베를린에서의 신도대회에서는 독일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주제로 내걸고 행사가 진행되었다. 즉 독일 내에 살고 있는 700만이 넘는 외국인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교회나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삼았었다. 당시 독일에 와 있던 한국의 간호원과 광부들이 계약기간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인데 그들이 필요한 경우 독일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더 오래도록 일하고 또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영주권을 받을 수 있도록 청원하는 서명운동을 재독한인교회가 전개하였다. 5만 명 이상이 서명된 안건은 독일의회에 안건으로 제출되어 법안으로 상정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한인교회는 더 많은 서명을 받아서 의회에 제출하였고 그 법안이 통과되어 계약기간이 끝난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독일에 정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었다. 봐이체커 당시 국회의원은 이러한 재독한인교회의 서명운동을 지원했고 친히 서명도 해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봐이체커 대통령은 살아생전 한국과 한국교회 특히 독일에 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한 가지 더 특기하고 싶은 것은 1980년 전두환 등 신군부가 김대중씨를 체포하고 국가반란혐의로 사형을 언도했을 때 봐이체커 대통령은 국회의장으로서 김대중씨 석방결의안을 독일연방의회에 제출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켜서 한국정부에다 강력한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었다.(필자는 독일연방의회에서 김대중씨 석방결의안 채택을 생중계하는 TV방송을 녹화해서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당시 김대중씨가 신군부에 의해서 사형언도를 받은 후 재독한인교회목사들(장성환, 김종렬목사 등)과 함께 필자가 목회하던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당에서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 19:40)라는 플래카드 교회종탑에 내걸고 1주일동안 김대중씨 석방을 위한 단식투쟁을 전개한바 있다. 이 때 독일교회는 우리의 석방운동을 지원했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발간되는 일간신문들인 Frankfurter Rundschau, 그리고 Frankfurter Allgemiene Zeitung 등 1면에 김대중석방을 위한 우리의 단식기사가 실렸었다. 그 때 봐이체커 의원은 우리 한인목사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온바 있다.

그 후 한국정부는 미국 등 우방국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김대중씨를 석방하면서 거주지를 미국으로 제한하여 추방한바 있다. 그 후 필자는 독일 사회당 부총재인 비스넵스키의 요청으로 미국 워싱턴 근교에 거주하던 김대중씨를 만나서 독일방문의 가능성을 타진했었다. 그의 주거를 미국 안으로 제한하고 있어서 그의 독일이나 유럽방문은 성사되지 못했다.

II

이제는 앞서도 언급한바 있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으로서 봐이체커가 1985년 종전 4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연방의회에서 행한 연설문에 대해서 언급해 보자. 16쪽에 달하는 대통령 연설문으로는 연설문치고는 좀 길었지만 대통령은 약 한 시간 정도 읽어 내려갔던 것 같다. 9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연설문은 “오늘 1985년 5월 8일 유럽에 사는 많은 민족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날은 사실상 독일과 전체 유럽에서 히틀러의 폭력지배와 그가 일으킨 전쟁이 끝난 날이다. 따라서 독일에 의해서 점령당했던 민족들의 해방의 날이고 수감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석방된 날이다. 히틀러의 폭력지배 하에서 신음하던 독일인들, 핍박받고 옥살이를 하던 사람들, 외국에서의 망명객들도 모두 해방된 날이다. 왜냐하면 이 날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해방되어 날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향과 집을 잃은 날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쟁과 폭격의 공포에서 벗어난 날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가족과 친척을 잃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주어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파탄된 조국에서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처참한 과거의 상처도 깊었지만 미래는 더욱 불확실했었다.

1. 봐이체커 대통령은 이러한 처참한 역사적 결과에 대해서 독일인들의 참회와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 우선 독일인들은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집권하도록 내어 맡겨 두었던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45년 5월 8일 해방 날은 독일인들에게는 해방의 기쁨의 날인 동시에 역사적 죄책에 대한 참회와 성찰의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독일인들 가운데 히틀러와 그 세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사람들은 처벌을 받음으로써 죄책을 걸머졌지만 직접 협조하지 않았거나 나이가 어려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일인이기 때문에 참회의 대열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일 대통령의 참회와 선찰에로의 호소는 현재도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군국주의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우익이나 아베총리와는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과 아시아침략이나 그 당시의 정신대 동원과 중국에서의 남경대학살에 대해서 참회는커녕 그 사실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인본의 우익정권은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역사교과서에서 제거하거나 왜곡함으로써 후손들의 미래를 오도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미국 등 외국교과서에 실려 있는 일본의 만행을 외교적 압력을 통해서 배제하려고 하고 있다.

2. 봐이체커는 1945년 5월 8일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했고 또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날이라고 했다.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가장 진지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내면의 일부로 삼아 되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신실성에 대한 커다란 요구들을 담고 있다.” 이렇게 기억을 정의한 봐이체커는 전쟁에서 고통당한 수백만의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 소련과 폴란드인들, 무고하게 죽어간 집시집단들인 Sinti와 Roma, 집단학살당한 정신병환자들, 독일의 정치범들, 점령당했던 국가들에서 저항운동을 하다 죽은 사람들을 기억할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봐이체커 대통령은 죽었거나 불구가 된 인간들이 겪었던 고통을 나열하며 그것들을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죽은 자들의 고통, 상처입고 불구가 된 이들의 고통,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은 이들의 고통, 폭격으로 받은 고통, 도주와 추방, 성폭력과 약탈, 강제노동과 고문, 배고픔과 빈곤, 체포와 옥살이 등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히틀러의 강권통치와 전쟁으로 인해서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1945년 5월 8일 종전을 기념하는 날에 독일인들의 자세라는 것이다.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은 자는 현재를 볼 수 없다. 자기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것들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자는 다시 동일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하면서 잘못된 과거를 망각하고 잊어버리려는 인간들이나 나라들에 대해서 봐이체커 대통령은 경고를 보낸다. 이것은 실상 오늘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망각하려는 일본정부에 대한 경고라고도 할 수 있다.

봐이체커 대통령은 성서에 나타나 있는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신명기 5:15)는 신명기적 회상규율을 언급하면서 과거에 대한 현재의 삶의 좌표를 바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대통령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회상 없이는 화해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봐이체커 대통령은 “망각은 포로생활을 연장시키고 기억은 해방의 신비다.”라는 유대인들의 지혜를 인용한다.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고 그들의 죄책을 고백한 독일은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과 동구라파 국가들과의 동방정책(Ostpolitik)을 수립함으로써 그들과 화해하고 마침내 1990년에 동서독의 분단을 극복하고 독일통일의 대업을 달성함으로써 유럽에서 당당한 자주독립국가로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인들이 과거의 적대국이었던 동독과 유럽 국가들과 화해하고 마침내 동서독의 통일을 이룩한 데는 1965년 독일개신교회가 내놓은 “동방백서”(Ostdenkschrift)가 길잡이가 되었다. 독일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강제로 분단된 동독과 서독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화해하고 통일된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 공동의 의견을 모아서 백서를 발간했다. 여기에 자극받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동방정책을 수립하고 동독과 적극적으로 회담하고 동시에 폴란드를 방문하여 전몰장병들의 묘지에 참배함으로써 화해와 평화의 길을 확보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죄책에 대한 참회와 화해의 노력으로 분단된 독일뿐만 아니라 분단된 유럽마저도 화해와 통합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III

여기서 우리는 유태인들과 같이 역사적 고난을 겪은 민족으로서 우리 한국인들은 과거의 강대국들(몽고, 중국, 일본)에 의해서 종살이 하던 것을 기억하고 현재도 강대국들(미국과 소련)의 패권정치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단되어 민족의 와전한 독립과 통일을 달성하지 못한 것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아직도 남북한 민족은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막대한 군사비를 들여 중무장하고 군사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 두어야 한다. 남한은 한미일 공조를 통해서 월등한 최신예무기로 북한을 위협하고,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여 남한을 협박하며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써야 할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이산가족들의 고통은 날로 더해가고 군비증강으로 인해서 북한 주민들은 굶주리고 남한에서는 복지비로 써야 할 막대한 예산이 군비증강으로 지출되고 있다. 이러한 어리석은 백치놀음을 남북한의 정치가들은 당장 중지해야 한다.

봐이체커와 같이 현명하고 정직한 정치가를 가졌었던 독일은 분단된 지 45년이 되던 해인 1990년 평화적 통일을 이루었다. 분단 70년이 된 우리의 처니에서 보면 부릅기 한이 없다. 지금은 동독출신의 가우커(Gauck) 목사가 연방정부의 대통령이 되었고 같은 동독출신의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가 되어 유럽마저도 통일하여 평화로운 유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귀결에 이른 것은 브란트와 같은 화해를 위한 동방정책의 수립자와 봐이체커 같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치가가 있어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분단 상황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가들과 모든 국민들이 이들의 정신을 본받아 남북한 민족도 서로 화해하고 통일을 이루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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