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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17 10:25
존경하는 변선환 박사님을 기리며
글쓴이 : 손규태

필자가 변선환박사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된 것은 1975년 성탄절 전후 스위스 바젤에서였다. 당시 그는 사모님과 함께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때늦은 유학생활을 하면서 프리츠 부리(Frit Buri)교수에게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계셨다. 필자도 늦은 나이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을 가서 처음 맞이하는 성탄절 휴일기간을 어떻게 지낼까 궁리하던 중 바젤대학의 선교학교 교수 베르너 비더(Werner Bieder)박사의 초청을 받고 그곳에서 성탄절 휴가를 보기로 했었다. 비더교수댁에 머무는 동안 필자는 바젤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인 체코 출신 밀릭 로크만(Milic Lochmann)교수의 초청을 받고 그 댁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ㄷㅎ 뜻 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비더 교수의 사모님이 마련해준 안락한 잠자리와 감자요리는 멀리 고향을 떠나서 처음 맞이하는 성탄절을 쓸쓸하지 않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비더교수 내외와 나는 비더교수의 큰 아들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서 즐거운 저녁 한때를 지낸 것이 기억난다. 그 큰 아들은 당시 스위스 군대의 대령으로 있었는데 그는 박정희가 찾아와서한국의 예비군을 스위스예비군의 모델을 따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는 높은 알프스 산에 올라 박정희와 찍은 사진도 보여주었다.

필자가 변선환 박사님을 만나던 날 그는 만나자마자 바젤의 좋은 곳에서 같이 산보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변박사님과 필자는 전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바젤교외에 있는 종점에 도착했다. 거기서 얼마를 더 걸어가니 아름답게 장식된 바젤 시립공동묘지가 나타났다. 공동묘지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묘지와는 달리 많은 수목으로 장식된 공원과 같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겨울의 꽤나 찬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산보를 하고 있었다.

변박사님은 필자를 안내해서 공원 안으로 한 참 들어가 어느 묘지 앞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바로 1968년에 작고한 저 바젤대학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칼 바르트는 잘 알다시피 1886년에 태어나 1968126일 향년 82세로 작고한 개혁교회 목사요 신학자다. 그의 묘지 뒤쪽에 서있는 약간 붉은 색의 묘지석에는 바르트와 그의 아내의 이름 그리고 태어난 날자와 서거한 날자가 적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묘지의 낮은 분봉위에는 그의 평생의 충실한 여비서였던 키르쉬바움(Kirschbaum)의 이름이 적인 나무서판도 서 있었다. 합장한 부부의 묘지 위에 얼마 전에 사망한 바르트의 여비서도 합장해 주었다고 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한동안 서서 묵념으로 위대한 신학자 바르트를 추모했다. 그리고 나서 변선생님은 또 하나의 위대한 바젤대학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묘지도 찾아보자고 했다. 우리는 한동안 이리저리 헤매면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산보 나온 사람들에게 묻기도 했지만 그의 묘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야스퍼스의 묘지 찾기를 포기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당시 변선환박사님의 사모님이며 이화여대 교수인 신옥희 교수님은 야스퍼스를 주제로 해서 철학박사학위 논문을 작성 중이었다.

우리는 잠시 따사로운 공원묘지의 벤치에 앉아 쉬면서 바르트의 신학과 야스퍼스의 철학에 대해서 담화를 나누었다. 필자도 몇 학기를 바르트의 신학을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했지만 한국에서 배운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바르트 소개는 대체로 그를 신정통주의적 교의학자로만 소개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박사님은 바르트의 신학 특히 나치 정권 하에서 형성도딘 그의 정치신학과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필자는 하이델베르크대학 사회윤리학 세미나 시간에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나의 지도교수 퇴트(Eduard Heinz Tödt)에게서도 바르트의 정치신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듣게 되었다, 사실상 바르트가 나치 하에서 그의 교회투쟁이라고 하는 드라마틱한 삶과 함께 형성된 그의 사상이 소개했었더라면 박정희독재체제 하에서 투쟁하던 우리들에게 더욱 실감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특히 필자는 바르트의 말기 저작들인 권리와 의인”(Recht und Rechtfertigung)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시민들의 공동체”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를 통해서 국가와 교회,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칼 바르트의 정치 신학적 저작들은 필자가 한국에 돌아와서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로서 연구하고 집필하는데 많은 영감과 지침들을 제공했었다. 어떤 의미에서 필자도 그동안 바르트의 제자가 된 셈이다.

팔자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1989년에 귀국해서 성공회대학에서 교수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 변박사님은 감신대학교 총장으로 계셨다. 그는 필자를 초청하여 대학원에서 특강을 하도록 했었다. 그 때 필자는 가톨릭이 선교신학자 뷜만(W. Bühlmann)의 책 신앙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세계교회의 상항에 대한 고찰”(Wo der Glaube lebt. Einblicke in die Lage der Weltkirche. Herder)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제3세계에서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역동성을 소개했었다. 필자는 교회사의 4단계 발전과정을 초대교회(동방교회), 중세가톨릭교회(서방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북방교회), 그리고 제3세계의 교회(남방교회)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만중신학과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는 헬레니즘화된 귀족교회로, 서방의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의 봉건지배계층의 교회로, 북방의 개신교회는 근대 부르주아 계급의 교회로, 그리고 제3세계의 남방교회는 민중들 중심의 교회로 발전해감으로써 복음의 본래적 본질을 다시 획득해 가고 있음을 강조했었다.

필자는 독일에 유학을 가기 전 197412월 월간지 기독교 사상에 실었던 글 삶의 계명으로서 평화란 글을 쓴 일이 있다. 필자는 당시 우연한 기회에 독일의 철학자며 핵물리학자인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Karl Friedrich von Weiszäcker)의 글 핵시대의 평화는 삶의 계명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필자는 한반도의 평화야 말로 우리들 모두의 삶의 조건이라는 내용을 글을 썼었다. 그 글을 읽으셨던 변박사님과 필자는 바젤체류기간에 남북한 분단문제와 통일과 평화를 주제로 해서 많은 시간을 바쳤었다. 당시 한국의 신학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분단 현실에서 남북통일에 관해서 많은 글들을 썼지만 평화를 주제로 한 글들은 별로 쓰지 않았을 때다. 변박사님은 그 글을 특별히 감명 깊게 읽었다고 칭찬하시면서 앞으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하고 연구해 보라고 하셨다.

필자는 귀국 후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로서 한반도에서 통일과 평화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게 되었고 여러 편의 글들도 발표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나라는 주권을 잃고 백성들은 기나긴 고통을 세월을 살아왔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분단되었고 분단의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지상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통일되어야함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는 우리의 살의 조건이다.

우리와 같이 분단되었던 동서독은 서로 긴 화해의 과정을 거쳐서 이미 1990년 통일을 이루고 유럽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국가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통일의 배경에는 독일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이 컸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적대시하던 양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었다. 1965년 독일 개신교협의회는 화해작업의 일환으로 당시 적대시하던 동독과 동구라파국가들과의 화해모색의 일환으로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처지와 동부에 있는 이웃민족들에 대한 독일민족과의 관계”(Die Lage der Vertriebenen und das Verhältnis des deutschen Volkes zu seinen östlichen Nachbarn)라는 제목으로 동방백서”(Ostdenkschrift)를 발표했다. 독일 개신교협의회가 작성한 동방백서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고후 5:18).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 화해하시고 나아가서 모든 인류가 서로 화해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있다. 이것은 1969년 브란트 수상의 독일연방정부로 하여금 동방정책”(Ostpolitik)을 이끌어내서 마침내 동서독이 점차 화해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서독의 화해정책은 마침내 동서독의 통일이라는 결실을 가져온 것이다.

따라서 남북 민족도 이제까지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화해하여 평화롭게 살아가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반세가 이상 지속되는 휴전 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준 전시상태를 청산해야 한다, 휴전이라는 준 전시상태에서 남북한은 막대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남한은 1년에 40조에 달하는 군비를 지출하고 있다. 몰론 북한도 여기에 상응하는 군대와 무력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남한의 경우 이 돈이면 무상교육이나 무상의료와 같은 근대복지국가들이 실현하고 있는 가치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전쟁을 않는 남한의 군대는 부정과 부패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막대한 돈으로 매년 전투기 사업이나 통영함 건조사업 등에서 엄청난 비리가 군대를 지배하고 있다. 북한은 막강한 군대로 인해서 선군정치라는 이름으로 정치가 군사화 되어 민주적 질서는 사라지고 군사국가화 됨으로써 국민들은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빈곤에서 신음하고 있다.

남북통일은 분단된 민족아 적대관계를 총산하고 화해하여 민족적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 이 통일은 남북한의 정치적 통합인 동시에 모든 사회계층이 정의로운 경제체제 하에서 평등한 삶을 누리는 사회적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1990독일민족은 통일 되었지만 독일 사회는 분열되었다.”는 인식들이 많은 사람들, 특히 동독 사람들 가운데 팽배했었다. 정치적 통일은 달성되었지만 동독의 가난한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불만이 많았었다. 그동안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한이 통일될 때 북한의 주민들이 차별 당하거나 소외되는 통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의 전제는 정의로운 통일, 모두가 화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통일 즉 평화가 달성될 수 있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1998년에 출간한 개신교 윤리사상사(대한기독교서회)에서 변선환 박사의 신학과 윤리사상을 종합하면서 그를 대화의 윤리, 평화의 윤리, 참여의 윤리학자로 정리해 보았다. 그는 문화신학자로서 종교 간의 대화를 추진했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평화 없다는 한스 큉(Hans Küng)의 말대로 대화의 윤리는 곧 평화윤리의 전제가 된다. 필자는 여기서 필자의 책에서 변박사님에 대한 총평을 인용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변선환박사는 단순히 이론적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이러한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종교 간의 대화의 모임들에 열과 성의를 다해서 참석했다. 그는 말년에는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의 대화 보다 오히려 타종교, 타문화의 대화에 장에 더 열심히 참석했다. 그것은 그가 목표로 하는 인류공동체를 더불어 달성하기 위한 헌신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활동의 목표를 이렇게 쓰고 있다. “거용(巨龍)과 싸움에서의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한국의 소망이며 세계의 소망이다. 그분이야말로 인류를 하나 되게 하고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용 살해자 그리스도라는 상징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책임적인 인류사회의 형성을 향하여 사랑에 사는 무제약적 책임성이 기독교 신앙만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독점물이라고 보지 않는다.”(변선환, 한국 기독교와 한국 문화, 전집 3. 19). 그는 거용살해자 그리스도라고 하는 상징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기희생과 결단 그리고 무제약적 책임성을 통한 행동적 참여를 말하고 있다.(손규태, 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

 

 

 

 

 

 

 

 

 

 

 

 

 

 

 

   

존경하는 변선환박사님을 기리며

 

필자가 변선환박사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된 것은 1975년 성탄절 전후 스위스 바젤에서였다. 당시 그는 사모님과 함께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때늦은 유학생활을 하면서 프리츠 부리(Frit Buri)교수에게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계셨다. 필자도 늦은 나이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을 가서 처음 맞이하는 성탄절 휴일기간을 어떻게 지낼까 궁리하던 중 바젤대학의 선교학교 교수 베르너 비더(Werner Bieder)박사의 초청을 받고 그곳에서 성탄절 휴가를 보기로 했었다. 비더교수댁에 머무는 동안 필자는 바젤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인 체코 출신 밀릭 로크만(Milic Lochmann)교수의 초청을 받고 그 댁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ㄷㅎ 뜻 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비더 교수의 사모님이 마련해준 안락한 잠자리와 감자요리는 멀리 고향을 떠나서 처음 맞이하는 성탄절을 쓸쓸하지 않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비더교수 내외와 나는 비더교수의 큰 아들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서 즐거운 저녁 한때를 지낸 것이 기억난다. 그 큰 아들은 당시 스위스 군대의 대령으로 있었는데 그는 박정희가 찾아와서한국의 예비군을 스위스예비군의 모델을 따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는 높은 알프스 산에 올라 박정희와 찍은 사진도 보여주었다.

필자가 변선환 박사님을 만나던 날 그는 만나자마자 바젤의 좋은 곳에서 같이 산보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변박사님과 필자는 전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바젤교외에 있는 종점에 도착했다. 거기서 얼마를 더 걸어가니 아름답게 장식된 바젤 시립공동묘지가 나타났다. 공동묘지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묘지와는 달리 많은 수목으로 장식된 공원과 같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겨울의 꽤나 찬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산보를 하고 있었다.

변박사님은 필자를 안내해서 공원 안으로 한 참 들어가 어느 묘지 앞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바로 1968년에 작고한 저 바젤대학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칼 바르트는 잘 알다시피 1886년에 태어나 1968126일 향년 82세로 작고한 개혁교회 목사요 신학자다. 그의 묘지 뒤쪽에 서있는 약간 붉은 색의 묘지석에는 바르트와 그의 아내의 이름 그리고 태어난 날자와 서거한 날자가 적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묘지의 낮은 분봉위에는 그의 평생의 충실한 여비서였던 키르쉬바움(Kirschbaum)의 이름이 적인 나무서판도 서 있었다. 합장한 부부의 묘지 위에 얼마 전에 사망한 바르트의 여비서도 합장해 주었다고 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한동안 서서 묵념으로 위대한 신학자 바르트를 추모했다. 그리고 나서 변선생님은 또 하나의 위대한 바젤대학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묘지도 찾아보자고 했다. 우리는 한동안 이리저리 헤매면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산보 나온 사람들에게 묻기도 했지만 그의 묘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야스퍼스의 묘지 찾기를 포기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당시 변선환박사님의 사모님이며 이화여대 교수인 신옥희 교수님은 야스퍼스를 주제로 해서 철학박사학위 논문을 작성 중이었다.

우리는 잠시 따사로운 공원묘지의 벤치에 앉아 쉬면서 바르트의 신학과 야스퍼스의 철학에 대해서 담화를 나누었다. 필자도 몇 학기를 바르트의 신학을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했지만 한국에서 배운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바르트 소개는 대체로 그를 신정통주의적 교의학자로만 소개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박사님은 바르트의 신학 특히 나치 정권 하에서 형성도딘 그의 정치신학과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필자는 하이델베르크대학 사회윤리학 세미나 시간에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나의 지도교수 퇴트(Eduard Heinz Tödt)에게서도 바르트의 정치신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듣게 되었다, 사실상 바르트가 나치 하에서 그의 교회투쟁이라고 하는 드라마틱한 삶과 함께 형성된 그의 사상이 소개했었더라면 박정희독재체제 하에서 투쟁하던 우리들에게 더욱 실감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특히 필자는 바르트의 말기 저작들인 권리와 의인”(Recht und Rechtfertigung)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시민들의 공동체”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를 통해서 국가와 교회,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칼 바르트의 정치 신학적 저작들은 필자가 한국에 돌아와서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로서 연구하고 집필하는데 많은 영감과 지침들을 제공했었다. 어떤 의미에서 필자도 그동안 바르트의 제자가 된 셈이다.

팔자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1989년에 귀국해서 성공회대학에서 교수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 변박사님은 감신대학교 총장으로 계셨다. 그는 필자를 초청하여 대학원에서 특강을 하도록 했었다. 그 때 필자는 가톨릭이 선교신학자 뷜만(W. Bühlmann)의 책 신앙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세계교회의 상항에 대한 고찰”(Wo der Glaube lebt. Einblicke in die Lage der Weltkirche. Herder)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제3세계에서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역동성을 소개했었다. 필자는 교회사의 4단계 발전과정을 초대교회(동방교회), 중세가톨릭교회(서방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북방교회), 그리고 제3세계의 교회(남방교회)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만중신학과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는 헬레니즘화된 귀족교회로, 서방의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의 봉건지배계층의 교회로, 북방의 개신교회는 근대 부르주아 계급의 교회로, 그리고 제3세계의 남방교회는 민중들 중심의 교회로 발전해감으로써 복음의 본래적 본질을 다시 획득해 가고 있음을 강조했었다.

필자는 독일에 유학을 가기 전 197412월 월간지 기독교 사상에 실었던 글 삶의 계명으로서 평화란 글을 쓴 일이 있다. 필자는 당시 우연한 기회에 독일의 철학자며 핵물리학자인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Karl Friedrich von Weiszäcker)의 글 핵시대의 평화는 삶의 계명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필자는 한반도의 평화야 말로 우리들 모두의 삶의 조건이라는 내용을 글을 썼었다. 그 글을 읽으셨던 변박사님과 필자는 바젤체류기간에 남북한 분단문제와 통일과 평화를 주제로 해서 많은 시간을 바쳤었다. 당시 한국의 신학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분단 현실에서 남북통일에 관해서 많은 글들을 썼지만 평화를 주제로 한 글들은 별로 쓰지 않았을 때다. 변박사님은 그 글을 특별히 감명 깊게 읽었다고 칭찬하시면서 앞으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하고 연구해 보라고 하셨다.

필자는 귀국 후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로서 한반도에서 통일과 평화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게 되었고 여러 편의 글들도 발표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나라는 주권을 잃고 백성들은 기나긴 고통을 세월을 살아왔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분단되었고 분단의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지상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통일되어야함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는 우리의 살의 조건이다.

우리와 같이 분단되었던 동서독은 서로 긴 화해의 과정을 거쳐서 이미 1990년 통일을 이루고 유럽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국가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통일의 배경에는 독일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이 컸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적대시하던 양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었다. 1965년 독일 개신교협의회는 화해작업의 일환으로 당시 적대시하던 동독과 동구라파국가들과의 화해모색의 일환으로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처지와 동부에 있는 이웃민족들에 대한 독일민족과의 관계”(Die Lage der Vertriebenen und das Verhältnis des deutschen Volkes zu seinen östlichen Nachbarn)라는 제목으로 동방백서”(Ostdenkschrift)를 발표했다. 독일 개신교협의회가 작성한 동방백서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고후 5:18).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 화해하시고 나아가서 모든 인류가 서로 화해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있다. 이것은 1969년 브란트 수상의 독일연방정부로 하여금 동방정책”(Ostpolitik)을 이끌어내서 마침내 동서독이 점차 화해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서독의 화해정책은 마침내 동서독의 통일이라는 결실을 가져온 것이다.

따라서 남북 민족도 이제까지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화해하여 평화롭게 살아가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반세가 이상 지속되는 휴전 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준 전시상태를 청산해야 한다, 휴전이라는 준 전시상태에서 남북한은 막대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남한은 1년에 40조에 달하는 군비를 지출하고 있다. 몰론 북한도 여기에 상응하는 군대와 무력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남한의 경우 이 돈이면 무상교육이나 무상의료와 같은 근대복지국가들이 실현하고 있는 가치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전쟁을 않는 남한의 군대는 부정과 부패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막대한 돈으로 매년 전투기 사업이나 통영함 건조사업 등에서 엄청난 비리가 군대를 지배하고 있다. 북한은 막강한 군대로 인해서 선군정치라는 이름으로 정치가 군사화 되어 민주적 질서는 사라지고 군사국가화 됨으로써 국민들은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빈곤에서 신음하고 있다.

남북통일은 분단된 민족아 적대관계를 총산하고 화해하여 민족적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 이 통일은 남북한의 정치적 통합인 동시에 모든 사회계층이 정의로운 경제체제 하에서 평등한 삶을 누리는 사회적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1990독일민족은 통일 되었지만 독일 사회는 분열되었다.”는 인식들이 많은 사람들, 특히 동독 사람들 가운데 팽배했었다. 정치적 통일은 달성되었지만 동독의 가난한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불만이 많았었다. 그동안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한이 통일될 때 북한의 주민들이 차별 당하거나 소외되는 통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의 전제는 정의로운 통일, 모두가 화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통일 즉 평화가 달성될 수 있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1998년에 출간한 개신교 윤리사상사(대한기독교서회)에서 변선환 박사의 신학과 윤리사상을 종합하면서 그를 대화의 윤리, 평화의 윤리, 참여의 윤리학자로 정리해 보았다. 그는 문화신학자로서 종교 간의 대화를 추진했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평화 없다는 한스 큉(Hans Küng)의 말대로 대화의 윤리는 곧 평화윤리의 전제가 된다. 필자는 여기서 필자의 책에서 변박사님에 대한 총평을 인용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변선환박사는 단순히 이론적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이러한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종교 간의 대화의 모임들에 열과 성의를 다해서 참석했다. 그는 말년에는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의 대화 보다 오히려 타종교, 타문화의 대화에 장에 더 열심히 참석했다. 그것은 그가 목표로 하는 인류공동체를 더불어 달성하기 위한 헌신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활동의 목표를 이렇게 쓰고 있다. “거용(巨龍)과 싸움에서의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한국의 소망이며 세계의 소망이다. 그분이야말로 인류를 하나 되게 하고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용 살해자 그리스도라는 상징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책임적인 인류사회의 형성을 향하여 사랑에 사는 무제약적 책임성이 기독교 신앙만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독점물이라고 보지 않는다.”(변선환, 한국 기독교와 한국 문화, 전집 3. 19). 그는 거용살해자 그리스도라고 하는 상징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기희생과 결단 그리고 무제약적 책임성을 통한 행동적 참여를 말하고 있다.(손규태, 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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