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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9-10 19:55
광복절 70주년을 맞아 사대주의를 경계한다
글쓴이 : 손규태

빛을 되찾는다는 뜻의 광복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한 민족이 다른 나라에게 강탈당했던 나라와 주권을 되찾아 자주하는 국민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광복절이란 나라와 주권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뜻이리라. 우리나라의 광복절은 1910년 조선조 말기 국가주권을 하나의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나라와 주권을 일본에 넘겼고 36년간 간 식민지의 멍에와 고통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가 70년에 맞는 광복절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과 주권회복의 날인가? 아니다. 우리가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날은 당시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에 의해서 남북한이 분할 점령된 날이다. 따라서 한국의 광복은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의 날이 아니라 낡은 식민주의자로부터 새로운 외국세력들에게 점령당한 날이다. 따라서 70년이란 긴 분단시대를 우리 민족은 진정한 해방과 독립과 주권을 쟁취하여 통일된 민족국가를 달성하기까지 광복절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 축하할 수 없다. 분단의 한쪽인 남한정부는 여러 가지 광복절 기념행사들을 조직하고 치르고 있지만 국민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진정한 해방과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것도 남북이 분단되고 대치하는 상태에서 치러지는 광복절행사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 3국의 역사전쟁

 

광복절과 남북분단 70주년을 맞이하기 얼마 전부터 전개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역사전쟁의 문제와 그 실체를 음미해보게 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했던 일본은 과거에 저지른 침략전쟁과 한반도,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저지른 식민지배와 악행에 대해서 반성과 사죄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오히려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여 서양세력들의 아시아 식민지화를 방어하고 미개한 아시아 국가들을 근대화하여 문명국이 되게하는 시혜자로 자처하고 있다. 역사전쟁을 통해서 일본의 극우정권들은 이렇게 식민지지배의 과거사를 왜곡하고 미화하여 그들의 역사교과서에 실어 후손들에게까지 전수하려 하고 있다. 특히 최근 아베정권은 역사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의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 즉 중국사회과학원에 설치한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가 동북지역의 3개 성()과 연합하여 시작한 대규모 프로젝트이며,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체계적 연구프로젝트. 여기서는 고조선과 삼국시대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부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한국정부는 강력히 항의하고 외교문제화 하였었다. 한국정부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20043월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하고 20069월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확대 발전시켜 여기에 대처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전쟁에서 한국은 어떠한가? 동아시아 3국의 역사전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선 한국의 극우파 정치지도자들과 뉴라이트 계통의 학자들은 일본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의 한국사를 친일적으로 왜곡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 김무성대표 등이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하여 그것만을 학교에서 가르치게 하려는 시도이다. 뉴라이트 계통의 약시교과서는 대체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해서 직간접적으로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나아가서 분단을 고착화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왜곡하고 있다. 이 역사교과서에서 주목을 끄는 몇 가지 왜곡된 대목들을 들자면 친일파들의 미화, 식민지근대화론 수용,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축소 내지 삭제,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정권 찬양, 위안부 문제 등의 축소기슬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적 회상:사대주의의 기원

 

이렇게 볼 때 남북한의 분단과 미완성의 광복의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와 다음으로는 근현대 한국의 지배계층과 기득권 세력들의 독립의식과 자주의식의 결여에 있다고 보겠다. 역사를 회고해 보면 한반도가 주변 국가들의 패권주의적 지배는 13세기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형제국가와 형제국가 관계를 형성했다지만 실제로는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 하에서 조공을 바치고 명맥을 유지하던 일종의 종속국가였다. 원나라(1279-1369)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의 왕들은 그 이름에다 몽고에 충성을 성약하는 ”()자를 넣어야 했다. 25忠烈王(1274-1308)부터 30대 충정왕(忠定王:1348-1351)까지 약 1세기 동안 고려는 몽고의 예속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물론 고려는 세자책봉 같은 중요한 정치적 사안에서도 몽고의 결정에 따랐다.

조선조(1392-1910)에 들어와서도 당시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명나라와 청나라에 의해서 속국의 처지를 면하지 못했다. 이미 조선조 초기부터 명나라는 내정에 깊이 관여하고 무거운 조공을 바치도록 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조선조 3대 왕인 태종 때부터 명나라는 처녀들까지 강제로 바치게 했었다. 그래서 조선조의 공식적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정책을 채택하여 명나라에는 사대로 일본 같은 나라에는 교린으로 대했다.

1592-1598년 사이 6년 동안 조선은 일본의 침략(임진왜란)으로 커다란 시련을 겪었고 명나라의 지원과 의병들과 이순신의 전과로 겨우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이 때 명나라의 장군 이여송은 일본과 협상을 통해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 북쪽은 명나라가. 남쪽은 일본이 차지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반의 분단의 씨앗은 이미 이때 뿌려졌다고도 볼 수 있다. 무능하고 사대적인 조선왕 선조와 당쟁을 일삼는 관료세력에 대항하여 민족자의식을 가진 몇 안 되던 관리들과 지식인(유생)들과 농민들로 조직된 의병들의 항쟁이 나라를 구해낸 것이다.

조선조 후기에 등장한 청나라도 조선조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그치지 않았다. 이때 조선의 조정은 친명파와 친청파로 갈라져 충성투쟁에 몰두했다. 친명파였던 인조는 병자호란 때(1636) 남한산성에서 저항아다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끌려나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찢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의 수치를 당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 때 청나라 군대는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을 전리품으로 끌고 갔는데 후에 몇몇 여인들이 조선으로 돌라왔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었다. 그들이 몸을 버리고 돌아왔다고 해서 나쁜 뜻으로 화냥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의 처지를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던 일본군 위안부들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과거 전쟁들에서 여성들은 승전국의 전리품이 되었었다. 이렇게 전쟁에서 가장 고통당하는 집단은 가장 약자인 어린이들과 여성들이었다. 최근에 여인들에 대한 유사한 야만적 사건은 유고슬라비아 내전 (1991)에서도 발견된다.

그 후 한반도의 운명은 청일전쟁(1894-6)과 러일전쟁(1904/5)에서 승리한 일본의 손에 떨어진다(1910). 일본은 조선을 합방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기까지 36년간 식민지로 통치했다. 일제식민지에서 풀려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남한에는 오늘까지도 미국군이 주둔하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간섭을 있다. 북한에는 외국군대의 주둔 없이 주체사상을 내세워 자주를 절대가치로 삼는다지만 주변 강대국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정치. 군사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지 확인하기 힘들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700여 년 동안 외세의 직접 간접으로 지배를 당해왔다고 할 수 있다. 미완의 광복절 아침 필자는 이렇게 오랫동안 외세들의 지배와 간섭을 받아온 한국인들은 사대주의 내지 외세 의존적 사고를 우리의 정신에 내면화하고 몸에 체현화하지 않았는가를 묻게 된다.

이렇게 조선 역사는 그 건국으로부터(1393) 멸망하기까지(1910) 대외정책은 사실상 사대주의가 근간을 이룬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의 건국과 동시에 중국 명나라에 그 사실을 보고했다. 태조는 국호를 명나라의 허락 하에 조선으로 정하고 국체를 소중화(小中華)를 지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조선의 외교정책은 정책은 친명사대(親明事大)과 조공책봉(朝貢冊封)을 채택한다. 이러한 친명사대주의와 조공책봉정책은 500년에 달하는 조선조 내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계속되었었다.

따라서 이러한 친명사대주 정책은 조선조 당시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들의 의식 속에 깊이 내면화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대주의의 내면화는 그 민족의 성격으로 자리잡아 소위 민족성으로 굳어져 마침내 민족의식(national consciousness)을 형성하게 된다. 어느 민족의 특성을 말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공통분모를 찾는데 문화적 공통분모로 우리는 언어, 관습, 종교, 생활양식(식생활 등) 등을 말하고 정치적 공통분모를 말할 때 세계관, 의식화, 공동체성 등을 말하게 된다. 한스 콘, 민족주의의 본잘(Hans Kohn, Das Wesen des Natiaonalismus),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말할 때 문화적 지향성을 승유사상”(崇儒思想)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지향성은 모화사상”(慕華思想)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이러한 민족성 내지 민족의식의 형성은 고려말기 조선 초기에 도입된 유교 특히 유교정통주의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원리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고 보인다. 그래서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서양사상의 기초가 된 서학(천주학)이 조선에 상륙했을 때 조선의 지배층은 성리학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으로 대응했다. 그들에게는 유교적 원리의 수호가 곧 서양세력의 도전에 맛서 나라의 얼, 즉 민족의식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조선조 500년 동안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는 공자에 대한 숭유사상과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이 뼈 속 깊이 내면화되고 그것은 대외적으로 사대주의로 나타났다.

 

일제 식민지지배 하에서 사대주의적 의식의 변용

 

일본은 19세가 중엽 명치유신(1968)을 단행하고 서양의 근대 과학과 기술(和魂洋才)을 받아들여 극동에서는 제일 먼저 근대화를 이루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그 힘으로 19세기 말 20세게 초 한반도를 둘러싸고 힘겨루기를 하던 중국과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1910). 그동안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의 반식민지 상태에 있던 조선은 무능한 왕실과 당쟁을 일삼던 부패한 관료체제 하에서 국력은 쇠잔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었다.

일본 세력에 굴복당한 조선의 지배관료체제를 구성했던 기득권 세력 속에 내면화되었던 명.청에 대한 사대주의가 친일사대주의 둔갑한다. 이완용, 송병준 등을 필두로 한 을사5, 정미 7, 경술국적 등이 조선합방의 선봉에 섰고 약700여명의 인사들이 본격적으로 친일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정계, 재계, 문화, 교육, 언론, 경찰, 관리, 예술, 종교, 체육 등 각계의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했었다.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선조 덕에 각계각층의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들 친일적 기득권 세력은 당시 일제가 식민지화된 조선인들 가운데서 중급 내지 고급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세운 경성제국대학교(서울대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물론 최고급 관리의 자리들은 일본인들이 차지했었다. 이 경성제국대학교의 일본인 교수들과 친일적 조선인 교수들은 조선학생들에게 고등교육 외에도 친일적 사고와 의식을 심어주었었다. 경성제국대학교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출신들 일부에서는 해방 70년을 맞이하는 오늘날까지도 친일적 사고와 행태에 젖어 있어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으며 이 대학교가 일본식민지 고급관료양성소였다는 오명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행정부의 고급관료들과 국회의 정치인들 그리고 사법부의 판검사의 자리들은 이 대학교 출신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보수 내지 수구적이고 권위적이며 위계적 행태를 보이고 배타적이고 가부장적이다. 특히 한국에서 대기업을 경영하는 이들 가운데 대대수가 이 대학교 출신이며 그들은 권위적이거 베타적이어서 기업경영에서 무한 경쟁을 벌린다. 그들은 중소기업들을 협력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그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의 물건 값을 후려치는 소위 갑질의 원조가 되었다. 그들은 상생이나 공동체적 의식의 결여로 노동자들을 기업의 동반자로 보지 않고 생산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적대시하고 파괴하려고 한다. 그래서 삼성 같은 기업은 처음부터 노조 없는 기업으로서 국민과 전세계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 기득권층으로 등장한 서울대학교 출신들은 각 분야에서 최고위지위들을 누리면서 학연과 지연 그리고 혼연()으로 서로 결합되어 자신들과 후손들을 기득권에 진입시키고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이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을 성골(聖骨)집단화 하여 자기들끼리만 혼인하여 그 특권을 자손만대에까지 지속시키려고 한다. 예를 들면 대재벌의 딸과 고급관료의 아들과 혼인시켜 일반인들은 그 성골집단에 진입하는 것을 근본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 이러한 친일적 집단이 한국 재계 내지는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서 전대미문의 대기업 집단을 이루고 경제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막강한 세력을 이룬 대기업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을사 5적의 우두머리 이완용의 후손이다. 그 대가로 이완용은 일본으로부터 작위 등 막강한 특권을 받고 다량의 토지와 재산을 받았다. 이완용의 둘째아들 이병구의 4남중 막내가 바로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이다. 그는 친일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기반으로 일제 때는 정미소 등을 운영하다가 해방 후 1951년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창업하여 무역업을 시작하고 1953-4년에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964년 한국비료공장 등을 세워서 제조업에 진출했다 그후 이병철은 1964년에 중앙방송 및 중앙일보를 창간하여 언론계에도 손을 대고 마침내 1969년에는 최첨단 산업인 삼성전자를 창립하여 오늘날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 재벌로 성장했다.

 

광복 후 친일파 기득권 세력들의 친미파로의 변모

 

이러한 친일파 기득권 세력들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이 남북한을 분단 점령하자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했다. 북한의 경우 친일파와 소위 유산계급은 사회주의적 평등원리에 따라 완전히 제거되거나 정리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사정은 전혀 달랐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군사정부를 세워 3년 넘게 미국장성이 통치했다. 이 기간에 미국은 친일행위자들을 제거하기는커녕 보호하여 일제통치에 경험이 있는 자들 다수를 군정청 고위직에 임명했다. 미국이 3년 동안 군정을 하는 동안 친미파인 이승만을 지원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그를 대통령자리에 안게 지원했다. 이승만은 겉으로는 일본에 대해 강경노선을 쓰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친일파청산에 미온적이었고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는 정책을 썼다. 이승만은 당시 제헌국회에서 야당의이 강력하게 추진하여 194897일 통과시킨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반민특위법)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실상 무력화시킴으로써 친일파청산을 무산시켰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에서 되살아난 친일파들은 다시 그 생존과 기득권유지를 위해서 이번에는 거의 대부분 친미파로 변신한다. 한국의 보수 기득권 세력들은 그 DNA 안에는 그 숙주인 강대국 외세에 의존해야 하는 사대주의적 성격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미국에 기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친일파 기득권 세력들은 친미파가 됨으로써 다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친일 세력들은 오늘날 미국의 지배권 안에 있는 한국에서 그들의 특권과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친미적으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을 미국대학들에 유학 보내서 친미적 사고와 행태를 답습하고 내면화하도록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일제 때 출세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제국대학들에서 유학했다면 오늘날에는 미국 대학들에서 유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은 일제 때 친일했던 집단들과 광복 이후에는 미국에 친미하는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해 친미파로 변신한 한국의 기득권 세력들은 그 친미의 정신적 자산을 미국선교사들이 전해준 매우 보수적이고 정통주의적 개신교에서 찾는다. 조선조에서 기득권자들이 친명 사대주의의 정신적 기초를 유교정통주의에서 찾은 것에 비교된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에서 기득권 세력을 구성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개신교 신자들이고, 그 중에서도 대부분은 보수적 교단들에 속하며 그들은 매우 친미적이다.

그들 친미적 그리스도인들은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을 장악하고 있는 공산주의 정권의 실체를 무신론과 전체주의 정권으로 파악하고 그들을 악마시하고 가장 적대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친미적 이승만 정권의 확실한 지원자들이었고 오늘날까지 한국의 친미 보수정권들, 그 중에서 독재정권들 마저도 무조건 지원했었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적이고 친미적 개신교인들은 한국의 보수정당의 든든한 지원자들이며 개혁을 내세우거나 진보를 추구하는 정당들을 멀리하고 때로는 친북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그 바탕으로 한 북한을 가장 적대시하고 따라서 북한과의 화해나 평화적 공존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따라서 한국의 친미적 보수적 개신교인들이야 말로 앞으로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가장 장애가 될 수 있는 집단이다.

글을 마치면서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오늘날까지도 진정한 의미의 광복(해방)을 맞이하고 완전한 주권국가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없다.

형식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한반도는 70년 전 미국과 소련이 분리해서 점령한 분단 상태에 있고 남한에는 아직도 점령군이었던 미군이 주두하고 있어 완전한 주권국가라고 할 수 없다. 미군들은 전시작전권을 갖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따라서 남한의 통치자들이나 통치자가 되려는 이들은 미국의 눈치를 보거나 안보를 매개로 하여 중대한 정치적 군사적 사안들은 미국과 의논하거나 지시를 받아서 결정한다. 그 대표적 예가 매우 불평등하게 체결되어 실행되는 미주둔군협정(SOFA협정)인데 거기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미군의 군사활동을 통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소파협정 9조에 의거 미국은한국정부의 허가 없이 군사물자를 도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미국은 1959년에 한국정부의 허가 없이 전술핵무기를 들여왔었고 또 최근에는 오산비행장을 통해서 살아있는 생화학무기인 탄저균을 국내에 도입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친일적이고 친미적 사대적 사고를 가진 기득권 세력들이 대한민국의 각계각층을 장악하고 지배하고 있다. 친미적이면서 친일파에 관용했던 이승만의 자유당은 친일적 인사들로 구성되었던 한민당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고 이 정당의 후신인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은 독재와 부정부패로 인해 학생혁명에 직면하여 붕괴되었다. 그 후 들어선 민주당 정권을 붕괴시킨 전일본군 장교 오까모도 미노루(岡本實)로 알려진 박정희가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장악했었다. 그는 1965년 오늘날까지도 말썽 많은 일본과 한일협정을 체결하여 그의 친일적 속내를 드러냈다. 그의 장기독재는 1979년 박정희가 그 부하에 의해서 암살당하면서 무너졌지만 그의 부하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다시 총칼로 정권을 장악한다. 보안사령관 당시 전두환은 신상초교수와 일본인 교수와 술자리를 겸한 인터뷰 자리에서 일본군들이 만주에서 조선독립군을 토벌할 때 부르던 토비가(討匪歌)3절까지 일본말로 불러서 배석했던 일본 월간지 文藝春秋기자가 놀라기도 했었다.

이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뿌리를 둔 오늘의 집권당인 새누리 당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박근혜대통령을 비롯하여 김무성대표 등 다수의 인사들은 친일파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정계, 관계, 사법부와 같은 권력기관은 물론 재계 등 각계각층의 기득권 세력들 가운데는 과거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광복을 찾지도 못했고 주권국가도 아니다. 한국의 진정한 광복은 외국군대가 철수하고 분단된 한반도가 통일되어 외세에 의존하려는 친일파와 친미파 등 사대주의적 기득권 세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통일된 자주적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나라를 세울 때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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