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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0-25 09:38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에 대한 회고
글쓴이 : 손규태

   1974년 나는 대학원을 나와 안병무박사가 독일교회의 지원으로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해 9월 중순 어느 날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독일인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독일연방공화국 제1공영텔레비전방송(ARD)의 도쿄 특파원이라고 했다. 그는 진스 바지에다 T셔츠바람에 카메라장비를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우리 사무실에는 교회관계에서 일하는 독일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으나 방송기자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일하는 독일선교사 파울 슈나이의 소개로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파울 슈나이스목사는 도쿄에서 일하면서 당시 한국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인권 탄압에 항거하는 교회의 투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국을 자주 방문하여 한국교회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독일교회는 물론 세계교회에 알리고 이를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슈나이스 목사는 도쿄에 주재하는 외국 특히 독일 특파원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필요한 경우 그들을 한국으로 보내 실상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지원했었다.

당시 위르겐 힌츠페터가 한국을 찾은 것은 1974926일 명동성당에서 황성민주교가 집전했던 순교자 찬미기도회를 계기로 정의구현사제단의 역사적 출발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사제단은 첫 시국성명에서 유신체제 철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 등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했었다. 이 뜻 깊은 정치적 미사에는 약 40여명의 신부들과 300여명의 수녀들이 참가하여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참여가 본격화되었다. 물론 그 이전 개신교 측에서는 1974년 민청학년 사건을 계기로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목요기도회가 시작되어 정치적으로 박해받는 구속자들의 석방과 함께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개신교의 목요기도회와 가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전체 기독교의 정치참여 운동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힌츠페터와 필자는 926일 명동 근처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촬영 장비를 준비해서 저녁 8시경 명동성당으로 갔다. 당시 명동성당 아래에는 성모병원이 있었는데 그 입구부터 수십 명의 전투경찰대가 사람들의 출입을 가로막고 있었다. 성당에서는 미사가 끝난 것 같았고 신부들과 수녀들 그리고 다수의 신자들이 명동으로 나와 시위를 벌리려고 했다. 그들을 가로막고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경찰과 신도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조명장비가 고장 나서 촬영을 할 수 없어서 필자는 거의 100미터나 되는 낡은 조명장비의 기다란 전깃줄을 끌고 성모병원 안으로 들어가 전기 콘센트를 찾아 연결하여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콘센트를 연결하고 나는 힌츠페터에게로 와서 조명을 들고 촬영을 도우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병원 안에서 콘센트네 연결된 전깃줄을 빼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앙정보부요원이 촬영을 방해하려고 콘센트에서 전기를 빼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병원 안에 남아 힌츠페터가 촬영을 마칠 때까지 콘센트를 지켰고 거의 9시가 다 되어서 데모도 끝나고 촬영도 마칠 수 있었다. 몇 사람의 감시자들을 피해서 우리는 병원 뒤 담을 넘어 충무로 클 길로 나와서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날 나는 힌츠페터와 같이 종로 5가에 있는 한국교회협의회(NCC) 사무실을 찾아가 당시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대부역할을 했던 김관석목사를 만나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인터뷰 중에 끈질기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왜 남미 등 권위주의 정권들에 저항하는 집단들이 흔히 무력이나 폭력사용을 하거나 요인들을 암살하는데 왜 한국에서만은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느냐? 왜 이러한 끔찍한 정치적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국인들은 비폭력 저항만을 하느냐? 한국의 민족성 때문인가 아니면 어떤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이 한국의 비폭력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가?” 김관석목사의 대답의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폭력저항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된다.

우리는 종로 4가를 지나다가 힌츠페터가 진열대에서 찐만두를 보고는 독일 자기 고향의 음식 마울타쉬(Maultasche)를 닮았다고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고등학교학생들 틈에서 찐만두로 점심을 때웠다. 그는 맥주를 주문하려고 했으나 분식집에서는 팔지 않아 주인이 밖에서 사다주는 것을 한잔씩 마셨다. 독일인들이 그렇듯이 그는 독일의 제1TV 방송기자로 넉넉한 출장비를 받았으나 호화호텔에 묵거나 고급식당에 가지 않고 YMCA 호텔과 같은 2류 호텔에 머물면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었다.

그 후 나는 197511월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면서부터 힌츠페터와의 접촉은 끊어졌다. 그런데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고 18년간의 군사독재가 끝나자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한국의 민주화의 봄에 큰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사태는 그 반대로 가고 있었다.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군부통치를 계속하려 했다. 그래서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강렬해졌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80518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여졌고 다급해진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대들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5월 독일제1TV방송은 거의 30-40분에 걸쳐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잔혹한 시민들의 학살 장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영했다. 독일 제2TV에서도 계속해서 광주학살 장면이 방영되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인들뿐만 아니라 독일인들도 그 잔혹함에 크게 놀랐고 치를 떨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씩 반복되는 방송뉴스를 Video 테이프에 저장해서 앞으로 어젠가는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즉시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일하고 있던 박상증목사에게 연락해서 그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서 한국의 사정을 전 세계와 교회들에게 알리자고 했다. 그는 그 테이프를 가지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복사해서 유럽 여러 나라 교회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의 교회들에 보내서 한국의 처참한 실상을 알리는 일을 했었다.

얼마 지나서 잡지를 사려고 동네 적은 서점에 나가니 Bunt라는 여성잡지 표지에 광주사건에 대한 사진뉴스가 실려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약 15면에 걸쳐서 광주에서 벌어진 처참한 잔혹상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었다. 이 잡지는 영화배우나 상류층의 사람들의 생활을 다루는 오락잡지였는데 놀랍게도 광주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와 군인들의 잔혹한 살상 장면들의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서점에 있는 약 20여권의 잡지를 다 사다 집에 보관하고 우리 집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8년에 한국에 돌아와서 어느 날 명동성당 앞을 지나는데 광주사건에 대한 사진전시회가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앞서 말한 Bunte잡지에 실렸던 것들이었고 힌츠페터가 목숨 걸고 촬영했던 것들이었다.

힌츠페터의 노력으로 광주사건의 진상이 전 세계에 알려졌었고 최근에는 택시운전수라는 영화가 만들어져서 한국인들도 그 실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바라기는 이 끔찍한 민족적 비극의 실상이 모두 제대로 알려져 역사의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광주에 잠든 힌츠페터의 명복을 빈다.

손규태(성공회대학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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