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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3 17:06
기독교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원리
글쓴이 : 손규태
한국교회현실(2004년 8월 15일) 신학평론
 
                                               
한국 교회에는 개선해야 할 수많은 모순들이 있다.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상업자본주의 원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 예는 큰 교회, 돈 많은 교회의 성직자들이 교회목회를 상업적 경영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교회의 프로그램들을 설계하고 실천한다. 이러한 상업적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방송시간을 사서 설교하는 일이다. 초기에는 라디오로 시작되었지만 TV매체가 등장하자 그것을 이용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전통은 자본주의적으로 구성된 미국사회에서 들어온 현상이다. 미국에서도 큰 교회들은 모든 종교활동을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조직하고 실천하고 있다. 로버트 슐러나 빌리 그래햄 같은 설교자들은 이러한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현대의 정보매체들을 잘 이용해서 성공한 성직자들이다.
이렇게 정보매체를 통해서 세속화된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하는 일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속화된 인간들에게 세속적 매체를 통해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인들의 세속화나 또 현대의 세속적 정보매체들은 그 속성상 어떤 가치중립적이거나 물질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라는 물신숭배체제의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힘)에 예속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들을 이용하는 종교인들의 자기의식 속에도 자본주의적 원리, 즉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한다든지, 타자를 경쟁자로 극복해야 할 대상자로 보아야 하는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지난 날 교인들의 신앙과 심령의 각성을 목적으로 했던 부흥회는 교인의 숫자의 양적 확대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의 친교(성도의 교제)를 위한 구역조직은 구역장을 통해 교인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전에 구역조직을 통한 교인훈련 프로그램은 기업체기 운영하는 다단계 판매의 점 조직처럼 이용되고 있다. 이 조직들을 통한 새 신자 훈련 프로그램은 다단계 판매조직 신입회원 교육 프로그램을 방불하게 한다.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자에게는 적절한 교회의 지위와 함께 신앙적 물질적 이윤이 배분된다. 또 오늘날 대형교회의 성직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당)회장은 대기업의 회장과 같고, 그 밑의 목사들은 그 밑에서 사장의 기능을 하며, 전도사들과 구역장들은 지사장이나 지점장들의 역할을 한다. 또 대기업이나 거대 은행들이 지점이나 지사를 내듯이 대 교회들도 지교회 혹은 지성전들을 통해서 그 세력을 확장해 간다. 이들 지교회와 그 담당 목사(사장 혹은 지사장)들은 자율권을 갖지 못하고 최고 관리자 (당)회장의 전권 하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대교회들의 조직과 활동들을 움직여 나가는 힘은 무엇보다도 돈(맘몬)에 근거하고 있다. 돈이 없으면 교회라는 거대조직을 움직여 나갈 수 없다. 그들은 돈의 위력의 정당성을 매우 세련된 신학적 논리를 가지고 입증한다. 어떤 한 목사는 2004년 6월 CBS TV에 나와서 하나님의 속성 중 全能性을 가지고 설교했다. 전통적 神論에 보면 하나님이야말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전능자다. 그 목사에 의하면 철학자가 말하듯이 “아는 것(지식)이 힘이 아니고, 율리우스 시저 말대로 군대가 강한 것도 아니고, 또 처칠이 말하듯이 대통령이 강자가 아니며 오직 돈만이 강하다. 지식도 새 지식이 나오면 사라지고, 장군이나 대통령도 늙고 병들면 사라지지만 영원한 것은 돈이다. 로마의 장군 시저도,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사라졌지만 과 그 능력이 사라진 적은 없다. 그리고 요즘과 같은 자본주의에서는 돈만 있으면 모든 물질적인 것을 소유할 수 있고 심지어 명예도 권력도 살 수 있다. 따라서 돈이 있어야 나라도 운영하고 기업도 경영하고 가난한 자들도 돕고 교회도 짖고 선교도 할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돈만큼 강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전능하듯이 돈도 전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돈, 맘몬이 곧 하나님인 것이다.
이 목사는 확신에 차서 돈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그가 봉사하는 교회의 교인들도 모두 부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바란다고 선언한다. 이 목사는 어찌 보면 정직한 사람같이 보인다. 가난한 지역의 교인들이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자가 됨으로써 그를 친히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싶어했다.
그 점 필자도 잘 이해가 간다. 김영삼 대통령(장로) 시절 성탄절 다음날 노동법이 개악되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IMF 이후 김대중 대통령 시절 비정규직 등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길바닥에서 신용카드를 나누어주어 소비진작을 시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 400만 명 이상 신용불량자가 생겨서 내수시장이 침체를 면치 못한다. 이들 “강제로” 가난하게 만들어진 사람들(die gemachte Armut), 청년 실업자들은 자신들의 “무력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통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돈의 힘에 대해서 감사할까.
별 볼일 없는 놈도 부자 아버지 만나서 대기업의 상속자가 되면 그는 전능한 자요 서울대학을 우수하게 나온 직원들은 그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된다. 머리가 좋아서 서울대학을 나왔어도 돈 없으면 쌍놈이고 머리가 나빠 시시한 대학 나왔어도 돈 있으면 양반이다. 피(신분)가 양반 만들지 않고 돈이 양반도 만든다. 푼돈을 받은 거물 정치인들은 철창신세를 지지만 수백 억의 부정한 정치자금을 준 기업인들을 검찰은 심문은커녕 소환조차 못한다. 부자는 스포츠의 “스”자도 몰라도 돈으로 세계 올림픽 위원도 되고 정치의 “政”자도 모르지만 국회의원 빼지를 달고 여의도를 활보한다.
예수는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돈(맘몬)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안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세웠다는(?) 교회에서도 이 돈처럼 위력을 발휘하는 곳도 적다. 중세기 피렌체의 돈 많은  메디치 가문이 한 때 교황직을 독점했고 얼마 전 바티칸에서는 한 추기경의 재정부정을 안 교황이 암살 당하기도 했다. 카톨릭에서만 그런가?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장로를 만드는 것은 대개 신앙이 아니라 돈이다. 아무리 신앙이 돈독하고 오래 믿었어도 돈 낼만한 능력이 없으면 장로가 못된다. 강남의 한 기장교회에서는 장로가 되려면 무조건 1억씩 바쳐야 한다. 따라서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정신이 아니라 돈, 그가 그렇게도 배척했던 돈이다.
예수는 마태복음에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제자)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6:24)고 선언함으로써 이 재물(맘몬)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미 유대교에서 사제들 가운데 돈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가를 보았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서 예수를 비웃었다”(누가 16:14) 이러한 예수의 선언은 예수 당대나 그후 교회의 역사에서 돈을 사랑하는 성직자들에게는 비웃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역사적으로 항상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고자 했다. 아니 하나님보다는 맘몬을 더 섬기려 한 것이 교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은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단도직입적 선언에 당황하고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이어서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농사도 짓지 않는 공주의 새들,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 백합화들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힌단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구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먹고 마시는 일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먹과 마시는 것을 가지고 일생 걱정하는 것은 이방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매진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맘몬에 얽매이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태복음의 선언이 정말 그것이 가능한가?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내용을 이른바 “불의한 청지기” 비유(누가 16:1-13)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누가에 보면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청지기가 해고당하게 되자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채무를 삭(탕)감해 주어 그들을 친구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불확실해진 미래를 준비한다. 그는 자신에게 영리한 (주인에게는 불의한) 행동을 한다. 과거 많은 성서 해석자들이 이 비유를 도덕적 테두리에서 해석하려 했다. 그래서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는 이 비유를 “비유들 가운데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das grauenvollste der Gleichnisse)이라 보았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나 지금이나 사회 통념상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짓이다. 왜냐하면 청지기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그를 고용해준 주인을 기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하나님과 재물의 문제에서 이 비유를 든 것은 “시대적 轉換期”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현실과 관련된다. 청지기의 기만에 대해 주인이 칭찬해 준 것은 그가 이 세상에 도래할 새로운 질서와 그 질서의 내용도 그는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주인은 기만 행위 자체를 칭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의 도래에서 세상의 아들들(세리 등 죄인들)이 빛의 아들들(유대인들)보다 더 영리하게 행동한 것을 칭찬했다. 그 시대적 전환이란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며, 그 뒤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때”이다. 이것을 모르는 유대인들(바리새인들)은 이 시대의 전환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전통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이 청지기 비유와 거기에 나타난 재산사용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도덕적 준거들이 문제가 아니라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질서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전환, 하나님의 세계통치라는 기독교적 세계화의 꿈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마태 28:19)는 예수의 명령으로 약속된다. 그러나 이 꿈은 500여 년 전(1492) “온 세상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경배하게 하겠다”는 어거스팅의 기도와 함께 강한 선교의 의지를 가지고 인도를 향해 출발한 성실한 카톨릭 신앙인 콜롬부스에게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카톨릭의 세계주의에 뿌리를 둔 콜롬부스의 기독교적 세계화의 배후에는 유럽 문명의 팽창주의 아니 유럽의 자본주의의 뿌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적 문명의 보편화와 서구 자본주의의 결탁은 수 백년에 걸쳐 유럽문명의 팽창과정에서 초기에는 제3세계에 대한 식민주의로 그 다음으로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와 문명을 파괴하고 인간들을 살상하고 노예화했다. 이러한 제국주의는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베리아식 남미의 식민지화)로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영미식 식민지를 거쳐서 확장되어 왔다. 이러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확장의 물결을 따라서 기독교도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지역에 따라서는 기독교 선교(사)는 이러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주용한 동반자 구실을 했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에서는 19세기를 “기독교 선교의 위대한 세기”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는 제3세계인들에게는 “굴욕의 세기”요 “日蝕의 역사”였다.
1990년 구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해체됨으로써 동서냉전체제가 끝장나자 미국의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은 미국을 정점으로 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완성되었다고 선언한다. 첫째 레이건 대통령이 말하는 세계화의 완성이란 자본주의 문명이 지향하는 인간의 자유 아니 시장(맘몬)의 자유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들은 아직도 민족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자본과 시장(맘몬의 두 손들)은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서 무한한 자유를 구가한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어디서나 제한 없이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도 미국의 수많은 체인들이 들어와 장사를 한다. 그 반대로 우리 나라 기업도 미국에 가서 장사를 할 수 있다. 또 미국의 엄청난 자금이 우리 나라 기업에 투자되어 그 이윤을 챙겨나간다. 우리 나라 자본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거대기업과 거대자본과 경쟁할 수 있는가? 따라서 시장과 자본의 자유는 단지 강한 자의 자유요 약한 자에게는 경쟁할 수 없는 제약으로 다가온다.
둘째 레이건 대통령이 말한 세계화의 배후에는 콜롬부스에 의해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결합시킨 기독교적 세계화의 왜곡이 도사리고 있다. 미국에서 이러한 식민주의와 선교의 결합은 이미 19세기 중엽 미국의 인디안들을 개종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되었고 미국의 식민지 확대와 더불어 세계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은 동서 냉전체제의 시기에는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기독교는 가장 앞장  서서 공산주의를 신학적(철학적)으로 기독교 유신론에 대항하는 유물론으로 비판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로 공격했다. 따라서 미국의 기독교 특히 근본주의 기독교는 공산주의의 붕괴를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난 기독교 세계화의 완성으로 보려했다. 그래서 기독교의 적 공산주의가 붕괴되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자기들의 주장이 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맘몬의 결합으로 낳은 오늘날의 세계화가 정말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었는가?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변신은 오늘날의 자본(맘몬)은 우리 나라에서도 그 동안 절반의 노동자를 싸구려로 부려먹다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었다. 이런 비정규직 노동제도와 근로자 파견제는 1996년 김영삼(대통령=장로)가 대기업의 등살에 떠밀려서 만들었다. IMF 금융대란 아래서 더욱 가난에 처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파견제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처참하게 만든 것은 김대중정권 시절 강력하게 도입된 금융자본의 빨판 구실을 하는 신용카드 남발이었다. 이 신용카드라는 빨판에 걸려든 400만 이상의 신용불량자들을 삶의 한계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세계화의 결과 아니 맘몬과 기독교의 결탁의 결과이다. 이 맘몬은 성서에 나오는 人身祭祀를 강요하는 몰록신과 같아서 오늘도 매일 한국에서는 경제난으로 120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이 자살로 고된 삶을 마치게 한다. 전세계적으로 맘몬의 제물이 되는 인간들이 매일 얼마나 될까?
1991년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오늘날 기독교와 자본의의의 결탁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 이 신의 顯現은 미국의 다우존스 주가지수며, 그의 靈聖體는 미국의 달라며, 그의 예배는 환율조정이며, 그의 왕국은 크레물린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문명이다”(Spiegel, 1991, 12,31, 97면).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첫째 자본의 신 맘몬, 人身祭祀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경제질서라는 살인의 몰록신으로부터 기독교를 해방하는 일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같이 섬길 수 없다.” 이 금융자본주의라는 맘몬의 신, 인간을 살해하는 몰록의 신이 시계경제질서라는 자신들의 먹이사슬 체제를 만들어 매년 수천만의 굶주리는 인간을 만들고 죽이고 있다. 기독교가 이 맘몬의 우상숭배를 계속하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둘째 기독교는 야훼 하나님을 전쟁의 신에서 사랑의 신으로 선포해야 한다. 중세기부터 서구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거의 기독교가 그 원인이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전쟁과 약탈의 신으로 만든 것이 서구 기독교의 왜곡이다. 8세기 칼 대제의 선교전쟁, 이슬람무역상들과 베니스 상인들의 갈등을 등에 업은 11세기의 십자군전쟁, 국가들의 식민지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1.2차 세계대전 등 거의 모든 전쟁들은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는 평화질서가 아니라 약탈의 질서며, 9.11테러사건도 미국자본의 아랍권 (석유)약탈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이번 이라크 전쟁은 기독교세계와 아랍세계를 분열시켜서 평화가 아니라 반목을 가져오게 한다.
셋째 우리 나라는 특정 국가들과는 달리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종교다원 사회이다. 한국 땅에서 카톨릭은 200년, 개신교는 100년 남짓의 역사를 가진 어린 종교다. 우리 나라의 전통 종교들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나름대로 역사와 문화발전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도덕적 함양에 기여해 왔다. 이런 전통 종교들에 대해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전통종교들에 대해서 매우 자만하고 전투적이며 적대적 자세를 취해 온 것이 사실이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카톨릭은 문화상대주의 정책을 통해서 타종교에 대해서 비교적 온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개신교들 그 중에서도 근본주의적이고 극우적 교파들은 전투적이며 제국주의적 선교론으로 무장하여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나가서 추태를 보이고 있다.
넷째 한국 개신교들은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들어와서도 경직된 반공주의와 전투적 선교이론을 가지고 북한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독교의 복음을 통한 남북분단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고 거기에 기독교를 이식하자는 19세기적 제국주의 선교이론을 주창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호전적이고 제국주의적 세계지배를 지원하고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십자군으로 보내자고 충동한다. 김선일사건에서 보듯이 사업체로 위장한 선교단체를 그곳에 보내고 그 직원으로 위장한 직원들이 침략군인 미군들에게 전쟁물자를 공급하여 얻은 돈을 선교활동비에 쓰고 있다.
이러한 개신교의 모든 행태들은 그 깊은 곳을 보면 하나님과 맘몬, 아니 하나님보다 맘몬을 섬기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 잘못된 물신숭배의의 승리주의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는 야훼냐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하는 기로에 서있다. 여기서 결단하지 않으면 맘몬의 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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