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미가 6:6-8, 요한일서 4:7-12, 요한복음 13:34-35
설교문
오늘은 우리 교회의 창립을 기념하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교회의 생일입니다. 사람도 생일이 되면 지나온 시간을 돌아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를 헤아리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립기념주일은 단순히 우리 교회가 몇 년 되었는지를 세어보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였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해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아주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하나님께 벌을 받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천사 미하일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찾아야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천사는 오랜 시간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침내 그 답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염려하는 힘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서로의 사랑으로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홀로 살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만드셨다." 천사가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요한일서의 여러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한일서 4:7-12)
톨스토이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문학적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질문이었습니다. "인간을 정말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교회 창립을 기념하는 주일에 저는 그 질문을 조금 바꾸어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교회를 정말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톨스토이는 평생 이 질문과 씨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어느 시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를 아주 깊이 공부했습니다. 『교리신학 연구』라는 책까지 썼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에 관하여 참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고,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설명하고, 구원을 설명하고, 성례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자꾸만 이 한 가지 질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사람을 어떻게 살게 하는가?" 이 질문은 19세기 러시아 정교회를 넘어 오늘의 한국교회 앞에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살게 만들었습니까?"
생각해 보면 한국교회는 참 열심히 믿었습니다. 우리는 세계 어느 교회 못지않게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헌금을 드렸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주여, 주여" 부르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톨스토이가 오늘 우리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아마 이런 불편한 질문들을 던질지 모릅니다. "그 많은 기도가 여러분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성경을 그렇게 오래 읽었는데 다른 사람의 아픔에 더 민감해졌습니까? 십자가를 그렇게 오래 바라보았는데 여러분은 조금 더 내려놓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수없이 고백했는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도 바로 이것을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미가 6:6-7) 점점 커집니다. 더 많이 드리겠습니다. 더 비싼 것을 드리겠습니다. 더 거창하게 예배하겠습니다. 그때 미가 선지자가 말합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미 너희에게 알려주셨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예배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사가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는 예배와 삶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도 정의롭지 않을 수 있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사람을 미워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눈앞의 사람을 외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가의 질문과 톨스토이의 질문이 여기에서 하나로 만납니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삶을 실제로 바꿨습니까?"
톨스토이에게 「두 노인」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노인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에핌(Efim)이었습니다. 에핌은 제법 부유한 농부였습니다.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욕설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의 책임자도 두 번이나 맡았는데 회계를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한마디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엘리샤(Elisha)였습니다. 엘리샤는 그렇게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키도 작고, 대머리에, 명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술도 마시고 코담배도 즐겼지만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죽기 전에 함께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에핌은 늘 바빴습니다. 집을 지어야 했고, 자녀의 일을 챙겨야 했고, 손자의 결혼도 있었습니다. "이것만 끝나면 가세." 그런데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결국 어느 날 엘리샤가 말합니다. "여보게, 우리는 할 일을 다 끝내놓고 떠날 수는 없어. 우리가 죽어도 세상은 돌아가네. 그냥 떠나세."
마침내 두 사람은 길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예루살렘!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예수께서 걸으셨던 땅을 밟는 것입니다. 골고다에 가고, 성묘교회(聖墓敎會, 예수님의 무덤이 있던 자리로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교회)에 가고, 촛불을 밝히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두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엘리샤가 목이 말랐습니다. 멀리 작은 집 한 채가 보였습니다. "자네 먼저 가게. 나는 저 집에 가서 물 한 모금 얻어먹고 따라가겠네." 에핌은 먼저 길을 갔습니다. 엘리샤는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 보니 이상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배고파 울 힘조차 없었습니다. 물 한 잔만 마시고 가려던 엘리샤는 차마 그대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방을 열어서 가지고 있던 빵을 꺼냈습니다. 먹였습니다. "이제 가야지." 그런데 보니 이 사람들은 오늘만 굶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마을로 가서 음식을 사 왔습니다. 아이들을 먹였습니다. "이제 정말 가야지. 친구 에핌이 얼마나 기다리겠어." 그런데 또 보니 이 집에는 농사를 지을 말 한 마리도 없습니다. 엘리사는 생각합니다. "내가 오늘 떠나면 이 사람들은 며칠 뒤에 다시 굶겠구나." 그래서 말을 삽니다. 수레도 마련합니다. 밀가루도 사다 놓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돈주머니를 열어보았습니다. 아뿔싸! 순례비가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나무 아래 앉아 혼자 생각합니다. "이 돈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도 없겠구나. 친구 에핌이 예루살렘에서 내 몫까지 촛불 하나 밝혀주겠지. 나는 이번 생에는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겠구나." 그리고 그는 쓸쓸히 집으로 돌아갑니다. 엘리샤는 성지순례에 실패했습니다.
그 사이 에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끝까지 갔습니다. 바다를 건너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성지를 찾아다닙니다. 성묘교회에도 갑니다. 촛불을 밝히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성지 곳곳에서 에핌의 눈에 낯익은 머리가 하나 보입니다. 대머리였습니다. "어?" 엘리샤였습니다. 분명히 자기보다 뒤처졌던 친구가 자기보다 먼저 가장 거룩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깜짝 놀라 사람들을 헤치고 찾아가 보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또 성지에 갑니다. 그런데 또 거기에 엘리샤가 보입니다. 이번에는 가장 앞에 서 있습니다. 에핌은 생각합니다. "아니, 저 친구가 언제 나보다 먼저 왔지?"
순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에핌은 마침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에핌은 돌아오는 길에 엘리샤가 머물렀던 바로 그 집을 지나게 됩니다. 그 집 사람들이 엘리사의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노인이 우리를 살려주었습니다. 우리는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분이 먹을 것을 주고, 농사지을 것을 마련해 주고, 우리 가족을 다시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제야 에핌은 깨달았습니다. "나는 예루살렘까지 갔다 왔지만, 엘리사는 그 집에서 하나님을 만났구나."
교우 여러분, 이 이야기를 읽으면 살짝 웃음이 나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아파집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안에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지는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아니면 굶어 죽어가는 가족이 있는 이름 없는 집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묘교회에서 촛불을 밝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배고픈 아이에게 빵을 건네는 것입니까? 물론 톨스토이는 성지순례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면서 사람을 지나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쓰러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을 지나쳐서라도 하나님께 가야 하는가?" 성서는 이미 그 질문에 답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누가복음 10:37)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이화대학교회의 창립9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는 이 「두 노인」의 질문을 우리 교회에 돌려놓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우리는 많은 일을 합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예산을 세우고, 회의를 하고, 건물을 관리하고, 역사를 기록합니다.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톨스토이가 우리 가운데 앉아 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교회 때문에 누가 살았습니까? 이 교회가 있어서 외로운 사람이 덜 외로웠습니까? 이 교회가 있어서 절망한 청년이 다시 희망을 얻었습니까? 병든 사람이 혼자가 아니었습니까? 낯선 외국인이 친구를 얻었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존엄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한 아이라도 더 따뜻한 세상을 경험했습니까? 이 교회가 있어서 이 세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더 정의롭고 평화롭고 따뜻해졌습니까?" 교우 여러분,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더 무서운 위기는 그 교회가 사라져도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학기에 제가 지도한 이화여자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이정민 학생이 톨스토이를 연구하여 석사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논문의 제목이 참 좋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문학에 나타난 기독교 사상 연구 : 사랑으로서의 구원, 구원으로서의 사랑」. 이 논문이 주목하는 것은 톨스토이에게 사랑이 단순히 착하게 살기 위한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랑은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서의 구원'이라는 말은 구원이 사랑과 별개의 어떤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던 이기적인 인간이 타자에게 열리고,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되는 사건이 곧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으로서의 사랑'이라는 말은 그렇게 변화되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미 구원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구원받으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다음 질문도 해야겠습니다. "구원받은 당신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예수를 10년, 20년, 30년, 50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조금 더 용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조금 덜 욕심내고, 조금 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이 정말 우리 안에 일어났다면 그 구원이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었느냐는 질문입니다. 요한일서는 아주 무섭게 말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요한일서 4:8a)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조금 덜'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예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8b)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사람은 사랑으로 삽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으로 삽니까? 교회는 사랑으로 삽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그렇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이 제자의 표지(sign)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표지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합시다." 너무 많이 들은 말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옳아서, 이제는 아무도 놀라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면 좋고, 사랑하지 못해도 나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의 문제이고 사랑은 그다음의 문제라고, 그래서 구원은 반드시 받아야 하지만 사랑은 형편이 되면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오늘 요한일서의 말씀은 너무 과격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가능하면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구원이고, 구원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사랑은 구원받은 사람이 여유가 있으면 덧붙이는 덕목의 하나가 아닙니다. 사랑은 구원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사랑이 구원이고, 구원이 사랑입니다. 그 둘이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구원'을 너무 쉽게 구원이라고 불러온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 창립 91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사람은 사랑으로 삽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으로 삽니까? 교회도 사랑으로 삽니다. 사랑은 우리가 해야 하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사랑은 구원이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학교회의 교우 여러분은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이전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칭송받는 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