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한신대 교수(한신대 신학대학원장, 조직신학)이 『신학사상』 2023년 봄호에 급격하게 진화하는 인공지능 문명과 그 파장 속에서 종교의 핵심 과제를 성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연구논문을 게재했습니다. 관련 소식입니다.
루터의 이 입장은 중세교회의 회개의 성례전을 상대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당시 사회는 크리스텐돔이었고 신자들은 교회의 권위와 전통 이외의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교회의 신자들에게 교회의 성레전들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죄책감으로 인한 불안은 성례전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했는데, 루터의 95개조 정신은 이것을 와해시키고 있다. 루터는 더 나아가 교황의 권위와 권한도 재고한다. 당시 교회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을 교황에게 적용하여,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였다. 이에 성경에 없는 개념인 연옥이나 면죄부도 교황의 승인 아래 공식적인 것이 되었다. 루터는 이런 상황에서 교황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 용서하심을 교황은 "선언하고 증명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기 바로 전 달인 9월 4일에 "스콜라 신학을 반대하는 변론"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스콜라 철학에 반대함을 명백하게 밝힌다. 루터는 스콜라 철학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반대하였는가? 김균진은 루터가 "스콜라 신학의 구원론을 거부한다"고 밝힌다. 중세 말기 스콜라 철학에 영향을 준 사상으로 반(半)펠라기우스주의가 있다.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였지만, 그럼에도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와 자유의 능력"이 남아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먼저 사랑할 수 있고...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협동할 수 있고, 구원의 은혜를 상으로 받을 수 있다." 즉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동'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주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때로 이의 없이 동의된다. 그런데 분명히 루터 이전에도 존 위클리프나 얀 후스와 같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있었고, 이들도 교황의 우상화를 비판하였고 성경을 번역하여 읽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인물로 우리는 루터를 꼽는다. 폴 틸리히는 루터에 대하여 "로마 체제를 뚫고 나가는데 성공한 인물"이고,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돌파를 감행했던 것은 오직 한 사람 루터"였다고 말했다.
혹 기독교인들이 '왜 신을 제한하고 인간에만 집중하는가, 그러면 진정한 인간 탐구가 불가하다'라고 발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한 충분한 숙고가 없는 사람이 왜곡된 종교적 신념에 도취되어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저지르는 일들을 종종 목격한다. 왜곡된 신과의 관계에 도취되어 신앙은 있으나 도덕이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런 부족한 글에 이름을 올리기조차 미안한 어린 영혼들, 정인이와 시우를 죽음에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계모와 부친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소위 가나안성도나 플로우팅성도가 아닌, 교회 내에서 열심을 보이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얼치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하여 숙고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아편이라는 비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폴 틸리히는 20세기 실존주의 대표적 철학자로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를 꼽았다.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는 이른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다. 이때 이들의 무신론은 신의 존재유무가 전혀 아니다. 이들은 단지 실존에 고도로 집중을 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실존에 집중하기 위하여 신을 제쳐놓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실존에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실존에 집중하고자 했을 때 왜 신을 제쳐놓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희망과 인간의 선이 합쳐졌더라면 역사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희망과 인간의 죄가 합쳐져 역사는 굴곡지다. 때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계신데 왜 역사가 이렇게까지 힘겨워야 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성서가 전하는 하나님을 살펴보면, 창조하신 에덴동산을 아낌없이 첫 사람에게 주셨지만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통제하진 않으셨다. 선악과 사건 이후 이치에 따라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나가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보호하시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얼마 후 그들의 자손들이 싸워 형이 아우를 쳤는데, 그 아우가 하나님의 전능으로 살아나는 기적은 없었다. 하나님은 살인한 형이 극도로 불안해하자 그를 지키시려는 요량으로 '표'를 주셨다. 세월이 더 흘러 세대가 타락하자 하나님은 후회를 하시며 40일간의 홍수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다시는 이
칸트가 말하는 인간도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다. 칸트의 순수한 실천이성에서 사람이 사람다운 존재가 되려면 사람은 정언명령에 따라 오직 법칙에 대한 존중심에서 행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의로운 행위는 개인의 행복이나 즐거움과는 별개의 문제이고, 정의로운 행위가 행복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착하게 산 사람의 인생의 인생이 반드시 행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은 우리도 실존에서 삶에서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행복은 어디서 보상을 받는가?
따지고 보면 근세의 휴머니즘은 중세의 교회중심사회 자체를 모태로 한다. 그런데 기존의 종교문화적 억압에 대한 반작용이 강했던 탓인지 근세의 휴머니즘은 신이 없는 휴머니즘이 되었다. 양명수 교수는 근세 휴머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바라보지 않음)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했다."
그리스도교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말이신 하나님이다. 로고스는 성자를 통해 육화되어, 사람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성자는 사람과 같이 계셨고, 성령은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와의 비연속성과 연속성을 동시에 본다.
기독교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익숙하고 친숙하다. 구약 선지자들이 신의 뜻을 전달하면 백성들은 들었고, 예수의 가르침에도 따르는 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개신교도 듣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예배는 사실상 설교 중심이고, 참석자들은 대부분의 예배 시간에서 '듣는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근거한 '말씀의 신학'을 펼쳤는데, 한국의 장로교나 감리교는 바르트가 그의 신학에서 전하는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은 중요하다. 성경에서 신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내신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였고, 복음서에서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타종교에서도 말은 중요하다. 고등종교들에는 경전이 확립되어 있고, 경전의 해석과 실천이 신앙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말이 곧 하나님'(요1:1)이라고 한다. 이 부분이 타종교와의 결정적 차이다.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양명수 교수가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진 지 이제 14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국교회는 그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공동체성이다. 물론 공동체성은 어떤 집단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토양은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에 비해 집단주의적인 성격이 보다 강하고, 여기에 한국인들의 종교적 열정까지 더해져,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은 다른 나라와 차별성을 갖게 되었다. 이 공동체성을 비판적으로 접근해보면 우리는 '교회주의'에 이른다.
기독교는 한 분 하나님을 믿음과 더불어 '삼위일체'를 말한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한다. 삼위일체는 신약 이후의 교회에서 나온 신관이다. 하나님을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는 특별한 뜻이 있다. 양명수 교수가 그의 논문 〈한국 기독교의 특징에 관한 신학적, 철학적 고찰〉에서 이 내용을 한국교회의 권위주의적인 현실과 엮어 다루었다. 살피면 아래와 같다.
이상적인 종교를 생각하라고 하면 흔히 '무소유'를 떠올린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만이라도 물질은 필요하기에, 교회가 소유로부터 아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19):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인간을 가리켜 우상 공장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우상의 마력은 인간 삶 전체에 걸쳐 뿌리 내려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상파괴가 말처럼 쉽지 않은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