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늘 새롭게"

2026년 10월 25일 종교개혁 주일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57:14-19, 히브리서 4:12-16, 마가복음 3:1-6 -

설교문

오는 10월 31일은 두 가지 역사를 함께 기억하게 하는 날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9주년이 되는 날이며, 이화의 보구녀관(普救女館)이 문을 연 지 139년이 되는 날입니다. 하나는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교회의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조선에서 시작된 여성 의료의 새로운 역사입니다. 시대도 장소도 다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두 역사 앞에서 하나의 질문을 듣습니다. "너희는 지금 무엇을 새롭게 하고 있느냐?"

종교개혁을 기념한다는 것은 루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되새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개신교인'(protestant)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보구녀관을 기념하는 일도 선교사들의 헌신과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열어간 한국 여성들의 용기를 기억하는 데서 멈출 수 없습니다. 그들이 당시의 편견과 관습을 넘어섰듯이, 오늘 우리도 지금의 편견과 관습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과거의 개혁을 존경하면서 오늘의 변화는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당시의 권위에 질문한 것을 칭송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구녀관이 여성의 치료와 배움의 길을 열었다고 자랑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길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원래 그렇게 해왔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개혁을 기념하는 우리가 개혁의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주님, 저 사람들을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우리를 새롭게 해주십시오"여야 합니다. 시편의 시인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0)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우리의 교회와 역사를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아픈 몸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는 회당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그의 고통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를 고치시는가에 쏠려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네 손이 낫게 될 것이다"라고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을 먼저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따지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 규정보다 먼저 고통받는 한 생명을 중심에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4)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결정 한가운데에는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지키려는 관습과 전통은 누구를 살리고 있습니까? 혹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느라, 정작 돌보아야 할 사람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질서와 규칙은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이어온 관습에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람을 위해 만든 질서가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질서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의 한가운데에 먼저 생명을 세우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에 사람들은 침묵했습니다. 그들은 아픈 사람을 고치지 말아야 한다고 선뜻 말할 수도 없었고, 고쳐야 한다고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논거가 한꺼번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셨습니다]."(마가복음 3:5). 개역개정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노하셨다고 전하는 장면은 두 곳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가로막는 제자들 앞에서, 그리고 바로 여기 아픈 사람의 치유를 가로막는 사람들의 완고함 앞에서 예수님은 노하셨습니다. 심지어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으며 상을 뒤엎으실 적에도 성서는 예수께서 노하셨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는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한 미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밀려난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그 사람들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돌아보면, 누군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지금까지 해온 말과 지켜온 체면 때문에 마음을 닫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씀 앞에서는 침묵으로 마음을 닫아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신약서신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나니."(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듣고 싶지 않다고 귀를 막는다고 해서 멈추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어떤 칼보다 예리하게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드십니다. 내 혼과 영,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시며, 깊이 감춘 속마음과 오래 굳어진 편견까지 다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내 생각을 확인받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승인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509년이 다가옵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라틴어로는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secundum verbum Dei"입니다. 우리말로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라는 이름에 안주하지 않고, 살아 있는 말씀에 따라 계속 '개혁 중인 교회'(reforming church)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은 또 하나의 다른 교단의 탄생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모든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원리이고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그 교회는 누구입니까? 항상 개혁해야 하는 교회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건물이 교회입니까? 어떤 교단의 직제와 전통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모인 우리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고린도전서 12:27)이라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는 우리가 "산 돌(living stone) 같이 [하나님의]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베드로전서 2: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에는 "내가 늘 말씀 앞에서 새로워져야 한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된 교회'의 교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갱신을 면제해 주는 자격증이 아닙니다. 루터의 95개조 논제도 바로 이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개혁은 처음부터 평생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인을 영어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에는 교회의 부당한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했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정신을 잇는다는 것은 남에게 반대하는 말을 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정신 때문에 나 자신도 바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붙든 복음의 중심에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인가? 나의 믿음과 선행은 충분한가?' 하는 불안 속에서 떨던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먼저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용납하시기에 그는 자신을 용납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믿음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고, 나의 헌신은 늘 모자란 것 같으며, 자꾸 반복하는 잘못 때문에 내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다 고친 다음에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지금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자격을 증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먼저 열어주신 문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은 무엇입니까? 개혁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그 문 앞에 우리가 다시 세워놓은 문턱을 허무는 일입니다.

루터의 시대와는 다른 시대였지만, 조선의 여성들도 높은 문턱 앞에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과 사회적 활동의 기회가 제한되었고, 남녀유별의 관습 때문에 몸이 아파도 진료받기가 어려웠습니다. '아픈 것이 죄인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보구녀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께서 아픈 사람을 회당 한가운데 세우셨듯이, 보구녀관은 관습 때문에 밀려나 있던 여성의 아픔을 돌봄의 한가운데 놓았습니다. 거기 온 사람들은 치료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신분과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귀한 생명이었기에 그들은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치료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이 배우고 의료와 간호 활동에 참여하며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활짝 여신 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에게 길을 여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종교개혁과 보구녀관을 함께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받아주신 사람을 인간의 기준으로 다시 문밖에 세워둘 수는 없습니다. 루터는 믿음으로 은혜 앞에 세워진 문턱을 낮추었고, 보구녀관은 믿음으로 여성의 치유와 배움을 가로막던 문턱을 허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신 그 은총의 문을 사람의 관습과 편견으로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화의 보구녀관 두 역사를 관통하는 믿음입니다. 이화의 대학교회는 바로 이 종교개혁의 신앙과 보구녀관의 역사를 함께 이어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두 역사를 함께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종교개혁을 기념한다는 것은 내가 오늘을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인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구녀관을 기념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의 편견과 구습을 넘어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혹 우리는 루터가 당시의 권위에 질문한 것을 칭송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에는 귀를 닫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일상은 누군가의 돌봄으로 유지되는데, 그 노동을 여성의 당연한 몫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효율을 강조하면서 노인과 장애인에게는 따라올 수 없으면 물러서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장과 편리함을 누리면서 그 비용을 가난한 이웃과 다음 세대, 그리고 신음하는 피조세계에 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주체로 살아가십시오. 개혁의 걸림돌이 아니라 그 걸림돌을 치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이사야 57:14) 하나님의 백성이 가는 길에서 걸림돌을 제거하여 상한 사람을 살리고, 고치며, 평화를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길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웁시다. 그리고 그 돌을 치우면서 혹 내가 바로 그 돌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판단이 누군가의 앞길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원래 그래"라는 내 말이 누군가의 질문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내가 속한 일터와 사회에서, 가정과 교회에서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일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어느 날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는 일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아니, 아무 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침묵은 부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도그마에서 그들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에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이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은 개혁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이유로 생명의 회복과 치유를 가로막던 해석과 관행을 깨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문 앞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턱을 허무시고 걸림돌을 치우셔서 우리가 그리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개혁은 생명을 향해 문을 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문턱을 낮추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오늘도 "살았고 활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항상 새롭게 하십니다.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늘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시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 앞에서 우리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로마서 12:2) 했습니다. 새롭게 하십시오. 변화를 받으십시오. 개혁을 기념하는 오늘, 여러분은 개혁이 되어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 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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