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하나님은 제 마음 아실까요?"

2026년 11월 1일 주일예배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49:14-16, 로마서 8:26-27, 마가복음 14:32-36 -

설교문

어릴 때 저는 어머니가 제 마음을 다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친구와 다투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속상한 일을 신기하게 다 알아채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자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고 방문을 쾅 닫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때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어머니는 내 마음을 모르셨을까. 아셨지만 어찌할 수 없어 함께 속을 끓이셨던 것은 아닐까.

시인 박목월의 「수요일의 밤하늘」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년이 세례받으러 가는 날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깨끗한 속옷을 갈아입혀 주십니다. 소년은 성경책을 끼고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머리를 곱게 빗은 어머니가 함께 갑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있습니다. 아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두 사람이 집으로 향합니다. 수요일의 짙푸른 밤하늘에 별자리가 가득합니다. 그 하늘 아래서 소년이 가슴 벅찬 목소리로 묻습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을 아실까요, 어머니." 어머니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며 소년의 손을 꼭 잡아 주십니다. 소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아시는지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 손의 온기가 아이에게는 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년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조금 다른 말로 같은 질문을 합니다. 가족을 위해 애썼는데 서운한 말이 돌아온 날, "하나님은 제 마음 아시지요?"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하나님, 제가 얼마나 두려운지 아시지요?" 잠든 자녀를 바라보다가, "제가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제 마음, 하나님은 아시지요?"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라고 부르기에는 짧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가장 자주 드리는 기도인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셨으면 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다고 웃었지만 혼자 돌아와서는 눈물이 나는 날,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 아실까요?"

그런데 이 질문이 아프게 변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아신다면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아신다면 왜 저를 그냥 이렇게 두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돌아봐 주시고, 내 삶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오래 답을 듣지 못하면 기도가 식어 갑니다. 처음에는 간절히 구하다가, 나중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았는데 한숨만 나옵니다.

교우 여러분, 성서에는 그런 마음이 펼쳐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시편 88편입니다. 오늘의 교독문입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펼쳐지는 기도자의 삶은 그 이름과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재난이 그의 영혼에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기력이 다했습니다.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마저 멀어졌습니다. 그는 밤에 부르짖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손을 듭니다. 아침에도 다시 기도합니다.

앞서 교독에서 우리는 시편 88편에서 몇 구절을 골라 읽고, 13절에서 마쳤습니다.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이 말씀에서 멈추면, 이제 무언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으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다는 찬송이 터져 나올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다섯 절이 더 있습니다. 14절부터 마지막 18절까지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여기서 끝납니다. 아침이 왔지만, 시인의 삶에 빛이 들어왔다는 말은 없습니다. 응답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감사로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마지막 단어도 '흑암', 곧 어둠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기도에 그가 하지 않은 말을 덧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모든 것이 잘되었다." 그렇게 끝내고 싶어도, 이 시편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성서는 이 기도를 그냥 남겨 놓았을까요?

우리는 기도하여 응답받은 이야기를 들으면 기쁩니다. 병이 낫고, 길이 열리고,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그렇지 않는 자기 삶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렇게 기도했는데 왜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나는 무엇이 부족했을까. 혹시 이런 마음이 드셨습니까? 그러고 나서 자신을 탓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믿음이 모자랐나, 간절함이 부족했나,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으시나.

구약성서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시편적 인간』이라는 책에서 이 시편 88편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이 시편에 관한 손쉬운 설명을 경계합니다. 이 시편에는 인간의 죄나 연약함 때문에 기도가 응답받지 않았다는 단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했으나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브루그만은 그 불편한 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삶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성서에 남겼습니다.

성서는 응답받지 못한 사람의 기도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 안에서 내 목소리를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아, 나와 같은 사람이 여기도 있구나. 나보다 먼저 같은 밤을 지나간 사람이 있었구나. 그 사람도 물었고, 울었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았구나. 그런데 성서는 그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기억하는구나.

그런데 브루그만은 이 어두운 기도에서 뜻밖의 믿음을 발견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얼굴을 감추십니까?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그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저를 이렇게 두셔도 되는 것입니까? 사실 조금 두려운 기도입니다. 이렇게 따져도 되는지 두렵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믿고 의지해 온 하나님께 그 관계의 책임을 묻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면 믿음이 식은 줄 압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서운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그 관계를 잃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라는 질문에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계셔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시인의 호소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그 어둠을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그 어둠이 삶의 전부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억울함으로 모든 것이 끝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 왜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까?" 이 탄식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멀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그 마음에도, 하나님께 닿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은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그 친밀한 이름을 부르시며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잔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기도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앞세워 그 앞의 간절한 호소를 지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은 피하고 싶은 고통까지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괴로운 마음을 다 가라앉힌 뒤에야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에는 그 말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은 무거운데 기도의 언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기도는 오직 내 말과 내 힘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 기도의 문장이 끊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위한 간구가 계속됩니다. 내가 말을 찾느라 애쓰는 동안 성령께서 나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 아실까요?" 말로 다 전하지 못한 그 마음까지 살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교우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그러니 더 많이, 더 끈질기게 기도하십시오"라는 권면으로 듣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오래 기도하다 지친 사람에게 또 하나의 짐을 얹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운함과 질문이 남아 있는 마음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시편 88편의 결말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서 본문을 읽는다고 해서 그 어둠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 기도를 남겨 둔 채, 다른 자리에서 또 하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에서 시온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시편의 사람과 닮았습니다. 우리와도 닮았습니다. 그 말에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어미가 어찌 젖먹이를 잊겠느냐고. 자기 몸에서 난 아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처음의 그 소년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 아실까요? 어머니는 소년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그 손의 온기를 생각하니 이사야의 말씀이 다시 들립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이 말씀은 물론 고난의 이유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곁에는 하나님의 약속도 함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손에 힘이 다 빠진 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꼭 잡아 주십니다. 그 소년의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어느 시인(림태주)이 「그토록 붉은 사랑」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자기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여기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 이사야가 왜 하나님의 마음을 말하기 위해 어머니를 불러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힘들게 농사지으며 자식을 키운 어느 어머니의 편지입니다.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거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웃고 다녀라.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너는 정성껏 살아라." 이 마지막 문장 앞에서 저는 오래 머물렀습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이 말만 따로 들었다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힘껏 살고 있는데 얼마나 더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러나 어머니는 먼저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으로 낳았고, 사랑으로 키웠고,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다고 합니다. 자식은 무엇을 이루기 전에 이미 사랑받았습니다. 어머니에게 사랑받기 위해 더 훌륭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그 사랑을 다 들려주고 나서 자식에게 한마디 남깁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었다고 그 모든 것이 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품고 살아온 자신을 조금 덜 탓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까지 가지고도 그분 앞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숨을 조금 돌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성서는 응답받지 못한 우리의 목소리를 위한 자리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도 남겨 두었습니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기도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남은 날들까지 모두 닫힌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 다시 창문을 열고 새 하루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일을 안고서도 밥을 먹고, 잠깐 햇볕을 쬐고, 내게 소중한 것에 정성을 기울여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 아실까요?" 오래전 한 소년의 질문은 오늘 우리의 질문이 되었습니다. 그 소년의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꼭 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따뜻한 온기에서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 너는 정성껏 살아라."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장신대, 이종성 통전적 신학 재조명

장로회신학대학교(총장 박경수)가 고(故) 이종성 박사의 '통전적 신학'을 오늘의 신학적 현실 속에서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관련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구미정 교수, 니체의 '초인'을 룻기의 '헤세드'에 잇대다

기독교윤리학자 구미정 교수(협성대 객원)가 《기독교사상》에 최근까지 연재해 온 '룻과 함께 아모르 파티'를 마무리했다. 얼마 전 발행한 8월호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아담"은 결국 "아다마"에서 왔다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운데 신학계에서도 인간과 자연, 창조와 구원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다시 묻는 작업이 이어지고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의 단일성 통해 현대 조직신학 재조명"

현대 조직신학의 핵심 흐름으로 자리해 온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재검토하며, '하나님의 단일성(divine oneness)'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재구성하려는 미국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성전론적 전쟁관에 치우쳐져 있는 한국 개신교인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에 대한 군사행동 등 바야흐로 전쟁의 시대다. 이러한 전쟁의 흐름이나 양상을 보고 향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 나라의 정치색은 좌도 우도 아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설교와 정치의 관계를 성찰하는 글을 공개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최 목사는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