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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목사 (한신대 명예교수)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인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라는 주제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주제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논의를 거쳐 온 주제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저는 이 주제에 대한 <저의 접근법>이 다른 여러 접근법들과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을 먼저 밝혀 두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첫째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강한 교설로 가르친 바, “영혼불멸” 교설을 전제하고 접근하는 제 접근법과는 저의 접근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이 희랍적 영혼불멸 교설은, 그것이 기독교의 부활신앙과는 정 반대되는 적 그리스도적인 이교 교설임에도 불구하고, 서구문화의 신앙 토대가 되었고 따라서 서구에서 활발하게 꽃피운 우리 기독교 신앙에도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최대의 절기인 부활절에 행하는 대부분의 부활주일 설교는 영혼불멸에 대한 플라톤적 이단강론이 부활절 메시지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혼불멸 신앙은 마치 기독교의 부활신앙과 일치되는 것인 것처럼 잘못 선포되고 있는 것이 오늘 지구촌 교회들의 실정이 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기독교의 장례예배의 설교에서는 거의 대부분 아예 부활신앙을 통한 구원의 희망을 전달하는 복음적 설교는 없어져버리고 그 대신 소크라테스적 영혼불멸 교설로서 고인의 유족을 위로하는 어불성설의 상황이 공공연히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학 없는 오늘의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한 구원의 복음은 사라지고 극단의 인본주의적 영혼불멸 교리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충격적인 질문이 가능할 정도로까지 기독교 교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교화 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 사도 바울처럼, 즉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한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 1:6,8)라고 갈파하였던 그런 신앙적 양심을 가지고 단호하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성서적 부활신앙을 “엄격한 성서연구”를 통하여 증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말한 바와 같이, 종교를 “아편”이라고 보고 또 기독교란 죽음이라는 절대 세력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혀 있지도 않은 내세교리를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이른 바, 전혀 허구적인 사후(死後)에 대한 환상, 즉 As if-illusion으로 인간들을 미혹에 빠트리고 있는 하나의 헛된 <혹세무민의 종교>에 불과하다고 규탄하는 그런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논리를 가지고 이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 이른 바, 철저히 유물론적인 접근방법과도 저의 접근법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말해 두려고 합니다.
따라서, 저의 접근법은 다음 세 가지의 분명한 전제를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첫째는 저는 기독교 교인이고 구약성서를 전공하고 또 가르쳐 온 구약학 교수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서, 그것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말하는 바의 틀 안에서 이 문제를 접근한다는 점입니다. 그 둘째는 구약성서는 비록 고대의 신화시적인 언어들로 겹겹이 감싸여 있다고는 하더라도 냉엄한 역사과학적 방법으로 해석해 들어가 보면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있는 <절대 가치의 경전>을 확인하게 된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1967년 9월부터 구약을 가르치고 연구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약 40여년에 걸친 대학교원 생활동안, 비록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진지하게 부심하여 온 학문적 노력의 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셋째로는 이러한 저의 학문적 노력은 또한 저의 심각한 신앙적 고투, 마치 욥이 내려갔었던 그 고난의 심연에까지 내려가 사투하여 얻은 신앙, 즉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신앙적 확신, 특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냐 창조냐 라는 논쟁은 여기서는 전혀 무의미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사실에 대해서 회의적일 때는 이 강연은 무의미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도 이러한 전제를 전제하고서 저의 접근법을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법에서 말씀을 드린 다음, 제가 제시한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제안한 <죽음을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에 관한 제안을 저의 관점에서 각색하여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저의 강연을 끝맺으려 합니다.
이러한 출발점과 결말을 설정하고 있는 저로서는 “우리의 주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전거(典據)란 성서, 특히 신약성서의 뿌리인 구약성서”라고 하는 뚜렷한 학문적 확신 위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서는 우리의 이 물음 즉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라는 문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증언하고 있는지를 밝혀내어 증언하는 일이 이 강연의 중심과제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볼 때, 구약성서는 실로 다음 세 가지를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이것입니다. 구약성서는 <사람이 왜 죽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플라톤적 영혼불멸 사상>과는 철저히 다르게! 대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성서는 결단코 사람의 육은 사멸하는 것이고 사람의 영혼은 영원하고 불멸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는, 비록 여러 가지 타 종교의 영 또는 혼에 대한 사상의 영향을 여러 형태로 강요받았다고는 할지라도,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만은 결코 모호하지 않았고 확고하였습니다. 즉 구약성서는 사람을 결코 영과 육으로 이분화하지는 않았다는 것과 그리고 사람을 “영혼”이라고 칭할 때에도 그 “영혼”은 결코 희랍철학이 말하는 “불멸하는 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확고하였고 이 신앙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몸의 부활 사건을 통하여 확실하게 확인되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확고하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야비스트(J)라는 고대의 구약성서기자는 소위 “역사 이전 기록”(prehistory)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1:1-11:27, 31-32 (Urgeschichte)에서는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라는 주제는 단지 경고로만 주어졌고(창 2:17; 3:3-4)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죽음”은 노아 대 홍수심판에서만 단 한 번 언급하였을 뿐(창 7:22[J], 창 11:28은 원 역사에 속하지 않고 족장 역사에 속함) 결코 그런 “죽음”(תומ“무트”)이 있었다는 언급조차 피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비스트의 놀라운 신학적 천재성을 발견하기까지 합니다. 즉 저 유명한 창세기 3:19의 말씀, “너는 흙에서[먼지에서] 나왔으니 흙으로[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만은!(דע),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יכ) 너는 흙이므로[먼지이므로] 흙으로[먼지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현대 주석가들이 다 한 목소리로 말하였듯이, 창세기 2:7의 인간창조의 기록과 연결되는 말씀이지 결단코(!) 창세기 2:17의 죽음(“무트,” תומ)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연결된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여기 야비스트(J)의 증언에서는 “죽음”이라는 말이 철저히 “먼지로[땅으로] 돌아간다.”(המדאה[רפע]־לא בושׁ)라는 말로만 대치(代置)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놀라운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흙 또는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의미의 “죽음”은 결코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 야비스트의 확신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즉 흙 또는 먼지에서 와서 야훼 하나님이 주신 생기를 가지고 일정 기간 동안 살다가 일정기간이 다하면 그 왔던 흙 또는 먼지로 돌아간다(בושׁ)는 것은 결단코 타락 또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서 태초의 창조 때부터 설정해 두신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었다는 것이 야비스트 성서기자의 확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경 또는 육경을 최종 편집할 때 ①먼지로부터 먼지로 돌아가는 자연 질서로서의 죽음과 ②죄의 심판으로서의 죽음을 혼재하여버린 성서편집자는 본래 타락기사를 갖고 있지 않았던 P라는 사제문서 기자였다고 하겠습니다. J와 P의 이러한 혼재를 통하여 이루어진 최종 형태의 경전은 “죽음”의 이중적 의미를 전승시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의 신구약성서 전체는 이러한 “죽음의 이중적 의미”를 신의 확고부동한 계시의 말씀으로서 지속적으로 증언해 오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아 죽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범죄로 인한 멸망과의 관련이 엄폐되어있는 것이 구약성서의 현실입니다. 더욱이 구약성서는 자기 일생의 수(壽)를 다 누리고 만족하며 죽는 죽음은 <인간의 피조성>에 속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른 피조물로서의 “죽음”은 죄에 대한 벌로 받는 “죽음”과는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한 계시록 기자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받는 “죽음”을 “둘째 사망”(“호 듀테로스 다나토스”ὁ δεύτερος θάνατος)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른 “죽음”을 “첫째 사망”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계 2:11; 20:6,14; 21:8; 경외전 제1에녹서 9:11). 예수님께서도 희랍적 영향권에 있는 대중들을 의식하고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즉 “몸(“소마”σϖμα)은 죽일지라도 영혼(“푸쉬케”Ψυχή)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 10:28; 눅 12:4-5)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신학적 통합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우리는 창세기 3:19의 말씀과 로마서 5:12의 말씀이 결코 서로 충돌하지 않는 조화와 통일을 이룬 하나의 “신 계시(神 啓示)”라고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은 천지 창조의 태초 때, 즉 인류타락 사건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셨던 “창조질서”(創造秩序)에 속하는 것이지 결단코 “타락의 결과로서의 죽음”(롬 5:12)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cf. H.W. Wolff, Anthropology of the Old Testament, London: SCM, 1974, P. 115) 즉 먼지가 생기를 받아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주어진 “일생”을 사는 그 인간 일생의 “시간적 삶의 단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의지에 속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적 삶의 단위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속한 것일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먼지에서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은 그 무슨 인간타락의 인과(因果)이거나 아니면 우주 생성과정에서 생겨난 우연이거나 아니면 인간의 타고난 숙명적 운명이거나 또는 선하신 하나님과 대결(對決)되는 그 무슨 악신이나 악마의 살의(殺意)에서부터 비롯된 것(dualism)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증언 중 가장 놀라운 증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지로부터 와서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죽음에 대비하는 성서적 신앙>일 뿐, 그 무슨, 독배를 받아 마시면서도 육체의 감방으로부터의 영혼의 탈출과 자유를 희망하며 웃음 지을 수 있었던 <소크라테스적 영혼불멸 신앙>이 죽음에 대비하는 참 자세는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본래부터 자기 자신 속에 신의 본질인 “영혼”이라는 불멸의 본질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은 극단의 인본주의적이고도 반 성서적인 이교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지성껏 노력만 하면 성불(成佛)할 수도 있다는, 이른 바,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다는 거인주의적인(titanic) 논리나 또는 인간 영혼이 지성껏 노력만 하면 죽음이라는 악마의 세력도 꺾을 수 있다는 이원론적 신념(dualism)이란 인간의 사유 능력이 만들어 낸 하나의 “허구”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부조리한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유한하고 허무한 인간고뇌의 경험들이 직접 웅변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물리학이나 천문학이나 생태학이나 의학이 또한 이구동성으로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 안에 인간의 희망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 하겠습니다. 희망은 오직 <유일하신 창조주 야훼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중심 증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심각한 사고(思考)의 혼란에 빠지게 만들어 온 것은 역시 “영혼”이라는 언어입니다. “영혼”(soul)이라고 번역된 언어의 히브리말 원어는 “네페쉬”(שׁפ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가 말하는 이 “네페쉬”라는 언어는 희랍철학이 말하는 “불멸의 영혼”과는 그 근본 개념에서 매우 다른 언어라는 점입니다. 우선, 성서는 “네페쉬”를 피조물이라고 확고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먼저 강력히 전제함으로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페쉬”가 “영혼”이라고 번역되었다 해서 그 “네페쉬”가 갑자기 희랍철학이 말하는 “불멸성을 가진 신적인 본질로서의 영혼”으로 성격 전이(轉移)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더욱이 성서 번역의 문맥상 “네페쉬”를 “영혼”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곳에서 조차도(!) 그 “네페쉬”의 의미는 주로 고난당하는 자(나그네, 궁핍한 자, 병약한 자 등등)의 고통과 그 고통의 정신적 상태를 나타내는 몸의 특수한 기관 또는 그 정서적 감정행위와 감정의 기능 자체를 가리킬 때 주로 “영혼”이라는 번역어가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애증(愛憎)의 주체를 가리킬 때에도 이 “네페쉬”라는 번역어가 사용되었을 뿐입니다.(H.W. Wolff, ibid., Pp. 17-18, 18-20) 특히, 이 말이 구약성서에서 사용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의미는 어디까지나 “생명”의 의미로 사용되는 때라는 점이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이 경우에도 특별히 주목할 것은, 이 “네페쉬” 조차 인간 존재의 그 어떤 “결코 파괴될 수 없는 핵심요소”(an indestructible core of being)를 가리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이 “네페쉬”라는 언어는 어떤 경우에도 육체의 “생명”과 분리되지는 않는 언어입니다. 그리하여 이 “네페쉬”가 사람에게서부터 밖으로 나간다고 말하거나(창 35:18, “숨을 거둔다.”[표준 새 번역], “혼이 떠나다”[개역 개정]) 또는 그 “네페쉬”가 사람에게로 돌아온다고 말할 때(애 1:11, “목숨을 이으려고”[표준 새 번역], “생명을 이으려고”[개역 개정])에도 이 “네페쉬”는, 결단코, 육체의 생명과 분리된 이후에도 여전히 존속할 수 있는 그 어떤 불멸적인 것(불멸의 영혼)이라는 의미는 결코 갖고 있지 않고 단지! “호흡이 끊어진다거나 호흡이 되돌아온다거나” 하는 의미만을 갖고 있을 뿐임을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희랍적 “영혼불멸” 개념은 전혀 구약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불멸하지 않는다는 이 신앙전통은 몸과 영혼의 개념 구별이 애매해진 신약성서의 어떤 구절들(cf. 눅 9: 24-25[“푸쉬케” 개념]; 행 2: 27,31[“푸쉬케”와 몸]; 마 10:28[“소마”와 “푸쉬케”])에서도 뚜렷이 계승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영(“프뉴마”)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고 목숨(“푸쉬케”) 또는 몸(“소마”)이 사용되고 있고 아버지 하나님만이 영원자로서 이 모두를 죽일 수 있는 분으로서 “몸”밖에 죽일 수 없는 원수들과는 엄격히 구별되고 있습니다.
뿐만은 아닙니다. 희랍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신약의 사(四)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임종에 관한 묘사를 보면, 마가(막 15:37)와 누가(눅 23:46)는 “숨을 거두셨다”(ἐξέπνευσεν)라고 표현하였으나 마태(마 27:50)와 요한(요 19:30)은 “영혼(πνεϋμα)이 떠나셨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신약성서 주석가들은 신약의 이 “프뉴마”(πνεϋμα, πνέω)를 희랍어 번역 구약성서인 70인 역본(LXX, cf. 창 35:18)에서 사용되고 있는 “푸쉬케”(ψυχή)의 전용(轉用)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에게만 “프뉴마”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프뉴마”에 의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부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구약성서도 신약성서도 모두 인간 영혼의 불멸성은 결코 말하지 않고 있음이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즉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한 희망은 전적으로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에 대한 믿음 안에만 있는 것이지 인간 영혼의 불멸성 안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성서의 중심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몸의 부활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요 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만이 인간의 죽음과 부활의 희망에 대한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요 표징(“세메이온”το σημεϊον, sign)일 뿐이라고 하겠습니다(사도 바울의 예수 체험, 행 9:1-19a, 고전 15:12-19).
신학적 문맥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엄격히 구별된다는 것을 강력히 강조하고 있는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유형, 무형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고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운명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주제와 관련시켜서 둘째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우주 탄생 때(big bang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생성, 소멸, [팽창]의 과정 속에서 이미 먼저 죽은(돌아간) 자들은 완전 소멸되어 없어진 것이냐 아니면 이 우주 어딘가에 어떤 존재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서는 인간은 먼지로부터 와서 먼지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יכ 문장의 기능 참조)라고 말한다는 것을 이미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전제할 때, 우리는, 오늘날의 첨단 과학 문명권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최근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선풍적 바람을 일으킨 주제인 “엔트로피(Entropy, 1980, 한국어 번역은 1996.)의 법칙”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법칙이 확신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태양계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에 따라 인간이란 죽음으로서 완전 소멸되어 버리기 보다는 죽은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형태의 존재방식으로든 불변하는 질량평형을 유지하며 이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엔트로피 법칙이 현대인에게 주는 에너지 고갈에 관한 경고의 메시지는 오히려 우주의 질량이 불변은 하지만 그 에너지의 유용성이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무용 에너지로 철저히 옮아간다는 것을 경고하는데 그 목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즉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우주가 종말을 향하여 어김없이 에너지 무용화 운동을 계속한다는 비관적 우주론에게 우리의 운명을 내어 맡길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학문 분야가 아닌, 이른 바, 다른 전공 영역인 첨단 물리학의 어떤 한 이론, 이른 바, 엔트로피 운동과 대칭되는 네겐트로피(negentropy)의 법칙에게 손을 들어 주는 방식으로는, 즉 무질서를 부정하고 질서와 유기조직을 수립하기 위하여서 이용 가능한 에너지 입자들이 존재한다는 네겐트로피 이론과 그리고 이 우주가 생명을 새롭게 생산하기 위하여서, 참으로 신비하고도 기적적이게도, “죽음”을 그 대가로 지불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새로운 별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엔트로피 법칙과 네겐트로피 법칙이 너무도 엄격히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는 “우주의 팽창 이론”(존 바우커[John Bowker], 『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파주: 청년사, 2005, Pp. 366-367)에게 손을 들어 주는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도달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궁극적 문제는 질량불변의 그 어떤 심오한 물리학적 법칙을 이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됨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근본문제가 있기 때문이고 또 창조의 주와 창조의 대상 사이의 관계 정립에 우리의 궁극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다소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영감 받은 구약성서 기자들은, 매우 엉성한 논리로나마,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고, 이른 바, 이교적(바벨론적?) “스올”(לואשׁ) 개념을 도입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개념을 이스라엘적인 것으로 끌어들여서 인간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무한한 시공(時空)의 문제에 대한 잠정적 해답 역할을 하는 한 교량(橋梁)을 놓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올”은 그 본래의 이교적 성격 때문에 그 개념을 명쾌하게 조직화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스올”은 지하에 있는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시공(時空)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거기 모여 있는 죽은 자[死者]들은 비록 죽었으나 자기 정체성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는 모습, 즉 죽은 자의 “몸”의 복사판(replica) 또는 그림자(shades)의 모습으로 모여 있는 망자(亡者)들의 세계를 가리켜 “스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 속에는 <땅위의 산 자들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는 곳(삼하 12:23; 욥 10:21)> <일거리, 지식, 지혜 등등이 없는 무인식의 세계(전 9:10)> 그러나 어떤 다른 곳에서는 이와는 다르게 <살이 아프고 마음이 슬픔을 겪는 장소(욥 14:22)> 또는 <지상의 세계에 대한 어떤 지식들을 가지고 있는 망자(亡者)들의 세계(삼상 28:3-19; 사 14:3-21)>심지어는 <평화의 거주지(욥 3:17-19)>등등의 개념들이 비체계적으로 뒤엉켜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술들이 담고 있는 바, 이스라엘적인 신학으로 자리매김을 한 신앙들은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첫째는 ①죽음이 인생의 완전한 끝은 아니라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은 자들이 부활의 때까지 잠자는 상태로 있다는 관념(마 27:52)도 또한 죽음의 절대 종말적 성격을 상대화시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전능의 창조자 하나님의 통치 세계 안에 “절대 종말”이 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라고 하겠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②“스올”은 산자들과의 교류와 하나님 찬양의 교통이 “잠정적으로” 단절된 곳이라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시인들이, 자주, <하나님 찬양이 중단되는 것에 대한 아픔>을 토로하였다는 것(시 30:9-10; 115:17 등등)은 먼지로부터 먼지로 “돌아가는 것” 자체는 결코 참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는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과 가지는 찬양의 교류가 “영원히” 끊어지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지 “죽음” 자체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역(逆)으로 말한다면, 이 사실은 하나님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는 곳(임마누엘의 현실, cf. 창 5:22,24)에는 죽음의 세력이 침투할 수 없다는 진리까지 증언한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③“스올” 사상은 “스올”자신도 또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라는 신앙을 증언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스올”은 악마가 통치하는 특별히 다른 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스올”은 하나님의 세계와 대립해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왕국이 따로 있고 또 이와 맞서는 악마가 통치하는 세계가 또한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스올”은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한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사적 통치의 한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 시인은 하나님을 도피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증언한 바가 있습니다.(시 139:8) “스올”이 하나님과의 교류가 “잠정적으로!” 끊어진 영역이라는 것은 이 “스올”도 결코 “종국”이 아니라 “영원”에 이르는 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스올”사상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 세계 속에 들어 옴으로써 비로소(!) “죽음”을 상대화시키는 역할(호 13:14)을 하게 됩니다. 즉 생명을 가진 먼지(인생)의 일생을 마친 “모든” 사람(생명, “네페쉬”)들을 “스올”에 당분간 붙들어 두신 분은 죽음의 세력(가나안의 “모트” 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었던 것입니다. 즉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역사 섭리는 “죽은 자들의 세계”(“스올”의 세계)를 장악하시어 정면 돌파하실 생각이셨던 것입니다. “스올”의 세계 속에 감금해 두신 -무저갱 속에 가두고 열쇠로 잠거 놓은(계 1:18; 9:1; 20:1,3)- 죽음의 세력들을 일시에 돌파하여 멸망시키실 계획(사 25:8)이셨던 것입니다. 삶을 죽임으로서 그 죽음으로부터 오히려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내시려는 계획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셨던 것입니다.
“창조자”라는 의미를 가진 신 야훼(One who causes to be: One who creates)께서는 “엘 사따이”(출 6:3; “전능의 신”=“젖가슴의 신”이라는 은유[隱喩]로 그 속성이 묘사된 분)이시요 동시에 “엘 라훔”(출 34:6; “긍휼의 신”=“자궁의 신”이라는 은유[隱喩]로 그 속성이 묘사된 분)이시었습니다. 이 야훼 창조주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긍휼]의 신이시었으므로 “인간을 사망의 세력에게 넘겨주실 분이 아니시었던 것입니다.” “비록 인간들은 스올로 뚫고 내려갈지라도 그는 거기에서도 그들 인간들을 잡아 올릴 분이시었습니다.”(암 9:2a) 욥은 이러한 야훼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과 그 현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참혹한 고난의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다가 감히 이렇게까지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나를 스올에 감추어 두실 수는 없으십니까? 주님의 진노가 가실 때까지 만이라도 나를 [스올에] 숨겨 주시고 기한을 정해 두셨다가 뒷날에 다시 나를 기억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욥 14:13) 그렇습니다. “스올”은 이제 야훼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야훼 하나님께서 친히 고통 받는 자를 감추어 두시는 은신처가 된 것입니다! 이 어찌 놀랍지 않습니까?
3. 그러므로 마지막 세 째로는 구약성서란 모든 피조물의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를 모두 다 “하나로” 통합하여 그것을 자신의 한 품 안에 품으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엘-올람”, םלוע־לא)이 곧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함으로서 우리의 주제가 던진 이 큰 물음에 대한 대답을 완결 짓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과 무상성”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심도 있게 숙고한 시편 90편 시인은 그의 시의 서두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아도나이”ינדא)은 대대로 우리의 거주지(“마온” ןועמ)가 되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하늘이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느님”(“엘로힘”이 아니라 “엘” לא)이십니다.(시 90:1-2)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가련한 인생아, 티끌로 돌아갈지어다.”(“타쉡”, בשׁת)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슈부”, ובושׁ)라고 말씀하십니다.(시 90:3)
진실로 주님 앞에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시 90:4)
이 시인은 여기서 즉 그의 시 서두에서 무엇 때문에 곧장 주저 없이 “인간의 죽음”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가 지니고 있는 그 무슨 “키호티즘”(Quixotism) 때문일까요? 구약학자 사무엘 테리언(Samuel Terrien, 1911-2002)은 그의 최근의 유고 작 『시편주석』(2003)에서 이 물음에 대답하기를 “히브리 신앙에서 볼 때, 이러한 현상은 … 창조신앙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P. 643)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생명”에 관한 문제와 불가피하게 맞물려 있고 그리고 “생과 사”에 관한 문제란 신의 창조 영역에 속하는 문제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없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과학과 철학의 세계는 이 주제에 대하여 묻기만 하였고 그리고 “성장의 마지막 단계”(傅偉勳)로서의 죽음을 단지 두려움 없이 맞이하도록 돕는 일(hospice)에만 힘을 기울였을 뿐, 우리의 주제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많은 시각과 억겁을 헤아리는 세월동안 인간에게는 오직 신비에만 묻혀 있었던 이 “생”과 “사”의 관계 본질이 시편 90편 시인의 시감(詩感)에서는 히브리어 “슙” (בושׁ)이라는[“돌아가다”라는] 언어에 의하여 극명하게, 조금도 불분명하지 않게 그 의미가 정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시편 90편 시인은 분명 여기서 “죽음”의 의미를 <창조주 하나님[“엘”לא] 이신 주님[“아도나이”ינודא] 안에서> 즉 <그 분의 “거주지”(“마온” ןועמ) 안에서(!!) 먼지로부터 먼지로 돌아가는 가는 것>이라고 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창조의 주님의 거주지>라는 것과 <왔다가 돌아가는 그 돌아가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과 우리 논의의 결론이 들어 있습니다. 즉 “첫째 사망”이라는 것은 넓은 창조주의 거주지, 이른 바, 야훼 하나님의 젖가슴과 자궁의 그 “넓은 품” 안에서 <왔다가 가고> 또 <왔다가 가고>,<루칵흐→슙>,<루칵흐→슙>(חקל→בושׁ,חקל→בושׁ)하는 한 목적지를 향한, 이른 바, 구속사의 완성을 향한 직선운동의 반복 사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대답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출생도 삶도 죽음도 그리고 죽음 이후도, 그 모든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거주지” “하나님의 해비테이션habitation” “하나님의 마온ןועמ” “하나님의 플레로마 πληρώμα,” “하나님의 fullness”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님의 거주지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시편 139편 시인은 이 진리를 각성한 후 이렇게 그의 깨달음을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이미 계시고, ‘스올’이라는 지하의 세계에다 내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도 이미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이끌며 나를 힘 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 아,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도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시 139:7-18) 말하자면, 온 우주들을 모두 다 그 안에 껴안고 있는 하나님의 젖가슴(“사따이”)과 그 모든 우주들을 그 안에 품고 있는 하나님의 자궁(“레헴→라훔”)이 바로 하나님의 거주지(πληρώμα)요 하나님 자신(Ὁ θεός)인 것입니다. 즉 사전(死前)도 사후(死後)도 처음도 마지막도 모두가 다 이 하나님의 거주지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지에서부터 먼지에로의 회귀(回歸)도 이 안에 있는 하나의 점처럼 지극히 작은 하나의 하나님의 구속사적(救贖史的) 운동일 뿐입니다. 자연과학과 철학과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해결 못한, 이른 바, 생(生), 사(死), 사후 생(死後 生)에 관한 신비에 싸인 수수께끼 같은 물음에 대한 정답은 오직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지극히 높으신 신(“엘 엘룐”), 야훼”(창 14: 19,22)에 대한 성서의 증언 안에서만 들려온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거주지(God's habitation, God's home)에 대한 이러한 히브리적 신앙은 세계의 창조자시요 동시에 모든 생명의 수여자(the Giver)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신앙”(the belief in the existence of only one God) 위에 확고하게 기초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cf. W. F. Albright and G. E. Wright, et al.) 하나님의 거주지! 하나님의 품! 그 안에 모든 것이 있고 생사화복(生死禍福)의 사건이 일어날 뿐입니다.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에 관한 모든 물음에 대한 구약성서의 유일한 대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가 유일한 창조주이심(!!)이, 바로 이 사실이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한 영지주의의 가르침과 그리고 영혼불멸에 관한 희랍철학적 가르침의 비(非) 진리성과 허구성(虛構性)을 웅변적으로 적시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게트로피(negentropy) 법칙이 전제되지 않는 엔트로피(entropy)의 열역학적 법칙에서 본다고 할 때도, 즉 에너지도 창조주의 창조물인 이상, 에너지의 효용성이 비록 어김없이 소멸됨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에너지의 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이론도 구약성서의 확신과는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후의 생은, 그러므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연쇄(連鎖)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됩니다. 예수님의 강림하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도 창조주 하나님의 거주지 신앙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운동의 결정적 증거일 뿐이라고 하겠습니다.(cf. G.C. Nicholson, Death as Departure: The Johannine Descent-Ascent Schema, Chico: Scholars Press, 1983, P. 7) 박완서의 최근 작, 『호미』(파주: 도서출판 열림원, 2007, P. 45)라는 산문집에서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의 주제를 창조주의 창조질서 안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그 씨들을 받을 때는 씨가 생명의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오히려] 시작이 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에 짠하게 경이롭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제와 연결된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고전적 구절인 창세기 2:7과 3:19가 결론적으로 말해 주는 것은 “먼지로부터 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은 하나님의 하나의 구속사적 운동의 한 일환일 뿐(전 3:19-21)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먼지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코 죄에 대한 징벌로서의 죽음(롬 6:12=둘째 사망, 계 20:6)과는 엄격히 구별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가장 지구력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사건은, 그러므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야훼 안에만 있을 뿐이라고 하겠습니다.(갈 6: 14-15) 그러므로 돌아가라! 돌아가라! 슈바(הבושׁ)! 슈바(הבושׁ)! [돌아가라=회개하라]라는 창조주 우리의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에게는 불가역의 <지상명령>임과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더없이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복음의 소리임에도 확실합니다. “아,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해 주시고 또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시 8:4[5]; cf. 욥 7:17-18) “아,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도 어찌하여 이토록 빛을 주셨습니까?”(욥 3:23)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