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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나비, "이슬람테러의 근인은 꾸란"

입력 Sep 19, 2017 07:03 AM KST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유럽 테러에 대해 대처할 것을 요청하는 논평을 발표하고, "끊이지 않는 이슬람의 테러는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서 나온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고 지적하면서 "이슬람의 실체를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하고 다중적 접근과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래는 논평의 전문이다.

끊이지 않는 이슬람의 테러는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서 나온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슬람의 실체를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하고 다중적 접근과 대응이 필요하다

이슬람 테러와 폭력의 사태는 전 인류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안겨주고 있다. 천년 넘는 이슬람 역사는 다와(선교), 테러, 전쟁, 폭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슬람에 의한 폭력과 테러는 2017년 유럽의 최근 사건만 보더라도, 파리에서 132명, 니스에서 86명, 베를린에서 12명, 바르셀로나에서 22명, 런던에서 5명, 그 외 스웨덴 스톡홀름, 벨기에 브뤼셀 등에서 무고한 다수의 사상자를 낳았다. 더 이상 테러의 안전지대는 없다. 그들은 왜 테러를 자행하나? 그들은 누구이며 대처 방법은 무엇인가? 샬롬나비는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1. 이슬람 테러는 필연적이다

선택이나 우발적 사고가 아니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가르침 때문이다. 꾸란은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명한다. 이것을 방해하는 세력은 적이다. 적과는 싸워야 하고 죽여야 한다(꾸란 3:100; 4:89; 8:12, 39; 9:5, 29, 123). 알라를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이 정당하다. 거짓말, 폭탄, 자살, 테러, 전쟁도 정당하다. 모든 무슬림이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꾸란에 충실할수록 헌신과 충성된 신앙심의 표현은 극단적 선택이 된다. 자살테러로 인한 죽음은 순교이다. 테러는 꾸란을 근거로 하는 이슬람에서 나오므로, 테러 그 자체보다 이슬람을 주목해야 한다. 이슬람을 막지 못하면 테러도 막을 수 없다.

2. 이슬람의 두 얼굴을 주시해야 한다

이슬람은 기독교인들과 친구가 되라고 하면서(꾸란 2:262; 3:113,114) 다른 한편으로는 칼로 죽이라고 한다(꾸란 9:29). 꾸란은 평화를 말하지만 또한 전쟁(Jihad)도 말한다. 이슬람의 두 얼굴이다. 마크 A. 가브리엘은 "지하드의 3단계"를 말한다. 첫 단계는 약한 단계로서, 평화를 내세우며 서서히 스며드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준비 단계로, 일정한 세력을 규합하고 조직을 갖추면서 그들만의 샤리아법(Sharia)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재정적, 심리적, 사상적, 군사적 준비를 갖춘다. 세 번째 단계는 그들의 앞길을 막는 모든 체제, 국가, 지배세력과 싸운다. 알라와 이슬람 국가를 위하여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고 목숨 걸고 싸운다. 그들의 이중성은 평화로 시작하여 기본 인권, 종교의 자유와 기도처 요구, 모스크 건립, 종교적 삶 보장을 요구하다가 유사시에는 테러와 전쟁을 불사한다. 이것이 이슬람의 세계화 과정이다.

3. 무슬림은 누구나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

이 말이 평범한 무슬림에게는 무례하고 불쾌하게 들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테러리스트는 이슬람 극단주의자, 혹은, 원리주의자로 제한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구분에 불과하다. 무슬림의 절대 다수는 선량하고 온순하지만 언제든지 '꾸란에 근거하여' 극단주의자가 될 수 있다. 현대 지하드의 아버지라 불리며 원리주의 철학자이자 영적인 지도자인 싸이드 쿠틉(Sayyid Qutb)은 물량주의 비이슬람 나라와 형식적인 이슬람 나라에 분노하며 알라를 위하여 진정한 무슬림 왕국 건설을 외치면서 신앙적 헌신과 투쟁을 강조했다.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슬림은 이슬람 신앙에 근거하여 언제든지 원리주의자가 될 수 있다.

4. 이슬람 물결은 막을 수 없다

그들의 다산정책과 선교정책은 계속되고있다. 종교가 곧 그들의 문화, 정치, 삶인 이상 이슬람의 팽창은 막을 수 없다. 그들의 세계화에 다만 전략적이고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할 뿐이다.

5. 이슬람 대책은 다중적 접근과 대응이 필요하다

이슬람 대책은 한두 가지 논리나 정책만으로 단순화 할 수 없다. 이에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이슬람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 먼저 이슬람이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하고 냉철한 공론화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이슬람의 이중성을 주목해야 한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이것을 놓쳤다. "인권"과 "국민"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래서 나온다. 이슬람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순진한 인도적 차원의 이민 정책을 폈다가 지금 전 유럽이 홍역을 앓고 있다. 반면교사가 된다. 이슬람의 실체를 아는 것이 우선이다.

둘째,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 유지가 보장되어야 한다. 평화는 양자 간의 힘의 균형에서 나온다. 이슬람, 특히, IS(이슬람국가)라고 불리는 극단주의 무슬림을 대항할 힘이 있을 때에 상호간에 평화는 가능하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그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물리적, 경제적 대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셋째, 열린 대화가 계속 되어야 한다. 상호존중을 기본으로 이슬람과의 대화는 불필요한 오해나 충돌을 막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가 된다. 지나친 이슬람 포비아 현상에 갇혀서도 안 되고 무분별한 이슬람 환상에 젖어서도 안 된다. 또한 이슬람 외에 다른 세계를 알지 못하는 폐쇄된 무슬림들에게도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져야 한다. 마틴 아케이드(Martin Accad)는 이슬람과의 다섯 가지 대화 유형을 제시하면서 '선포적 접근 대화'를 권한다. 그는 기독교 복음은 선포하는 것이기에 대화(communication)를 통하여 복음이 자연스럽게 선포될 때에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서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넷째, 이슬람을 무슬림을 선교의 도구로 활용 할 수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적 유사성은 접촉점으로 공감대 형성을 이끌어 낸다. 동시에 차이점은 상호간 대화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무슬림에 대한 "비판적 거부"는 상호간의 괴리감과 적대감을 심화시킨다. "무비판적 수용"은 그들의 부정성에 대한 장려이며 기독교의 혼합주의가 된다. 선교학자 폴 히버트는 "비판적 수용"을 제안했다. 수용을 위한 비판이다. 건강한 비판과 함께 그들을 품는 것이다. 이슬람은 걸림돌이면서 또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장기적으로는 이슬람의 세계관을 바꾸어야 한다. 국내외 디아스포라 선교를 통하여 회심자를 얻고 양육을 통하여 세계관을 바꾸어야한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도 바뀌지 않는다. 복음이 그들의 세계관을 바꿀 수 없다면 그들의 세계관이 복음을 바꾼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이슬람 세계관을 바꾸어야한다.

여섯째, 건강한 교회가 이슬람의 침투를 막아낸다. 부패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격은 무관하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의 침공을 부패한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으로 이해했다. 역사적으로 타락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확산은 비례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건강한 기독교를 지키는 것이 그들을 이기는 영적인 방법이다.

일곱째, 이슬람의 한계를 느끼는 무슬림이 늘고 있다. 무슬림 전문 사역자인 데이빗 게리슨(David Garrison)은 그 현실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무슬림 내에서 시아파와 수니파를 중심으로 한 대립, 극단주의와 온건주의 간의 갈등, 실업자 무슬림의 급증, 무슬림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환상 붕괴 등이 이슬람을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오늘날 다양한 대중 매체인 인터넷, 영화, 방송, 여행이나 유학 등을 통하여 서구 세계를 보고 복음을 들으며 이슬람의 한계를 느끼는 무슬림들이 늘고 있다.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또한 강하게 불고 있다는 선교현장 소식이 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2017년 9월 18일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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