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하나되게 하소서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Oct 08, 2018 09:26 AM KST

- 에스겔 37:15-17, 고린도전서 1:10-15, 요한복음 1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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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82년의 일입니다. '세계기독교의 UN'이라 불리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가 페루의 수도 리마에 모여,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교파를 떠나 함께 드릴 수 있는 공동예식서인, 『세례, 성만찬,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이라는 제목의 문서(소위 'BEM 문서')를 채택하면서 매년 10월 첫째 주일을 세계성찬주일로 지키자고 선언한 것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 안에는 이미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es)와 정교회(Orthodox Church)가 가입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성찬주일 선언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근 500년 동안이나 서로 갈라져 있던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도 참여함으로써 명실공히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를 포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신교와 구교 그리고 정교회 등,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갈라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가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물론 배타적인 근본주의 신앙이 강한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교회가 이 날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같은 개신교회여도 교단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가르치는 한국교회의 분리주의적 신앙의 눈으로는, 가톨릭과 정교회까지 참여하는 이 세계성찬주일을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참 의미 있고 감사한 날입니다. 오늘은 이 세상의 모든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연습을 하는 날일뿐만 아니라, 민족과 인종, 성별과 빈부, 그리고 종교로 나뉘어 한시도 쉬지 않고 서로 다투고 반목하는 전 세계 인류도 모두 한 자매형제임을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Is Christ divided?)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질문을 던집니다. 언젠가 한국에 처음 온 한 독일선교사(Lutz Drescher)는 한국교회가 예수교장로회와 그리스도교장로회, 예수교감리회와 그리스도교감리회 등, 예수교와 그리스도교로 나눠져 서로 대립하는 걸 보고 "어째서 한국에서는 예수님과 그리스도가 서로 싸웁니까?"라고 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와 같은 질문을 고린도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18개월 동안 체류하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고린도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자 교인들이 초대 담임목사인 바울에게 의견을 물어왔기에 그에 대한 답으로 쓴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이 서신은 주후 53~54년 경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집필하여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때문에 고린도전서는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교회가 무엇이며, 교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깊은 견해를 담은 보석 같은 편지입니다.

먼저 고린도(Corinth)라는 도시를 알아야 합니다. 이 도시는 그리스 남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당시 최고의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오늘날의 뉴욕과 같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도시는 예수님 오시기 146년 전에 로마군대에 의해 멸망했다가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가 주전 44년에 재건하여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주전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가 그리스의 수도로 삼은 곳입니다. 코스모포리탄 도시인 이 고린도에는 따라서 로마의 관리들과 상인들, 군인들과 선원들이 넘쳤습니다. 자연히 이 도시는 '죄의 도시'(City of Sin)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고, 따라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은 곧 '음란하다'는 말로 통했습니다. 이곳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의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또 바다의 신이라는 포세이돈(Poseidon)의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있는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교인들 내부에 분파가 생긴 것이고 (소위 잘난 사람들에 의해 교회 내 파벌이 생겼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당시의 물질문명과 동일시하는 것이며, 마지막 셋째는 이런 거짓 복음과 번영의 신학을 설파하는 외부 설교자들이 전임 목회자인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애끓는 마음으로 이 문제에 답해야 했습니다.

문안인사를 하자마자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 곧바로 설명합니다. 1장 2-3절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둘째 '성도라 부르심을 받고,'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입니다.

먼저 '거룩해지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하기아조'입니다. 그 뜻은 다른 것과 '구별되다' 혹은 '깨끗하게 씻기다'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거룩을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금욕적인 상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룩을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합니다. 즉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사람을 바울은 '거룩한 사람,' 즉 '성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부르심을 받다'가 핵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바울의 두 번째 견해이기도 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부르심이 피동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하여지도록 초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회사나 친목회처럼 내가 자발적으로 구성하고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무리'입니다. 무리란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개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극도의 개인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 혼자 예배드리고 기도하면 됐지 무엇하러 교회에 나가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란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교회란 '거룩한 공회'(holy catholic church)이고 '성도가 서로 교통/소통하는 것'(communion/communication of saints)입니다. 이러한 공공성과 공동체성이 없어지면 교회는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상을 집중해 비판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네 개의 분파가 생겼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생겼습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는 모두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런 교회의 상황에 대해 바울이 이렇게 유머스럽게 반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Has Christ been divided?, 1:13, 새번역). 성경 전체에서 아마 가장 높은 문학적 수준의 해학(諧謔)입니다. 반전(反轉)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쪼개진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는 반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이 교회의 교인 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일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 당시에도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했던가 봅니다. 세례는 세례를 집례하는 인간의 학식이나 도덕 혹은 능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세례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집전하는 사람을 보고 판단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보내진 것이 세례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세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어야지 세례 때문에 분파가 조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권면합니다. 1장 10절입니다. "형제[자매]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당대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인 국제도시에 사는 사람들답게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잘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그들이 서로 자기들에게 세례를 베푼 집례자를 기준으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여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각자 자기들이 최고라며 우기며 서로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십자가의 도(道)'를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교회 일치의 비결로 제시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겸손히]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빌립보서 2:6-8). 그렇게 성자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 위에서 이 낮은 땅 위로 내려와 겸손과 비움과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것입니다(빌립소서 2:9-11). 바로 이 낮춤과 높임, 그리고 비움과 채움의 변증법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신앙의 신비이고 십자가의 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문벌을 자랑하지만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 하시며, [또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말합니다(고전 1:27-28). 놀라운 역설이고 무서운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고전 1:29)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과연 사람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학식과 지위와 명성을 자랑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회는 강하고 잘난 사람들의 힘과 자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하고 비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의 겸손함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는 신앙의 신비를 가르칩니다.

바울은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사람들을 가리켜 '육신에 속한 자'(고전 3:3)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고전 3:4-9, 새번역). 참으로 겸손한 목회자였습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에 소유권이나 기득권을 주장한만도 한데 자신은 단지 부르심 받은 일꾼이며 그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과 같은 목회자가 많다면 어찌 한국교회에 세습이니 분열이니 도덕적 타락이니 하는 문제가 일어나겠습니까.

우리 현대인들은 많은 열쇠(key)를 가지고 삽니다. 여러 가지가 자동화되기는 했지만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메일 박스 열쇠 등 ... 열쇠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는 게 현대인의 생활입니다. 만약 열쇠를 잃어버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거나'(locked out), '밖으로 나갈 수 없는'(locked in) 상황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열리지 않는 문의 안타까움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 말고도 현대인들은 수많은 다른 문들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가문(家門), 명문(名門), 입학의 문, 취직의 문, 결혼의 문 등. 그 문들이 잘 열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중 어떤 문은 잘 열리지 않아 고생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쉽게 열리지 않는 문 가운데 매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 문'입니다. 아파트 문은 열쇠를 잃어버려도 열쇠 수리공의 도움으로 열 수 있습니다. 자동차 키가 꽂힌 채 문이 닫혀 있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닫힌 사람 마음의 문은 좀처럼 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경순 시인의 <문>이라는 시입니다. "여기에 문이 있고 / 문이 닫쳤소 / 나는 문안에 있고 / 문이 밖에서 자물쇠로 잠겼소 / 그 열쇠를 가진 사람은 낸데 / 내가 문안에 있소." 정말 묘한 상황입니다. 문이 밖에서 잠겨 있는데 열쇠를 가진 나는 문안에 있습니다. 시가 계속 이어집니다. "나는 문 밖에 있소 / 문이 안에서 자물쇠로 잠겼소 / 그 열쇠를 가진 사람이 낸데 / 내가 문밖에 있소 / 이 문이 닫쳐 있소." 이번에는 문이 안으로 잠겨 있는데 그 열쇠를 가진 나는 문밖에 있는 상황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문은 도대체 어떤 문을 가리킬까요?

영국의 화가 윌리엄 헌트(William Holman Hunt)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The Light of the World," 즉 '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그림인데, 한번쯤 보셨던 그림입니다. 예수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의 눈에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고 얼굴은 간절한 열망으로 빛이 납니다. 요한계시록 3:20 말씀에 근거한 그림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런데 여러분, 이 그림에서 매우 특별한 것이 있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님이 두드리고 계신 문인데, 자세히 보면 거기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강제로라도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구)찬송가 325장 가사처럼, "주 예수 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십니다." 아까 읽은 이경순 시인의 시 후반부를 다시 읽어봅니다. "나는 문 밖에 있소 / 문이 안에서 자물쇠로 잠겼소 / 그 열쇠를 가진 사람이 낸데 / 내가 문밖에 있소 / 이 문이 닫쳐 있소." 아무리 두드려도 좀처럼 열리지 않는 우리 마음의 문을 간절히 두드리고 계신 예수님의 심정을 읊은 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 문이 닫혔다는 것은 소통이 단절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과,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과의 사이에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두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미국 시카고에 높이가 무려 6미터나 되는 높은 담을 쌓은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사는 할머니는 사람 보기가 싫어, 그리고 남들이 자기를 볼까 두려워 그렇게 높은 담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높은 울타리가 햇빛을 가로막아 정원의 잔디가 다 죽고 집도 그늘져 썩어 들어가 금방 못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노인은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문'(門)이 되십니다.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께서는(요한 14:6) 또한 우리의 문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7-9절). 예수님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그분이 지금 내 문 밖에 서서 나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여러분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 그를 맞이하십시오.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경험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안으로 걸어 잠근 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와 역사를 향해 열린 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나아가 주님은 우리가 닫힌 문과 닫힌 문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길 바라십니다. 저는 한때 뉴욕시에 살면서 왜 그 도시가 '세계의 수도'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뉴욕시에는 수많은 다리가 있습니다. 자치구라 할 수 있는 보로(borough)와 보로를 잇는 다리가 8개 있습니다.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다리는 4개나 됩니다.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은 이렇게 많은 다리들이 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다리는 교류와 소통의 상징입니다. 수많은 다리가 마을과 마을,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였기에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기능을 하는 다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야 합니다. 집단과 집단, 세대와 세대, 그리고 문명과 문명 사이에 놓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다리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닮아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모든 이웃과 사상과 체제와 종교 사이에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입니다. '양들이 드나드는 [생명의] 문'입니다. 그 분이 문 밖에서 간절히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서로에 대한 미움과 오해 그리고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자랑과 편견으로 꼭꼭 닫힌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라며 갈라진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70년이 넘게 서로 싸우고 죽이고 피 흘린 이 민족의 분단의 문도 간절히 두드리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분열된 유다와 이스라엘을 두 막대기로 상징하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에스겔 37:17)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남과 북 두 막대기를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십자가가 바로 두 막대기를 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가 바로 일치이고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즉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는 분입니다(이상 에베소서 2:14-16, 새번역).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십자가 위에 하나됨의 원리가 드러나 있습니다.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잇는 하늘의 원리가 십자가 위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길[道]이 끊임없이 갈라져 서로 싸우는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와 우리의 교회와 그리고 우리 민족과 이 세계를 살리는 길[道]인 것입니다. 갈라진 교회와 세계 그리고 남과 북의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오늘,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우리 주님의 하나되게 하는 거룩한 은총과 권능이 우리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8.10.7.)

오피니언

기자수첩

[시론] ‘크리스찬’(?) 고위 공직자의 비리

고위공직자들 중에 개신교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꽤 많다. 이명박 '장로' 대통령 집권 당시엔 아예 소망교회 인맥들이 정부요직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부디 이 분들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