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비바람 너머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정태기 목사 /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 원장

입력 Mar 06, 2009 10:32 AM KST

 ‘찬 듯하면서도 못다 찬 삶’


헨리 나웬은 현대인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찬 듯하면서도 못다 찬 삶…’
굳이 유명한 영성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의 삶이, 무언가로 바삐 달려가고 꽉찬 듯이 보이지만 실상 그 삶의 이면에는 까닭모를 갈증과 황폐함으로 허기져 있는 것이다.
이 삶에 대한 갈증, 허기짐…

아마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과 같은 삶의 조건 때문에 사람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만나고 사랑하고 위로받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고 위안 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갈망한다. 아마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욕구의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을 찾아서 자신의 몸, 생각, 열망, 희망, 두려움 등 모든 것을 열어 보여주고 그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관계를 맺는 능력이 가장 찬란하게 꽃피우는 것이 바로 부부관계이다. 정상적인 남녀가 엄숙한 서약을 통해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결혼은,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과 한 몸, 한 마음 그리고 한 영혼이 되고 싶다는 깊은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결혼을 하는 이상, 바로 결혼이 안고 있는 연약함이, 함정이 여기에 있다.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것처럼 결혼은 이처럼 바라는 것이 크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가 성취되지 못할 때 좌절감도 그만큼 깊다. 관계가 밀접하면 밀접할수록 스트레스와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에 속속들이 열어 보여준 자아는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신뢰와 상호 의존에 대한 기대가 흔들리거나 무너지게 되면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보다 상처를 받게 되고 부부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위기에 빠진 부부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이혼이다. 한때는 부스스한 그의 머리칼이 순수해보여서 그것마저도 좋았는데 이제는 자신에게 닿는 손길도 싫다. 목소리도 듣기 싫다. 그 사람의 꼴을 보지 않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며 행복한 길이라도 되는 듯 이혼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이 기나긴 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너무나 자주 잃어버린다.


몇년 전 결혼식의 주례를 서준 신부가 나를 찾아와서 자신은 더 이상 남편과 살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해왔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풀어놓은 이야기에는 그들 부부는 결혼 후 3년 동안은 무척이나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남편의 태도와 열정이 시들해지더니 말다툼이 잦아졌다. 며칠 전에도 심하게 말다툼을 했는데 남편이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지경인데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사랑이 식어버린 결혼은 아무 의미도 없으며 지옥과 다를 바 없다.”고 성토를 하는 것이다.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지요. 사랑이 식어버린 결혼생활은 무의미한 것이지요. 또 식은 감정으로 서로를 질시하는 결혼생활은 지옥의 괴로움에 비견할만하지요. 그같은 결혼생활은 서로를 파괴하기 때문에 지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말에 여인은 놀라는 듯 했다. 목사가 선뜻 ‘이혼’에 동의를 해주는 것이 생소했거니와 홧김에 한 소린데 정말 이대로 결혼생활을 끝내버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일말의 두려움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도는 다른데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당신은 남편과 참사랑을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당신들의 이 시기는 대부분의 부부들이 참사랑이라는 목적지를 향해가는 여정 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겪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사랑, 참 만남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수많은 고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사랑은 여러 고비와 어려움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 과정 중 첫 고비를 만나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고린도 13장의 4-7절을 읽었다. 바울은 참 사랑이 무엇이고, 참 만남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랑이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바울은 만남에는 반드시 어려운 고비가 오는데 이 고비를 참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참 사랑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 참는다.’가 영어로 ‘long suffering(오래 아파하는 것)’이라니…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속절없는 아픔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이 말하는 참사랑은, 참 만남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긴 여행을 떠나는 여행객과 같다. 두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정지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때로는 산꼭대기를 오르기도 하고 가파른 낭떠러지를 만나기도 하며, 때로는 망망한 바다와 세찬 물줄기를 건너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여정을 무사히 마쳐야만 진정한 사랑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뜨거워지면 상대의 약점은 보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사랑이 불붙는 시기를 ‘애정기’라고 한다. 서양사람들은 ‘허니문’, 즉 꿀맛같은 시기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깨가 쏟아지는 시기’라고 표현한다.

이런 젊은 시절의 꿈결같은 시간들이 백발노인이 되어서도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정기에 사랑의 깨를 다 쏟아버리고 만다. 시골에서 깨를 털어 본 사람은 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베어 낸 깻단을 가을 볕에 잘 말려서 막대기로 툭툭 털어내면 깨가 한꺼번에 다 쏟아져 나온다. 인간의 사랑도 이와 같다. 물 불 가리지 못하던 애정기가 지나면 서서히 배우자의 실망스런 모습이 드러나고, 저런 사람과 한평생 살을 맞대고 살아갈 일이 아득할 때…이때가 결혼생활의 권태기다.

많은 사람들이 한참 깨가 쏟아지는 애정기에는 그 사랑의 깨가 일생동안 쏟아질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짖궂은 운명은 권태기라는 과정을 결코 지나치지 않고, 사람들은 위기 앞에 결혼을 포기해버리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때의 위기는 결코 우리를 괴롭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부의 위기는 자기 성찰과 성장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위기의 극복을 위해 적응을 하는 동안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

애정기의 마냥, 좋게만 보이던 모습, 밉상스럽게만 보이던 권태기 시절의 모습이 부부애라는 큰 그릇에 용해되어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배우자의 참 모습은 권태기에서 쏟아지는 여러 번의 소나기가 지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깊은 어둠 뒤에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듯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새로운 감동으로 맞이할 수 있다. 이것이 참사랑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많은 부부들은 이런 참사랑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결혼생활을 지루하게 지속하거나 파경으로 끝내고 만다. 이유는 권태기에서 상대방에게 실망을 느끼고 대화를 포기해 버린 데 있다. 사랑은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감정만으로는 완전해지지 않는다. 행복한 결혼생활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지루하고도 힘든 여정이다. 수십 수백 번의 소나기를 지나고 세찬 파도를 넘은 자만이 가 닿을 수 있는 천국인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피로와 권태로 시들어버린 꽃처럼 말라 비틀어져 떨어질 때……이때 그 꽃의 화려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대신 우리는 그때부터 진정한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랑은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을 인내와 노력으로 최후까지 투병해나가는 기나긴 자기 절제와 인내가 필요한 언약이다. 그 과정에서 이전 아프지 않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이전 건강했을 때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안목이 열려진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익어가며 우리의 사랑은 깊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삶의 신비가 있기에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내릴지라도 그래도 다시 성곽짓기를 계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 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믿음에 매어 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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