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함께여서 좋은 사람들
2017년 10월 15일 청파감리교회 설교자 김기석 목사

입력 Nov 04, 2017 12:41 PM KST

성경본문

롬1:8-12

[나는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 아들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충심으로 섬기는 분이시기에, 내 마음 속을 알고 계십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여러분에게로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신령한 은사를 좀 나누어 주어,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설교문

*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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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로寒露를 지나 상강霜降을 향해 가는 계절이 참 아름답습니다. 산과 들도 가을빛을 머금고 있습니다. '무르익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감이 무르익고, 배와 사과가 무르익고, 들판의 벼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왠지 모를 그리움이 우리 가슴에 깃들 때입니다. 시인 나희덕 선생은 가을을 가리켜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단풍잎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중에서)라고 말했습니다. 평화영성가인 박노해 선생은 '서성인다'라는 시에서 가을이 오면 왠지 창 밖에 누군가 서성이는 것만 같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나가 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방으로 돌아와 홀로 서성인다는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 있어도 뭔가 자꾸 서성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슬며시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 기척은 대체 뭘까요?

"선듯한 가을바람이 서성이고

맑아진 가을볕이 서성이고

흔들리는 들국화가 서성이고

남몰래 부풀어 오른 씨앗들이 서성이고

가을편지와 떠나간 사랑과 상처 난 꿈들이

자꾸만 서성이는 것 같다

가을이 오면 지나쳐온 이름들이

잊히지 않는 그리운 얼굴들이

자꾸만 내 안에서 서성이는 것만 같다"

야외에 나와보니 뭔가 수런수런 움직이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지시나요? 일상의 분주함 속에 파묻혀 지낼 때는 감지할 수 없었던 것들이 한가로움 속에서 혹은 고독 속에서 말을 걸어올 때가 있습니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것 같습니다. 이 계절이 주는 은총을 한껏 누리면서 우리도 자기 나름의 색깔로 무르익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이지만, 그 잿빛 세상을 하늘빛으로 물들이라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 믿음의 소문

오늘은 로마서의 첫 부분을 묵상하면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들은 대개 그가 직접 세운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 쓴 것입니다. 로마서만은 예외입니다.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세우지 않았습니다. 물론 로마 교회에는 바울 사도가 잘 아는 이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문안 인사에서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뵈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 에배네도 등 많은 이들이 로마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들이었습니다. 바울 서신은 대개 자기가 설립했던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신앙적 갈등을 해결하고, 교인들이 품은 신앙적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기술되었습니다. 바울은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기에,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자녀처럼 대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한 말이 전형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고전4:15) 갈라디아서에도 그런 심정이 드러납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4:19).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마음이 참으로 극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자신이 설립하지도 않은 로마교회에 서신을 보냈을까요? 그것은 그의 선교 열정과 연결됩니다. 안디옥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몇 차례에 걸쳐 로마제국의 동편 지역 선교에 나섰던 바울은 그곳에서의 자기 사역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서편 지역으로 선교의 지평을 확장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로마교회의 후원을 얻어 당시에 땅끝으로 여겨졌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파함으로 주님의 명령을 완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서신이 단순히 선교 후원을 요청하는 서신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살피면서 바울 사도의 생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먼저 로마교회 교인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을 언급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그 소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힘이 정의처럼 인식되고 있던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삶에 대한 놀람과 경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을 일러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로마가 누리는 풍요로움은 전쟁과 피정복민들에 대한 착취의 결과였습니다. 로마가 자랑하는 평화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얻어진 그들만의 평화였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을 추구하고, 독점이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고, 폭력으로 얻어진 평화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새로운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방탕하고 음란한 문화의 한복판에서 시작된 소박하고 따뜻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로마 교회를 위해 늘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말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은...내 마음 속을 알고 계십니다"(9)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교인들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한다고 말합니다. 선교 후원 요청을 위해서라고 지레 짐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생각은 조금 더 깊은 데를 향하고 있습니다.

* 이야기의 합류

바울은 로마교회와 교인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까닭을 아주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신령한 은사를 좀 나누어 주어,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11-12)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준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은사가 마치 누군가의 소유물이어서 주고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깊고 부요한지를 밝힘으로 교인들을 그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그런 열정의 배후에 있는 것이 바로 '빚진 자 의식'입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롬1:14)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전파함으로 그는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합니다. 빚진 자 의식에는 공로 의식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야기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미국의 탁월한 작가인 리베카 솔닛은 "가끔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더 큰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김현우 옮김, 반비, 2017년 5월 22일, p.285)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일상의 무게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순간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우울감이 사라지기도 하고, 울혈처럼 우리를 괴롭히던 삶의 무게감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리베카 솔닛의 책을 번역한 김현우 선생은 바로 그런 것을 일러 성장이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이야기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내 이야기의 일부를 비워 내는 것, 그렇게 타인의 어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더 커진 경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위의 책, p.379, 옮긴이 후기 중)

바울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가 합류하여 구원 이야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 또한 그 이야기에 합류하면서 구세주의 구원 이야기는 점점 풍료로워질 것입니다. 바울은 일방적으로 그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 이야기를 경청함으로 자신도 격려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 교회에 불러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눔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고, 인생의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피차 격려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은 참 다양합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다른 이들의 경험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믿음의 지평이 커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런 아름다운 나눔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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