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마음을 성결하게"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Apr 26, 2020 08:40 PM KST

- 신명기 5:12-15, 야고보서 4:8-10, 요한복음 1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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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조선의 선비들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몸과 마음의 자세를 허투루 하지 않고 단정하고 올곧게 지냈습니다. 아무리 더운 여름 날씨에도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버선과 댓님을 제대로 갖춘 자세로 온종일 무릎을 꿇고 공손하고 경건하게 글을 읽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제자 정수칠에게 당부한 말입니다.

"활달하여 자유로움을 좋아하고 구속을 싫어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어찌 꼭 꿇어앉아야만 학문을 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지만 이 말 또한 잘못된 말이다. 무릇 사람은 경건한 마음이 일어날 때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며 꿇어앉은 자세를 풀면 속마음의 경건함 역시 해이해지는 것이다.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말씨를 공손히 지님은 꿇어앉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한 가지 일에 따라 스스로의 지기(志氣)가 드러나게 되니 꿇어앉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태도가 본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그 사람의 태도를 보면 됩니다.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잘 알려주는 구절은 아마 빌립보서 2:5-11의 말씀일 겁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또한 '낮추어'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낮추고 비운 그의 태도 안에 그가 어떤 분이신지 드러났습니다. 실제 몇몇 성경이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구절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같은 태도를 가지십시오"(현대인의 성경)라고 번역합니다. 영어성경에도 그렇습니다.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 NIV / "Have this attitude in yourselves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 NASB).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은 그의 태도에서 드러났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또한 '낮추어' 우리를 채우시고 높이신 구원자 하나님의 인격과 본성이 거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최근 <기독교목회자협의회>라는 단체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한국 교회 영향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한국교회 거의가 '사회적 거리두기'의 동참 차원에서 주일 '현장예배'를 온라인예배로 대체하고 있는 가운데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응답자의 53.7%가 '현장예배보다 만족하지 못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서 70.1%가 '교회에서만큼 집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온라인예배가 현장예배보다 오히려 더 좋았다는 응답은 9.3%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예배를 드릴 때 어떤 태도로 드렸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10명 중 3명 가까이는 교회에서처럼 적극적으로 예배드리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으로부터 자기 교회의 교인의 사례를 들었는데 '누워서 설교만 들었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단정한 옷을 입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던 교인들이 점차 편안한 복장과 자세를 취하게 되고 다른 예배순서는 모두 생략한 채 설교만 듣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예배자'가 아니라 '시청자' 혹은 '구경자'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1-2절). 예수님 당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했습니다. 마카비 왕조 때 화폐의 문장이 포도나무였을 정도로, 포도나무는 유대 민족의 표상이고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번역된 '알레티노스'(alethinos)라는 어휘는 '참되고도 순수한'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너희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에 속했다는 이유로, 혹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자기가 선택받은 백성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포도나무 가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말했듯이 이스라엘은 타락한 포도나무이다. 너희가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사실이 너희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다. 내 안에 거하는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와 참되고도 순수한 교제를 가진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실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4-5절).

당시 이스라엘 농부들은 어린 포도나무를 심고 3년간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했습니다. 더욱 잘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매년 철저하게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성숙한 포도나무 역시 12월에서 1월에 걸쳐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포도나무에는 열매 맺는 가지와 열매 맺지 않는 가지가 있습니다. 농부들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나무의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가차 없이 잘라버립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인 자신에게 붙어 있으나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깨끗하게'(katharos) 된다는 '성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결'(聖潔)이란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야고보 4:8). 처음으로 온라인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지난 3월 1일 주일에 "손 씻으세요"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기억이 납니다. 1백30여 년 전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미신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던 이 나라 백성들에게 '손을 깨끗이 씻으라'라고 가르쳐 역병(疫病)을 물리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약서신의 말씀은 '손을 깨끗하게 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명합니다. 깨끗한 손과 성결한 마음, 두 가지를 모두 가지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카타리사테 케이라스'(katharisate cheiras), 즉 '손을 깨끗하게 하라'는 말씀은 유대교 정결법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제들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모든 유대인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고, 식사 도중에 그리고 식사 후에도 손을 씻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사실 중세시대 유럽에 흑사병(pest)이 돌 때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에게는 이 병이 번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구약의 정결례에 따라 자주 손과 발을 씻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손 씻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여기에 더하여 '하그니사테 카르디아스'(hagnisate kardias), 즉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두 명령이 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손만 깨끗하게 할 것이 아니라 마음도 성결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 사람입니까? '하마르톨로이'(hamartoloi), 즉 '죄인들'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까? '딥수코이'(dipsychoi), 즉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딥수코이'란 본래 통일되지 않고 분열된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특히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어중간한 믿음의 소유자들을 '딥수코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종교적 적당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아니 일찍이 이사야는 이런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을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이사야 29:13). 입술과 마음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합니다.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세상 안의 존재'(In der Welt Sein)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야고보 4:4)이라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라"(야고보 4:8)고 말합니다. 이 가르침은 세상을 등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속세를 떠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나온 존재'(ecclesia,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 6:24)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한 TV 드라마(JTBC, <부부의 세계>)처럼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태도가 그 사람의 본질입니다. '딥수코이,' 즉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야고보는 마음의 '성결'을 주문합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 즉 온전한 한 마음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분명한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자에게,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요한계시록 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포도나무의 가지를 깨끗이 잘라내실 것입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한 무명(無名)의 시인이 쓴 <주님, 이 세상에선>입니다. "주님, 모두 높아지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 저만 홀로 낮아지기란 정말 힘겹습니다. / 모두 잠든 세상에서 / 저만 홀로 깨어 있기도 괴롭습니다. / 그저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 시류(時流)에 몸을 맡기고 싶은 마음도 간절합니다. /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기보다는 / 세상의 종이 되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습니다. // 주님, 지금은 밤이 깊어도 / 이 세상의 주인이신 당신이 곧 오신다는 /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하소서. / 그 기다림이 아무리 힘들어도 / 결코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않는 / 슬기롭고 충직한 종이 되게 하소서." 시인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마음'을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달, 코로나 19 '때문에'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19 '덕분에' 우리는 자신이 진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냥 교회만 나가는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코로나 19 '덕분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실로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습니다(방선기, "코로나 재앙 '때문에'와 '덕분에'," 국민일보 2020.4.21.).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초미세 바이러스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멈추어 서서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얼마나 많이 이룰 것인가?'나 '얼마나 많이 생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사랑할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이 나눌 것인가?'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입니다.

"삶의 끝에 서면 / 너희 또한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 너희는 행복했는가? / 다정했는가? / 자상했는가? // 남들을 보살피고 연민하고 이해했는가? /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 //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고, / 마침내 자신의 영혼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쇠렌 키르케고르, <천국으로 가는 시>)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품성의 사람입니까? 어떤 태도의 인간입니까?

삶은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태도가 본질입니다. 신앙도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너희는 생활 태도를 고쳐라... 이것은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한다마는 그런 빈말을 믿어 안심하지 말고 너희의 생활 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마라... 다른 신을 따라가 재앙을 불러들이지 마라... 나는 이 백성의 마음과 생활 태도를 변화시켜 언제까지나 나를 공경하고 대대손손 잘되게 하여주리라"(예레미야 7:3-6, 32:39, 공동번역). 실로 "주께서는 사람의 생활[삶의] 태도를 낱낱이 살피셨다가, 그 생활[삶의] 태도와 행실에 따라 갚아주시는 분"(예레미야 32:19)이라고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 2:5, 개역개정)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같은 태도를 가지십시오"(현대인의 성경)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취하신 태도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9-11).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신 그 태도(attitude)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그분의 본질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품성과 본성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군림하는 분이 아니라 섬기는 분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마태 20:28)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오만한 통치자가 아니라 겸손한 종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태 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예언처럼(스가랴 9:9)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마태 21:5)습니다. 아니 성경은 겸손이 하나님 당신의 본성임을 증언합니다. 시편 113편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4-8절)신다 했습니다.

겸손은 '마음의 가난'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성결한 마음입니다. 오직 주님만 섬기는, 깨끗하고 거룩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마태 18: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 23: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야고보서도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촉구합니다. 이것이 마음이 성결한 자가 받는 복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역설입니다.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와 역설을 홍수희 시인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난으로 나는 당신을 얻겠습니다 / 땅뙈기도 없는 새가 하늘을 다 누리듯이 / 볼품없는 민들레가 햇볕을 다 누리듯이 / 못생긴 물고기가 바다를 다 누리듯이 / 나에게는 당신만이 주인이게 하겠습니다 / 당신만 내 곁에 / 계셔주시면 / 세상의 온갖 보배도 내 것이오니 / 당신만 내게 있으면 내 가난함이 어찌 가난이겠습니까 / 가난으로 나는 온 하늘의 별을 사겠습니다 / 가난으로 나는 온 누리의 주인이 되겠습니다"(홍수희, <가난으로 나는>). 여러분은 이런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런 성결한 마음을 속에 가지고 계십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3월 첫 주일부터 오늘까지 만 두 달 아홉 주일을 온라인예배로 드렸습니다. 5월의 첫 주일인 다음 주일부터 '모이는 예배'를 재개하려 합니다. 모이는 예배를 다시 시작해도 온라인예배를 병행하려 합니다. 교인 중에 자가격리자, 유증상자, 고령자, 어린아이가 있어서 또는 다른 이유로 예배당에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운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교인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서 온라인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시 만날 때 우리를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좋겠습니다. 지난 두 달, 대학교회는 주일예배를 멈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일성수(主日聖守),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과거 유대인들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 '거룩한 공간'(예루살렘 성전)에 모일 수 없을 때 '거룩한 시간'(안식일)을 지켰듯이, 우리도 바이러스의 감염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거룩한 공간에 모일 수 없을 때 거룩한 시간을 지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모든 노력은 신앙의 자세와 태도를 흩뜨리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염병은 이번이 끝이 아니라 더욱, 자주, 그리고 다양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터넷 공간이라는 '새로운 일상'(new normal)에 적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설교 서핑(surfing)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시청자나 관중(觀衆)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편 5:7)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으나, '흩어지는 교회'로서 일상을 거룩하게 하며 살아야 하겠으나,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의 친교를 소중히 여기며,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 이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조선 최고의 지식인, 하지만 정조 사후 신유박해 때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오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세례명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인(천주교인) 정약용, 그는 '어찌 꼭 꿇어앉아야만 학문을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사람은 경건한 마음이 일어날 때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며 꿇어앉은 자세를 풀면 속마음의 경건함 역시 해이해지는 것이다." 여러분, 그런 속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자세, 태도란 형식에 속하지 않고 신앙의 알맹이이며, 속마음이며 본질입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다니엘 6:1). 사도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에베소서 3:15, 사도행전 20:36, 21:5). 베드로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사도행전 9:40). 무엇보다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누가 22:41)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속마음에 경건한 마음이 일어나면 우리는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그 속마음을 간직하십시오. 그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손을 깨끗이 씻으며, 마음을 성결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주 앞에서 무릎 꿇고 자신을 낮추면 주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에게는, 오늘의 교독문(시편 103편)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여호와의 의가 여러분의 자손의 자손에게 이를 것입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음에 감사하며, 항상 부족함에 기뻐합니다. 그 없음의 자리는 주님으로 채우고 그 부족함을 이웃으로 채웁니다. 영생은 소유할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니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려고 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교육원, 2019 대림절 묵상집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중에서). (2020.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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