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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김수연(이화여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 4학기, 조직신학 전공)

입력 Nov 07, 2020 05:47 AM KST
corona
(Photo : ⓒ새물결플러스)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

지난 3백 일간 인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마주하고 있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그것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은 지구의 세계화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으며, 그로 인해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민낯을 마주할 수 있었다. 특히 사회 전반적으로 과잉 미국화되어 있는 대한민국은 미국에 대한 '묻지마 선망'에 합리적인 의심을 품게 되었다. 지난 3백 일간, 그리고 현재에도 인류는 분명 코로나19 이전의 삶과는 다른 세상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때에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간단하지 않은 이 질문에 예언자적 통찰로 읽는 이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주는 책이 나왔다. 이도영 목사가 지은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가 그것이다.

저자는 코로나19 이후가 어떤 시대가 될 것이며 한국교회의 과제는 무엇인지에 관해 해박한 지식과 급진적인 비전으로 글을 전개해나간다. 무엇보다 책 표지에 "공교회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공공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망한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표방하면서 이 글을 가볍게 읽고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저자는 전통적 신학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의 '낡은 생각'에 일침을 가함과 동시에 뼛속 깊숙이 익숙해 있는 그것들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망한다고 단언한다. 이렇듯 이 책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드러난 한국교회의 민낯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한국교회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기존 개념을 뒤집는 몇 가지 단어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서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코로나19 이전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다른 개념이었다. 오히려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 내용 면에서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기피할 때 하던 행동 양식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는 오히려 서로를 걱정해주고 소중히 여기는 행동이 되었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기꺼이 용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기존 개념을 뒤집는 사고는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준다. 바로 '생각의 전환'이다. 저자는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저술한 책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로 사용하면서 그 사고의 그물망에서 건져 올린 새로운 생각들로 기독교가 십자가의 종교이자 부활의 종교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가운데 해답을 찾고 있다.

이 책은 모두 6장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부분 즉 제1~3장에서는 현재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있으면 뒷부분 즉 4~6장에서는 앞으로의 전망과 비전을 담고 있다. 우선 앞 1~3장에서는 사상 초유의 사태인 코로나19 팬데믹을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코로나19 사태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인가, 또 기독교는 어떻게 성자적 영성과 혁명가적 영성으로 코로나19를 보아야 하는가가 차례로 다뤄진다. 기후 위기는 왜 발생해서 코로나19 팬데믹을 가져오게 되었는가?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교수(이화여대 에코과학부)는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팬데믹을 설명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알려진 박쥐는 주로 열대지방에 모여 살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평균보다 온도가 높아진 온대지방으로 그 서식지를 확장하고 있다. 그런데 인류의 인구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온대지방의 생활공간이 부족하게 되고, 인류는 부족한 생활공간 확충을 위해 야생동물 서식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식지를 잃게 된 박쥐가 떠돌다가 천산갑과 같은 야생동물들과 접촉하게 되고, 그러한 야생동물을 식용으로 즐기는 사람들에게로 바이러스가 옮아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후변화와 생물의 다양성 그리고 팬데믹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도영 목사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은 기후위기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 기후위기는 또 다른 코로나19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면서 기후위기의 저변에는 불평등과 분배정의의 문제가 깔려있으며 코로나19로 인해 불평등이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평등을 덜 초래하는 경제를 만들기 위해 기본 소득 제도를 도입하고 부의 '재분배'가 아닌 부의 '사전 분배'를 위해 최고 임금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불공평한 약육강식의 사고가 세상을 지배해왔음에 주목하고 교회도 이러한 승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음을 깊이 반성한다. 저자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 『공생자 행성』, 『초협력자』 등의 여러 저서를 예로 들면서 인류 문명의 진화 과정은 경쟁이 아니라 공존을 통해 발전했으며 오직 협력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세상은 '공존하는 세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함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후위기와 그로 인한 코로나19 팬데믹에 기독교는 왜 '특별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서구 기독교인들은 '역사'를 자연보다 우월한 인간의 영역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현존하는 확실한 영역으로 이해한 반면 '자연'을 인간다움과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부정해야만 하는 영역으로 간주했다.(로즈마리 류터, 『가이아와 하느님』, 245.)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서구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구분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하는 데 적극 동조했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인간중심주의를 지향해왔다. 인간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였던 반면에 인간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 대해서 소홀히 해온 것이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모든 생태계가 위협받고 인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시점이 되어도 그리스도인들의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체계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원죄'의 교리와 '하나님의 종'이라는 교리는 인간의 죄성과 무기력을 강조하여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켰다. 코로나19가 세계를 점령하기 몇 달 전 교황은 "생태적 죄를 원죄에 포함시키라"고 선포하며 '생태적 전환'만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이보다 앞서 정교회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우리는 지구를 무신론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하면서 인류의 회심과 생태적 전환을 호소한 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있다. 현재 인류가 봉착해 있는 기후위기와 그로 인한 코로나19 팬데믹에 기독교가 왜 특별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근대 이후로 인류의 삶의 목표는 '성장'이었다. 무한한 성장이라는 모토는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인 양 들리기까지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희망에 취해서 그것의 엔트로피를 간과한 채 수 세기 동안 멈추지 않는 기관차와 같이 달렸다. 그 결과 다다른 곳이 지구 전체 생명의 위기이고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팬데믹 상황이 되자 매연과 공기 오염이 줄었고, 인간의 움직임이 멈추자 지구가 깨끗해졌다. 중국의 탄소 배출이 25% 이상 줄어들면서 대기의 질이 깨끗해졌고,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던 베네치아 운하에는 60년 만에 물고기가 돌아왔다. 결국, 지구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은 인간이라는 이도영 목사의 지적이다. 그러므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는 생태계를 파괴해가며 무한한 성장을 이루고자 현대 인류 문명을 향해 지금이라도 생명을 사랑하는 생태적 삶으로 전환하라는 경고가 된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대한 전복적 사고와 근본적인 전환을 모색하는 혁명적인 영성을 가지고 생태 친화적인 문명으로의 전환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단지 인간의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전인격적인 구원, 사회적 차원의 죄악으로부터의 회복, 그리고 무엇보다 땅의 회복, 즉 새 창조를 말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개인의 구원을 넘어 하나님 창조세계에서 모든 피조물의 복지를 의미한다면, 기후변화, 식량, 에너지, 소비주의 등 생활방식의 문제는 곧 신학적 문제가 된다. 성서적 구원은 개인, 공동체, 사회, 문명, 무생물, 동물, 식물, 지구, 우주 등 만물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우주적이다.

한국교회, 공교회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공공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망한다

저자 이도영 목사는 성경으로 돌아가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고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그린 뉴딜'과 '사회적 뉴딜'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될 것을 예측하고 교회가 어떻게 이를 먼저 가시적으로 보여줄 것인지 치열하게 기도하며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교회 건물을 재생 에너지 시스템으로 바꾸고, 교회 내에 환경 선교사를 세우며,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에서 진행하는 '지구돌봄서클' 같은 다양한 교육 모임을 만들어 생태적 사고에 대해 배우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교회문화를 생태 친화적 문화로 바꿔가며, 농촌과 도시 연결망을 통한 '녹색마켓'을 각각의 교회와 교회 연합이 만들어내고, 동물권 운동이나 채식주의 운동을 펼치며, '플라스틱 프리' 운동을 전개하거나 '환경주일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한다. 그는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에서 펼치고 있는 40일 혹은 1주일의 '탄소 금식 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한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음을 실천하는 생태회복 공동체가 될 때 진정한 교회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저자는 "리오리엔트가 포스트-코로나의 핵심 징후"라는 소제목으로 열고 있는 4장에서 세계사가 철저히 서구 중심으로 쓰였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여기에는 '우월한 유럽이 미개한 동양을 문명화했다'라는 패러다임이 작동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자본주의의 탄생, 서양의 발흥,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로 통합된 아시아, 서양의 합리주의와 동양의 신비주의, 그리고 문명화의 사명 등의 수많은 담론이 여기서 유래한다. 그중 저자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가 쓴 『리오리엔트』(이상,2003)를 인용하면서 서방이 동방을 앞선 건 길게는 지난 2백 년이고 짧게는 지난 100~150년에 불과하다며, 지금 우리 시대는 유라시아가 다시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될 것을 예견한다. 실상 산업화나 민주화는 모두 서방의 것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 서구 근대 자본주의 문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을 넘어서는 비전을 가저야 한다고 저자는 제안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서구와 동구뿐 아니라 서방과 동방을 통합할 수 있는 숨겨진 문화적 역량이 있고, 이것이 코로나19 팬데믹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우리의 역량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기독교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교회는 헬라인과 유대인,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되게 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품고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자신을 헌신할 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의 흘린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급진적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도영 목사는 이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며 이 비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리오리엔트'의 시각까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러한 웅대한 비전을 품고 대륙의 길과 해양의 길을 따라 이미 들어가 있는 교포들과 교인들의 연대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 평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초기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실현하는 공동체였다. 이런 초기 교회의 모습은 성서가 말하는 겨자씨와 누룩을 닮았다. 겨자는 군집으로 모여야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 공중의 새가 깃들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교회로 비유되는 누룩은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 세상을 바꿔버리는 위험한 존재이다. 초기 교회의 이런 믿음과 삶을 따라 오늘의 기독교는 이미 예견되었던 이 재난에 대안을 제시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비전을 실제로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늘의 한국교회는 영혼 구원과 교회 생활 빼고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극우 이데올로기에 동화되어 있다. 저자는 이것이 큰 문제라고 우려를 표명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진보의 가치를 흉내 내며 자신의 문화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반동성애 운동이나 반이슬람 운동에 혈안이 되지 말고 공동체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어떻게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저자는 호소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극단의 왕국에서도 공동체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진짜 보수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교회가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백향목의 영광을 드러내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코로나19가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처럼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로 몰래 들어가 세상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누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 이도영 목사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공교회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진정한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이며, 진정한 교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성서의 도전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청년들이 모두 떠나고 나이트클럽이나 이슬람사원으로 변하고 있는 서구의 교회들처럼 한국교회에도 희망은 사라질 것이다. 저자의 말을 듣고 있으니 메리 엘리자베스 무어의 한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한다.(Mary Elizabeth Moore, Ministering with the Earth [St. Louis : Chalice Press, 1998], 143-169.) 그는 환경에 대한 반성, 성찰 정도의 깨달음은 미래를 향하는 통로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과 적극적인 실천으로의 변화 없이 기존의 프레임 안에서는 절대로 사람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변화라는 것은 도전적이다. 때문에 변화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 권력을 재분배하고, 보다 나은 사회조직을 추구해야 하는 압력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는 기존의 시스템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스템의 길을 열어준다. 한국교회는 위험을 무릅쓰는 자, 즉 '파라볼라노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재난 한가운데서도 우리를 통해 일하실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강제 멈춤'으로 소비 욕망을 꼭 필요한 것으로 제한하거나 미루는 행동 패턴을 생활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에 있어 가족을 위주로 한 소규모 공동체 중심의 활동을 하게 되었다. 현재 지구가 겪고 있는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실천과제들, 즉 소비줄이기와 지속가능한 공동체로의 전환을 인류가 반강제적이지만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생존을 위한 프락시스'라고 해야 할까. 인류는 코로나19를 함께 겪으면서 새로운 사회와 경제를 바라보고 이미 방향키를 틀고 있다. 이제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 역시 무엇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인지 새로운 해석과 전망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바로 이 시점에 이도영 목사의 『코로나19 이후 시대와 한국교회의 과제』는 한국교회에 큰 성찰을 안겨주는 선물과 같은 책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로부터 값진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느낌이다. 코로나19 시대,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이 시대에 교회 현장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시원한 단비와 같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신학생들에게는 긴 어둠의 터널 끝에 뿌려지는 빛다발이 되어 줄 정말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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