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입력 Nov 22, 2021 10:39 AM KST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역대지상 21장 1-8절, 시편 119편 89-96절, 고린도전서 7장 17-24절

[신앙은 특수인식의 활성화]

10월 초에 SBS Biz의 <같이 찾는 인생 가치>라는 프로그램에 종교학자이신 오강남, 성혜영 교수님이 출연하셔서 이 시대에 위기를 맞고 있는 종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대담에서 오강남 교수께서 종교인들의 체험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두고 "특수인식의 활성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즉 종교인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의 가치관과 믿음 또는 깨달음을 가지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삶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지식과 정보의 양과 질이 다르고, 또 취향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나 사물을 보고 느끼는 바가 다릅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그 표면적 의미만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속 깊은 뜻을 살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좋은 것이 나쁜 것이고, 나쁜 것도 변하여 좋은 것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한 사건에서 양면을 함께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때도 있지만, 선과 악의 규정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들을 보면서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이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의 관점을 늘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이 때로 더 중요한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그것을 끄기에 급급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 살아가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깊어지면 일반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깊은 심미안(審美眼)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인만이 지닌 특수 인식이 활성화 됩니다.

우리는 3년 성서통독에 따라 11월 6일부터 이번 주말까지 시편 119편을 매일매일 읽고 있는데, 이 시편은 말씀 하나 하나가 깊은 신앙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제가 다시 한 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하늘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님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릅니다. 땅의 기초도 주님께서 놓으신 것이기에, 언제나 흔들림이 없습니다. 만물이 모두 주님의 종들이기에, 만물이 오늘날까지도 주님의 규례대로 흔들림이 없이 서 있습니다. 주님의 법을 내 기쁨으로 삼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법도로 나를 살려 주셨으니, 나는 영원토록 그 법도를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니,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나는 열심히 주님의 법도를 따랐습니다. 악인들은, 내가 망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나는 주님의 교훈만을 깊이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리 완전한 것이라도, 모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은 완전합니다.

이 시편의 주인공은 악인들에게 시달렸고, 고난을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세상 만물이 주님의 규례에 따라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자신도 주님의 교훈을 명심하며 주님의 법도를 따랐습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주님의 법을 기쁨으로 삼았기에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계명만이 완전하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이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유혹과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넘어가지 않고,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주님의 말씀에만 굳건히 설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날마다 감사하며,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본이 될 것입니다.

[섰다고 생각할 때 특히 조심하라]

그러나 우리들은 늘 넘어지고 실수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늘 조심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손수 영원한 계약을 맺어 주신 다윗 왕이 실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겼다고 하지만, 결국 선택은 다윗이 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 이어 이스라엘과 온 유다의 왕이 된 후,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의 성으로 옮기고(역대상 13:1-14, 15:25-16:43), 블레셋과 암몬과 시리아와 랍바 등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렇게 승승장구 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부강해지자, 인구조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이스라엘에는 전염병이 돌았고, 칠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쓰러졌다고 성경은 보고하고 있습니다. 김학로 장로님께서 이 구절을 읽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게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다윗이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명하는데 이 행위가 하나님을 화나게 한 것으로 기록하는데, 어찌 백성 7만 명이 죽어야 될 정도로 큰 잘못인지 썩 이해가 다가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인구조사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화가 나신 것일까요?

구약성서 곳곳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셀 수 없이 많은 백성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러했고, 모세와 여호수아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매우 약하고 소수 민족이었던 히브리 백성들은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언제든 멸절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세력과 이집트 지역의 세력, 그리고 지중해 세력이 서로 싸우는 일이 생기면 그 한 가운데 끼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나라의 안위를 늘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백성들의 신앙은 흔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생각보다는 어느 편이 더 센가를 보면서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숫자로 확인하고 싶은 다윗의 불신앙을 드러냅니다. 일개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일국의 왕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더욱 굳건하고 안정된 나라를 만들어 주셨음에도 여전히 다윗이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숫자를 헤아렸기 때문에 이런 벌이 내렸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을 또 다른 각도에서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동안 겪은 모든 고난을 헤쳐 왔습니다. 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승전을 하고 남의 나라를 자신의 밑에 두자,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쟁이 아니라, 군인이 될 만한 사람들의 숫자를 세면서 자신의 전쟁을 하고 싶은 욕망에 빠져 들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이해한다면, 다윗은 자신의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다가, 이제 왕위에 오르자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충신이었던 요압마저도 염려하고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셨고, 결국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와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한국교회와 생명 종교의 삼중 요소]

제가 지난 주에 설교하면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 중 한 분이신 한완상 전 부총리는 <예수 없는 예수 교회>라는 책을 낸 적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덩치가 커지고, 돈이 쌓이고, 권력이 생기자마자 다윗과 같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 정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 보다 더 세속적이고, 일반 시민사회보다 더 부도덕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코로나 19와 더불어 거세게 한국 개신교의 빠른 쇠퇴와 몰락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휘몰아치는 풍랑 속에서 올곧게 서고자 했던 교회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의 저자처럼 우리 모두가 다시 주님의 법도에 따라 옳게 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기회를 주실 때에 놓치지 않고 잡는 것이 지혜인데, 그런 지혜는 성공을 목표로 삼고 목회했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저는 총회나 노회에서 제게 맡겨진 일들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하는 편인데, 어떤 것은 스스로 나서서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총회 영성수련원의 활동입니다. 오늘날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고, 여기에 함께 참여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진실하게 주님의 길을 가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지난 11월 12일에 총회영성수련원 주관으로 "코로나 이후의 영성, 신학, 그리고 교회"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이 열렸습니다. 박사 두 분, 목사 두 분, 합해서 네 분의 발제가 있었고, 제가 논찬자로 참여했습니다. 다들 좋은 내용이었지만 특별히 총회 영성수련원 원장이신 홍순원 목사님의 발제가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홍 목사님의 발제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퇴행적 모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오래도록 고민해 오셨고, 그 결과물을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교회와 신학교육, 교단의 정책의 변화 등 매우 거대한 체제의 변혁을 요청하는 것이기에 다 말씀 드릴 수도 없고, 과연 실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국 개신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에 대해서는 매우 적합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발제문을 읽고 발표를 들으면서,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지난 목회가 그래도 방향을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나아가 앞으로 더 견고하고 세밀한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특히 머릿속에 박힌 것이 있는데, 제가 지난 주에 목회마당에 소개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 종교의 삼중요소"입니다. 한국 교회가 퇴행 종교가 아니라 살아 숨 쉬고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생명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중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솟대'와 '횟대', 그리고 '저잣거리'라는 비유로 표현됩니다. '솟대'는 까마득한 시절부터 우리들 마을에 서 있던 높은 나무인데, 그 꼭대기에는 기러기나 새가 한 마리 올려 있고, 이 솟대는 그 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합니다. 높이 솟은 장대 꼭대기의 새는 하늘과 땅을 잇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신성한 솟대에는 단 한 마리의 새 밖에는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홍순원 목사님은 이 솟대는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수도원 같은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에는 매우 적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솟대와 같은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력을 지닌 소수의 교인들이 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할을 감당하려면 높이 솟구치려는 철저한 신앙의 훈련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횟대'입니다. 이것은 양계장에 있는 것으로 흙 밭을 헤집고 다니며 놀던 닭들이 저녁이 되면 닭장 안으로 들어가 쉬는 공간입니다. 횃대에 올라가야 땅에 물기가 있어도 젖지 않고, 종종 깊이 잠들어도 어린 닭을 파먹는 쥐로부터도 안전하게 됩니다. 이 횃대는 솟대와는 달리 높지 않습니다. 닭들이 한 번만 폴짝 뛰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 닭이 한꺼번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 횟대의 역할은 교인들 전체가 해야 합니다. 세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세상에는 물들지 않은 사람들, 솟대보다는 낮지만 세속보다는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잣거리'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때때로 술판, 주먹질, 온갖 욕설, 자리싸움, 호객행위가 일어납니다. 우리 세속의 밑바닥 현실에서 벌어지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 '저잣거리'는 샤머니즘과 생명 종교를 구분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종교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목회자와 사제는 그저 복을 빌어주는 무당일 뿐입니다.

홍순원 목사님은 한국 개신교회는 솟대는 전혀 없는 채, 도리어 저잣거리에다 자기의 자리를 두고 '축복과 성공, 성장'을 그 신앙의 내용으로 삼아 왔다고 비판합니다. 이 때문에 횃대는커녕 아예 교회가 저잣거리를 양산하는 온상이 되고 말았다고 탄식합니다.

저는 이런 목사님의 분석이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구조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신앙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구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언제나 저잣거리가 될 수 있고, 삶 속에서 그런 저잣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삶의 한복판에서 횟대의 자리를 마련하려면 반드시 솟대를 세우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높이 솟은 공간과 시간을 반드시 내어야 하고, 그래서 세속의 어떤 것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시공간에서 길러진 신앙 속에서만 우리는 신앙이 주는 고귀함과 거룩함을 얻고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반드시 신앙의 높은 수준을 삶으로 보여주는 솟대 같은 존재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분들이 교회의 지도력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교인들은 이 분들의 지도를 받아서 횟대로 모여 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저잣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횟대인 교회는 솟대의 힘으로 저잣거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하고, 인내하고 연단하면서 선교를 해야 합니다.

[부름 받은 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라]

오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처지 그대로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조언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 나라가 곧 도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이 조언이 지니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름은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삶의 위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역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루어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배웠든 못 배웠든, 가졌든 못 가졌든, 권력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은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특수인식의 활성화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느냐 삼지 않느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는 가르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회사원과 그렇지 않은 회사원은 일 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사람과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사회적 지위는 노예이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자유인이지만 돈에 얽매이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고, 교만하거나 자기를 비하하면서 종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과 다릅니다. 자유인이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 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으로 섬기면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세상과 사람을 위해 섬기러 오신 예수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아닙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름과 이끌림에 의해 살아간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걱정도 염려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으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봅시다. 최근에 청년들이 독서모임을 매우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청년 독서 모임 후에 한 청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참 오랫동안 예수를 믿는다 하고 교회 봉사도 하고 있지만 sns에 교회나 종교 이야기가 하나 없는 것은 부끄럽게도 공개적으로 뭔가를 올릴 만큼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 요즘 교회 청년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이 정말 좋아서 올리는 구구절절 피드(백)

회사에서도 친구들과도 심지어 아파트 주민들과도 독서모임을 해봤지만 이번 모임 정말 좋다. 살아온 인생이 다른 만큼 모두의 의견이 같을 수 없는데 내 이야기를 하기에만 바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진심으로 공감하고 솔직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이 얼마나 될까?

교회와 신앙이 아니었다면 만나기 참 어려웠을 조합이라 더 감사하다. 얼마나 좋았는지 끝나고도 한참을 남편에게 조잘조잘 공유하고, 이어서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거 너무 좋아.

이 청년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자세와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편린을 살짝 보았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이런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한 몫을 담당합시다. 거대한 계획도 필요 없고,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계신 그 자리에서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명하였듯이, 오늘 저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다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를 불러 주시는 하나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함께 품게 하시고, 주님과 더불어 해산의 고통을 겪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세계를 구원하고, 땅과 하늘을 화해시키는 그 꿈을 꾸게 하시고, 주님의 형상으로, 주님의 지혜와 능력, 사랑과 정의를 이루어가는 사역에 불러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르심 받은 그대로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참된 신앙 안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느끼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물어가는 한 해의 끝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를 기억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겪는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때로 주님께 소홀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새 시대에 적응하며 또 다른 내일을 다시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창조절을 맺고 이제 대림절을 준비합니다. 코로나 19의 종식을 꿈꾸며 일상의 회복을 기대해 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잘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무엇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인생 경험 들 중 가장 중요한 경험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주님께서 물으실 때, 주님께서 요구하실 때! '아멘'으로 응답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주님의 부르심을 감지하고 응답하여 주님의 뜻을 이뤄가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오피니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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