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김경재 박사 칼럼] 칸트의 계몽주의에서 본 한국사회와 교회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혜암신학연구소 편집고문

입력 Nov 29, 2021 02:47 PM KST

1.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핵심개념: 이성과 자율

계몽주의(Enlightenment)란 무엇인가? 계몽정신은 유럽지성사 혹은 사회사에서 17세기-18세기 약 200년 동안, 독일 프랑스 영국 화란 등을 중심으로 활발했던 정신 혁명적 시대정신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유럽사회 발전사에서 일어난 어느 특정 시대 한 가지 시대조류라고 우리는 가볍게 생각하거나 오해한다.

그러나 계몽주의 근본정신은 유럽사회발전사에서 시대정신일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어떤 인종의 사회라 할지라도 그 국가사회나 문명이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화된 사회, 개명된 사회, 열린 성숙한 사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판단의 척도가 된다. 그렇기에 계몽주의 정신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겉으로 근대화를 이룬 후기산업사회(일본), 공산주의 혁명을 이룬 사회주의 사회(중국), 시민혁명을 통해 이룬 민주화 사회(한국)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주 많다. 계몽주의 정신이 사회구성원 전반에 스며들지 아니한 사회는 닫혀진 사회, 미성숙한 사회, 덜 개명된 사회, 권위주의와 온갖 현대판 우상들이 득실거리는 '계몽주의 이전시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현대교육을 받은 한국 지식인들 중에서도 17-18세기 어간에 유럽사회를 근본적으로 탈바꿈 시킨 계몽주의(啓蒙主義)와 한국 개화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기에 일어났던 계몽운동(啓蒙運動)을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후자 곧 한국 개화기에 발생한 계몽운동은 외세침입에 저항하여 일어난 국권회복운동으로서 계몽운동은 나라와 역사의 주체인 민중 혹은 국민 대다수를 계몽되어야 할 대상으로 전제하고, 앞선 지식인들이 국민의 무지를 '유식한 개화된 민중'으로 바꾸려고 교육사업, 자강언론, 물산장려, 애국 애족을 강조하던 운동이 계몽운동이다. 대한제국 시대와 5.16 군사혁명 시대에 새마을 운동의 성격 같은 것은 계몽운동이지 이글에서 다루려는 계몽주의(enlightenment)와는 전혀 다르다.

계몽운동 거기에는 항상 우매한 대중을 영도한다는 영도자 숭배라는 일종의 영웅주의, 애국주의, 개인 인간 그 자체보다 국가를 신성시하는 국가주의와 부국강병론, "잘 살아보세" 표어가 상징하듯이 의식주 욕망충족을 인의(仁義)보다 중시하는 물질주의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계몽운동(啓蒙運動)에는 계몽주의(啓蒙主義)라고 하는 위대한 시대정신의 혁명은 없었다. 그것의 부재(不在)가 오늘도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계 혼란과 시대착오적 퇴행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2.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본질과 이성(理性)에 대한 이해

17-18세기 계몽주의의 열쇳말(Key word)이 이성(理性, reason)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성이란 무엇인가? 이성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성 기능은 한계가 있는가 없는가? 등등 곰곰이 생각하면 간단한 질문이 아니다.

이성(理性)이라는 단어 중에서 이(理)는 한자 옥편에 보면 "바르다(正也), 길이다(道也), 다스리다(治也)"등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어휘로서 도리(道理), 이치(理致), 이론(理論), 논리(論理), 합리(合理), 이상(理想)등의 어휘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이 세상 만물 곧 우주로부터 사람 마음과 정신 그리고 티끌먼지에 이르기까지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있지 않고 어떤 '질서'(秩序)와 법칙(法則)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서양 그리스(헬라) 사람들은 로고스(Logos)라고 했고 중국 한자문화권에서는 리(理)라고 했다. 그 로고스와 리(理)는 사람에게 후천적으로 가르쳐 주거나 주입시켜서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 태어날 때부터 인간본성 속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해서 이성(理性)이라 불렀다.

이성(理性)은 인간 마음의 또 다른 특수 기능인 지성(知性), 감성(感性), 도덕성(道德性)보다 더 근원적이고 숭고하고 신령한 정신기능인 것이다. 그것은 광막한 우주를 탐구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차려 느끼며, 옳고 그른 것이나 추하고 아름다운 것을 분별하며, 거짓권위와 우상숭배에 저항하는 성격을 지닌다. 틸리히는 그래서 이성 기능에는 존재론적 기능, 직관적 기능, 비판적 기능, 계산적 기능이 있다고 요약했다.

진정한 계몽주의 정신의 핵심 본질은 칸트가 간략하게 한 문장으로 압축 표현한 대로 "계몽(Enlightenment)이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이성의 자율적 힘을 행사하여 인간이 미성숙상태(未成熟狀態)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으로나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책임적 자율성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책임지는 삶을 영위하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이 미성숙 상태를 극복하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연령이 18세 이상이 되어 한국사회에서 사례처럼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선거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연령이 30세, 50세, 60세가 되어서도 자기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책임질 줄 모르면 미성숙한 인간이요 아직 계몽되지 못한 사람이다. 능력 있고, 권위 있는 다른 사람들 예들면 부모, 종교성직자, 정치적 영도자, 회사와 관료사회 상사, 군대상관, 특히 언론의 이념편향적 논조 등을 더 신뢰하고, 자기주체적 판단 결정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계몽주의 이전시대 사회인 것이다. 계몽주의 핵심 열쇳말이 '이성과 자율'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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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김진한 기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장공기념사업회 이사장)가 발언하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 정신의 핵심이 '이성의 자율(自律)'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율(自律,autonomy)은 자의(恣意) 가 아니다. 자의(恣意的) 행동이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내 맛대로, 내 멋대로 말하거나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지만, 자율적(自律的) 행동이란 자기 맘 속에 있는 이성의 명령, 양심의 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과 책임성도 따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성의 자율'을 포기한다. 무지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성과 용기(勇氣)가 부족하고 사리분별 하는 노력이 귀찮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들, 정치모리배, 사이비 언론매체, 대중 선동가들은 그 틈새를 노린다. 온갖 언론 매체를 통해 진실과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풀리고, 호화롭게 포장하여 선전한다. 우중(愚衆)은 판단 능력도 약해지고 상업방송과 특정 정당의 정치선전의 지속적 세뇌작용(洗腦作用)에 중독되어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증오심과 적의(敵意)에 맘이 불탄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올바른 애국심과 정의심에 열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우상들과 독재자들의 밥이 된다. 인간다운 삶은 사라지고 "만인이 만인에 대한 늑대" 사회가 된다. 이성이 지배하는 바르고, 밝고, 투명하고, 공정하고, 서로 공경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아니다. 시민들의 이성이 '자율적 판단 능력'을 상실하면, 특권층 무리들 특히 판검사, 변호사, 국회의원, 종교성직자, 교수지식인 같은 힘 가진 사람들이 국민을 우롱하는 대낮의 뻔뻔스런 행위가 기승을 부린다. 예들면 '검찰의 고발사주 사건'이나 '성남시 대장동 부동산 개발'을 둘러싼 특권층의 탐욕행각이 뻔뻔스럽게 자행된다. 가진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서로를 비인간화시키는 비극적 사회단계로 치닫는다.

이러한 어둡고 우리 맘을 슬프게 하는 부정적 사건들이 지속하는 근본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계몽주의 시대정신'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류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계몽된 인간이라는 보장은 없다. 도리어 그들이 쌓은 특별한 지식을 동원하여 '반계몽주의적 행동'을 강화하는데 사용한다. 반계몽주의적 집단의식의 특징은 '정치적 영도자, 영웅주의'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제3독일제국에서 히틀러의 독재, 북한 사회에서 3대 김일성 일가의 태양 같은 어버이 수령론(首領論), 이승만 국부론(國父論)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근대화 영도자론(領導者論)은 모두 미성숙한 계몽주의 시대정신을 철저히 거치지 않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가오는 2022년 3월 한국 사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유사한 반계몽주의 시대정신이 발광하고 있음은 심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갈파했다. 오늘날 한국 국민이 진정 '생각하는 백성'일까? 냉철한 이성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 민족의 고난과 지속되는 비극의 원인을 생각하고, '주체적 이성의 자율권'을 행사하여 정치, 경제, 국방, 사회문화와 특히 종교문제에 임하고 있는가? 분풀이, 화풀이, 집단패거리 행태, 썩은 음식물에 모여드는 파리떼들처럼 권력쟁취와 돈되는 일이라면 도덕심은 그만두고 사생결단 모여든다. 한 주먹도 되지 않는 부동산 토건세력과 부패 판검사들과 국회의원들과 경제 기득권 특권층이 이미 인수해버린 극보수 언론들의 지원사격을 받아 국론은 분열되고 나라가 온통 뒤흔들려도 '냉철한 이성의 비판능력'이 없기 때문에, 한국사회는 총성 없는 내전(內戰)을 방불케 한다. 심히 두려운 일이 한국 사회 안에 펼쳐지고 있다.

3. 계몽주의 정신의 빛에서 본 오늘날 한국 기독교 문제

외형적으로 보면 한국사회는 문맹률은 세계 최저수준으로 모두 개명되어 있고, 젊은이나 늙은이나 핸드폰을 손에 들고 최첨단 기술공학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1950년 6.25 한국전쟁시기에 국민소득 100달라 수준의 가장 가난하고 비참했던 한국을 G20 선진국 반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의 국가 사회를 겉으로 보지 말고 심층에서 본다면 과연 한국사회는 서구 문명국가들이 17-18세기 어간에 이미 거쳤던 치열한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은 사회인가 되물어야 한다.

거듭 내 스스로에게 묻거니와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핵심은 무엇인가? 비이성적인 각종 권위적 실체들을 냉철한 이성적 비판능력을 구사하여 허물어 부셔버리고, 미성숙한 아이들처럼 복종적 삶을 살았던 권위적 다스림과 노예적 근성에서 스스로 해방하고, 자유인이 되고 책임적인 성숙인간이 되자는 것이 아니던가? 권위적 실체 중 가장 견고했던 것은 정치적 군왕들의 특권의식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신성불가침하여 비판적 접근을 불허하는 종교적 도그마였다. 프랑스 혁명시기 루이16세 왕족과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낭비적 생활, 청나라 말기 서태후를 중심한 중국 황족들의 사치와 권력남용, 17세기 이후 날로 발견되고 진보된 새로운 과학사상에 대한 교회의 승산 없는 반대논쟁을 생각해보면 된다.

기독교 교회사를 뒤돌아볼 때, 계몽주의 시대정신 중 가강 괄목할만한 결실은 역사주의와 과학사상 이었다. 역사주의 근본정신은 인류문명 속에서 생겨난 그 어떤 것일지라도 역사적 발전과정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는 신념이다. 과학사상이란 우주 물리화학적 변화나 생명체 출현 및 그 변화과정을 도그마, 미신, 오랜 습관을 깨트리고 합리적 이성의 빛으로 밝혀내고 인류 삶을 보다 밝게 만들어가자는 신념이다. 계몽주의 두 가지 커다란 열매 중 하나인 역사주의 영향을 받아 성경연구방법에서 소위 말하는 '역사적-비평적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이 발전하게 되었고, 또 다른 결실인 후자 곧 과학사상에서 생명현상에 대한 진화론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역사적 기독교 반응은,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급들이 취했던 입장, 즉 그 두 가지 계몽주의 결실에 대하여 격렬한 반대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계몽주의 결실이 '성경의 문자적 절대무오설' 위에 서있던 기독교 전통을 무너뜨린다고 두려워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기독교는 역사발전에서 뒤떨어지거나 외딴 섬처럼 되어갔고, 기독교 신앙과 과학사상이 서로 적대시하는 불행한 관계가 누적되어 갔다.

성경연구에서 '역사적-비평적 방법'이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경전문서들이 어떤 역사적 상황과 조건 안에서 집필되거나 편집되거나 전승되어갔는지를 역사적 방법에 의해 연구하자는 것이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거나 그 영감성을 깡그리 부정하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교회의 권위나 전통에 의해 당연시 되어오던 '불편한 진실'이나 '경건한 기만'을 이성의 밝은 빛으로 해방시켜 '머리와 가슴'이 함께 동의하는 바르고 성숙한 신앙으로 재정립하자는 것이 본래취지였다.

지난 200년간 성서연구방법론으로 발전해온 '역사비평' 방법이 일부탈선하여 성경집필자의 심령 위에 성령의 감화가 함께하여 집필자 지성이 숭고하게 고양되고 '황홀한 이성' 안에서 예언하고, 편지 쓰고, 역사서와 복음서를 문서화 하였다고 이해하는 올바른 성서영감설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다. 그 때, 20세기 초(1919), 칼 바르트는 다음같이 『로마서 주석』 제1판 서문에서 핵심문제를 갈파했다. "성서연구의 '역사적-비평적 방법'은 옳다. 그 연구 방법은 이해에 필요한 준비를 지시한다. 그러나 내가 '역사적-비평적 연구방법'과 '성서영감설' 중에서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단연코 옛 영감설을 택할 것이다." 칼 바르트는 성서연구방법의 한가지로서 '역사비평방법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세속적 인문학의 역사학에서 취하는 해석학적 입장 곧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 가능성이나 성령이 감동감화 가능성 등을 부정하고, 순전히 실증적이고 문헌학적 연구결과만을 인정하려는 평면적 이성의 분석검증 기능에 국한시키는 성서학계 경향에 반대한 것이다.

계몽주의 열매로서 지난 200여 년간 발전해온 역사주의와 과학주의가 기독교 신앙을 밑바닥에서부터 파괴한다고 겁을 먹고 담을 쌓고 기독교 전통을 고수하려는 닫힌 태도, 경직된 태도, 이성의 빛을 거절하는 태도를 일컬어 '보수적 기독교'라고 칭한다. 그 핵심적 방패가 '성경무오설'이라는 교리 이다. 인류의 고등종교들도 경전의 가르침이 고귀하지만, 그중에서도 성경은 특이할 만큼 인류에게 영감, 지혜, 역사통찰, 삶과 죽음이해, 영원한 소망을 주는 경정들 중의 경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없는 일반 교인들에게 '성경무오설'을 주입시켜 계몽주의 시대이후 기독교를 점점 세상학문과 소통이 단절된 '독단과 독선의 종교집단체'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성경무오설'은 더 보수적 교리집단이 될수록 '성경축자무오설'(聖經逐字無誤說)이라는 교리로 변질해 가는데, 성경은 문자 그대로, 문장 그대로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예들면 창세기 1장에서 천지만물이 6일 동안 걸쳐 창조되었다고 했으니 현대 우주 천문학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각각 생물체를 각 종류마다 창조하셨다(창1:24-25) 했으니 진화론을 용인하지 못한다. 교회 안에서 여성은 잠잠하라(고전14:28,34) 했으니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주거나 장로로 세우지 않는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13:1) 했으니 정치적 독재자들에게도 저항해서는 안 된다. 성경무오설은 사이비 신부나 목사 등 성직자들에게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耳懸鈴 鼻懸鈴)가 되는 참 편리한 '손오공 여의봉'이 되어 교회를 망치고, 교인들을 협박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 그 안에서 왕 노릇 한다.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권세와 물질적 이득도 누린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둘러 댄다. 계몽주의 정신을 무시하는 한국사회와 기독교는 "좋은 나무는 그 열배로서 안다"(눅6: 43-44)는 예수님 말씀과 "심는 대로 거둘 것이다"(갈6:7)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 비춰볼 때 커다란 위기 앞에 직면해 있다. 그 위기는 코로나19 팬데믹 위기보다 더 위험하고 두려운 위기이다. 진리는 은혜이지만 동시에 심판이어서 두려운 것이다. 진정한 계몽주의 정신적 세례 없이는 첨단 정보화 기술사회란 위험한 칼을 망나니 손에 쥐어주는 위험을 맛보게 될 것이다. 독일 히틀러 제3제국 등장은 기독교인숫자가 전 국민의 90% 이상이었고 수많은 철학자, 신학자, 예술 천재들을 배출한 독일이라는 국가사회 안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계몽이란 모든 사람에게 하늘이 부여해준 이성의 자율적 판단력을 행사하여 쭉정이와 알곡,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자격 갖춘 대통령 후보자와 일시적으로 바람을 탄 자격미달 후보자가 누구인지 판단 분별하는 성숙한 개체로서 '씨알사람'이 되는 일이다. 기독교는 참된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조작되거나 선동된 세력들에 의해 부화뇌동하는 우중(愚衆)의 다수(多數)를 따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와 수많은 의인들도 어리석은 대중 무리들의 성난 함성과 살기(殺氣)에 둘러싸여 희생당하셨기 때문이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들의 다수결이 대신 하지 못한다. 조작되거나 양심소리와 이성의 빛을 잃어버린 민심은 참된 민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병든 민심은 천심이 아니다.

진짜 혁명은 총칼 들고 무력으로써 하는 쿠테타가 아니다. 타락한 언론들의 진영논리의 뉴스폭력을 이용하여 국민의 판단력을 마취시키는 정권 쟁탈전이 참 혁명일 수 없다. 참 혁명은 사람들 각자가 깨끗한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되찾아, 하나님이 본래 주신 '내 마음 속의 빛'(눅 11:35)을 회복하는 것이며, 자율적이고 책임적인 성숙한 이성적 시민들이 1표 1표씩 투표함에 넣는 '투표혁명'이 참 혁명인 것이다.

※ 본 글은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혜암신학연구소에 기고한 정기 칼럼입니다.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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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칼럼] 가상현실과 삶의 철학: 베르그송, 딜타이, 함석헌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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