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새해주일설교] 전능한 하나님 (El Shaddai)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Jan 03, 2022 08:05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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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17:1-8, 로마서 8:26-30, 마태복음 5:13-17 -

미국의 여류시인 헬렌 스타이너 라이스(Helen Steiner Rice, 1900-1981)의 <내가 좋아하는 요리법 A Favorite Recipe>을 소개합니다. 새로 시작한 임인년(壬寅年) 한해, 날마다 이런 음식을 요리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잔의 친절에 / 사랑을 부어 잘 섞고 /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 많은 인내를 첨가하고 / 기쁨과 감사와 격려를 / 넉넉하게 뿌립니다. / 그러면 1년 내내 포식할 / '천사의 양식'이 됩니다."(Take a cup of kindness, / Mix it well with love, / Add a lot of patience, / And faith in God above, / Sprinkle very generously / With joy and thanks and cheer / And you'll have lots of 'angel food' / To feast on all the year.)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인내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기쁨과 감사와 격려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천사의 양식'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미국에 '천사의 양식'이 있다면 한국에는 작자 미상의 '사랑의 차 내리는 법'이 있습니다. "1. 불평과 화는 뿌리를 잘라내고 잘게 다진다. 2 교만과 자존심은 속을 빼낸 후 깨끗이 씻어 말린다. 3. 짜증은 껍질을 벗기고 송송 썰어 넓은 마음으로 절여둔다. 4. 실망과 미움은 씨를 잘 빼낸 후 용서를 푼 물에 데친다. 5. 위의 모든 재료를 주전자에 담고 인내와 기도를 첨가하여 쓴맛이 없어질 때까지 충분히 달인다. 6. 기쁨과 감사로 잘 젓고, 미소 몇 개를 예쁘게 띄운 후, 깨끗한 믿음의 잔에 부어서 따뜻할 때 마신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생일> 중에서)

이렇게 올 한 해 동안 '천사의 양식'을 먹고 '사랑의 차'를 마신다면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하고 아름다워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천사의 양식에 꼭 들어가야 하고, 사랑의 차는 꼭 '깨끗한 믿음의 잔'에 부어서 따뜻할 때 마시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최초로 직접 계시하신 당신의 이름은 '엘 샤다이'(El Shaddai)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 창세기 17:1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신명(神名)이라고 하지요. 야곱이 세겜에서 땅을 사고 제단을 쌓은 후에 부른 하나님의 이름은 '엘 엘로헤 이스라엘'(창세기 33:20)입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택한 자를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또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 벧엘에서 단을 세우고 하나님을 '엘 벧엘'이라 불렀습니다.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박해를 피해 도망하던 하갈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가 하나님의 지키심을 체험하고 부른 이름은 '엘 로이'(창세기 16:13)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지식이 무한함을 가리킵니다. 창세기와 시편에서 주로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은 '엘 엘룐'(창세기 14:17-22, 시편 78:35)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혹은 '천지의 주재', 즉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서에서 이 이름은 하늘이 땅보다 높지만, 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 즉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스데반이 유대인들 앞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사도행전 7:48)라고 설교할 때 그가 말한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제약을 받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강조하는 이름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엘 깁보르'입니다. '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이 나오는 가장 유명한 구절은 대림절에 반드시 읽는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여기서 엘 깁보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엘 샤다이' 곧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99세가 된 늙은 아브람 앞에 '갑자기' 나타나신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17: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을 의아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 앞에 '갑자기' 혹은 '느닷없이' 나타나셨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창세기 17:1 바로 앞은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창세기 16:16)라고 끝나는데, 이후 아브람이 99세가 되기까지 13년 동안이나 아브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는 13년의 세월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왔을 때가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이후 11년이 지나 그의 나이 86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그의 나이가 이제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앞에 불현 듯 나타나셔서 당신의 이름이 '엘 샤다이', 곧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이 13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1-2) 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거기서 열심히 부를 일구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큰 군대로 거느린 강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모든 걸 갖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내 집에서 갈린 자"(창세기 15:2-3)라고 불평했듯이, 아브람에게 한 가지 부족했던 것은 그가 가나안 땅에서 일군 그 모든 것을 물려줄 상속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밤하늘을 보게 하시며,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5)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이 이 약속의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세기 15:6)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아내 사래가 출산하지 못하자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창세기 16:3)에 결국 아내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삼아 동침하여 그다음 해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습니다. 86세가 되도록 단 한 명의 자녀도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상속자가 없는 상황에서 낳은 아들이었으니 아브람은 얼마나 기쁘고 좋았을까요. 이제 이스마엘의 탄생으로 그는 완전한 삶을 누리게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13년 동안 성서는 아브람의 삶에 대해 한 마디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 특별히 언급할만한 의미 있는 일이 없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지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아브람은 만족스럽게 살고 있었다는 걸 말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 흐르듯, 아무런 문제없이 그저 순탄하게 흘러가는 삶! 우리는 보통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않던가요. 아마 아브람 자신도 그 13년의 세월이 평생 고생하며 지내온 자신의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느끼며 날마다 자라는 아들을 보면서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지냈을 겁니다.

그런데 13년 만에, 이제는 99세가 된 늙은 아브람 앞에 하나님께서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십니다. "완전하라"라니요. 이미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완전한 삶을 잘 살고 있지 않나요? 그런데 불쑥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완전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실 질책의 말씀입니다.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처음 부르실 때 그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2-3)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될 것이라 하셨지만, 지난 13년 동안 이스마엘을 얻은 아브람은 그 기쁨에 취해 하나님의 본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자기 가족 안에 묻혀 노년의 평온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온한 일상을 깨고 나타나신 '엘 샤다이' 하나님은 다시 '언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까지 하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창세기 17:2)라고 하시며 언약을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세기 17:4-5)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한 가족이나 종족의 아버지이나,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과 종족과 민족을 뛰어넘어 많은 무리의 아버지, 곧 열국(列國)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앞에 나타나 본래의 언약을 상기시키시며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여 새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엘 샤다이의 하나님, 곧 전능한 하나님은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꼭 이루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시기에 전능한 하나님, 곧 엘 샤다이이신 것입니다. 분명 아브람과 사래는 의학적으로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이 아브람 앞에 나타나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인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늦어지고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더라도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끝까지 신실하게 '언약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복을 받으라고 인사하는 걸까요? 성서가 말하는 복은 어떤 복입니까?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에베소서 1:3) 그런데 그 복은 어떤 복입니까? 다시 바울이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4-5) 그렇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고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로마서 8:17)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4:18)라고 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라는 말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었다"(공동번역), 혹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다"(새번역)라고도 번역됩니다. 영어 성경(NIV)은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라고 번역합니다. 이 번역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모든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hope against all hope), 이 놀라운 역설적 희망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로마서 4:19-22)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이 바로 아브람이 만남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조상'이 된 많은 무리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든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hope against all hope)이었습니다. 그 역설이 희망이었습니다. 그 희망은 길이 없는 곳을 걸어간 믿음의 희망이었습니다. 중국 근대문학의 개척자 루쉰(鲁迅)은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지요. "희망이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앞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걸어간 그의 길이 우리가 걷는 믿음의 길이 되었습니다. 서산대사는 이렇게 말했지요. "그대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부디 그 길을 어지럽게 하지 마시게. 오늘 남긴 그대 발자국 끝내 내일 뒤따르는 사람들 이정표 된다네." 눈 덮인 들판엔 길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길을 글었습니다. 그가 모든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을 가지고 길이 없는 눈 덮인 들판을 반듯하게 걸었을 때 그가 걸어간 길이 오늘 많은 무리가 따르는 믿음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은 '너는 내 앞에서 흠이 없게 걸으라'(Walk before Me, and blameless)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흠이 없게 걷는 것이 믿음의 길, 완전한 삶입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에서 읽은 것처럼, 윤동주 시인이 <서시 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 괴로워"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서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깊이 고뇌하고 철저하게 다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임인년 한해, 우리도 시인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게 당당하고 의연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믿음이란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길을 걸으며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선함이 아닌 그분의 약속에 기초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새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갑고 어둡고 삭막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꿋꿋하고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강연자 켄트 M. 키스(Kent M. Keith)의 글 <역설적 명령 Paradoxical Commandments>을 읽어봅니다. 켈커타의 마더 테레사가 세운 어린이 집에 붙어 있는 글입니다. 켈커타에 마더 테레사가 세운 한 어린이 집 벽에 붙은 글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 네가 친절을 베풀면 /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 비난할지도 모른다. /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 누군가 하룻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 그래도 행복하라 /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 그래도 선을 행하라. /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 부족하다 할지 모른다. /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엘 샤다이, 전능한 하나님이 오늘 고난 중에 있는 우리는 찾으십니다.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성서에서 욥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구약에 모두 48번 엘 샤다이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중에 무려 31회가 욥기에 나옵니다. 욥기는 고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고한 자의 고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고난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통찰을 줍니다. 올 한 해도 우리는 고난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아마도 작년보다 더욱 힘들고, 고달프고, 어려운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고 이 고난의 시간을 지날 때가 샤다이의 하나님, 곧 전능한 하나님, 곧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가 아니겠습니까. 오래전 아브람 앞에 불현 듯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신년주일로 새해 첫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지금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언약의 상속자임을 상기시키면서 약속의 땅을 향해 가자고 일어나 가자고 손 내미십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로마서 8:28)입니다.

끝으로 켈트족 원주민의 새해 축복의 기도를 읽어드립니다. "당신의 손에 언제나 / 할 일이 있기를 / 당신의 지갑에 언제나 한두 개의 / 동전이 남아 있기를 /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 당신의 얼굴에는 해가 비치기를 / 이따금 당신의 길에 / 비가 내리더라도 / 곧 무지개가 뜨기를 / 불행에서는 가난하고 / 축복에서는 부자가 되기를 / 적을 만드는 데는 느리고 / 친구를 만드는 데는 빠르기를 / 이웃은 당신을 존중하고 /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하지 않기를 / 당신이 죽은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이미 / 당신이 천국에 가 있기를 /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날보다 / 더 나은 날이기를 / 그리고 하나님께서 늘 당신 곁에 있기를." 엘 샤다이, 전능한 하나님,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올 한 해 항상 여러분 곁에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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