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입력 Jun 20, 2022 07:51 AM KST
jangyoonjae_0512
(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시편 42:1-5, 로마서 5:1-6, 요한복음 16:33 -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시편 42편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의 탄원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1절) 여기서부터 <시편>의 제2권(42~72)이 시작됩니다. 아마도 성소(聖所)로 가는 길에 한 순례자가 사고를 당해 여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10절("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에 따르면 그는 뼈가 부러지는 중상(重傷)을 입은 것 같습니다. 순례자는 지금 성소 가까이에 와 있지만(6절,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적대적인 주변 세계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무리와 동행하여 하나님의 집에 안전하게 이르기를 간구합니다. 이 시의 압권(壓卷), 즉 가장 뛰어난 부분은 5절과 11절에 (그리고 43:5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이 아름다운 후렴구일 겁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형식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에 전적인 희망을 걸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인류의 역사에서 음악가로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한 사람을 꼽으라면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5월의 마지막 주일에 이화창립 136주년을 기념하는 음악예배에서 온 회중이 기쁨찬양대와 함께 바흐의 유명한 곡 <예수는 우리의 기쁨 Jesus bleibet meine Freude>을 감동적으로 부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의 사랑과 칭송을 받는 바흐도 한때 '그저 그런 음악가'란 평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37년에 태어난 바흐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힘들게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습니다. 22살에 뮐하우젠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쳤지만,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과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라이프치히로 이사하게 되었고, 거기서 유명한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 자리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흐의 지원서는 다른 유명 음악인들에게 밀렸습니다. 다행히 게오르크 텔레만과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와 같은 당대 유명 음악인들이 모두 초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바흐가 뽑힐 수 있었습니다. 성 토마스 교회는 합창장을 선임한 후에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최고의 음악가들을 초청할 수가 없으니 우리는 그저 그런 음악가에 만족해야 한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충격적인 기록입니다. 사실 바흐의 음악은 전문가들에게는 인정을 받았지만, 동갑의 헨델이나 세 살 어린 비발디처럼 대중적 명성과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오페라나 높은 기교로 사람들의 청각을 자극하는 음악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학구적인 음악과 교회음악을 추구했습니다. 주위 평가가 어떻든 묵묵히 자신의 예술에 충실했습니다. 성공에 대한 사회적 압박에 굴하지 않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는 우리의 기쁨>이라는 곡에서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참 기쁨과 지혜의 왕... 빛의 근원... [그리고] 우리 삶의 참된 소망"이 되시는 예수만 바라보고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7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린 것을 알고 이스라엘의 새 왕을 찾아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에 갔습니다. 그 집 아들들을 모았는데 그중 용모와 키가 준수한 엘리압(Eliab)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한 사무엘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감탄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外貌), 즉 겉모양을 보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서는 이 말을 수없이 되풀이합니다. (신명기 10:17, 사도행전 10:34, 로마서 2:11, 에베소서 6:9, 골로새서 3:25, 베드로전서 1:17) 대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신다]"(시편 51:6)라고 말합니다. 중심이 진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장미꽃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풀꽃처럼 성품이 온유한 사람, 속에 무슨 생각을 할까 짐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어딘가 꼬여 항상 부정적이지 않고 매사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사람, 남들과 비교하여 자기를 평가하지 않고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내게 주신 삶을 감사하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비교한다는 것은 내 삶의 소망을 그 비교하는 대상에 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비교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하는 한 자유는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신과 동생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과 비교합니다. 가까운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그가 가지고 있으면 괜히 그가 미워집니다. 멀쩡하던 내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듯 나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살아가는 것인데, 그가 누리는 은총은 특별해 보이고 내가 누리는 은총은 초라해 보입니다. 그런 결과가 형이 아우를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이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5:10)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비교하는 자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나 자신의 눈에 만족스러운 나를 찾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내 앞에 놓인 길을 자신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중심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중심이 진실하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남이 가진 것,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신"(송명희, <나>) 하나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수직적 지평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번아웃 증후군'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번아웃'(burnout)이란 '다 태워버리는 화재'나 '로켓의 연소 종료'를 뜻하나 '소모', '소진', 혹은 '극도의 피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런 번아웃 증후근, 그러니까 '소진 증후군'을 겪고 있는 어느 직장인의 이야기입니다. "월급을 주 연료로 이 한 몸 열심히 태워온 지 수년째, 누군가 옆에서 건들기만 하면 온몸이 바스러져 잿더미가 될 것 같다. 내가 회사일을 혼자 떠맡은 일중독자라서 그런 건 전혀 아니다. 주변 동료들 모두 비슷한 심리적 소진 상태를 겪고 있다. 심리적인 에너지 고갈로 간단한 일조차 하기 어려워지면 결국 정신과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이 사람에게 스티브 잡스는 우상이었습니다. 2005년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그 유명한 연설, "Stay hungry, Stay foolish"(만족하지 말고 더 갈망하라)가 그의 삶의 가이드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세요." 요지는 "너만의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20대 중반의 이 청년에게는 거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봅니다.

"취업준비생이라는 암흑기를 수차례 입사시험 낙방 끝에 벗어난 뒤 잠시나마 행복에 겨웠다. 내가 찾아낸,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 그 자체로 선택받은 삶이었다. 휴일, 휴식, 칼퇴근과 같은 '워라벨'에서 희생할 것은 많았다. 감내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만든 결과물이 스스로 정말 좋았다는 생각이 들면 또 몇 주를 버틸 수 있었다. 누군가 칭찬이라도 해주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열정의 그림자는 자기착취였다. 그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녁 시간을 반납해 일하고, 때로는 주말 데이트를 포기하고 일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 대가로 스스로를 쥐어짰다... [하지만] 일 스트레스가 크면 며칠 밤을 연달아 생생하게 일하는 꿈을 꿨다. 일어나면 어깻죽지가 바짝 굳어 있을 정도였다. 어느새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일이 무서워졌고 재미없어졌다."

그랬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젊은이들은 이른바 '자기계발'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능력을 끌어올려 자신의 시장가치를 입증해야 합니다. 이게 사회적 문제임은 알지만, 사회를 바꾸기 어려우니 당장 바꿀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한시도 허투루 쓰는 시간 없이 생산적으로 일과를 짭니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외국어 공부, 매일 아침은 스트레칭, 그리고 밀린 독서에 전시회도 가봐야 합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만 보는 건 쉼이 아니라 죄악 같습니다. 하지만 이래야 합니다. 이래야만 마음이 편합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노동의 성과로만 입증해야 하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이 땅의 젊은이들이 소진(burnout)됩니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강물은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장 루슬로, <달팽이는 느려도 늦지 않다>)라고 했는데, 세상은 젊은이들을 쉴새 없이 몰아붙입니다. 더 빨리 달리라고 등 떠밉니다. 젊은이들만이 아닙니다. 온 사회가 이 자기계발이라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집 성소(聖所)로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시편 42편의 기자와 같습니다.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마살 산에" 이르렀으나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합니다. "내 혼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불안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고 "내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날 것만 같고, 이렇게 이 여정이 막을 내릴 것만 같습니다. 그때 시편 기자는 이렇게 자신에게 말을 겁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너만의 좋아하는 일을 하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열정의 그림자는 자기착취일 수 있습니다. 나의 열정이 나를 다 태워버리는 방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이 가진 것, 남에게 있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소망"이 아니듯이 내가 가진 열정, 내게 있는 능력도 참 소망이 아닙니다. 성서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림'이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46:1-2)라고 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62:5-6)라고 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오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편 71:5), 그러므로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5)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31)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신약성서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디모데전서 4:10)라고 말하면서 "[여러분은]...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디모데전서 6:17)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참된 소망은 높은 지위나 재물이 아니라 모든 걸 은혜로 베푸시고 그것을 향유하게 하시는 저 위의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까? 그냥 마음먹으면 그렇데 되는 걸까요? 우리는 시련과 아픔, 환난과 연단을 통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영국의 조지 왕이 어느 날 한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두 개의 꽃병이 특별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꽃병들은 같은 원료, 같은 타일, 같은 무늬로 만들어졌으나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있는 예술품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투박한 채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관리인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관리인이 답합니다. "전하,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또 다른 하나는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시련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하며 무엇보다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특별히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라고 했습니다. '환난'은 '인내력'을,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는 말입니다.(새번역)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이사야 48: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언 17:3) 했습니다. 풀무질과 담금질과 무두질이라는 과정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불순물이 제거되고, 단단해지고, 부드럽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변을 보면 삶이 아름답게 빛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냥 빚어진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풀무질과 담금질 그리고 무두질의 과정을 묵묵히 이겨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은 무의미한 게 아닙니다. 고통와 아픔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닙니다. 시편 119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라고 고백합니다. 성서는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베드로전서 4:12)라고 말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브리서 12:11)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5)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이 그리스도라는 참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로마서 12:12)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희망은 한 마리 새 / 영혼 위에 걸터앉아 /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 그칠 줄을 모른다. // 모든 바람 속에서 더욱 달콤한 소리 / 아무리 심한 폭풍도 / 많은 이의 가슴 따뜻이 보듬는 / 그 작은 새의 노래 멈추지 못하리..." (장영희, 『(영미시산책) 축복』 중에서.) 그렇습니다. 희망은, 소망은 우리의 영혼에 살짝 걸터앉아 있는 한 마리 새와 같습니다. 행복하고 기쁠 때 우리는 그 새를 잊고 살지만, 마음이 아프고 절망할 때 그 새는 어느덧 내 곁에 와서 지저귑니다. 희망은, 소망은 내가 열심히 일한다고 생기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생기는 게 아닙니다. 상처에 새살이 나오듯이, 죽은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듯이, 희망은 그렇게 '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거쳐 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기쁨찬양대가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1-2) 환난과 시련, 슬픔과 아픔을 당해 혹 높은 산에서 무슨 신령한 도움이 올까 바라봤더니 나의 도움이 그 산이 아니라 그 산을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부터 나온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산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했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번 성한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반드시 쇠해집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습니다. 십 년 가는 권력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화가 티끌 같습니다. 성서는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0:31 - 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오직'이라 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남이 가진 것, 남에게 있는 것, 심지어 내가 가진 것, 내게 있는 열정도 기준이 아닙니다. "참 기쁨과 지혜의 왕"이요 "빛의 근원"이신 주님만이 "우리 삶의 참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일에 낙심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만을 소망으로 삼으십시오.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교독문(이사야 12장)처럼,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을 것]"입니다. 아멘.

오피니언

연재

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13):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이 유지되는 한 신은 인간의 자기 대상화를 통해 인격적인 신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인간과 신의 유사성을 토대로 한 인격주의적 신관..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