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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 리뷰-①: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불안들을 해부해 보면
죽음의 불안, 무의미함의 불안, 죄의식의 불안

입력 Dec 08, 2022 06:43 AM KST
틸리히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는 출판되었을 당시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빠짐없이 올랐고, 신학적인 대화에서는 항상 이 책의 제목이 거론되었다. - 「존재의 용기」 서문-

일상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불안과 절망이 없었던 시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우리 시대 현대인들이 떠안은 불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다. 그래서 다양한 '용기'의 담론들이 나온다. '세계'는 물론 '너'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폴 틸리히의 명저 《존재의 용기》를 소개한다. 그는 현대의 초입, 절망과 상실의 시대를 살과 뼈로 겪으며, 비존재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용기를 구하고자 했다. 그가 길어올린 것이 '존재의 용기'이다.

이 책 소개는 3번에 나누어서 한다.

①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불안들을 해부해 보면

② 중세와 근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용기들의 실체

③ 의미 상실의 시대에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존재의 용기'

<1>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불안들을 해부해 보면

칼빈은 인간의 마음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고 했는데, 틸리히는 인간의 마음이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고 했다. 사실상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순간 근본적인 불안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종교와는 별개로 자신의 유한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니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불안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틸리히가 말하는 불안은 단편적인 불안이 아닌, 비존재의 위협에 대해 느끼는 불안이다. 비존재는 존재의 반대말이다. 쉽게 쓰면 존재는 있음이고, 비존재는 없음이다. 그러니까 존재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비존재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존재는 살아있음이고 비존재는 죽음이다. 삶을 위협하는 것이 비존재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불안은 셀 수가 없겠지만, 불안의 정점은 죽음이다. 내 존재의 있음을 무(無)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안을 떨쳐버리는 방법이 있다면, 현대인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구원의 길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틸리히는 인간의 불안이 제거될 길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불안이 "실존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인간이 삶을 지속하는 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불안을 떨쳐내는 용기가 아닌, 불안을 싸안는 용기를 이야기한다. 불안을 싸안는 용기를 가지기 위해, 그는 인간을 위협하는 불안을 분석했다. 틸리히는 불안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각각 죽음의 불안, 무의미함의 불안, 그리고 죄의식의 불안이다. 

첫 번째 불안은 죽음의 불안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여타 모든 불안을 덮는다. 상기한 바와 같이 죽음은 나 자신을 무(無)로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의 불안은 원시시대 때부터 고중세를 거쳐 근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각각의 개인을 엄습한 것이므로, 현대인이 가진 특별한 고충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현대인에게 특별히 더 처참한 죽음이 주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연 앞에 무력했던 원시시대나, 절대 권력 앞에서 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고중세 시대가 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틸리히의 통찰이 돋보인다. 그는 죽음의 불안을 '운명'의 불안과 연결지어 풀어냈다.

죽음은 절대적이지만 운명은 상대적이다. 다시 말하면 육의 죽음이라는 결론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운명은 해석의 여지를 두고 있다. 특히 하나의 전통으로 결집되었던 중세가 무너지고 자연과학 및 인간 이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우연성'의 세계관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하나의 행성이다. 한때 '왕'은 곧 '신'으로도 추앙받았지만 이제 인간은 누구라도 우주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연성의 사고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운명'에 대한 인간의 고뇌는 깊어진다. 우연한 것은 우발적이다. 인간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궁극적인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 우연하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된다. 인간 개개인 존재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때,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잃고 절망에 빠진다. "우연한 순간에 나서 우연한 순간에 죽어버리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연한 여러 경험들로 가득찬 일정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관점은 궁극적인 것을 찾는 자에게 불안을 일으킬 뿐, 안정을 주지 못한다. 

틸리히는 비존재는 어디에나 편재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위험은 "실존의 모든 순간에" 즉 삶의 모든 순간에 퍼져있는 것이다. 그는 직접적인 죽음의 위협이 없는 곳에서도 죽음은 인간에게 불안을 야기함을 지적하며, 인간이 이 죽음의 불안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갈파했다.

두 번째 불안은 무의미함의 불안이다. 틸리히는 무의미함의 불안을 "정신적 중심의 상실"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근세 이후에 득세했다. 중세 세계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하나의 절대적인 전통이 사회와 개인을 받쳐주지 않았고, 인간은 스스로 갈 길을 찾아야 했다. 중세의 중심이 종교였기에, 종교적 중심을 잃은 후폭풍은 작을 수가 없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실존의 의미에 대하여 물어도 절대적인 답변을 얻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틸리히는 사람들이 정신적 중심을 상실한 이후에, 다른 여러 가지들로부터 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음을 짚었다. 인간 문명과 문화의 풍성한 결실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것으로부터 근본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공허함에 빠지게 되는 사례들을 우리는 발견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공허한 그늘이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궁극적인 것을 구하는 자에게 유한한 것이 답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답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들은 오히려 더 깊은 불안을 야기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틸리히는 지적했다. 

무의미함을 못견딘 사람들은 한편으로 '의미 찾기'를 포기하기도 했다고 틸리히는 밝힌다. 이것은 궁극적인 것을 찾으려고 해도 쉽지가 않으니, 사람들이 유한한 것을 궁극적인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그것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궁극적인 것이라고 상정한 대상을 신처럼 섬기고 받든다. 이것은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우상이 될 수도 있고, 일반사회적으로 보면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틸리히는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독단에 빠져 광신적 면모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세 번째는 정죄와 죄의식의 불안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내면 즉 양심이 자기 자신을 공격[정죄]하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은 자신의 결단들이 순수한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한 개인이 순수한 선을 추구한다고 하여도 인간 안의 '선과 악의 모호함'이 순수한 선을 추구하는 이에게 방해물이 된다. 인간 안에 선과 악이 모호한 것은 유한한 인간의 태생적 한계이다. 이 때문에 틸리히는 인간이 "자신이 최고의 행위로 여기는 일들 속에서도 비존재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일이 완전해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표현했다. 인간 안에 완전한 도덕성이 자리 잡을 수 없다는 현실에서 인간의 '도덕적 자기 긍정이 위협'받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틸리히의 분석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 도덕적 완전함을 필사적으로 추구하며 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죄의식의 불안이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편재하여 인간을 불안증에 시달리게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틸리히가 죄의식의 불안을 말한 이유는, 그는 인간의 죽음의 두려움 속에는 죄의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신약 고린도서 저자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고전15:55-56, 새번역) 죽음이 활개치는 루트는 죄라는 관점이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앞서 언급되었던 '운명의 우연성'도 죄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길을 갈 때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안보이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때 제자들의 질문이 이러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9:2, 새번역)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죄'와 연결지어서 보았는데, 이것은 질문한 사람 개인의 단독적 생각을 넘어 당시 사회 전체가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현대인은 죄의식에 더욱 민감하다. 자신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어 본인에게 귀책사유가 없는 사건에도 죄의식을 느낀다.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가 입양되어 잔인하게 학대당하다가 16개월로 인생을 마감했다는 소식 앞에서, 전 국민이 죄의식의 맥락과 이어진 감정을 가졌다. 분향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모여 그 영혼을 위로했다. 때때로 규모가 큰 사건들은 사회적 반향까지도 일으킨다. 수학여행 중에 수백명의 어린 영혼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 앞에서 전국의 행사들이 일정 기간 취소되고, 사회 각처에서 자숙의 분위기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운명의 우연성과 도덕의 문제, 죽음의 문제와 죄의식의 문제가 서로 얽혀있다. 틸리히는 "죽음의 위협은 언제나 죄의식을 일깨우고 증가시켜 왔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죄의식의 문제는 "단지 외부적 처벌을 받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라, 결국 우리의 운명을 상실할 것이라는 절망감" 즉 죽음의 불안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 틸리히가 분석한 인간 삶의 구석구석에 편재한 불안들을 살폈다. 인간이 비존재를 극복할 길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비존재가 인간 삶에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은 아니다. 설사 비존재, 불안이 인간을 잠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비존재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틸리히의 명쾌한 해석과 같이 "비존재가 승리한 느낌이란 것도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비존재를 싸고 있는 존재인 인간은, 불안에 대항하여 용기를 냈다. 그 용기에 대한 내용을 다음 글 「② 중세와 근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용기들의 실체」에서 다룬다. 그 용기가 특정한 시대에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났는지 분석한 틸리히의 안내를 기대해도 좋다. <계속>

 

북리뷰/서평 문의  eleison2023@gmail.com


*틸리히의 책에서 직접 인용한 어구, 문장은 큰따옴표(", ")로 표시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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