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신비주의와 여성 - 주체, 억압, 저항 그리고 전복 ㅣ 이충범 지음 ㅣ 동연 ㅣ 342쪽 ㅣ 1만 6천원
현대 그리스도교회는 너무 남성중심적이고 교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중세의 교회는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교회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속에서 ‘성녀’로 추앙받은 여성이 있다면, 그 여성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행복했을까? 이충범 교수(협성대 신학과)는 신간 『중세 신비주의와 여성…』에서 성녀 카타리나(Saint Catherine of Siena) 등 중세 교회에서 두드러진 여성들의 삶의 이면을 파헤친다.
카타리나는 누구인가? 그녀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성녀가 출현했다는 중세 후기에서도 가장 위대한 성녀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가톨릭교회는 역사상 두 명의 여성에게만 교회박사(Doctor of the Church)라는 칭호를 허락했는데 그중 한 명이 카타리나였다.
당시 교회의 남성중심적인 제도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카타리나는 철저히 교회적 인물이었으며, 교회 남성에 의해 추앙되기까지 했다. 그녀는 웬만한 남성 못지 않은 활동력을 과시했다. 1309년 교황 클레멘트 5세가 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주하면서 시작된 아비뇽 교황 시대는, 유럽의 교권이 프랑스의 정치도구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가운데 카타리나는 교황의 아비뇽 잔류를 찬성하는 추기경들을 “악마의 자녀들”이라 부르며 강하게 규탄했고, 아비뇽에 있는 교황 그레고리 11세를 수 차례 방문하여 로마 귀환을 촉구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교황청을 로마로 귀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자본계급 및 세속군주들이 과중한 세금 부담과 간섭의 근원지인 교황청과 갈등했을 때 교황에게 충성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을 하는가 하면, 십자군 조직에도 깊이 가담하여 그레고리 11세에게 속히 십자군을 조직하라고 조언하는 등 교황에게도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었고, 십자군전쟁 비용을 보태달라는 자신의 의견을 정치인들, 은행가들, 심지어 나폴리의 여왕에게까지 전달했다.
저자는 묻는다. “문맹이자 평민인 여인이, 어떠한 권위가 있어서 20대 중반부터 교황들과 교류하고 주요 정치가들, 교권의 핵심인사들, 자본가들, 왕들에게 충고하였는가? 그녀는 어떻게 권위를 획득하였는가?”
여성이었던 카타리나가 종교적 권위를 갖게 된 첫 번째 원천은 다름 아닌 그녀의 동정(童貞)이었다. 카타리나의 부모는 그녀를 결혼시키려 여러가지로 노력하였지만, 카타리나는 극심한 고행과 기도, 삭발 등을 통해 동정의지을 더 강화하는 길로 갔을 뿐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녀의 전기를 쓴 라이문도가 카타리나의 동정을 ‘죄’의 문제와 연관시켰다는 사실이다. 동정에 대하여 카타리나와 나눈 토론을 기술하며 라이문도는 말하길, “카타리나는 매우 사소한 죄조차도 범하지 않았음을 항상 느꼈다”고 한다. 결국 라이문도를 비롯한 카타리나의 추종자들은 카타리나의 동정을 가지고 그녀에게 거룩성을 부여하고 찬양했다.
두 번째로 카타리나가 종교적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원천은, 그녀의 믿기 힘든 육체적 고행이었다. 카타리나는 건강을 완전히 해칠 만큼 가혹한 금식을 단행했고, 상처를 씻어 악취 나는 물을 마시기도 했다.
자신의 성을 무성화하고, 자신의 몸을 죽기까지의 고통(금식)에 내던졌던 카타리나. 이 두 가지 행동은 모두 ‘육체’와 관련됐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왜 육체였을까?
또 라이문도는 카타리나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 경험(?)이라든지, 그리스도와의 심장 교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빈번한 탈혼과 같은 신비주의적 현상을 체험했다고 강조했는데, 이러한 서술들은 라이문도가 카타리나에게 사도적 권위와 거룩한 여인의 권위를 부여함에 있어서, 비상한 초자연적 현상에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왜 신비성을 강조한 것일까?
저자는, 카타리나가 육체성(육체에 대한 억압)에 집착한 것은 자의적인 것이라기보다 당시의 종교환경에 의한, 즉 타의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말한다. “당시의 종교적인 위계질서는 성스러움에 대한 여성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여성들이 소위 ‘성스러움’ 혹은 ‘성녀가 됨’에 접근하기 위하여 교회의 권위를 소유하는 방식은, 육체성을 통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왜 하필 육체를 억압하는 방식인가. 중세에 여성의 육체는 ‘죄’와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이오니아 철학에서 유래된 여성혐오증(misogyny)이 기독교세계 안으로 유입되면서 남성의 주체는 영혼, 반대로 여성의 주체는 육체로 짝지어졌고, 이에 따라 타락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하와와 그 죄로 인하여 육체적 해산의 고통을 당하는 여성 등의 성서적 자료는 ‘죄’와 ‘여성의 육체’ 간의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는 전거로 사용됐다. 그리하여 여성의 몸은 혐오스러운 교정의 대상, 즉 원죄를 씻고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고통 받아야 할 존재가 되고 말았다. 카타리나의 고행 역시 “혐오스러운 육체를 학대하기 위한 그녀의 시각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신비성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로 당시의 종교환경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라 본다. 카타리나를 비롯한 중세 성녀들의 신비경험들은 “제도와 이성의 권위를 가진 남성들로부터 독립하여 여성만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여성의 영적 권위를 축적하는 공간이었다 … 카타리나는 (남성들이 지배했던)문자, 교리, 정통주의로 경직된 교회문화 속에서 여성들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성령의 활동, 은총, 비밀, 환상, 기적과 같은 현상에 충실하였다.” 그 길 밖에는 자신의 영적 권위를 축적할 방법이 없었고, 그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여성들의 정치적 공간을 창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일까. 교회 내 젠더 역할에 충실했던 카타리나는 성녀로 추앙되고, 카타리나와는 반대로 교회 밖에서 비육체적이고 비신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신앙을 설파했던 동시대 여성 마그리트 포레테는 이단으로 정죄당한 후 화형에 처해진다.
일견 이 두 명의 여인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하지만, 저자는 이 둘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낸다. 카타리나는 여성에게 강요된 종교적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권위를 축적하고 이를 통해 남성의 전유물이던 교권구조 속에 침범했고, 포레테는 그 교권구조에 정면으로 투쟁했다. 결국 이 두 명은 자신들의 경계를 범람하면서 남성을, 그리고 그들의 교권을 비웃어 보이고 균열시켜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