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봄 문익환 목사 |
“통일은 다 됐어! 통일은 다 됐어요”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통일의 전망과 희망을 말하던 늦봄 문익환이 타계한 지 올해로 15년, 방북한 지는 20년이 지났다. 1994년 1월 통일맞이 사무실을 개소하고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18일 밤 8시 20분 자택에서 숨을 거둔 그는, 이후 모란공원 묘지에 안치됐다.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와 강당, 감옥을 누비며 “통일의 실마리를 풀지 않으면 또다시 외세에 크게 흔들릴 것이니 온 겨레가 통일에 떨쳐나서자”고 호소하던 늦봄 문인환 목사였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통일맞이 문익환목사기념사업’에서는 오는 17일 묘소참배와 3월 3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학술심포지엄 및 기념식을 계획하고 있다. 심포지엄에서는 문 목사의 방북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평가, 그리고 이후 비전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문익환 목사는 1918년 6월 1일 옛 고구려 땅인 만주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지 김신묵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명동촌은 안중근이 사격 연습을 하고 이동휘가 드나들던 곳이다. 곧 국내 애국지사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어 마을 자체가 독립운동 결사체였다. 그의 집안은 기독교 가정이었고, 그의 신앙은 민족주의와 닿아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윤동주, 송몽규 등과 죽마고우였다.
소년 문익환은 1924년 명동학교를 입학하여 1931년 졸업했다. 이어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용정 괌명중학교를 다녔다. 1938년 일본 도쿄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가 1943년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 만주 일대에서 교회전도사로 사역하다가 해방을 맞아 1946년 귀국했다.
이 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유니언 신학교로 가서 수학했다. 1974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 한빛교회 목사로 지냈다.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는 암울한 80년대 민주와 통일의 지도자였다. 그가 박정희 유신독재의 맞서 싸운 때는 절친했던 장준하 선생이 살해되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고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억울하게 사형 당한 1975년 여름부터였다.
문 목사는 이후 58세 때인 1976년 3.1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에 반대하는 명동성당 <3.1 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감옥을 드나들었다. 이 사건으로 22개월 만에 출옥한 뒤 1978년 10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해 다시 수감, 1980년 5월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정권에 의한 ‘내란예비음모죄’로 3번째 투옥되었다가 31개월 만에 출옥, 1986년 인천 5.3항생과 서울대 연설사건, 그리고 1989년 3월 26일 전국을 뒤흔든 방북사건, 1991년의 ‘분신정국’으로 재수감될 때까지 민주화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가 성취되었다. 그러나 문 목사의 민주화운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어떻게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가장 적극적인 대답은 바로 방북이었다. 문 목사는 통일이 앞당겨지면 민주화가 진전되고 그렇게 돼야 억울한 희생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 목사는 1989년 3월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열흘 간의 북한 방문으로 김일성 주석과 2차례 회담 끝에 통일 3단계 방안 원칙인 <4.2 남북공동성명>을 끌어냈다. 이에 대해 학계는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교류 협력사업, 햇볕정책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큰 장벽을 허물기 전에 작은 장벽부터 하나하나 허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통일을 이루기 전에 작은 통일부터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일된 통일운동이 남과 북, 해외, 이렇게 삼면에서 분단을 무너뜨리려고 같이 조여 들어 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늦봄 문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