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 9절부터 11절까지는 이른바 메시야의 대관식이라 불리는 세례를 받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가 세례를 받으신 후에 물에서 올라오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재하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섬삼위 하나님의 임재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왜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요한으로부터 받았을까요? 메시야의 대관식 앞에서 겸손의 왕임을 스스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을까요? 하지만 기독교는 단순히 겸손과 겸양을 강조하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가 아닙니다. 이 사건이 가리키는 본질은 무엇일까요?
문제 해결의 열쇠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인간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사건은 대속주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세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정체성이 신성 혹은 인성 어느 한쪽으로 쏠리거나 환원되지 않고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의 세례 사건은 또한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형성된 삼위일체 교리의 배경이 되고 있음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신이기만 한 예수도 인간이기만 한 예수도 아닌 참 신이자 참 인간으로 오신 분이셨습니다.
예수가 신이기만 했다면 대속 사건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가 인간이기만 한다면 대속 사건을 통한 구원의 능력을 베풀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의 세례 사건은 신이자 인간이신 예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그 분의 목적을 직관적으로 진술해 주고 있는 본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야의 대관식과도 같은 예수의 세례 사건 이후 마가는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합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예수가 성으로 입성하는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뜬금없이 예수가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마가는 광야에서의 시험을 단 두 줄로 짧게 정리했습니다. 광야에서의 시험이 중요하지 않아서였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십일의 기록을 단 두 줄로 짧게 요약했던 것일까요? 다른 복음서를 통해 유추해 본다면 예수는 광야에서 사탄에 의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 실현을 요구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을 떡이 되게 해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등등의 표현에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가는 광야의 시험이 예수의 정체성 시험의 연장이요 대관식의 마침표를 이루는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는 배고프지 않은 신이 아니라 배고픈 인간이요 각종 시험과 유혹에 노출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 한편으로 신-인 관계에 있어서 불순종의 역사로 얼룩진 광야에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예수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광야의 시험은 메시아 대관식의 마침표와 같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예수가 셰례를 받고 광야의 시험을 받은 사건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실존 상태를 잘 기술해 주고 있습니다. 주일예배 시간을 통해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은 신자는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면 각종 시험과 유혹이 도사리는 광야를 마주하게 됩니다. 하늘나라 시민이자 세속 시민으로서의 두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정체성 싸움을 벌이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아니라 사탄에 의한 각종 시험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일 수 있음을 마가는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는 번영복음이 크리스천의 뚜렷한 실존 인식을 흐리게 하는 등 복음의 변질을 초래하는 거짓 가르침이라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잘되고 싶은가?" "좋은 리더가 되고 싶습니까" "나 만나는 사람 100% 복 받는다" 얼핏보면 여느 비즈니스 리더십 세미나에서 나올 만한 강좌 제목이지만 실상은 어느 교회의 설교 제목입니다. 마케팅에 능수능란한 이 교회의 설교가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루저가 되지 않는 비결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해 상품화하고 있습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이죠. 이 교회 설교 영상들은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신도들이 그 거룩한? 성공의 비결을 소비하는데 여념이 없다는 점을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부동산 낙오 불안 속에서 소위 '영끌'하는 시대에 성공의 비결을, 그것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하는 설교에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단 이 교회 문제만도 아닙니다.
이러한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이 문제인 것은 익히 알다시피 주변의 사람들, 아니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온 형제와 자매들까지도 경쟁의 대상으로 보거나 나아가 밟고 올라서야 할 수단으로 보게 하는 등 타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부추긴다는 점입니다.
성공이 우상화 되면서 성공에서 멀어진 이들을 경멸하거나 정죄의 대상으로 보는 조직문화가 파생되기 일쑤인데 이는 새벽기도가 부족해서 또는 헌신이 부족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성공의 대열에 서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억압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류의 교회일수록 숫자, 양에 집착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데 급기야 순장, 목장 단위 그룹의 모임의 출석률과 참여도가 점수화 되어 때로는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용서와 환대는 없고 경쟁과 비판이 강조되는 교회. 누가 이런 교회 다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성공이라는 우상의 늪에 빠진 신도들이 경쟁과 비판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림 없는 소리일지 모릅니다. 교회에서의 이탈은 곧 낙오이며 이는 성공이 아닌 실패로 직결된다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지상주의를 강조하고 강요하는 교회에서는 자기 희생, 자기 부정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가르침마저 자기 이기주의적 실현, 즉 성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면서도 그리스도교를 사랑한 어느 철학자의 아래와 같은 언명을 곱씹어 보는 것은 신앙성찰의 차원에서 실로 그 의미가 크겠습니다.
"부정은 형식일 뿐이며 자기긍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수단이다. 이러한 점을 종교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태내 주는 것이 희생이다...그러나 희생에 의한 부정이나 파괴는 결코 아무런 목적 없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단히 명백한, 이기적인 목적과 이유를 갖고 있다...이러한 환상적인 자기부정은 동시에 최고의 자신감, 최고의 자기만족과 결부되어 있다."(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마가 기자의 예수의 세례 사건과 광야 시험 사건의 연속적 기록은 성령 충만한 자의 현실을 성공으로 포장하며 기독교를 능력 종교화 하고 있는 번영복음의 폐부를 찌르고 있습니다. 성공을 부르짖으며 거룩을 세속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거룩을 지키기 위해 세속과 싸움을 벌이는 것이 신앙의 마땅한 자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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