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주체 이해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저마다 각각의 주체 이해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며, 그것이 고중세적 주체든 근세적 주체든 현대적 주체든 간에 부단히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미래 주체를 앞당겨 고심한다.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는 미래의 주체가 어떠할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겠으나, 인문학적 과학적 실존적 모든 자료들과 상상력을 가지고 주체의 길을 모색을 시도해보는 것은 필요한 작업이다.
이관표 박사(한세대 교수, 사회복지학과)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들뢰즈, 로지 브라이도티다. 하이데거는 현대적 주체 이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들뢰즈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하이데거를 넘어서려 하였다. 브라이도티는 들뢰즈 논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주체론 정립을 시도했다.
이 글은 이관표 박사가 논문에서 소개한 위 세 실존 이해를 소개한다. 철학적 실존 논의는 책상 앞에서의 한가한 펜대 굴림이 아니다. 이 박사는 인간이 "자신을 주체로서 인식할 때만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고 기획할 수 있다"고 밝힌다. "자신을 주체로서 인정할 때만" 자신을 알고, 타자를 알고 또한 신 앞에서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기도 하다. 중세 방식의 타율적이기만한 신앙은 제대로 된 자기 이해가 불가능함은 물론 왜곡된 신과의 관계를 만들어냈다는 이해에 우리는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모든 시도가 오늘 우리 시대 모든 사람에게 딱 맞을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앞서 만들어진 다양한 가능성과 길들을 이정표 삼아 주체 이해 곧 자기 이해의 여정을 떠날 뿐이다.
하이데거: '탈-존'적 주체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전회 이후]에서 존재에 대한 탐구는, 존재 그 자체에서 시작한다. 존재 탐구는 "존재 그 자체가 시작하고 난 이후에야 우리가 생각하고, 의도하며, 전망하고 관찰하는 존재에 대한 학문이 해석[이] 가능"해진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 구도에서 주체와 존재의 관계는, 존재가 앞서 있다. 존재는 "초월"이고, 이에 대해 인간은 "스스로 말하기 전에 먼저 존재가 자신에게 말을 걸게끔 해야"하는 입장이다. 초월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은 "탈-존"의 형태이다.
그렇다면 탈존은 어떤 상태인가? 이관표는 "인간을 넘어선 어떤 영역이 스스로를 알려오는 (비어 있는 열려진) 장소"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주도성을 내려놓고,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비우고, 그 빈 터 안에 존재가 개현하게 해야 한다. 이를 '존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여하튼 인간(곧 현 존재)의 사명은 존재 앞에서 수동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존재를 위해 자신을 비워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워진 터에서 존재의 말 걸어옴을 들을 때 '응답'하는 것이다.
들뢰즈: 유목적 주체
들뢰즈는 하이데거가 시도했던 전통적 주체 극복의 시도에 동의하면서도 탈-존적 주체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탈-존에도 동일성의 폭력의 가능성이 있음을 자각하고, 모든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주체의 모델을 만든다. 그것이 유목적 주체이다.
들뢰즈는 형이상학적 동일성과 싸운다. 그는 전통적 동일성이 '차이'를 집어삼켰고, 이에 각각의 개별적 존재자들은 동일자의 '부속물'에 불과해졌다고 본다. 형이상학의 동일성에 따르면 주체는 불변의 일점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차이'를 전면에 내세운다. 형이상학의 동일성도 알고보면 '차이의 반복'이 동일성으로 인식된 것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차이이다. 차이로 인해 자기분열적이다. 자기분열은 또한 새로운 자기를 생성해간다.
그래서 들뢰즈의 주체는 해체와 분열을 거듭한다. 자기분열증은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새로운 자기자신의 생산이다. 자기분열이 원인이 되면서 그 결과의 새로운 생성이 만들어지지만 그 생성된 것 또한 분열이 되면서 한 지점에 계속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유목적이다. 유목민들의 정착이 일시적이듯 주체의 해체와 생성의 과정은 끊임없다. 기존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내는 생성의 과정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회적 변혁으로도 나타난다. 유목적 주체는 주체적 분열과 주체적 생산을 거듭한다.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주체
브라이도티는 들뢰즈의 '유목적 주체' 이해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2013) 미래적 주체 담론인 '포스트휴먼 주체'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은 포스트휴먼 주체 논의는 휴머니즘과 안티휴머니즘 사이를 돌파하는 새로운 주체 논의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실존들의 '상황'을 충분히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적용한다. 곧 현대인들의 '상황'에서 주체가 휴머니즘적으로도 안티휴머니즘적으로도 빠지지 않는 길을 모색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되기 과정이 있는데, '동물-되기', '지구-되기', '기계-되기'이다.
포스트휴먼 주체는 '동물-되기'에서 인간과 동물의 상호관계를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인간과 동물 각각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허용"한다. 기존의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흐려진다. 두 번째 포스트휴먼 주체 '지구-되기'에서 주체는 지구와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지구와 인간을 일원론적 관점으로 보기를 시도한다. 세 번째 포스트휴먼 주체 '기계-되기'는 4차산업혁명 이후의 트랜스휴머니즘 논의와 연결된다. 인간과 기술 간의 관계에서 지금까지 기술은 인간의 도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 기술이라는 비인간적 요소가 인간에게 핵심적 요소가 되었고 또 앞으로 더 될 것이라는 것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태세다.
이상의 세 가지 주체 논의가 이관표 박사의 논문에서 소개되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들뢰즈의 도무지 정착하지 않는 유목적 주체도 급진적이지만,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브라이도티의 주체 논의는 다소 파격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재설정한다는 것은 꽤 깊은 뿌리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브라이도티의 주체 논의에서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의 논의라지만, 존재 자체, 초월, 신 등에 대한 논의가 없이 전자의 논의가 어느정도로 유효할 수 있을까. 물론 브라이도티의 논의는 의미가 있다. 기존의 경계선 허물기가 사유에서는 보수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실존의 문화적이고 현실적인 현장에서는 이미 시작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논의들을 살피는 것은 하나의 정답을 찾기 위함이라기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사유의 이정표를 삼는 작업들이라면, 독자들에게 유익하다.
한편 이관표 박사는 자신이 소개한 전통적 주체와 구별되는 현대적 주체 이해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로 의의를 정리했다. 첫째, 주체는 대상이나 객체를 지배하는 절대적 일점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와 더불어, 타자를 위해, 타자가 되는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둘째, 주체는 오직 인간만이 될 것이 아니라 전 생명체와 물질로 확장되어야 한다. 셋째, 주체는 상황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을 상황에 맞추어 생성해내는 과정 혹은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