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박을 수가 없오.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서 예언자적 양심을 보여줬던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 어느덧 그가 소천한지 22주년을 맞았다.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는 오는 22일 오전 11시 성북교회에서 ‘김재준 목사 22주기 추모예배’를 갖는다.
이날 김종택 목사가 설교를 전하며 서광선 박사(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추모사를 낭독할 예정이다. 2009년 정기총회도 함께 개최하는 기념사업회는 올해 사업계획을 세우는 한편, 이사를 선출키로 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 김재준 목사 ⓒ장공 기념사업회 |
일본 아오야마 신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했다. 구약학으로 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해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1935년 ‘아빙돈(Abingdon)단권성경주석(單券聖經註釋)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송창근(宋昌根)·한경직(韓景職)과 함께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가 한국 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로 부각된 것은 8·15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세우면서부터였다. 그는 1947년 성서비평에 입각해 모세오경 저작 문제와 십계명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강의했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에 대해 당시의 보수적 학생들의 항의를 받게 됐고, 이 사건이 비화돼 1952년 장로교 총회에서 제명됐고,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별도로 분립되기에 이른다.
그는 이 교단에서 자유로운 신학 연구와 강의를 했으며 현한국신학대학의 신학적 배경을 성립시켰다. 1970년대부터는 사회문제에 적극 관심을 보여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삼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위원장,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공동의장, 북미주 한국인권 수호협의회 의장, 북미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위원장, 북미주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의장 등 군부독재에 맞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1987년 지병인 당뇨와 간경화로 사망했다.
저서에는 《범용기》 《낙수(落穗)》 《계시와 증언》 《하늘과 땅의 해후》 《인간이기에》 《장공전집(長空全集)》 《광야에 외치는 소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