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
“엄마 어릴 때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구경도 못했어!”
엄마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아 어머니, 어릴 때 궁핍하게 사신 걸 기억하면서 앞으로는 성원에 보답해서 음식을 귀하게 여겨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아이가 답을 해주면 딱 좋겠는데, 그렇지 않지요. 대체로 “아, 또 그 얘기!” 하면서 딴 전을 피울 겁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예수님의 음식 기적을 떠올립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경제 사정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밥 한 끼에 하느님께 최고의 감사 기도를 올릴 정도였습니다.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아 인간의 평균수명도 40-45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런 환경이었으니 예수님이 크게 한 턱 내신 날 모두들 열심히 먹었을 겁니다. 먹다먹다 못해 음식물이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니 얼마나 만족한 식사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비슷한 기적이 있었습니다. 열왕기 상 17장 8절에서 16절에 보면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음식기적을 베풀었는데 그 때는 불과 한 가족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5천명도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으니 상대도 안 될 정도의 기적을 베푸신 셈입니다.
이제 성서본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자기 한 몸 가누기도 힘든 죄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먹을 게 넉넉지 않았던 상황일 겁니다. 점심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빌립보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고 하자 빌립보는 기가 막힙니다. 도대체 어디 가서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양식을 사올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 일행의 경제 여건을 볼 때 그 많은 돈이 있을 리 만무고요. 빌립보 입에서 선뜻 나온 말이 200 데나리온입니다. 당시에는 보통 큰 빵 하나를 아침, 점심, 저녁 삼등분해서 하루를 버텼습니다. 그러니까 빵 하나가 3인분인 셈입니다. 보통 1/12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계산해 보면 3×12×200 이 됩니다. 금세 계산이 안 되시지요? 저도 계산하느라 애먹었는데 7200입니다. 그러니까 200데나리온이면 대략 7200명분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날 식복이 있었던 사람들이 남성만 5천이라고 했으니 빌립보의 계산은 의외로 정확합니다.
다른 제자 안드레아는 그래도 좀 낫습니다. 모인 군중에 수소문해서 소식이라고 하나 갖고 오긴 했는데 사실 갖고 오나마나 한 소식이었습니다. 어는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빵에는 보리빵과 밀 빵이 있었습니다. 밀로 만든 빵은 채를 쳐서 입자가 고운 편이라 부드러웠지만 보리빵은 거칠었습니다. 자칫하면 이가 깨지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고대 유골들을 보면 모두 이가 형편없이 닳아 있다고들 합니다. 여행 중에 먹는 물고기는 보통 말려서 소금절이를 한 것이었습니다. 기온이 높은 광야성 기후에서 오래 동안 보관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겁니다. 보리빵 다섯에 물고기 두 마리라면 한 끼 식사는 아니고 하루 종일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말하자면 그 소년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이 먹으려고 준비해온 양식 전부를 예수님께 드린 겁니다. 소년의 희생정신이 놀랍습니다.
성서본문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남성 숫자만 5천이라고 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아마 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여성과 아이들은 사람 취급을 안 해 숫자계산에 넣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예수님이 베푼 기적의 폭발적인 메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음식기적을 베푼 것과 비교할 때 그 규모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뿐더러 12광주리가 남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숫자 상징을 많이 사용합니다. 열둘은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말하자면 한 조각 빠뜨리지 않고 알뜰하게 남은 음식을 모았다는 뜻이겠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베푼 음식 기적에서 이야기하려는 바는 예수님의 능력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물론 그런 능력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제 우리 쪽으로 이야기를 가까이 끌어와 보겠습니다. 이 유별난 기적 이야기를 어떻게 우리 삶에 영양가 넘치는 양식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남미의 어느 신학자는 이 기적을 다른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레오나르도 보프라는 해방신학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제안한 생각입니다. 그는 5천명을 먹인 음식 기적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식사시간이 되자 저마다 숨겨온 음식들을 다 앞으로 내놓았고 그렇게 모인 음식물은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넘치도록 남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게 바로 진정한 기적이 아니겠냐고 질문합니다.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마침 올 초에 가톨릭의 정진석 추기경은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인 기적 이야기가 서로 음식물을 나누어가진 사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프의 제안을 기정사실화한 셈입니다. 물론 추기경 자신은 그렇게 해석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렇게 기정사실화 한 것이 좀 불편합니다.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여전히 예수님의 기적이 글자그대로 일어난 것이며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예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 입장에서 본문을 해체하고 한번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유난히 눈에 띄는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소년의 행동을 주목해볼만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소년은 하루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먹으려고 준비해온 음식을 다 내놓았습니다. 아마 소년의 거리낌 없는 행동을 보면서 어른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조금씩 풀렸을지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모인 사람 전부를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한 턱 내시면 제대로 내시는 분입니다. 아마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아낌없는 사랑도 그와 같을 겁니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빠짐없이 알뜰살뜰 돌보시는 섬세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술은 보이게 하는 것이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다.’ 보이는 사물을 그대로 그려내면 그게 무슨 예술이겠느냐? 오히려 사물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을 보이게 만들어주어야 예술가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제가 이 말을 지어냈을 것이라는 상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감사할 일입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잘 봐주셔서 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 말이 아니라 초현실주의 화가인 파울 클레의 말입니다.
또한 만약 예술이 아직 보이지 않던 것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든다면, 비록 어떤 작품이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가치가 있다. 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역시 제가 아니라 철학자 베르그송이 한 말입니다. 좀 어렵게 가고 있지요? 아무튼 달리 보면 얼마든지 달리 볼 수 있는 게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 날 놀라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을 뿐 아니라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회를 얻은 겁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5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는 꼭 들어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발견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5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서 놀라운 희망을 발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참으로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마땅한 분이라는 사실도 감지했습니다. 복음의 막강한 위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