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민 34:16-29, 엡 2:14-19, 요 4:1-10)
설교문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
고대에는 책이 매우 귀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종이가 없던 시절, 파피루스라는 식물로 책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습기에 약하고 곰팡이에 손상되는 등 오래 보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의 가죽으로 종이를 만들기도 했는데, 양피지는 매우 질겨서 오래 보존할 수 있었고, 양면을 사용할 수 있으며, 틀렸을 경우 살짝 긁어내고 다시 쓸 수 있는 장점들이 있지만 만들기가 매우 어렵고, 무게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매우 비쌌는데, 양피지로 한 권의 책을 만들려면 새끼 양 수십 마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책 만들기가 이렇게 힘들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매우 신중했고, 꼭 필요한 내용만 넣어서 빽빽하게 가득 메웠습니다. 이렇게 귀하게 만들어진 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민수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요단강 서쪽 땅을 분배하는 책임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민수기에는 크게 세 번 열두지파의 지도자 명단(1장, 13장, 34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세 명단을 비교해 보면, 등장하는 인물이 다 다릅니다. 우선 광야에서 사람들을 보호했던 군대 지휘관들과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지도자 명단은 한 명도 같지 않습니다. 이유는 40년 세월이 흘렀고, 세대가 교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명단도 다릅니다. 오직 한 사람, 바로 유다 지파의 지도자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이 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시대에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를 해야 합니다. 후손들이 윗세대보다 더 능력 있고 훌륭하면 그 공동체는 발전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쇠락합니다.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과연 이스라엘 공동체는 출애굽했던 세대보다 더 성숙하고 성장했을까요? 광야의 시간이 이스라엘 백성을 더 나은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기간에 출애굽 1세대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1세대 지도자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만은 아닙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물며 모압의 딸들과 음행을 하였고, 모압 사람의 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성경은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이 징벌을 내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염병에 걸리고, 지도자들의 목이 달아났을 뿐만 아니라, 2만 4천명이나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합니다.
출애굽 1세대들은 우상 숭배와 이교적 생활 방식 속에서 벌을 받고, 긴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다가 결국 모두 죽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들은 출애굽 2세대들인데, 정탐꾼으로 갔던 이들 중 오로지 갈렙만이 신앙을 지켰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기에 약속의 땅을 분배하는 자리에서는 갈렙을 제외하곤 전부 교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민수기는 각 지도자의 명단을 다르게 기록함으로써 후세대를 위한 중요한 이정표를 만들고 있습니다.
[377차 평화통일 월요기도회 및 화해와 평화의 교회가 품은 꿈]
오늘 우리는 평화통일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는 1,500년 가까이 한 몸이었는데, 지난 80년의 세월은 두 동강이 난 채 지내야 했습니다. 앞으로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후손들에게 다시 하나된 한반도를 물려 줄 수 있을까요? 앞으로 남과 북은 그 옛날처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까요? 이 땅의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명단으로 어느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교단은 2014년 사순절부터 전쟁을 종식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통일 월요기도회를 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로 11주년이 되고, 내일이면 377차가 됩니다. 특별히 내일은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우리 교단 전국 교회가 힘을 모아 세운 "화해와 평화의 교회"가 교회당 헌당 및 창립 예배를 겸하여 기도회를 합니다. 우리 교회도 그동안 꾸준히 모아온 남북 나눔 헌금 중 일부로 "화해와 평화의 교회"를 짓는 데 보태었고, 또 교회의 다양한 비품을 구입하는 데도 일조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2대 담임목사님이셨던 홍근수 목사님은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오셨을 때, "나는 이 땅의 반공을 깨부수러 왔다."고 하셨고, 16년의 목회를 통해 평화와 통일의 사도가 되셨습니다. 70년을 맞이하여 세운 광화문 새 예배당 순례길 셋째 마당은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선교로 분명히 통일 선교를 명시합니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분단 체제라는 원죄로 인해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할 때, 한반도 전체가 함께 힘을 모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은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2024년 광복절에 지난 윤석열 정부는 소위 "8.15 통일 독트린"이라는 것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통일 독트린은 3대 비전, 3대 추진 전략, 7대 통일 추진 방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독트린의 핵심인 3대 추진 전략은 이러합니다. "첫째, 우리 국민이 자유 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가치관과 역량을 더욱 확고히 가져야 하고, 둘째는, 북한 주민들이 자유 통일을 간절히 원하도록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며, 셋째는, 국제사회와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15 통일 독트린"은 1964년 2월 북한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 8차 회의에서 채택한 "남조선 3대 혁명 역량 강화 방침"과 판박이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대내적으로 사회주의 혁명 기지를 건설하고, 대남 차원에서는 남조선 혁명 역량을 강화시키고, 대외적으로는 국제 혁명 역량과 연대를 강화해서 남한을 흡수 통일하겠다는 전략을 내세웠는데, 작년에 정부가 내놓은 것이 바로 이것과 너무 닮아있었습니다.
윤석열 정부를 비롯해 보수정권이 내놓은 통일 전략은 흡수 통일인데, 이 방식은 결국 상대를 무너뜨리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과 대결 양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 특검을 통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듯이, 윤 정권은 전쟁을 도발하여 계엄의 빌미로 삼고, 영구집권마저 꾀했습니다. 지난 정부가 지속해서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면서 북한을 위협하고 적대 정책을 시도한 결과, 북쪽도 더 이상 남쪽을 같은 민족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2024년 1월 초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합니다(14기 11차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북한은 대내외 문서에서 '통일'이라는 문구를 전면 삭제하였고, 심지어 북한 '애국가' 가사에 나오는 '삼천리'라는 표현을 '이 세상'으로 교체하고, 평양의 "통일역"도 "모란봉역"으로 바꾸고, 통일전선부는 노동당중앙위원회 10국으로 바꾸고, 높이 30미터에 너비 61.5미터로 '조국통일 3대 헌장'과 '6.15 남북공동선언'을 상징하던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은 철거되었습니다. 이는 지난 시기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 유지되었던 '우리 민족끼리'나 '조선은 하나다'라는 대남정책 노선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음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6월에 새로운 정부를 맞이하였는데,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무너지고 후퇴한 모든 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너무나 큰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인수위도 없이 시작한 이재명 정부가 앞으로 국제관계를 비롯해 남북 관계의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지 현재로서는 막막한 상황입니다.
[80년 전 광복절 분위기]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80년 전도 비슷한 혼돈의 상황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도둑 같이 해방이 찾아왔을 때, 삼천리금수강산 온 겨레는 해방의 기쁨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8월 16일 조선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여운형은 휘문 중학 운동장에서 이렇게 연설합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이때는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 버리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같은 해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해방축하집회'에서 조만식의 소개로 나온 김일성은 7만 여명의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을 가진 자는 노력으로,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완전히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
그러나 여운형이나 김일성의 이러한 이상과는 달리 해방 정국은 극도의 분열과 대립의 양상으로 흐릅니다. 45년 12월 송진우 암살, 47년 7월 여운형 암살, 47년 12월 장덕수 암살, 49년 6월 김구 암살 등 정치지도자들이 연이어 암살되고 각종 테러가 발생하였습니다. 좌우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분출된 개개인들의 욕망은 갈등을 일으키고 분쟁과 분열을 계속하다가 결국 한 형제자매들끼리 죽이고 죽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전쟁의 결과 한국군 62만 명, UN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민간인 피해 250만 명, 이재민 37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 명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을 넘는 1,800여만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36만 6,840ha의 농지가 손상되었으며, 60만 채의 민가와 5,000개의 학교 및 1,000개의 병원이 파괴되었고, 남한 지역에서는 약 900개의 공장이 파괴되었으며, 약 60만 채의 가옥이 파손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전쟁의 상처들]
그런데, 전쟁은 인명 피해와 남북한 전 국토의 초토화라는 물리적 피해만 준 것은 아닙니다. 이후 전쟁은 우리들의 마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고, 레드 컴플랙스를 비롯해 전쟁이 없었으면 전혀 생길 필요가 없었던 지난한 역사 논쟁을 불러왔고,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곧은 정신은 계속 훼손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국군에게 개전 이후에 첫 승리를 안겨줬던 부대가 있습니다. 지금도 현존하는 육군 제6보병사단입니다. 6사단은 현재는 철원에 있지만 당시에는 춘천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후퇴를 거듭하다 충주지역에서 한국전쟁을 통틀어 첫 번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북한 육군 1,000명이 전사하고 132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약 2,000명의 인적 피해를 보았으며, 소련제 장비 다수를 노획하며 소련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음을 증명해, 유엔 회원국 등이 유엔군을 결성해 이 전쟁에 참전할 결정적 명분을 제공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를 "동락리 전투"(1950년 7월 5-8일)라고 부르는데, 충주지역에 가면 동락전승비를 비롯해 동락초등학교에는 김재옥 교사 현충탑, 6.25전쟁 참전기념비 등이 어마어마하게 세워져 있고, 해마다 성대한 기념식이 열립니다. 6사단에 대한 국가의 공식 기록은 '한국전쟁에서 첫 번째 승리를 안겨준 부대', '한국전쟁 최다 전투 기록(154회)',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적을 사살한 부대(92,669명)', '최초, 최다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은 부대' 등입니다.
그런데 6사단은 승리를 거두고 나서도 이미 퇴각하던 다른 부대와 보조를 맞추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춘천에서 횡성, 홍천, 원주를 거쳐 충주까지 퇴각했던 경로는 한국전쟁 당시 벌어졌던 각지역의 민간인 학살경로 즉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6사단은 동락리 전투 이전 6월 28일 횡성을 시작으로, 7월초에 원주, 7월 5일에는 충북 진천과 충주에서 최대 1,300여명을 학살하고, 7월 8일에는 음성에서 40여명, 7월 9일과 10일에는 청원에서 1,000여명을 학살합니다. 이후 경북 북부로 후퇴한 이후 영주, 문경, 상주에서 또 다시 총 1,000여명 이상을 학살하여 강원도와 충청도, 경북에 이르기까지 총 4,70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그것도 가장 먼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부대입니다. 오랜 세월 비밀에 부쳐있던 것이, 당시 현장 책임자였던 한 용기 있는 군인의 양심고백으로 세상에 그 전모가 드러났습니다.(6사단 헌병대 김만식)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의 공식기록과 기억 속에서 그들을 <전쟁영웅>이라 부릅니다. 한국전쟁이라는 끔찍한 대혼란 속에서 국가에 의해 전쟁영웅이 되어 국립현충원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어 있는 사람 중에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많습니다. 민간인 학살과 연결된 이들의 뿌리를 파고 올라가면 하나의 큰 물줄기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간도 특설대'입니다. 일제 칼날의 앞잡이로 독립군을 때려잡던 이들이 계속 살아남고 변신하여 반공의 이름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주범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제주에서, 여수 순천에서 수많은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고, 이때의 야전 경험을 통해 한국전쟁에서도 승승장구하며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합니다. 민간인 학살 관점에서 보자면 여수와 제주에서 초급장교였던 이들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휘관으로 거듭나고, 그들은 다시 베트남으로 가서 학살을 이어갑니다. 한편 베트남에 갔던 전두환(백마부대 제29연대장), 노태우(맹호부대 재구대대 대대장), 정호용(제9사단 예하대대 대대장) 등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 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민중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남산에서, 옥인동에서, 남영동에서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범죄와, 이 수많은 민간인 학살의 원형이 바로 <간도 특설대>에 있습니다.
그 간도 특설대에 장교로 복무하였던 '백선엽'은 평생을 전쟁영웅으로 떠받들어졌고, 2023년에는 국가보훈부에 의해 친일 경력도 삭제되었고, 2024년에는 백선엽의 비석을 '국가유산'으로 지정하려고도 했습니다. 친일파들은 아직도 이런 방식으로 이 나라의 기득권이 되어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이들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은 이 땅 어딘가에 아직도 암매장되어 있고, 그 후손들은 빨갱이 자식들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며 평생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땅에서는 아직도 아벨의 핏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년 8월 둘째 주일을 평화통일 주일로 지키는 이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과 광복이 다시는 전쟁 비극이 없는 종전과 영원한 평화의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통일 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 역사의 비극 속에서 발생하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지 늘 고민이 됩니다. 남북의 문제만 아니라 지역 갈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진보와 보수, 다수파와 소수자들, 노인들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다툼과 분열, 이견과 논쟁을 하나의 큰 방향 속에서 어떻게 어우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서 본문 속으로 : 피할 수 없는 갈등]
그럼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첫 시작에는 세례요한파와 예수파의 묘한 긴장이 드러납니다. 누가 더 많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지 비교하고 경쟁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설명까지 붙입니다. 이어서 또 사마리아와 유다 사이의 오래 묵은 적대적 감정을 보여 줍니다. 갈릴리에서 유대로 가거나,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고, 그렇게 가면 훨씬 빨리 가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절대로 그 땅에 들어가지 않았고 사마리아 땅을 피하여 멀리 돌아서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들어갔고, 수가라는 마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이 말의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성서의 저자는 친절하게 설명을 붙여 놓았습니다.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나중에 돌아온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방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시고 놀랍니다(4:27). 이런 표현 모두가 당시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들 사이가 어땠는지 보여 줍니다. 신약성서는 유대인의 종교에서 비롯된 그리스도교가 세계 종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갈등과 충돌을 드러내고 있고,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에게도 발생하는 대립과 반목과 불화를 극복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화해와 평화를 일구려면]
오늘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평화의 사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싸움은 우리의 삶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줍니다. 싸움으로 인한 상처와 깊이 패인 골은 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종교에 속해 있지만, 싸움으로 인해 생긴 감정은 정말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싸움 당사자들 사이에서 서로 화해하도록 중재해 본 사람은 종종 겪는 일이지만 양쪽 모두로부터 욕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게 하려면 그런 상황들을 견뎌야 합니다. 이것은 머리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둘 다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 몸을 내어주어 막힌 담을 허물 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올리며 모욕과 비난, 때로는 오해와 욕설을 참아내야만 비로소 화해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더 큰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요한복음의 예수님처럼 몸소 찾아가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진솔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진실한 대화는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더 큰 세계를 바라보게 하며, 진심을 담아 전하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모든 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로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를 그저 유대인 남자 중 한 명으로 알았던 여인은 대화를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겪은 일들을 말했다고 전하는데(4:28), 물동이를 버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우물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로부터 참된 생명수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여인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대화에 진지하게 참여함으로써 영생하는 샘물을 얻게 되었고, 복음의 소식을 전파하고 선포하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큰 기쁨은 옳게 대화하는 방식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대화는 논쟁이 아니며 상대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것입니다. 상대를 이겨 누르려고 하는 대화는 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화의 탈을 쓴 강요이고, 강요는 폭력의 다른 이름입니다. 대화는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자, 배우겠다는 의지입니다.
[왜 하나가 되려고 하는가?]
오늘 바울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가 되려고 하나요?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행하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 되는 것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또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웁니다. 바로 그런 자세로 믿음의 식구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서로 대화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법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각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민주주의 사회의 이런 다양성 때문에 언제나 이견이 발생합니다. 이견들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율해 가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가능한 많은 구성원이 편하게 자기 의사를 표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게 하려면 구성원 전체가 경청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끝까지 들으며, 자기 의견을 일목요연하게 말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며, 충분한 숙고와 토의를 거쳐서 결정된 것은 수용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과 능력과 지혜로 서로 다름을 더 풍성하고 커지는 계기로 만드십니다.
개인의 특성, 자라온 환경, 처한 상황, 세상을 보는 관점, 말하는 방식, 생김새들이 각각 다양하기에 이것들이 관계를 맺을 때, 때로는 상처가 되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다양함이 더 큰 하나를 위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협력할 때는 엄청난 기적의 역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교회 성장이 먼저냐, 교회 개혁이 먼저냐, 역사적 예수냐 아니면 신앙의 그리스도냐? 영혼 구원이냐, 사회 선교냐? 칼 바르트냐? 폴 틸리히냐? 자유냐? 평등이냐? 사랑이냐? 정의냐? 저마다 제각기 제 목소리를 높인다면, 이런 모든 것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막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열과 갈등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나만'을 바라보는 좁은 시야가 있습니다. 이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열어 서로 사랑합시다.
통일(統一)이라는 말은 한 가지 색으로 도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요소, 소재, 조건 등이 있고, 그것들은 때로 서로 무관하고, 서로 제약하고, 심지어 서로 반대되는 것도 있지만 그것을 서로 모순 없이 전체 안에서 조화롭게 결합하는 일이 바로 통일입니다. 그리고 그 통일은 평화롭게 진행되어야지 무력을 통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평화통일은 남북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가정에서도,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사람들끼리 관계 맺는 모든 자리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어디에 가시든지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분열과 갈등을 하나로 아울러 평화롭게 통일을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평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모든 통일의 근원적 토대가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합시다. 사랑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포함되며,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이런 사랑의 하나님 없이는 자주독립 국가도 없고, 이상적인 낙원도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없이는 세계도 존재하지 않고, 교회도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만 나도 있고 너도 있으며 우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깊이 이해합시다.
다름이 축제가 되도록 합시다.
다름을 품어 더 큰 하나가 됩시다.
더 큰 하나가 되어 참 평화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