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호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정책실장 ⓒ베리타스 DB |
본디 피조세계는 하나님과 거닐던 곳, 하나님을 가까이서 대하던 친근한 곳이었다. 때때로 낯선 눈으로 피조세계를 바라보지만, 그것은 변함없이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저마다 자신 안에 심겨진 생명의 씨앗을 싹 틔우려 최선을 다하며 땅에 충만한 후 기꺼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땐, “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심”(요14:11)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 믿음이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쉬이 만나게 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힘으로 살기보다 ‘가만히 있어’(시46:10), 나와 피조세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거기서 힘을 얻는다.
다만 살며시 나를 돌아보면, 입안엔 말이, 마음엔 생각이, 뱃속엔 밥이 가득하고 분주하다. 15년 전 즈음 환경운동이 존재의 본질이나 되듯 그저 활동하느라 분주해 하다가, 생명 안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씨앗을 뒤늦게 발견하곤 몹시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뒤늦었던 만큼 부끄러움도 컸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서인지 피조세계라고 해서 우리를 늘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한다. 때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기도 한다. 하나님을 쉬이 찾게도 하지만, 때론 심한 고통 속에서 헤매게도 한다. 피조세계와 둘로 갈라져 살아가기 때문일진대, 둘이 서로 갈라져 있는 한, 피조세계를 단지 돈벌이 수단인 자원으로만 여기는 한, 창조된 생명이 인간만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여기는 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건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물론 어떤 상태에 있든지 피조세계 안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말을 건네 오신다. “창조된 모든 것이 참 좋지?”(창1:31) 또 주님은 한 처음에 ‘참 좋다’ 하셨던 그 곳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하늘 나는 새와 들에 핀 꽃, 그리고 짐승과 물고기’(마6:26,28, 욥12:7,8)들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을 보이시고 또 세상을 보게 하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20)
상처 입고 고통 중에 신음하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기다리는 것’(롬8:19)도 알게 하신다. 피조물이 심히 고통 중에 있으니, 주님께서도 상처 입은 피조세계를 통해 더 분명하게 다가서시는 듯도 하다. 때로 신음하는 산과 강, 갯벌과 바다로 인해 그를 찾아가 걸으며 기도하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침묵으로 초대되었고, ‘피조세계 안에서 쉼 없이 행하고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중요한 건, 피조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말씀을 읽거나 피조세계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하면서 거닐 때에, 하나님 안에 어떻게 온전히 거하느냐’(관상) 하는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며,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는 ‘관상’이, 우리를 영적으로 깨어나게 하리라. 피조세계 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뵙고 그 안에서 즐거이 서로 연결된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
‘나의 나됨이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애쓴 덕’임을 알기에,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합성세제를 삼가고, 중고품을 사용하고, 물 전기를 아껴 쓰고, 육식을 줄이고 음식을 절제하고,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하지 않고, 소비광고에 한 눈을 팔지 않고, 작고 단순하고 불편한 것을 구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연과 이웃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리라.
그러면 생태적이고 또 관상적인 삶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 걸까? 우선은 일상의 삶 속에서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모두에서 탐욕을 몰아냄으로,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생각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하리라. 그리고 그 삶의 지속을 뒷받침하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과, 지지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힘써야 하리라.
“주님, 내 욕망과 의지가 하나님이 지으신 태양과 바람과 늘 조화로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서두르지 않고 휘둘리지도 않고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고 살 수 있게 도우소서. 아멘.”
오늘도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진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와 같다.”(요3:8) 우리 모두가 침묵에 깊이 뿌리내리고 변화함으로, ‘작은 것’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쉬운 것’에서부터 ‘생태적 삶’을 살고, 신음하는 ‘피조세계의 중보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끝.